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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인물열전1]중원(中原)을 비춘 고구려(高句麗) 혼(魂) 이정기(李正己)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7.06.06|조회수227 목록 댓글 0
[인물열전1]중원(中原)을 비춘 고구려(高句麗) 혼(魂) 이정기(李正己) | 나의 관심정보 메모 삭제 2007/04/13 19:24   
개척자(hamesta) http://memolog.blog.naver.com/hamesta/16
출처 블로그 > 백만장자 MIND (긍정적인 인생)
원본 http://blog.naver.com/robot74/140012352010

드라마 해신(海神)에서 등장하였던 이사도의 난과  관련있는 인물입니다.

 

아래 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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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가 망한 지 90여 년만에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 한복판에 독립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4대 55년에 걸쳐 세계제국 당나라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맞섰습니다.
 우리 나라 국사(國史)에는 한 구절의 언급도 없는 잃어버린 역사의 한 장. 그러나 중국의 역대 사서는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이민왕국(移民王國)의 건설자 이정기(李正己). 그는 고구려 옛 땅 요서에서 군벌로 몸을 일으켜 안록산의 난 평정을 계기로 요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청주지방)으로 진출했습니다.
 고대로 동이족(東夷族)의 무대였고 백제가 오랫동안 해외영토로 영유했던 산동(山東)을 중심으로 15개 주(州)를 석권하고 신라, 발해, 일본과의 공, 사무역을 독점했습니다.
전성기 때 그의 왕국은 면적, 인구에서 신라보다 컸고 그 군사력과 경제력은 당나라를 떨게 하였습니다.
 고구려 혼의 마지막 불꽃이라 할 그의 왕업은 또 훗날 장보고(張保皐) 해상왕국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의 기록자들은 그의 이름을 지금껏 외면해왔습니다.

1. 당(唐) 심장부에 독립정권 수립

 고구려의 유민의 아들로 조국을 멸망시킨 당(唐)의 심장부를 세우고 수도 장안(長安)을 한때 혼란 상태로까지 몰아붙인 영걸이었습니다. 그 아들, 손자들로 이어진 4대 55년간 당의 중앙정부와 대립적인 독립왕국을 건설했던 이정기 일가의 왕업은 다음과 같습니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두 차례에 걸쳐 서역을 정벌했던 고구려 출신의 명장 고선지(高仙芝). 동아시아 해상을 장악하고 국제무역으로 거부를 쌓은 해상왕 장보고(張保皐). 이들과 동시대를 살며서 세계제국인 당의 심장부 산동(山東)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왕국을 세운 뒤 4대에 걸쳐 55년 동안 당 조정과 대립했던 이정기(李正己) 장군. 그는 우리에게 과연 누구일까요.
 이정기는 당의 혼란기에 안록산 반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입신해 당의 최대 강번(强藩)으로 성장한 끝에 직접 당과 대결했습니다. 그러다 그의 아들인 납(納)은 스스로를 제왕(齊王)으로 칭하면서 당과 당당히 맞서, 한때 덕종(德宗)은 장안(長安)을 떠나 섬서(陝西)성, 남정(南鄭)현 등지로 피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한민족의 활동 범주를 한 발자국 넓힐 수 있는 역사적 쾌거였지만, 이정기 일가의 활약상은 우리 역사에서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사대주의 역사서술에 의해 잊혀진 영웅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현대 역사가들마저 그들의 치적에 대해서는 글을 아껴, 그들에게 당이라는 세계제국에 대항하다 토벌된 번진(藩鎭) 이상의 의미를 주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족사에서 그들에 대한 언급은 고작 일제 통치 때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역사"에서 나타날 뿐이며 오히려 중국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 그의 전기(傳記)가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이정기(본명 회옥:懷玉)은 영주(營州) 땅에서 고구려가 패망(668년)한 지 64년이 지난 732년에 태어났습니다.
 당의 최대 혼란기로 꼽히는 '안록산의 난' 때 그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납니다. 외모에 관한 글은 그의 신체가 건장하고 담대한 용력을 가졌다 고만 쓰여 있습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신당서"의 내용입니다.
 안록산 난 당시 반군 토벌에 동원되었던 위글(군의 대장)이 자신의 전공과 완력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정기가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하자 군사들이 이정기를 추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2. 안록산의 亂 토벌로 入身

 이정기는 당시 영주(요동과 가까운 지역)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평로(平盧:요동지역)군 의 비장(裨將)으로 자신과 고종사촌간이었던 후희일(侯希逸)과 평로군에서 함께 복무했습니다.
 후희일은 이정기의 고모 아들로 그보다는 손위였습니다. 이러한 후희일이 난(亂)이 한창일 때,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와 공모해 안록산의 친장(親將)으로 평로절도사로 부임한 서귀도(徐歸道)를 죽이고 왕현지를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옹립합니다. 그런 왕현지는 곧 병사(病死)하고(758년), 당 조정이 그 아들에게 절도사직을 세습시키려 하자 이정기는 왕현지의 아들을 죽이고 후희일을 평로군사로 추대했습니다.
 후희일은 이전부터 반군 합류를 종영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안록산의 사신(使臣)을 참수해버리는 등 철저히 반안록산노선을 견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평로군은 안록산 군대로부터 쫓기고, 북방으로부터는 해족(奚族)의 침공까지 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761년 부장(副將) 이정기와 함께 후희일은 근왕군(勤王軍) 2만명을 데리고 발해(渤海)만의 묘도열도(廟島列島)를 건너 등주(登州:청주지방)로 상륙합니다. 평로군은 인근 청주(靑州)에서 관군과 합류했는데, 당 조정은 이를 가상히 여겨 후희일에게 치주(淄州), 청주 등 6개주를 관장케 하고,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의 관작을 내립니다. 이때부터 '평로'가 '치청(淄靑)'으로 바뀌게 된 셈입니다.

3. 동아시아 외교창구와 무역요지를 점령

 그러나 말기의 후희일은 정사에 태만하고 불사(佛寺) 건축 등 큰 건설공사를 무리하게 일으켜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럴 즈음 치청군 내부에서 이정기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후희일은 이정기를 해임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은 765년 후희일을 쫓아내고 이정기를 수령으로 추대했습니다.
 당 조정도 할 수 없이 회옥(懷玉:이정기의 본명)에게 정기(正己)라는 이름을 내리고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라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이어 조정은 이정기에게 요양군왕(饒陽郡王)에 봉하는 등 무마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정기는 점차 산동 일대를 치청에 복속시켜 10개 주를 확보했고, 10만 대군을 거느리기에 이르렀읍니다. 당시 당 조정과 대립한 최대 번진으로 꼽힌 하북3진(河北三鎭)의 위박(魏博), 성덕(成德), 노룡(盧龍) 등의 군사력이 각각 5만에서 9만 명이었고, 그들의 세력권이 7 ~ 9주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이정기의 군사력과 통치범위는 단연 괄목할 만했습니다. 그는 "자치통감"의 기록대로 '이웃 번진들이 모두 두려워할 강번'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정기는 어느 정도 세력기반이 다져지자 관리임명권, 조세수취권 등 행정과 경제, 군사, 외교권 등을 독점하면서 반당(反唐) 노선을 걷게 됩니다. 이웃 번진들과 혼인관계를 통해 연합전선을 형성합니다.
 777년에 그는 이영요(李靈曜)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의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서주(徐州) 등 내륙 5개 주를 추가 점령, 명실공히 반당 최대 강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어 내륙 경략에 더욱 치중하기 위해 청주에 있던 치소(治所)를 운주(運州)로 옮긴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정기는 청주를 아들 납(納)에게 맡겼습니다.
 서주로 말하자면 초한(楚漢) 전쟁 시기 초패왕 항우의 도성인 팽성(彭城)이며, 예로부터 중국의 남북과 동서를 잇는 육운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강회조운(江淮漕運)의 요충지로 꼽혔던 곳입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장안은 경제적인 대공황에 빠져들었습니다. 다급해진 덕종(德宗:780-804년)은 780년 3월 하북 3진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변주에 축성하고, 이정기 제압의 전초기지로 삼게됩니다.
 이정기도 이에 맞서 이듬해 변주와 가까운 조주(曹州) 제음(濟陰)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훈련케 하고, 사촌형인 이유(李洧)에게 서주자사(徐州刺史)를 맡긴 뒤 증원군대를 파견했습니다(이유는 이정기가 죽은 뒤 이납 대에 와서 조정이 보낸 백거이의 회유에 빠져 당 조정에 투항합니다).
 이 와중에 이정기 군대는 당군을 연파하면서 서주와 가까운 용교(埇橋), 와구(渦口)마저 점령해 대운하를 통한 남쪽지방(吳지역)으로부터의 물자운송을 완전히 두절시킵니다.

4.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토를 통치

 치청(淄靑)으로서는 당시가 최고 융성기였습니다. "신당서"에는 치청 지역의 정치가 엄정하고 법령이 일치하고 부세(賦稅)가 가벼우며 형벌이 엄중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정기가 통치했던 15개 주의 영역은 지금의 산동성 일대와 안휘성, 강소성의 일부까지 포괄, 현재의 한반도보다 넓었습니다.
 여러분들께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삼국지 시대의 청주, 서주, 허창, 낙양, 합비지방 그리고 기주의 일부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구도 패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보다 많았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호구가 69만(400만)이었고, 치청의 호구는 84만(5백40만명)이었으니 치청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정기는 781년 8월 등창으로 갑자기 병사하고 맙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이정기 왕국의 면모를 알아보기 위해 "청주현지(靑州縣誌)"의 기록을 찾아보면,
 '사료에 언급하기를, 이정기 부자 통치시절에는 법령이 올바르게 시행되고, 백성들의 세금이 공평하고 가벼웠으며, 새로이 많은 농토를 개간하고, 창고에는 물산이 가득 쌓여 멀고 가까운 곳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자치통감"에 있는 기록을 옮긴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이민족 정권을 이렇게 평가한 것은 참으로 유례가 드물다 할 수 있습니다. 이정기 장군의 높은 인격, 올바른 정치, 훌륭한 전략가의 자질을 모두 갖춘 위대한 군주였던 것입니다.
 이정기 왕국의 존재가 당나라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는 다음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정기의 독립왕국은 소멸됐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대단히 기뻐했고, 백거이와 유종원은 글을 지어 축하했다.'
 이정기 장군의 통치지역이 일개 번진(藩鎭)의 형태가 아니고 완전한 독립왕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치통감" "청주현지"의 기록은 자칭왕국(自稱王國)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하늘로부터 임명받은 것이 아니고 모두 그들 스스로 세운 자칭왕국인 것입니다.
 이정기의 죽음과 함께 치청과 동맹관계에 있던 산남동도(山南東道)의 양숭의(梁崇義)마저 관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망, 주변상황도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아들 이납(李納)은 아버지의 죽음을 숨긴 채 내륙경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그의 당숙으로 서주자사에 있던 이유와 덕주(德州)의 이사진(李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卿)등이 작당해 종실을 배반하고 당에 투항하면서 최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결국 운하통운은 1년만에 재개되고 장안도 평상 분위기를 되찾게 됩니다.
 그러나 이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782년 회서(淮西)의 이희열(李希烈)과 남북 양동작전을 전개해 변주를 재탈환하게 됩니다. 운하통운은 1년만에 다시 불통됐습니다.
 다급해진 덕종은 멀리 영남(지금의 廣州일대)에까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선무(宣武)절도사 현좌(劉玄佐)를 앞세워 이납을 치게 합니다.
 그러나 당시 당 조정에서도 무리한 군사징발과 논공행상에 대한 무장들의 불만이 팽배했습니다. 급기야 783년 장안 서북방에서 치청토벌을 위해 관동(關東)으로 출병하던 경원군(涇原軍)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맙니다. 치청으로서는 위기일발의 순간, 뜻하지 않게 호재를 만난 격이었습니다.
 덕종은 어쩔 수 없이 봉천(奉天), 양주(梁州) 등지로 피난했고, 반당행위를 해온 번진들에게 오히려 관직을 내리면서 무마책을 구사했습니다.
 이납은 이 무렵 전국시대의 제(齊)의 국호를 받아 왕위에 오른 뒤 백관(百官)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말기의 이납은 당 조정과 화해하고 수성(守成)에 전력하게 됩니다.
 그런 이납도 792년 34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이정기로부터 통치기반을 물려받은 지 12년만의 일이었습니다. 덕종은 이납이 죽자 애도의 표시로 3일 동안 조사(朝事)를 폐했습니다.
 그 뒤로 이납의 아들 이사고(李師古)가 정사를 이었습니다. 이사고는 망명자를 후하게 대해주고, 범죄자까지 끌어들여 치청의 세력을 강화해 갔습니다. 특히 이사고는 외임자(外任者)를 쓸 때 이들의 배반을 경계하여 반드시 처자를 치소(治所)에 머무르게 하는 수법을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사고 대에는 당조정과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이뤘으나 번진 간의 영토 쟁탈전이 오히려 가열되었습니다.
 치청 소재 염산지(鹽産地)로 유명한 체주와 이납 대로부터 군사요충지로 활용돼 온 덕주를 사이에 두고, 치청과 성덕(成德)간의 국지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사고가 806년에 죽자 그의 이복동생인 사도(師道)가 뒤를 이었습니다. 마침 같은 시기 장안에서는 당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헌종(憲宗)이 즉위했습니다. 차례로 군소 반당 번진 들을 토벌한 헌종은 815년 12월부터 강회의 번진 들과 투항해온 번진 들을 앞세워 치청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보다 앞서 814년 헌종의 회서(淮西)를 치자 이사도는 이듬해 강회(江淮)의 재부(財賦)가 쌓여있던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불살라버리고, 교량등을 파괴하는 등 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합니다.
 하음창(河陰倉)은 당 조정이 회서와 치청 토벌을 위해 1백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비축해뒀던 곳으로 저장된 쌀만 2백만 석에 달하였습니다. 그러한 곳을 치청은 공격하여 불살랐던 것입니다.

5. 李氏왕국의 몰락과 장보고 해상왕국의 등장

 이어 장안과 가까운 하남부(河南府)에 10여 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군인과 첩자를 상주시켰던 이사도는 장안까지 자객을 보내 당시 번진토벌론을 주창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고 배도(裵度)에게 중상을 입혀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후방교란 전술은 한때 조정을 긴장시켜 치청에 대한 토벌반대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헌종은 타협론을 단호히 배격했습니다.
 당조정의 치청토벌작전에는 당시 강호의 모든 친당 번진들과 투항해온 번진들이 속속 참가해 치청으로서는 사면초가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사도도 포대매(蒲大妹), 상칠랑(裳七娘) 두 측근 비녀의 진언을 받아들여 당과 정면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당시 조정의 토벌군 선봉은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군중소장으로 속해 있던 무령군(武寧軍)이었습니다.

 816년 치청의 평음(平陰)까지 무령군의 선봉장 왕지흥(王智興)에게 점령 당하고 맙니다.

 819년에는 선무(宣武), 위박(魏博), 의성(義成), 무령군 등의 협공을 받던 이사도는 같은 해 주력군인 위박의 전홍정(田弘正)에게 운주와 동아(東阿)에서 잇따라 패하고, 군사 8만 명을 잃게 됩니다. 한때 치청과 동맹관계였던 군번들까지도 당 연합군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사도의 수하로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였던 유오(劉悟)는 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운주성에서 이사도를 죽이고 당에 투항해 버립니다.
 당(唐) 헌종(憲宗) 13년(819) 2월. 당의 심장부에서 55년을 유지해왔던 이씨 일가의 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정기 일가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 불씨까지 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교민과 고구려, 백제유민들이 또다시 일어나 당시 세계무역 판도를 양분, 황해무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군사력보다는 경제적으로 재도전한 것입니다. 즉 장보고의 해상왕국의 주역들이 그들입니다.

※이정기 일가의 年譜
668년 고구려 멸망
732년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李正己 영주(營州)에서 출생
758년 이정기 쿠데타, 내외종간인 후회일을 평로군사(平盧軍使)로 옹립
761년 평로군 발해를 건너 영주에서 산동성 청주(靑州)로 치소(治所) 옮김
765년 군사들에 의해 이정기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로 추대됨
777년 이영요(李靈曜) 토벌로 조주, 서주등 점령, 15개주 병사 10만명 확보
780년 변주에서 당군과 격전
781년 용교(埇橋)와 와구(渦口)를 점령, 대운하를 통한 강회조운(江淮漕運) 두절시킴, 이정기
병사, 아들 납(納)이 습위
782년 이납 용교, 와구 재탈환
783년 당조정, 이납 토벌 위해 전국에 동원령, 경원군 반란으로 장안 함락, 당 덕종(德宗) 봉 천으로 피신
792년 이납 병사, 아들 사고(師古) 세습
806년 이사고 병사, 이복동생 사도(師道) 습의
814년 이사도 하남부에 10여개 진지구축, 군사훈련, 당의 하음전운원 창고와 하남부 동도 궁 궐 소각
815년 당 재상 무원형을 암살, 당 헌종(憲宗) 이사도 토벌령
816년 당군 치청(淄靑) 공격
819년 이사도 유오(劉悟)에게 피살되 치청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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