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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조선사 인물]지전설을 주장한 실학자 홍 대용

작성자발해 열번째 왕|작성시간07.07.03|조회수199 목록 댓글 0
홍대용[洪大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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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 생애  | 학문  | 사회개혁론  | 자연과학사상  

1731(영조 7) 서울~1783(정조 7).

조선 후기의 실학자·과학사상가.
[개요]

홍대용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홍지(弘之).


[생애]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 )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A.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A.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곧바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학문]

그는 주자학자들이 입으로는 정학(正學)이니 구세(救世)니 하면서 실은 무심(務心)·승심(勝心)·권심(權心)·이심(利心)의 불순한 마음으로 허(虛)에 빠지고 있다고 개탄하고 공리공론의 해악으로 실(實)을 잃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그의 실학적인 학문경향은 18세기 중엽 민중의 생활안정과 번영을 추상적인 도덕론보다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혁신을 통해 이룩하자는 북학파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는 베이징 기행문인 〈연기 燕記〉의 시사(市肆)·음식·가옥·기용(器用)·병기·악기·축물(畜物) 등 여러 항목에서 중국에서 본 바를 조선의 문물과 비교하면서 그 실익을 취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그는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역상의 구분일 뿐 중국은 어디까지나 외국이요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시대풍조인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을 지양하고 '학중국'(學中國)하여 경제생활의 개선 등을 도모하자는 북학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허에 대립하는 실의 학문으로서 실학을 자신의 학문적 중심으로 세워나갔으며, 실을 찾는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해갔다. 경세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천문·율력·산수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까지 연구가 확대된 것은 이러한 학문활동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회개혁론]

그의 학문과 사상의 주관심사는 유교적인 원리론보다는 군국(軍國)과 경제에 대한 것이었다.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놀고 먹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형벌을 주며,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는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중직에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어떤 신분이라도 교육의 기회를 주고 과거제 대신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하여 능력 있는 자를 중용하며 공적인 발언권을 허용할 것 등을 주장했다. 토지제도에 대해서는 균전법(均田法)에 따라 전국 토지를 기혼 남자에게 각 2결씩 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며 상마(桑麻)의 재배를 권장하고 저축을 강조했다. 관제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관아는 혁파하고 폐할 수 없는 관아는 모두 왕 직속의 경(卿)에게 소속시켜 명령계통을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내수사(內需司)와 관결(官結)을 폐하여 호조에 소속시켜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병제에 대해서는 100만 명의 병력 보유와 각 지역의 성곽의 정비, 무비(武備)의 철저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균전제·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하여 농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의 기반인 세원과 국방의 기반인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자연과학사상]

당시 천문학·수학·의학 등 자연과학은 신분상 특수 계층이 담당하는 낮은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그는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보아 중시했다.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특히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베이징에 갔을 때도 흠천감의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을 만나 많은 질문을 하고 천문시설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천문학과 관련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지전설이다. 그는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전설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학설에서 시사받은 것이었다. 그가 베이징에 갔던 무렵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은 중국에 비교적 널리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익(李翼)·김만중(金萬重) 등이 언급했고, 지전설은 17세기에 이민철(李敏哲)·김석문(金錫文) 등이 말했으나 그의 지전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시사받으면서도 그것을 사고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동양적 논리를 전개했으며 또한 당시 중국의 서양선교사나 천문학자들에 의해 지전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지구의 자전만을 말한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도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한편 그는 〈주해수용 籌解需用〉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사귄 친구들이나 베이징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과학관계 서적과 기구를 들여왔는데, 천주교 및 서양 과학의 총서인 〈천학초함 天學初函〉을 10년에 걸쳐 구입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별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自鳴鐘)을 두고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담헌서 湛軒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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