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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권율 장군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7.11.14|조회수188 목록 댓글 1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권율 장군
행주산성 전투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권율 장군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권율 장군이 있었습니다. 선조의 어명을 받아 행주 산성에 진을 친 권율 장군은 불과 2300여 명의 의병만으로 3만여 명의 왜병을 물리치는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빛나는 승리로 왜병은 결국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권율 장군의 무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 168번지에 있다.

▲ 이치령에서 큰 승리 거둬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이 전쟁이 바로 임진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입니다.

전쟁 초기,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패하자 선조는 궁궐이 있는 한양을 떠나 평양으로 그리고 다시 압록강 부근 의주까지 피난을 계속했습니다.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장수들은 지역으로 내려가 의병을 지휘해 왜적을 섬멸하라!”

이 때 광주 목사 권율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의 도움으로 4만의 의병을 모아 그 가운데 수천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자 왜병 수천 명이 추격해와 이치령에서 큰 전투를 치르게 됩니다.

“모두 후퇴하라! 도저히 조선 의병을 물리칠 수가 없다!”

왜병들은 겨우 1000여 명만 살아 남았고,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이치령에서의 승리는 피난중인 선조 임금에게도 전해졌습니다.

“뭐라고! 권율이 이치 고개에서 대승을 했단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전하! 낫이나 괭이를 들고 싸운 의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육지에서는 계속 패배 소식만 잇따랐는데 이처럼 기쁜 소식이 없도다! 여봐라! 권율을 전라도 관찰사로 임명하노라!”

1592년 권율 장군은 의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리고 한강 하류 행주산성에서 30 리쯤 떨어진 경기도 수원 부근 독산성에 진을 쳤습니다.

한편, 왜군은 조선 의병이 독산성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으로 성을 둘러쌓습니다.

“으하하! 우물도 없는 작은 산성에다 진을 치다니, 바보들이로구나.”

왜병들은 성 아래를 포위한 채 느긋하게 의병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성 안에서는 말에게 목욕을 시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성 안에 우물이 없다더니 어찌 된 것이냐? 말 목욕까지 시키질 않느냐!”

이 모습은 실은 권율 장군이 꾀를 내어 왜병이 잘 보이는 곳에 말을 모아 놓고 쌀을 부어 목욕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왜병은 성 안에 물이 많다고 지레 짐작하고 포위망을 풀고 병사를 이동시켰습니다. 독산성에는 지금도 ‘말을 목욕시킨 장소’라는 뜻의 세마대(洗馬臺)란 누각이 있습니다.

 


▲ 행주산성 승리로 한양 되찾고 임진왜란도 끝내

 

금산 이치령. 임진왜란이 이후 처음으로 육지에서 대승을 거둔 장소. 이 승리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지혜를 발휘해 독산성을 나온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에 진을 쳤습니다.

당시 행주산성은 빼앗긴 한양을 되찾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명나라 이여송 군대가 행주산성의 의병과 합세하면 한양을 지켜 내기 어렵습니다. 먼저 행주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아야만 됩니다.”

불안을 느낀 왜병들은 곧바로 한양에 주둔 중인 왜병 대부분을 내보내 행주산성 주위를 에워싸게 했습니다.

“행주산성을 지켜야만 한양을 탈환할 수 있다. 힘을 내어 왜병과 맞서라!”

권율 장군의 독려로 의병들은 산성을 기어오르는 왜병에게 활을 쏘고 돌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쪽 모두 많은 병사들을 잃었습니다.

“장군, 화살이 다 떨어졌습니다.”

“계속 돌을 던져라. 명나라 이여송 부대가 올 때까지 견뎌야 하느니라!”

여자들은 치마에 돌을 날라 의병에게 전달하며 적의 공격을 막았습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왜 행주산성에 우리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습니까?”

행주산성 대첩비와 비각. 비각 안의 비는 1602년(선조 25년)에 그의 부하들이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세웠다. 그 뒤 행주대첩비는 1963년에 세운 것이다.

왜병들은 크게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3만 명 가운데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각, 한양을 향하던 이여송 부대는 의정부 벽제관에서 패해 3000여 명의 기병을 잃었습니다. 겁을 먹은 이여송은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권율 장군이 명나라 군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왜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하지 않는 겁니까?”

조선 신하들의 성화에 못이긴 이여송은 군대를 보내 용산에 쌓아 둔 적의 군량미 10만 석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때, 한양에 주둔 중인 왜병 사이에 전염병이 나돌아 하루에 수천 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행주산성의 의병과 이여송 군대가 한양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소이다. 남쪽으로 내려가 힘을 모아 다시 한양을 빼앗읍시다.”

왜병들은 결국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육지에서 만큼은 승승장구하던 왜병들의 사기는 행주산성 싸움 이후 크게 꺾였고, 남쪽으로 후퇴해서도 계속해서 의병들에게 패했습니다.

이처럼 행주산성 대첩은 임진왜란을 끝내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 중심에는 물론 권율 장군이 있었습니다.


▲ 권율 연보

1537년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막내 아들로 태어남
1587년 전라도 도사가 됨
1592년 광주 목사를 거쳐 전라도 순찰사가 됨
1593년 행주산성에 주둔해 3만여 명의 왜병을 물리침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도원수가 됨
1597년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전투에 참여함
1599년 관직 사임 뒤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남

/김남석(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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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임서빈 | 작성시간 08.03.27 대단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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