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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손암(巽菴)과 다산(茶山)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8.08.11|조회수107 목록 댓글 1

손암(巽菴)과 다산(茶山)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두 형제는 네 살 터울의 형과 아우였습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인 해남윤씨였습니다. 정조시대라는 좋은 때를 맞아 두 형제는 아우가 먼저 문과에 급제하고 뒤이어 형이 또 문과에 합격하여 나란히 옥관자에 관복을 입고 궁중에 출입하며 세상을 제대로 바로잡고, 동양정치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이루려는 꿈에 부풀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마음과 같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에, 형인 손암은 아우보다는 벼슬길이 순탄치 못해 하급관료에 머무는 불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매사에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던 다산은 참의·승지 등의 벼슬에 이르렀으나 손암은 좌랑(佐郞)에 그치고 끝내는 천주교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먼먼 흑산도로 귀양가서 16년째를 지내다가 해배도 하지 못하고 5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절해의 고도에서 운명하는 비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육지인 강진에서 경학연구에 심취한 아우 다산은, 책의 저술을 마칠 때마다 뱃사람을 통해 형에게 보내 자문을 구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동포형제이자 학문적 지기이던 두 형제, 저술에 게을렀던 형이지만 아우가 저술한 책이 오면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보고 평어를 보내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1804년인 갑자(甲子)년에 다산은 최초로 『주역(周易)』에 관한 연구서인 『주역사전』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그 다음해인 을축년에 또 수정가필하여 『을축본』이라하고, 다음해인 병인년에 다시 수정가필하여 『병인본』이라 하고, 그 다음해에 또 다시 수정해 『정묘본』이라 하고, 마지막으로 강진읍에서 다산초당으로 옮긴 무진년(1808)에 완성한 『무진본』을 흑산도의 형에게 보냅니다. 24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을 받아본 손암은 아우의 높고 깊은 학문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는 평어를 보냅니다. “『주역사전』의 어느 부분도 장관(壯觀)이 아닌 곳이 없으나, 「시괘전(蓍卦傳)」에 이르면 더욱 뛰어나게 기특한 문자(奇文)이고, 「구육(九六)의 변론」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하고 말마다 글자마다 신이나 귀신이 가르쳐준 것과 같아 형용할 방법이 없노라. 우리 아우가 어떻게 해서 이런 영특한 마음과 오묘한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곧바로 미친 듯이 절규하며 흐드러지게 춤이라도 추고 싶게 해준다”라는 격찬의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독한 유배지에서 그처럼 격려해주는 형님이 계시는 한 다산은 결코 외롭지 않았기에 그만한 저술을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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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빼빼로 | 작성시간 12.01.13 정다산 선생님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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