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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위인전

우리나라 민속학, 인류학, 박물관 분야의 선구자 -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9.04.10|조회수53 목록 댓글 0

우리나라 민속학, 인류학, 박물관 분야의 선구자 -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2009-02-05 오후 02:54

석남 송석하는 가면극과 전통적인 민속의 조사·연구에 투신했던 한 사람의 열정적인 개척자였다. 그는 민속학과 인류학 그리고 박물관학 분야에서 기념비적 자취를 남긴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민속학계는 석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민족학의 정신적 아버지 석남의 삶
석남 송석하(1904~1948)의 삶은 우리나라 민속학, 인류학, 박물관학에 선구자로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1904년 오늘날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에서 대한제국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을 지낸 만석군의 대지주 송태관宋台觀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남이라는 아호는 그의 출생지가 석남사石南寺 부근이어서 아호를 석남이라고 하였다. 고향 양등리에서 10여리 길을 걸어 언양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부친을 따라 1년 만에 반구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울산공립보통학교로 전학을 하여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 무렵 이미 부산으로 진출한 부친을 따라 부산상업고등학교 전신인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20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 후 일본 토쿄에 있는 히토츠바시一橋대학의 전신인 토쿄상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토쿄에서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참사를 경험하게 되어 사회 불안으로 인하여 정신적 충격이 켰다. 일본에서 약 2년간 유학생활을 하는동안 관동대지진의 충격과 복잡한 가정문제로 인하여 부친의 학비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학업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바로 결혼하라는 부친의 엄명을 거부하고 잠시 일본으로 피신한 적이 있지만 결국 20대 초반의 나이에 전북 정읍의 대지주의 딸 김경옥(金瓊玉 1907~?)과 결혼하여 서울 안국동에 정착하게 된다.

한국최초의 영상민속학자, 아키비스트로서의 석남
석남은 민속학 분야에서 공식적으로 정규과정의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의 나이 26세(1929) 때 일본의 『민속예술』지에 「조선의 인형극」을 발표하면서 민속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32년 「조선의 민속극」을 일본의 『민속학』에 발표하였고, 인형극, 가면극, 민속무용, 연극, 무속, 농촌오락 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민속연구의 영역을 넓혔고, 현장답사, 민속자료 채집, 출판, 학회활동 등 민속연구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전념하였다. 1932년에는 우리나라 민속학 분야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조선민속학회》를 손진태, 정인섭 등과 함께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33년 1월에 창간한 학회지 『조선민속』제1호는 석남이 사비를 들여 학회지를 발행한 것으로 역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기게 되었다. 그가 보여준 조선민속에 대한 사랑과 관심, 조선민속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누구나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의 흔적을 후학들에게 남겨 주었다.
석남은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하면서 민속을 채집하여 사진과 기록으로 민속자료카드를 후세에 남겼다. 석남은 사진정리를 위하여 사진자료 카드를 제작하여 사진을 부착하고 사진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2년도 안되는 짧은 유학생활을 하면서 식민지 조국의 현실과 고통을 두루 체험한 그가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갖고 전국을 돌면서 조사 연구를 하였다.
석남은 특히 민속극과 민속오락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오늘날 한국민속예술축제와 유사한 조선민속예술경연대회를 기획하여 대중들에게 민속을 널리 알리고 전통을 향유하도록 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민속자료를 수집하고, 현장답사를 통해서 수집한 민속자료를 대중들이 쉽게 읽을 있는 일간지와 잡지에 기고하여 대중 속에 민속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당시 석남은 조선민속의 향유자이자 조선민속학의 지킴이로서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족정신의 프로슈머였다고 할 수 있다. 석남은 민속의 발굴과 신문, 잡지 등 각종 매체를 통해서 민속을 널리 알리고 민속연구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과 교류를 하는데 전념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 편집위원으로 위촉된 것이 유일한 공식직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민속학의 열정적인 개척자 석남 송석하
석남이 민속사진 기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 〈종교 및 사회학 연구실〉의 아카마츠赤松智城교수와 아끼바秋葉隆 교수와 학술적으로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사회문화분야의 조사사업에 참여했던 무라야마村山智順와 조선총독부 관헌으로 조선민속을 조사연구했던 이마무라 토모에今村革丙와도 민속탐사 분야에서 특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아끼바 교수와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해방정국까지 특별하고 긴밀한 유대관계가 지속되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관장으로서 근무했던 총독부 고고학의 원로 아리미츠有光敎一 교수에 의하면, 송석하에 대한 질문에 첫 대답이 “송석하는 아끼바의 제자였다.”(전경수, 2003:113)고 회고한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석남은 아끼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해방정국을 맞이하여 아끼바의 보금자리였던 경성제국대학 즉 경성대학 박물관에 자리를 잡았고, 박물관 입구에〈인류학과人類學科〉라는 간판도 걸었다. 1926년 11월에 경성제국대학에 부임했던 아끼바秋葉隆에 의해 민속창고품실民俗參考品室이 창설되었고, “당시의 민속참고품실은 박물관 또는 진열관에 해당되는 시설이라는 점이다.”(전경수, 203:102), 아끼바가 1928년경에 창립했던〈경성제대 민속참고품실京城帝大 民俗參考品室〉에 보관되어 있는 상당수의 사진자료가 석남이 남긴 민속자료 카드 사진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끼바와 밀접한 관계성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남은 아끼바와 학문적으로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당지연구當地硏究라는 인류학적 조사연구 방법인 fieldwork을 수행하면서 민속학에서 인류학으로 관심의 영역이 증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민속학과 인류학 그리고 박물관학까지 석남 송석하가 꿈꾸었던 길
석남은 당지연구를 통해서 민속학에서 인류학으로 관심이 증대하면서 국립민족박물관(국립인류학박물관) 창설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석남이 국립민족박물관의 초대 관장(군정청 임명사령 제68호)으로 임명되어 서울 예장동 舊시정기념관 건물에서 1945년 11월 8일 국립민족박물관을 창립하였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미군정청에서 신탁통치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1945년 11월 29일에 한국으로 발령을 받은 뉴멕시코대학 인류학과 출신 유진 크네즈Eugene I. Knez 대위가 미군정청의 문교부 교화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인류학을 전공했던 크네즈는 석남과 돈독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국립민족박물관의 개관준비는 석남이 수집한 민속자료와 조선민족미술관의 야나기柳宗悅가 수집한 민예품을 기반으로 6개월간 준비하여 1946년 4월 25일 성대하게 국립민족박물관(영문명 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을 개관하였다. 영문명칭은 크네즈로 대표되는 미군정청 문교부의 박물관 성격규정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또한 석남의 인류학과 인류학박물관에 대한 여망이 담긴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남은 크네즈 국장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1946년 5월 8일 석남은 크네즈 등과 함께 조선인류학회를 창립하였다. 제 1차 학회이후 사무실을 국립민족박물관 관내로 옮겨 인류학의 학문적 기반 조성과 인류학박물관 사업에 힘을 쏟았다. 해방정국에 등장한 ‘인류학’의 개념과 인류학도의 꿈은 석남이 국립민족박물관장을 맡은 지 3년도 못되어 지병이었던 고혈압 때문에 44세의 젊은 나이에 1948년 8월 5일 별세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석남이 경성대학에다 인류학과를 신설케 하였다.’지만 그 당시 대학에서 학과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석남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류학과’도 개설되지 못한 채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가 속에 1950년 12월 12일 전시 임시 행정간소화 조치로 국립민족박물관은 국립박물관 남산 분관으로 흡수 통합되고 말았다. 인류학과가 대학에 개설되는 것은 1961년 고고학자 김원룡박사의 주도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었지만, 석남이 염원했던 인류학박물관의 꿈은 아직도 펼치지 못한 채 물속에서만 꿈틀거리고 있는 듯 하다.
석남은 우리에게 사진을 통해 민속자료 조사와 민속정보의 활용에 대한 아이디와 기록유산을 남겨 주었고, 민속학의 연구, 인류학의 전파, 인류학박물관의 개설 등 우리에게 남긴 발자취는 크게 남아 있다. 석남의 발자취를 쫓아서 우리의 문화를 세계화로 이끌어 한류의 세계화에 이바지하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하겠다. 석남이 남긴 기록유산은 이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석남의 삶과 발자취를 재조명하여 “석남 송석하 선생 탄신 100년 기념 심포지움”을 비록하여 수많은 간행물을 발간하여 석남의 민속학과 인류학, 박물관 분야에 남긴 발자취를 되새겨 보게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앞선 생각이 여러 사람에게 많은 기회와 혜택 그리고 공동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지속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다. 석남의 명복과 유족들의 행복을 기원한다. 또한 민속학, 인류학, 박물관학, 문화재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도 행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글ㅣ최종호 문화재전문위원,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 사진ㅣ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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