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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개조開祖 이벽을 만나다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9.04.21|조회수81 목록 댓글 0

한국 천주교의 개조開祖 이벽을 만나다
2008-03-28 오전 08:53

중국 북경의 북천주당(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은 이승훈(1756~1801)이지만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한 인물이 이벽(1754~1785)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벽은 선교사의 전교傳敎가 없던 조선의 상황에서 스스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천주교의 조직을 만든 수수께끼 인물이다. 이승훈이 북경의 북당을 스스로 찾아가 영세를 달라고 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에는 이미 이승훈에게 신앙을 주었던 자생적인 천주교 조직이 있었는데, 그 조직의 지도자가 바로 이벽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천주교가 소개되기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북경에 주청사로 갔던 이수광이 마태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등 천주교 문헌을 가지고 귀국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선교사로 활약하던 아담 샬 신부와 교제를 나누고 귀국할 때 천주교 서적을 선물로 받아온 적이 있었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적을 통해 서양학문의 하나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성호 이익 같은 대학자는 문인인 안정복, 신후담, 이헌경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찾아 읽고 그 교리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학문적으로 접근하던 천주교를 조선 사람들에게 종교로써 접근하게 한 데는 이벽이 많은 역할을 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984년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u]“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것은 세계교회 역사상 유일한 경우로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된 것입니다. 신앙을 향한 한국인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말 고맙게도 몇몇 평신도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이 남녀 평신도들은 마땅히 ‘한국 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이라고 해야 하며, 1779년부터 1835년까지 저들은 사제들의 도움 없이 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며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습니다.”[/u]


[b]닫힌 시대의 천재라고 불린 젊은 열정가 [/b]
이처럼 자생적 천주교도라 할 수 있는 이벽으로 인해 조선은 이승훈이 영세 받기 전 이미 천주교 조직이 이루어졌는데,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한 후 빠른 속도로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여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의 인물, 이벽은 누구인가?

이벽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경주 이씨 부만簿萬과 청주 한씨 사이에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집안은 고려 때 문신으로 유명한 익재 이제현의 후손으로 본래 문관 집안이었으나 후대에 무관으로 전환해 조부, 부친을 비롯하여 형과 동생이 모두 무과로 벼슬하고 있었다. 이벽 또한 키가 8척에 한 손으로 무쇠 백 근을 드는 장사였다고 한다.

이벽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총명하여 일곱 살 때 이미 사서삼경을 외워 인근의 선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그를 가리켜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고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된 후 이미 세상을 떠난 이벽을 회상하면서, “나에게는 비교가 안될 만큼 출중한 덕행과 해박한 지식이 있던 이벽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랴?”하며 이벽의 뛰어난 학문과 행실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집안이 대대로 무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드날리며 벼슬길에 나갔으므로 그의 아버지 이부만은 총명하고 공부에도 뛰어난 둘째 아들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크게 빛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이벽은 당대 실학의 대학자였던 순암 안정복에게 한동안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러나 이벽은 학문의 길에는 나아갔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산수를 유람하거나 선비들과 토론하기를 즐기는 등 점차 천주학에 몰두해감으로써 아버지 이부만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b]조선의 학자, 천주교에 매료되다 [/b]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6대조 이경상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병자호란 때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셨는데,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귀국할 때 선교사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중 일부가 집안에 전해져왔다.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던 것이다.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젊은 학자들이 1779년(정조 3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대선배 학자이며 사부격인 권철신을 주재자로 모시고 강학회를 열었다. 모인 사람들은 권일신, 이벽,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 남인가의 자제들이었다. 이 강학회가 유교적 모임이냐 천주교 성격의 모임이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강학회에 참석한 인물들은 천주교가 유교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강학회에 이벽이 참여하면서 서양지식과 천주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점차 ‘천주교’라는 종교로 침잠하게 되었다. 훗날 천주교가 사교로 몰리면서 이 강학회에 참석했던 상당수의 인물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1783년 11월 이승훈은 이벽의 주선으로 동지사로 가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으로 간다. 이듬해(1784) 봄 예수회 그라몽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조선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벽은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하자 그에게 세례와 함께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전파에 나섰다. 당대 최고의 천재라 일컫던 이가환, 강학회를 이끌던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등 남인가 명사들은 물론 최창현, 최인길, 김범우 등 중인 지식인들과 양반가 부녀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도를 전파하였다.

[b]박해와 갈등의 삶을 살다간 최초의 그리스도인[/b]
천진암에서 출발한 초기 천주교 신앙의 흐름은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을 거쳐서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전교는 점차 주위의 눈에 띄게 되었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신앙집회가 추조(형조)의 포졸들에 의해 발각되었다. 집주인 김범우가 순교했으나 양반자제들은 무사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이후 이벽은 성리학 사회의 비방과 문중門中의 강압으로 집안에 감금되고, 아버지 이부만은 문중회의에 불려가 모욕과 문책을 당한다. 아들 이벽의 천주교 전교를 막든가, 막을 수 없으면 족보에서 빼어 버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부만은 아들 이벽을 불러놓고 달래고 야단치고 위협하고 갖가지 수단을 다 써가며 천주교 전교를 하지 말 것과 문중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잘못을 빌도록 설득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이부만은 대들보에 노끈을 걸어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이벽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교를 중지하겠다’고 말했다. 집안과 문중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고자 한 것이다.

목을 매달려던 이부만은 자살기도를 중지하고 아들이 천주교를 끊었다고 문중에 알렸다. 그런데 문중에서 이번에는 이벽 자신이 직접 문중회의에 나와 자명소自明疏를 올릴 것을 요구했다. 이벽은 오히려 천주 공경의 필요성과 방법과 순서를 간략하게 알리는 글을 지었다. 크게 분노한 아버지는 이는 내 자식이 아니라고까지 극언하면서 그를 후원 별당에 가두어 출입문에 못을 치고 하인들에게 엄히 지키게 했다. 문중에는 아들 이벽이 천주교를 믿다가 천벌을 받아 염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알렸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벽은 때가 이르렀음을 느끼고 방안에 좌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철야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결국 그는 단식 14일 만인 그해 (1785) 음력 6월 14일 밤 탈진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 때였다.

우리에게 이벽은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복음福音을 받아들여 어두움 속에 잠겨 있던 조선 땅에 밝은 여명을 열어간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가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짧았지만 그리스도의 도道를 전하려다 끝내 목숨을 잃은 순교자의 청정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 글_ 김병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
▶ 사진_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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