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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조 시대 최고의 천문학자 서호수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9.04.27|조회수221 목록 댓글 4

영조·정조 시대 최고의 천문학자 서호수

박권수(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을 주도한 학자들 중에서 조선시대 과학사 연구자들이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학산(鶴山) 서호수(徐浩修, 1736∼1799)이다.

서호수는 영·정조시대 학자관료였던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의 아들이자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저자인 서유구(徐有埍, 1764∼1845)의 친부로서, 정조시대의 학술 발전, 특히 천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학자이다. 이들 3대 학자를 포함해서 서명선·서형수·서철수·서유본 등을 아우르는 달성 서씨 가문의 세거지와 선영이 장단의 동원이었는데, 오늘날의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 일월봉 일대가 그곳이다. 서호수의 호인 학산은 동원의 서쪽 20여 리에 있는 백학산에서 따온 것이고, 이 학산에 서명응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서호수·서유구가 함께 묻혀 있다.

서호수는 1766년 홍문관 부교리로 출사를 시작하여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특히 1776년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곧바로 도승지로 임명되어 1799년 임종할 때까지 줄곧 정조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부친인 서명응과 더불어 규장각의 설립과정을 주도하고 각종 서적의 편찬하는 등 정조대 학술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서호수의 이름이 사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770년에 완성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천문학 부분인 [상위고(象緯考)]를 집필한 데에서부터이다. 이후 그는 정조 대를 통하여 관상감 제조 등을 역임하면서 천문관측 기구를 중수(重修)하고 역법(曆法) 서적을 편찬하며 관련 제도를 개편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사실 정조 대에 서호수가 이룬 천문학 분야의 성과들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우선 1776년에는 제정각(齊政閣)에 보관된 혼천의(渾天儀)를 중수하였으며, 사은사 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하여 귀국하였는데, 그 중에는 19종의 서양 천문학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1782년에는 {천세력(千歲歷)}을 편찬하여 110년간의 역서를 미리 만들어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1789년에는 시각을 측정하는 누각(漏閣)의 제도를 시헌력 체제에 맞게 개정하였다. 특히 1789년에 이루어진 시각측정 체제의 개정을 위해서 그는 천문 관측기구인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를 새롭게 제작하였고 중성(中星)의 위치를 다시 설정하고 물시계의 잣대를 개정하였으며, 그 결과들을 정리하여 {신법중성기(新法中星記)}와 {신법누주통의(新法漏籌通義)}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서호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중인 과학자인 김영(金泳)을 발굴하여 중용하기도 하였다.

한편 1791년에는 관상감의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천문학 부문과 명과학 부문의 관직을 정비하고 선발 시험 교재를 개편하였다. 특히 택일 업무를 담당하는 명과학 부문의 정원을 늘리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례에 필수적인 택일 작업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에 그는 부친인 서명응이 영조 대부터 주장하던 '8도의 북극고도와 동서편도의 측정과 역서에의 기재' 작업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여, 결국 관상감 소장 지도를 이용하여 수치들을 산정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1796년에는 김영·성주덕과 더불어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편찬하여 그동안 이루어진 천문역산 개혁의 성과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정조 대에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천문학과 명과학 분야의 제도개혁과 관련 의기의 중수 및 서적의 편찬과정에서 서호수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작업에서 서호수가 맡은 역할이 여타의 사대부 출신 관상감 제조들처럼 관상감의 업무를 단순히 관리, 감독하는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천문역산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토대로 천문학과 명과학(命課學)의 개혁 작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학자였으며, 실제 당시 유학자들과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서호수는 천문역산과 관련해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그가 남긴 저술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바이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 강희 연간에 편찬된 수학서인 {수리정온(數理精蘊)}에 수록된 수학 이론을 해설한 {비례약설(比例約說)}과 {수리정온보해(數理精蘊補解)}를 편찬하였으며, 역시 중국에서 간행된 천문학 서적인 {역상고성(曆象考成)}과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篇)}의 내용을 해설한 {역상고성보해(曆象考成補解)}와 {역상고성후편보해(曆象考成後篇補解)}를 편찬하였다. 또한 마테오리치의 협력자였던 이지조가 지구설에 대해 논한 저술인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을 해설하여 {혼개통헌도설집전(渾蓋通憲圖說集箋)}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서호수의 저술은 천문학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 농학의 전통 위에서 중국의 농법을 새롭게 수용하고 서양식 수차에 관한 내용들을 반영한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정조 대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서적편찬의 작업에 관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호수의 개인적인 저술은 대부분 일실되어 그 일부만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수리정온보해}가 소장되어 있고, 이화여대에는 {사고(私稿)}라는 이름으로 문집의 일부 내용이 필사본으로 남아있으며, 그 외 농학저술인 {해동농서}와 중국 여행기를 담은 {연행기(燕行記)}만이 학계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1968년에 간행된 {한국고서종합목록}에는 서호수의 저술인 {율려통의(律呂通義)} 4책이 개성의 중경문고에 소장되어 있다고 적고 있으며, 이후 이 책들은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물론 현재까지도 파주에 있는 학산 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자유롭게 출입할 수가 없으며 김일성종합대학과의 학술적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서호수의 학문적 흔적조차도 쉽게 확인할 길이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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