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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의 실체

청동기와 고조선

작성자개척자.|작성시간07.07.03|조회수173 목록 댓글 1
청동기와 고조선
   
“좀더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면, ‘왜곡된 내용’을 뺄 수 있다는 건가?”
바름이 아빠는 마치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새로 밝히는 역사학자와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된 듯, 설레는 마음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씩’ 웃음이 났다. 그건 바름이가 던진 ‘왜곡이 뭐냐’란 질문에 오히려 자신이 더 재미가 난 것 같아서였다. 마침 옆을 지나가던 동료가 “강부장님! 뭐가 그렇게 즐거우세요?”라고 물었다. “어? 김과장! 왜곡이 뭔지 아시는가?”, “뭐 대충은...”, “그럼 일본이 뭘 왜곡했는지도 아시고?”, “어~~~ 그건...”, “김과장도 나랑 비슷하군. 우리도 ‘일본의 역사왜곡’이란 문제에 그냥 무심히 지나쳐 온 것 같아. 우리 아들 바름이에게 대답해줄 것을 찾다보니 내 자신이 먼저 왜곡에 대해 흥미로워졌거든. 새롭게 의미있는 것을 알아 간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인 것 같군. 김과장도 이리 와 이 것 좀 보시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모든 사건과 사실을 원래대로 회복(복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사건과 사실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거기에다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들을 선택하여 특정한 사건과 사실을 다룰 수밖에 없기에 어떤 특정한 부분만을 선택하여 해석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러한 해석에 담긴 의미나 의도를 분별하고 판단하여 알아가는 과정(역사 인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과정에서 특정한 집단의 견해나 관점(주관적 관점)이 반영된 관심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어떠한 시대적 감각과 주관적 관심이 반영되어 있는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특정 집단의 시대 의식이나 주관적 관심이 지나치면 조작된 역사 인식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름이 아빠가 펼쳐 보인 것은 ‘후소샤’에서 만든 책의 뒷부분에 있는 연표였는데, 일본어를 모르는 김과장은 그 연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강부장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쳐다본 김과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연표에는 우리의 ‘고조선(古朝鮮)’이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시작이 ‘낙랑군(樂浪郡)’과 ‘고구려’로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낙랑군’이 뭐란 말인가? 김과장은 강부장의 설명이 있고난 후 더욱 화가 났다.

“김과장도 어렴풋하게 기억나겠지만, 낙랑이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한사군(漢四郡-중국의 한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위만 조선을 점령하고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4개의 지방행정구역)’중 하나라네. 그런데 불과 25년도 지나지 않아(기원전 82년) 낙랑군과 현도군 두 개만 남게 되었고, 현도군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구려 토착 세력에 흡수되어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네.”

“그럼 결국 우리 역사의 시작이 중국 한(漢)나라의 지방에서부터였다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셈이지”
“도대체 왜 그런 터무니없는 소릴 한답니까?”
“우리 바름이랑 거의 같은 질문이군. 지금 나도 그것을 찾는 중일세”


일본은 1192년부터 1868년까지 일종의 장군(쇼군)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정부(政府)인 ‘막부(幕府-변방에서 지휘관이 머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군막을 의미하기도 함)’체제였습니다. 천황은 권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였죠. 그런데,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천황제의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를 만들게 되었는데, 신화 속에서만 존재했던 천황의 의미를 실제로 국가성립에 필요한 중심축으로 적용하여 국민을 하나로 묶어 나가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죠. 그래서 일본은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의 조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책인 『古事記』(712)와 『日本書紀』(720) 등의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천황을 신격화하였으며, 이러한 내용을 의무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나 징병제 군대와 같은 집단체제 속에서 주입식 교육을 통해 암기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바로 이 때문에 ‘특정 집단의 시대 의식이나 주관적 관심이 지나쳐’ 조작된 역사 인식을 형성하게된 것이죠.

좀더 살펴보죠.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만주 지역에 ‘만선 지리 역사 조사실’을 설치하여 ‘만선사(滿鮮史)’라는 것을 성립시켰습니다. ‘만선사’란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 역사는 주체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고 대륙에 붙어 따라다니는 것으로 파악하여 ‘한국사의 타율성(他律性)’을 강조하는 역사관을 뜻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진 원칙이나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성질을 타율성이라 하죠. 그렇다면,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역사관인 ‘만선사’는 우리 역사가 외부의 침입과 이에 따른 영향으로 진행되는 타율적인 역사이며, 따라서 우리나라는 선진 문물을 보유한 국가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을 만들어 낸 셈 이죠.

바름이는 TV에서 "겨울 방학 특강-한국의 역사‘를 보며 책을 뒤적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이 생긴 게 이상했지만, 일단 게임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TV를 보다 늘 갖고 있던 궁금증이 떠올랐습니다. “곰이 사람이 되서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낳은 단군이 고조선을 만들었다.” 이런 내용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궁금증이었습니다. ‘역사란 원래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다는데 신화 속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는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

“자! 다음은 우리나라의 고조선 형성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죠.”라는 소리에 바름이는 TV로 다시 눈을 돌렸습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먼저 ‘조작’했던 것이 바로 ‘타율성’입니다. 이러한 목적에 딱 맞는 것을 일본은 찾아낸 것이죠. 그건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는 한(漢)나라의 무제(武帝)와 관련된 역사였습니다. 한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꾸준히 동쪽을 공격하려 했으나 ‘고조선(위만과 우거왕)’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끝내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치른 전쟁을 끝내고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바름이 아빠의 설명처럼.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이 ‘한사군(漢四郡)’이 조선 침략의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타율성’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이 이용하기에 아주 좋은 역사적 증거가 된 것이죠. 그래서, ≪조선사의 길잡이 朝鮮史の訶≫라고 하는 개설서에서 우리 역사의 시작을 한사군(漢四郡)부터라고 하여, 마치 우리 역사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였습니다. 즉, 한사군(漢四郡)은 바로 일제(日帝)가 우리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끌어들여 강조한 것이죠.

그런데, 19C 후반에 형성된 ‘특정 집단의 시대 의식과 주관’이 21C의 일본 교과서에도 남아 있는 이유와 의도가 무엇일까요? 현재 일본의 ‘시대 의식과 주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한사군(漢四郡) 설치가 결과라면, 무엇이 원인일까요? 그건 바로 ‘고조선(古朝鮮)’ 멸망(기원전 108)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21C 현재에도 ‘원인’이었던 역사적 실체인 ‘고조선’을 서술하지 않은 채 우리 역사의 시작을 ‘한사군(漢四郡)’이었다고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과감한 삭제’·‘의도적 누락’은 이기적이며 의도적인 행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겠다.’는 생각이죠.

‘후소샤’에서 만든 역사책에는 『후한서』(한나라가 멸망 후 한(漢)왕조를 재건하여 25년부터 220년까지 196년 동안 유지되었던 후한(後漢)에 대한 역사책)의 「동이전(東夷傳)」을 근거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대 국가는 1세기 중엽에 ‘왜(倭)’가 한(漢)에 사절을 보내었기 때문에 황제가 인(印)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 받았다고 ‘생각되는’ 금인(金印)이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 황제와 일본 열도의 사자(使者)와의 교섭은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고대 국가가 대륙과의 교류, 즉 중국 한(漢)왕조와 교류했다는 역사의 근거를 제공한 『후한서』에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와 관련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제(漢-武帝)는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서 현도에 속하게 하였으며…… 」, 「무제(漢武帝)가 조선(朝鮮)을 멸망시키고서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이와 같이 ‘한사군’의 원인이었던 ‘조선(朝鮮)’ 땅에 한나라의 4개 군현이 설치했다고 하여 ‘조선(朝鮮)’이 분명히 존재하였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朝鮮)’은 인정하지 않고, 결과만을 ‘역사적으로 선택(choice)’하여 자신들을 위한 역사책을 만들었던 것이죠.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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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슬픈 영혼 | 작성시간 05.08.03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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