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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의 실체

대조영이 야망을 꿈꾸던 땅 차오양

작성자태을천77|작성시간08.01.16|조회수181 목록 댓글 0

<1> 대조영이 야망을 꿈꾸던 땅 차오양

 

고구려 부흥을 향한 지혜가 싹튼 곳
초린과 숙영공주 역사기록 없어
'고씨' 고구려 '대씨' 발해로 정치 순환



차오양 근교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요나라(遼代)의 마운탑(摩雲塔). 높이 37m의 13층 방형 벽돌탑으로 요에 귀화한 발해 지배층 유민들도 참가하여 조영되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청년 장수 대조영은 초린과 숙영 중에서 과연 누구를 선택하여 황후로 삼을 것인가. 요즈음 인기있는 TV 사극 '대조영'을 보는 이들의 관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주 접하는 질문은 과연 초린과 숙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등이다. 대조영에게 여인이 있었겠지만 초린과 숙영공주에 대한 기록은 없다.

발해 초대 고왕 대조영은 청춘기를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차오양(朝陽)에서 보냈을 것이다. 그가 결혼하고 고구려 부흥의 꿈을 왕성히 피우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을 것이다. 차오양은 당시 영주(營州)로 불리던 곳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고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 등이 고구려에서 669년경 옮겨와 696년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698년)하기까지 27년 간 살던 곳이다. 대조영의 아들 제2대 무왕도 차오양에서 태어났을 개연성이 크다.

차오양이 발해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곳으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곳은 고구려 부흥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곳이자,발해 멸망 후로는 지식층 유민들이 요나라 문화의 발전을 위해 활약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요나라 불교유적에는 발해유민들의 열정과 지혜가 담겨있을 것이다.

발해국은 고구려 장수 출신의 대조영 등에 의해 698년 건국되어 926년 멸망할 때까지 15대왕 228년간을 유지했던 왕조이다. 그 영토는 지금의 북한지역과 중국 3성으로 불리는 지린성(吉林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랴오닝성 일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남부로 고구려의 영역에서 동북으로 좀 넓어진 형세였다.

필자가 차오양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7년 8월 이곳과 인접한 푸신(阜新)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된 3박4일간에 걸친 요금거란사연구회 주최의 발표 때였다. 초청자는 중국 동북민족역사학자이자 동북공정 이론가인 선양(瀋陽)의 쑨진지 선생이었다. 발표 주제는 '고려 내투·내왕 거란인'으로 고려에 투항하거나 왕래한 거란인 상당수는 발해유민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으로는 나 혼자서 베이징 등 중국 각지에서 온 50여 명의 참석자들과 두 도시 유적을 순회하며 발표와 토론을 하였던 것이 인상 깊었다. 첫날과 둘째날은 푸신에서 그리고 다음날은 차오양에서 보냈다.

 

 

 

 

 

 

 

차오양에서도 요대(遼代)의 마운탑(摩雲塔)이 있는 봉황산 기슭의 운접사(雲接寺)와 차오양 시내의 연도빈관(燕都賓館) 등이 행사장으로 사용되었다. 토론회에서는 발해가 과연 어느 민족의 역사인가,하는 민감한 질문도 나에게 던져져 잠시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우호적인 분위기는 유지되었다.

차오양은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고 많은 유민들이 강제로 이주되었던 곳이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이듬해부터 평양과 요동지역의 민호(民戶) 3만8천200호 약 15만명을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하였다고 하는데,사극에서 대중상으로 묘사되는 걸걸중상도 그 한 세력에 속했다. 강제 이주세력에는 이외에도 대조영과 함께 건국 길에 올랐다가 전사한 걸사비우(乞四比羽)나 안서도호부 고선지장군(?~755),그리고 이 지역의 지방장관이 되어 당조정까지 위협하였던 이정기(732~781)의 선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이해고(李楷固)도 바로 이곳 차오양에서 대조영과 함께하고 있었다. 사극이 대조영의 첫사랑을 이진충의 딸인 초린으로 등장시킨 것도 바로 영주에서의 동거를 염두에 둔 설정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진충은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장본인이었다. 당나라 영주도독 조문홰의 학정에 분을 품고 그를 살해하면서 촉발된 '이진충의 난'(696~697),즉 '영주의 난'이 발해 건국의 도화선이 되었다.

'구당서'(940~945년 편찬) 북적열전 발해전은 대조영의 영주에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가 살았다. 만세통천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대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이진충이 죽자 측천무후가 우옥검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죽이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대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를 연합하여 이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하고 이해고는 탈출하여 돌아왔다… (대조영은)성력 연간에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에 올랐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보자면 영주 즉 차오양에서는 대조영과 이진충,그리고 걸사비우가 함께 당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진충에게 영주는 본거지였다. 거란의 발상지는 지금의 중국 내몽고 츠펑(赤峰)시 관할 서요하(西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西拉木倫) 강 유역이고,몽골인들은 지금도 거란이 그들의 조상이었다고 믿고 있다.

이진충이 반기를 든 것은 이러한 지역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남 손만영(孫萬榮)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고 실패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의 고구려부흥은 성공하였다. 발해가 건국된 것은 요동 등에서 아직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과 영주의 지도자 대조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진충의 반란을 유도한 것은 바로 대조영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검모잠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서 일어났던 고구려부흥운동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망명의 차오양에서 고구려부흥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대조영과 고구려 유민들이 토대가 되어 세워진 발해국은 성공하였다. 30년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 발해로의 정치 순환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푸신에서 몽골인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중국식의 멸시적인 '몽고'라는 이름을 꺼리고 칭기스칸의 후예인 '몽골'인임을 자부한다. 결혼식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진행되었으나 축하연은 몽골문화 그대로를 보여줬다. 한국인들에 대한 몽골인들의 정서가 우호적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마침 당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던 프로축구에서 100만도 안된다는 조선족의 연변 오동팀이 성 대표들을 누르고 상위권에 진입하고 있었던 것도 한국인을 더욱 극진히 대접한 이유였다. 연변 오동팀은 조선족의 대표가 아니라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대표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오동팀의 해체는 예견된 것이었다.

 


 

<2> 고구려인들의 영원한 고향 요동벌

고구려 유민 저항운동 들불처럼 번져
평양성 함락에도 안시성 등 11개 성 끝까지 대항

요즘 사극을 보면 역사란 죽이고 죽는 전쟁뿐인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어떤 네티즌은 한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받은 것은 931번 정도였다고 한다. 큰 전쟁으로는 일본과 17회,중국과 33회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통 중국왕조 가운데 우리와 직접 부딪힌 것이 한(漢)과 수·당(隋唐)이 대표적이었기에 숫자는 이보다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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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수 사람들은 중국과 북방민족을 구별치 못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면서도 거란과 여진,원,청을 중국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의 전쟁터로 요동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지금의 한국사가 있게 한 지역으로 그 중심에는 고구려인들이 있었다.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 건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 멸망 후 유민들의 부흥 의지를 살피는 것은 필수다. 한국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에서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심의 신라보다 대륙 중심의 고구려를 의식한 나머지,고구려가 통일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의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에 다름이 아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만에 고구려 땅에 세워진 발해는 이미 한민족의 왕조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당나라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항거하며 고구려 부흥을 꾀했던 안시성(사진 아래쪽이 내부). 사진 중간이 성곽 흔적이다. 양만춘 장군이 주민과 함께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랴오닝성 하이청(海城) 남동쪽의 잉청즈(英城子)로 지금은 한국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제한돼 있다. 사진 제공=서길수 서경대 교수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 많은 고구려민들은 잠시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신라로 그리고 일부는 몽고 방면의 돌궐 등으로 이주하였는가 하면,소수는 일본열도로도 이주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한 지배층 및 부호들을 비롯한 2만8천여 호는 당나라로 내지로 옮기게 되었는데,이는 당이 고구려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었다. 당으로 이주된 세력 가운데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집안과 같이 영주(차오양)로 간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고선지와 같이 안서인 서역 근방으로 이주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부류도 있었다.

    당으로의 강제 이주정책은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일으켰다. 670년에 설인귀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출정한 틈을 타 검모잠(劍牟岑)이 일으킨 고구려 부흥 운동이 그것이다. 평양성에서 일어난 검모잠은 신라로 간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옹립한 뒤 지금의 황해도 재령인 한성을 근거지로 항쟁하였다. 부흥 운동의 불길은 또한 요동 안시성으로 번져갔다. 강제 사민(徙民)의 여파로 불만에 차 있던 유민들은 당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부흥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앞서 668년 고구려 멸망 때 평양성의 함락과 보장왕의 항복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구려 성들은 저항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의 성(城)이란 오늘날의 시·군과 같은 행정단위였다. 당시의 전선(戰線)은 오늘날과 같은 선이 아니라 하나의 포스트인 점(點)이었다. 때문에 보급로가 문제만 없다면 항복하지 않은 성을 젖혀두고도 얼마든지 평양성을 공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성들 가운데 당의 무력에 정복당한 성은 혈성과 은성,사성,3개 성밖에 없었다. 평양성의 함락과 함께 양암성 등 11개 성이 스스로 항복하여 전체적으로 당나라가 장악한 성은 14개였다.

    이에 반하여 당나라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성은 18개였다. 그 중에서 항복하지 않고 계속 대항한 성은 11개로 북부여성,백석성(백암성),안시성,요동성,신성 등이었으고,항복하지 않고 주민들이 일시 도망한 성은 연성 등 7개였다. 이미 발해가 건국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양성의 함락과 고구려 멸망은 당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사실상은 신라에 의한 것이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신당(나당)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다름 아닌 김춘추의 외교력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관할하기로 하였던 밀약과 고·수(高隋),고·당(高唐)전의 뼈아픈 복수전을 위해서,신라는 당나라에 최후 승리의 기회를 주어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당시 신라의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문무왕 8년:668년)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에 이르러 여러 총관들에게 명하여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하였다. 문영 등은 사천(蛇川) 벌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싸워 크게 무찔렀다. 9월 21일에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평양을 에워쌌다." 평양성 공격은 당나라에 의해서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나라가 개선할 때에는 당나라 이적과 승전군의 일환으로 신라의 각간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그리고 인태·의복·수세·천광·흥원 등도 함께하였다.

    당나라의 9도독부(고구려),계림도독부(신라),웅진도독부(백제) 설치를 통해 그 야욕을 깨닫게 된 신라는 당나라 축출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이때의 신라군은 통일을 위해 상쟁하던 삼국시대의 신라군이 아니라,백제와 고구려인들까지 합세한 '통일신라군'이었다. 설인귀의 잦은 공격도 이들을 통해서 막아내었다. 고구려 유민의 강력한 저항과 통일신라군의 공격으로 안동도호부는 676년 평양을 버리고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라오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으며,도호부는 이어 677년에는 신성(新城:푸순)으로,705년에는 평주(平州)·요서군(遼西郡) 등으로 옮기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대동강 이남 지역을 관할하기로 한 당과의 밀약과 경주의 지역적 한계로 말미암아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 건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인들과 대화하면 난감할 때가 있다. 중국을 갈 수 없었던 1987년 겨울 대만에 가서 자료 수집과 언어연수를 하였다. 당사(唐史)를 공부하지 왜 하필 발해사를 하느냐는 질문은 그저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92년 이후 방문한 중국 학자들과의 대화는 좀 달랐다. 평화를 생각하며 학문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 와 화가 난 적이 있다. 그의 말에는 중국에 저항하거나 반하는 학문은 평화가 아니라는 중국중심적 시각이 짙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였다. 20개국과 인접한 중국으로서 변방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패권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논리로 주변국을 설득하려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룩되어 온 과정을 다만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역사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날을 기대해 본다.

     

     

     

    <3> 대조영·이해고의 숙명 '천문령 전투'


    당나라 추격군 물리치고 가자 둔화로!
    측천무후, 이해고 앞세워 발해 건국 집요하게 방해
    대조영 '운명건 싸움' 대승 후 고구려 부흥 꿈 이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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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걸걸중상 등 대조영 집안도 이진충의 난에 깊이 간여했을 거라는 시각이 일반적이기에 둘은 영주에서도 알고 지냈다고 볼 수 있다.

    TV 사극이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하다가 영주로 갔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설령 대조영이 평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 활약의 주인공은 아버지 걸걸중상이었다. 대조영의 사망 연대는 719년으로 분명하다. 고구려 멸망이 668년 그리고 발해 건국이 698년이니 그가 70세에 죽었다면 649년생으로 영주로 갈 때에는 20세 정도였고 발해를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敦化)지역에서 건국할 당시는 50세였다.

    그런데 구당서가 발해 건국을 이끈 지도자를 대조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신당서'(1044~1060편찬)는 그 아버지 걸걸중상에서 대조영으로 그 임무가 바뀌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당서 내용이 걸걸중상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풍부한 기록으로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발해 건국을 위해 영주를 탈출할 때까지 고구려 부흥세력의 중심은 대조영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물론 대조영은 충분히 아버지의 뜻을 대행할 정도로 나이나 경륜을 갖춘 지도자였기에 발해 건국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대조영과 이해고가 일전을 벌였던 천문령을 연상케 하는 장백삼림 지구 고개. 화띠엔과 찡유(靖宇)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발해 건국 과정에 함께하였던 사람 중에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등장한다. 사극에서는 대조영의 부하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그는 대조영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 정도의 장수였다. '신당서'는 이 부분을 자세히 전한다.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하여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당나라와)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

    천무후가 발해 건국 만류를 위해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그리고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삼아 회유하였다고 전한다. 책봉 순서도 걸걸중상보다 걸사비우가 먼저였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항복한 장수 이해고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해고가 그 뒤 대조영에게 패배함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의 신임을 두텁게 입고 상까지 받았던 것은 거물급 걸사비우를 제거했던 공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은 천문령전투였다. 대조영이 추격해온 당나라 장수 이해고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기에 발해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해고는 수차례 출병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을 정도로 발해 건국을 집요하게 방해했지만 결국에는 아무 성과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휘파허 유역 동쪽의 화띠엔시에 있는 소밀성 발해성터 유적. 화띠엔시는 대조영이 천문령을 넘어 건국길에 올랐던 길목이자 거란과 교통하였던 영주도의 길목에 있는 도시이다.



    천문령이 어디인가 하는 점은 많은 견해들이 있으나 대체로 현재 요하 동쪽의 훈허(渾河)와 휘파허(輝發河)의 분수령인 지린하따링(吉林哈達嶺)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은 후일 발해에서 거란으로 가는 영주도(營州道)의 길목이었다. 대조영은 바로 이곳 휘파허 부근에서 추격해 오던 이해고를 대파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하였다. 이해고가 겨우 "몸을 빠져나가(脫身)" 요서지방으로 되돌아갔다고 전한다. 이곳에서의 승리가 없었던들 고구려 유민들의 꿈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천문령으로 짐작되는 하따링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랴오웬(遼源)시,그리고 동쪽 휘파허 유역 도시로는 메이허코우(梅河口),류허(柳河),휘난(輝南),판스(磐石),화띠엔(樺甸)시 등이 있다. 화띠엔시에는 국가급 소밀성(蘇密城) 발해성터가 남아 있다.

    당시의 국제정세도 대조영에게는 유리했다. '구당서'가 "이 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무후)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성(푸순)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도 유명무실하였다. 아울러 신라의 당 축출전쟁으로 신당간에도 대결적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보다도 발해 건국의 성공 원인은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다는 것과 고구려 유민들을 잘 조직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필자가 천문령 근방을 처음 답사한 것은 1994년 11월이었다. 휘파허 하류의 송화호(松花湖) 근방에 위치한 지린(吉林)시에서 관련 학자들을 방문하고 부여·고구려 및 청동기 유적으로 유명한 동단산(東團山) 및 서단산(西團山) 유적에 이어 휘파허 유역을 거쳐 장백조선족 자치현을 답사하였다. 장백현은 발해 영광탑이 있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고 천문령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다. 화띠엔 소밀성 유적 이후부터는 역시 난코스였다. 산악과 겨울이라는 악조건으로 인해 4륜 구동 차량을 타지 않고는 갈 수가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간에 마적단들이라도 나올 그런 공포감이 스며드는 코스였다. 발해사 학자로는 처음으로 이 코스를 접해 본 감동과 함께 대조영이 이런 곳을 뚫고 발해 건국을 성공시켰구나 하는 감회가 새삼 뭉클하였던 곳이다.

     

     

     

    <4> 동모산에 자리잡은 최초의 산성-성산자산성


    군사적 약점 보인 평양 대신 사방 탁 트인 동모산으로…
    인근 영승·육정산 일대 발해 유물·고분 쏟아져
    15년전 산성터 찾았다 북한 학자들과도 만나

    698년 대조영 등이 이해고와의 천문령전투에서 승리하고 건국의 터를 잡은 곳은 지금의 지린성 조선족 자치주 둔화지역이다. '신당서'는 이후의 상경(上京)과 비교하여 이곳을 '구국(舊國)'이라 한다. 대조영이 당의 추격을 피해 첫 수도로 삼은 '구국'은 송화강의 큰 지류인 목단강 상류에 위치한다. 그들이 처음 웅거하였다는 '동모산(東牟山)'은 지금 둔화시 서남쪽 시엔루샹(賢儒鄕) 성산자산성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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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에 치열하게 저항한 고구려 말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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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산자란 '산 위에 성터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그곳 마을도 '성산자촌'으로 북방에 이러한 지명이 많다. 옌지(延吉)에 있는 성자산이나,지안(集安)의 산성자산(山城子山) 등이 그렇다. 그런데 오늘날 북방에는 '동모산'이라는 지명이 전혀 없고 발굴도 완벽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곳이 동모산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이곳은 방어적 산성일 뿐만 아니라 이 산과 연결된 목단강(牡丹江) 건너 영승(永勝)유적에 발해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으며,또 이곳에서 동북으로 10㎞ 정도에 발해 왕족과 평민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의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고,산의 북쪽을 끼고는 사료에 보이는 오루하(奧婁河),즉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남아 있는 성터는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둘레가 2㎞ 정도이고 성곽은 흙과 모래를 섞어 쌓았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성인 이곳은 사면이 탁 트여 있어 외부인의 동태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대석하(大石河)는 북쪽 방어선이다.

    그런데 대조영이 왜 평양이 아닌 이곳을 건국 터로 삼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고구려 부흥국이라면 평양을 목적지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의 출신 지역과,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노출된 평양의 군사적 약점으로 인하여 결코 평양을 첫 수도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TV사극에서 그린 것처럼 대조영이 평양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 기록이 없어 부인도 인정도 할 수 없다). 대조영의 출신은 '속말말갈'로 표현되는 것처럼 송화강(속말수) 유역에서 태어났고 그 세력들은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천문령전투에서 큰 공을 이룰 수 있었고 결국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다.

     

     

     



    ▲ 대조영이 첫 건국 터로 잡은 동모산(현 성산자산성). 중국 지린성 둔화시 서남쪽에 위치한다. 해발 600m의 나지막한 산으로 산의 북쪽에 대석하(大石河)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



    필자는 성산자산성을 다섯 차례에 걸쳐 가 보았지만 2005년에는 중국 관원에게 제지를 당하고 들어가지 못했다. 처음 답사한 것은 1992년 여름이었다. 그해 7월 옌볜대 발해사연구소에서 개최된 제2회 발해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발해 유적을 최초로 답사할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었다. 2박 3일간의 학술회의가 끝난 후,발해유적 답사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래 중국 학술대회의 관례는 주최 측에서 관련 유적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발해사는 민감하였던 터라 유적 답사는 묵인하는 정도에서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으로 이루어졌다. 악조건이었지만 비교적 안심하고 유적을 답사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중국의 발해사 학자들도 반가웠지만,뜻밖에 북한 발해사학자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의미가 있었다.

    한편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인 거란의 항복 장수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그를 돕고 있던 '말갈' 세력 때문이었다.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는 데 그를 도왔던 세력으로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을 꼽고 있다.

    과연 말갈인들은 누구인가? 이들과 고구려인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발해는 과연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조였는가 아니면 고구려와 관계없는 말갈인들이 세운 왕조였는가 하는 점들이 학계의 쟁점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봉착한 문제였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부분이다. 1988년에 내놓은 '숙신·읍루연구'와 '고구려시대 말갈연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결론은 말갈이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니라 고구려 변방 사람들을 낮춰서 부른 종족명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서울사람만을 나라사람으로 인정하는 역사관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신라인하면 경주 사람만을 지칭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서울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시골 사람'으로 낮춰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고대의 백제사람이란 공주·부여 사람만을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란 평양의 도성 안 사람만을 지칭했던 것이다.

    ▲ 성산자산성에서 내려다 본 오루하(奧婁河). 지금의 대석하(大石河)로 동쪽 4㎞ 지점에는 목단강 상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해 말갈이라는 멸시어는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라,고구려와 당나라 사람들이 낮춰 부른 이름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갈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갈이라는 말 속에는 부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두산 지역 사람을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 한다든지,송화강 유역 사람을 낮춰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불렀다. 때문에 '신당서'가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한 것은 '송화강 지역 시골사람'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갈 추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변방 장수로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으며,고구려가 멸망해서는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세력의 추장이었다. 끝까지 대조영과 운명을 함께한 걸사비우는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변방의 독자 세력으로서 말갈 추장이라 불렸던 자이다.

    한편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에 끌려가 고구려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당의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었다가,고구려 부흥을 위해 오히려 '말갈' 즉 고구려 변방인과 공모하였다는 '구당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이때의 말갈도 고구려 변방 현지인에 대한 낮춤말 이외의 다른 뜻이 아니다.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당 고종이 고장(보장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임명하여 조선왕(朝鮮王)에 봉하고… 그런데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불러다 늑주(勒州)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등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다."

     

     

     

    <5> 대조영이 거처한 왕궁은 어디였을까


    육정산 고분군 남쪽 영승유적 도성터 정설
    고왕 대조영에서 3대 문왕 초기까지 44년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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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조영의 출생지-지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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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부터 시작된,소수민족 역사를 중국사로 만드는 정책은 앞으로 더욱 조용히 치밀하고 강력하게 진행될 것이다. 최근 중국은 장춘 동계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창바이산(長白山),즉 백두산을 형상화한 영상물을 내보냈다. 동북공정은 학술(역사)프로젝트라기보다는 정치·전략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총 51개 기초연구 과제 중 32개가 변경 및 국경문제에 집중돼 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연구재단','동북아역사재단'이 만들어졌고,최근의 인기 사극들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것이다. 사극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고구려사에서 소외되어 말갈사나 중국사로 간주되기도 하던 발해사가 '대조영'이라는 사극을 통해 되살아나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대조영이 첫 수도로 삼은 것은 구국(舊國) 둔화지역이었다. 이곳은 그가 처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출발했던 영주(營州;朝陽)로부터 1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천문령에서는 동북으로 좀 올라간 산악지역이다. 그런데 구국은 대조영이 첫 도읍지로 삼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잠시 거쳐간 지역으로 간주되면서 발해 5경 즉 상경,중경,서경,동경,남경에 포함시켜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해 수도가,중경현덕부인 지린성(吉林省) 화롱현(和龍縣) 시구청(西古城) 근방으로 옮기는 742년경까지,이곳에 약 44년 이상 자리했다는 것을 결코 짧게 볼 수는 없다. 왕으로 보아도 고왕(高王,698~719) 대조영(大祚榮)에 이어 그 아들 무왕(武王,719~737) 대무예(大武藝)가 이곳에서 재위했고,심지어 제3대 문왕(文王,737~793) 대흠무(大欽茂)도 초기까지 이곳을 도성으로 삼았다.

    그러면 과연 어느 곳이 발해 왕이 거처하던 도성 역할을 하였는가? 그점이 쟁점이다. 44년간 왕이 거처했다면 그 규모가 어떠하더라도 적어도 궁성과 행정관서는 있어야 한다. 고고학적으로 기와나 주춧돌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하곤 한다. 이렇게 해서 지목된 곳이 처음에는 둔화시에 있는 오동성(敖東城)터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요나라 시기의 유물들이 나오고 그 성곽 짜임새 등에서 발해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육정산 고분군 남쪽에 인접한 영승(永勝)유적을 도성터로 강력하게 인정하고 있다. 궁터와 같은 정연한 주춧돌 등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서쪽 5㎞ 지점에 발해 최초 산성인 동모산이 있는 점을 들어 도성터로 보는 것이다. 동모산이 오루하(대석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것은 적의 예상 공격 지점이 적어도 목단강 서쪽이기 때문인데 오동성은 똑 같이 서쪽에 있어서 방어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발해가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로 전환하게 된 시기는 당에서 측천무후가 사망하고 705년 중종이 즉위한 뒤였다. 당 조정은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무마했고,대조영도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에 보내어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그 뒤 당은 대조영에 대해서 외교적 승인행위인 책봉례를 거치려 하였으나 거란과 돌궐의 침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711년 돌궐의 묵철(默)이 당에 화친을 바라면서 신하로 복종할 것을 표시하자,당 예종(睿宗,710~712 재위)은 이 시기를 이용하여 713년 낭장(郎將) 최흔(崔)을 발해에 파견하여 양국 관계가 개선될 수 있었다.


    ▲ 발해의 첫 궁궐터 영승유적. 가운데 산이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운 동모산이다. 이전에는 발해 첫 궁터를 오동성터(작은 사진)로 여겼다. 현재 오동성터와 관련해서는 영승유적에서 옮겨와 도성으로 삼은 곳이라는 견해 등이 제기돼 있다.



    그는 발해(당시는 진국振國)에 들어와서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의 책봉을 전달하였고,그 아들 대무예(후에 2대 무왕)에게는 계루군왕(桂婁郡王)의 책봉도 전달하고 돌아갔는데 모두가 구국을 수도로 하고 있던 때였다. 아직 '발해국'이 아닌 '발해군'으로 인정되는 한계가 있었지만 당으로선 발해 건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발해의 요청이 아닌 당에서 먼저 사신을 파견했던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중국은 발해 대조영이 홀한주도독의 책봉을 받았다고 해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 승인 행위의 관행으로 행해지고 있던 책봉례를 이렇게 보는 데 대해서는 일본을 비롯한 동양사학계에서조차도 인정하고 있지 않는다. 이렇다면 백제나 신라,왜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발해의 자주성은 대조영의 시호(諡號) 즉 죽은 후에 부르는 호칭을 고왕(高王)이라 하였다고 '신당서'가 전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조영은 연호도 '천통(天統)'이라 하였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다른 왕들도 대체로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다고 함은 정치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발해의 자주성 내지 국호 사용 시기에 대하여 '신당서'가 "(대조영이 책봉을 받았던 713년으로부터)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고 전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다. 발해라는 국호가 과연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로부터 하사(下賜) 받은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어는 당나라로서 그들이 일방적으로 발해를 '말갈'이라 깔보아 부르다가 이때로부터 정식 국호를 따라 '발해'라고 불렀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발해는 건국 때 '떨쳐 퍼진다'는 뜻의 '진국(振國)'이었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 '발해'로 고쳐불렀고,그 시기는 적어도 당의 책봉시기 이전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6> 무왕 대무예의 당나라 공격


    "믿음 저버린 대국 응징하라" 웅대한 기개로 독립국 천명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 견제
    요동반도 발해 영역 증명
    해상과 육상으로 전면 공격

    발해는 719년 대조영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왕위를 이어 받아 제2대 무왕이 되었다. 대조영이 자식을 얼마나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상으로 무왕이 된 대무예와 당나라 책봉에 대한 답방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대문예(大門藝)만이 확실하다. 이들의 어머니가 누구이며 어느 집안 출신인가 하는 점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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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연남생과 대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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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무왕과 그 동생 대문예는 당나라 공격 문제를 놓고 뜻을 같이 하지 못하고 형제의 의를 끊게 된다. 이 비극은 사극 작가들의 '흥미'를 끄는 대목일 수 있다. 단순히 권력의 생리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그의 시호(諡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업적을 많이 쌓은 왕이다. 그는 대조영의 외교 방향을 이어 받아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하는 등 독립국의 면모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독자적 행동에 대해서 '신당서'는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고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당에 대한 무왕의 감정이 극히 나빴던 것은 아버지 대조영과 건국의 고통을 같이 했던 과정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이미 영주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의 집요한 방해를 무릅쓰고 건국 길에 올랐다. 무왕은 737년에 죽었으며 발해 건국을 위해 영주에서 탈출한 지 40년이 지난 정도였다. 무왕이 60세에 사망했다면 20세 정도에 이미 그는 아버지 대조영과 할아버지 걸걸중상의 활동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그 내용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자세하다. "개원 14년(726)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므로,현종(玄宗)이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라는 관리를 두고 통치케 하자" 무왕은 크게 격노하였다. "(무왕은)흑수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부터 당나라와 서로 통하였고,지난날 돌궐에게 토둔(吐屯)의 직책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는데,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당과 공모를 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고 하면서 친아우 대문예 및 그의 장인 임아(任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전에 일찌기 볼모로 당나라 서울에 갔다 온 대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의 전성기에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 발해 군대가 당을 공격하기 위해 거쳐갔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집안시의 압록강변으로 건너편이 북한이다.


    대문예는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을 적에 또 글을 올려 강하게 간했다. 그러자 무왕은 노하여 사촌 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이에 문예가 그의 무리를 버리고 당나라로 도망하자 당 현종은 오히려 그를 좌효위장군으로 삼아 양국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무왕은 사신을 보내어 문예의 죄상을 피력하며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몰래 문예를 안서로 보내고 무왕에게는 영남으로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하지만 내부 제보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안 무왕은 당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대국은 남에게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거짓을 일삼는단 말인가. 이제 들으니 문예가 영남으로 떠나지 않았다 한다. 청컨대 죽여주기 바란다."고 거듭 요구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은 누설자를 색출하여 좌천시키고 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보내고 무왕을 달랬다.

    그러나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전쟁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무왕이 전쟁으로 원한을 풀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7> 발해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육정산 고분군


    정혜공주 묘비 독립국가 정체성 확인 대발견
    1949년 고분 발견 50~60년대 발굴 80년대 국내 알려져
    장례·무덤 양식 등 고구려 계승…황상 칭호 자주성 증명

    3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둔화에 도착하였다. 시내에 있는 발해의 '강동 24개 돌유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었다. 아침은 연변대학 초대소에서 녹두죽과 찐빵으로 하였다. 다양한 곡식죽은 중국에 갈 적마다 맛있게 먹는 음식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점심은 입에 맞는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둔화는 조선족자치주이면서도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장국'(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물만두 등 비교적 우리의 식성에 맞는 요리로 점심을 떼울 수밖에 없었다.

    둔화에는 모두 다섯 차례 정도 가보았지만 육정산고분군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문 때는 육정산에 올라가서 정혜공주묘 발굴터와 다른 무덤군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유적지는 잡풀이 무성했으나 발굴 후 유적 뒤처리를 말끔히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유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다행이었다. 그 뒤에는 고분군 울타리 밖에서 안내간판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안내간판조차 아예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2003년 여름 모 통신회사에서 후원한 중고생들의 답사 인솔 때에는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고 입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정각사(正覺寺)만 볼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비공식적이나마 육정산고분군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방문이 늘고 모 방송국에서 이곳의 관리실태를 한국 입장에서 비판한 후,접근이 까다로워졌다. 최근 중국당국이 발해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위해 전반적인 발굴을 하면서부터 더욱 경계가 심해졌다. 지난해 여름에는 둔화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이 다른 샛길로 빙 돌아 고분군 경계와 안내간판이 있는 곳까지만 들렀다가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발해 귀족들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49년이었다. 중국 건국 후 학교운영비를 마련할 방도를 궁리하던,둔화의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이 옛 무덤이 많은 이곳에서 보물을 꺼내야겠다고 '도굴'을 하던 중 보물은 나오지 않고 글자가 새겨진 돌 등이 나왔는데,이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 발굴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내막이 겨우 알려졌을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발해유적 가운데 몇 군데의 도성급 유적들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동기야 어떻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나마 그때 발굴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육정산 '고분군의 구역'(墓區)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제1구역에선 왕실귀족들의 무덤이 30여 기,제2구역에선 중·하급관리와 일반인들의 무덤이 5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대부분 발굴되었다. 최초의 발굴은 연변박물관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1953~1957년 지린성문물관리위원회와 지린성박물관이,1959년 8월에는 지린성박물관에서 그리고 1964년에는 북한과 공동발굴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 발굴에 대한 소식이 한국과 일본 등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0년 이후였다. 1956년 진유푸(金毓)와 옌완장(閻萬章)의 정혜공주묘에 대한 글과 1965년 북한의 '력사과학'에서 소개한 자료가 1980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번역·소개되었다. 중국도 80년대부터 발해사 연구가 크게 일어나면서 정혜공주묘비 등에 대하여 왕청리(王承禮) 등이 다시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하였는데 50~60년대 발굴의 중요성이 컸음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제1구역에는 묘비가 나와 확인된 정혜공주묘가 있다. 그로부터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제2대 무왕 대무예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 '진릉(珍陵)'도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돌사자와 벽화조각,꽃무늬벽돌과 질그릇 손잡이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정혜공주 묘비의 발굴은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발해사에 있어서 대발견이었다. 이는 1980년 지린성 화롱현(和龍縣)에서 발견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함께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21행 725자의 정혜공주묘 비문은 높이 90cm,너비 49cm,두께 29cm로 현재 창춘(長春)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그녀가 문왕의 둘째 딸로 출가하였고 남편이 그녀보다 먼저 죽었으며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 40세로 죽었다는 사실과 정혜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보력 7년 11월에 진릉 서원(西原)에 배장(陪葬)되었다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3년상을 치른 셈인데 이는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장례 풍속으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이 확인된 셈이다. 또한 발해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발해의 자주성을 확인케 한 증거가 되었다.

    무덤양식도 고구려식 돌방무덤(석실봉토묘)이며 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 길이 있고,여기서 널길을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4면이 돌방이며 천정은 고구려식의 고임천정(말각천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비문은 그 아버지 문왕이 '대흥(大興)'에서 불교적 색깔이 있는 '보력(寶曆)'으로 연호를 고쳤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즉위시가 아닌 때에 개원(改元)했다는 것은 정치의 개혁 및 유신과 관련이 있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문왕이 전제군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적혀 있어 문왕이 불교이념을 중심으로 국가통합을 의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육정산 전경. 여섯 봉우리가 있어 육정산(六頂山)으로 불리며 맨 오른쪽에 603m의 주봉이 보이고 그 뒤편 남쪽에 정혜공주묘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정혜공주묘지석.



    ▲ 제1무덤구역 2호분의 정혜공주묘. 뒤쪽 조금 솟아난 부분이 남아 있는 봉분이다.



    ▲ 육정산 고분군 입구. 안내비문이 뒤로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 석공의 실수로 한 획이 빠져 '륙정산 옛 무덤떼'가 아닌 '륙정산 엿 무덤떼'가 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1993년 촬영)



    ▲ 지금은 입구에 '륙정산 옛 뭇묘지'로 고쳐져 있다(2006년 촬영).

     

     

     

     

    <8> 북한의 발해사 연구


    고고학 강점 기반 독립국 역사 복원 의지
    5경 중 남경,현재 신포시 오매리절터 등 1차 자료 많아
    60년대부터 본격 연구 발해 정체성 논리적 토대 구축

    2002년부터 공개화된 중국의 역사 침탈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이 알려지면서 자주 받던 질문 증의 하나는 북한은 과연 고구려나 발해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북한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대로 설명을 해 보이지만 그런 나를 신기롭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북한 자료를 보아 왔느냐 하는 것도 그렇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북한의 연구 성과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부터였다. 1980년 초반 필자는 주로 일본 국회도서관에 복사 신청을 하여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문헌사의 '력사과학'과 고고학 중심의 '조선고고연구'라는 잡지가 보려는 자료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북한 논문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논문에 있는 김일성 교시문이 생소하고 거슬렸지만 중국 논문을 보다가 우리와 같은 시각에서 쓰여진 강렬한 글을 보니 귀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차에 1992년 중국에서 열리는 '발해사 국제학술회의'는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공산권 여행 '허가'를 받아 혼자서 텐진으로 입국하여 베이징을 거쳐 연변으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기에서 북한의 발해사 학자들을 세 분이나 만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북한 학자들을 초청하고서 남한에는 이러한 사정을 통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한 해 전 비슷한 학술회의를 할 적에는 한국 학자들만이 참석하였기에 남북 발해사 학자가 역사상 최초로 만난 사건이 된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다 고인이 되었지만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전영률 소장을 비롯해서 역사연구소 발해사연구실장인 장국종 박사,김일성대학 교수인 현명호 박사가 참석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에 대한 발표를 하였고,필자는 '신라와 발해의 교섭과 대립'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를 역설하였다. 헤이룽장성을 비롯한 중국 내의 많은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이 참석하여 진행된 이 학술회의는 긴장된 상태 그대로였다. 당나라 지방정권으로서의 발해라는 중국학자들의 견해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까지의 발해사에 대한 연구는 북이 남보다 앞섰다. 이는 발해사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큰 차가 없었지만 남한은 발해사 연구 인력이 거의 전무했고 1980년에야 비로소 한국사 전공자로서 발해사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필자와 서울대 송기호 교수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은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발해사 영역으로 1차 자료를 안고 있는 곳이다. 또한 1963년부터 2년간 중국의 발해사 유적을 중국과 공동발굴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 주영헌,장상렬,김종혁 등과 같은 훌륭한 고고학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는 박시형이 1962년 '발해사를 위하여'라는 지표가 될 만한 무게있는 글을 발표하여 판단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문헌과 고고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발해사가 발전하였다. 역사연구소에 발해사연구실이 있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제도적인 면에서 남한보다 나았다.

    북한 발해사 연구의 강점은 고고학이다. 아울러 정사류의 기록에 없는 내용이 많은 '협계태씨족보' 등을 적극적으로 원용해서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것도 주목된다. 발해건국 1천300주년을 기념해서 내놓은 7권의 '발해사'와 '발해사문답집' 등은 훌륭했다. 이 연구서는 사료 인용에 있어서 무리한 부분이 있지만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북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1992년 발표가 끝난 후 중국 학술회의의 관례대로 답사 안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발해유적 답사는 공식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묵인할 테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이나마도 이때에는 헤이룽장성까지 발해유적을 비교적 많이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감동적이었다. 북한 학자들에게는 내가 쓴 박사논문 등을 전달하고 헤어졌다.

    1992년부터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발해유적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북한 땅은 2004년 2월에야 밟을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운 좋게도 인천공항발 평양 순안공항 직항 고려항공이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으로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 참석을 위해서였다. 출국면세점도 국내 여행으로 간주되어 이용할 수 없었다.

    '동북공정' 분위기가 한층이었고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이 진행중에 있던 터라 내심으로는 고구려나 발해유적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은 '일제의 약탈문화재'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른바 '납치문제' 등에서 북한은 중국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분위기였다.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이 알아서 해주고,일본은 우리가 맡는다는 분위기로 읽혀졌다.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의 '역사침탈'을 방관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었다. 북한은 발해의 5경 중의 하나인 남경이 있던 곳이고 함남 신포시의 오매리절터 등 많은 발해유적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등에 대해서는 이미 논리적 기반을 구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이 발해사연구를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있는 동안 북한은 오히려 고구려·발해사 연구에 진력하여 많은 성과를 남기고 있었다.

    ▲함경남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절터 전경. 이곳에서는 구들이 있는 건물터와 발해의 전형적 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오매리절터 북쪽1호 건물터 구들 유구.



    어떤 이는 북한의 역사학이 교조적이고 국수적이기에 무시하거나 얕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이래 요·금·고려·조선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한이고 60년대 쌓은 학문적 우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토론회가 끝난 후 북측은 남측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와 강서큰무덤 등을 우리들에게 공개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찍지 말라는 비디오 카메라를 몰래 찍다가 필름을 압수당하기까지 하였다.

    2004년 7월 1일 드디어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남한의 민관이 적극 후원한 덕택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9월에는 금강산에서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기념 남북공동전시회·학술토론회'가 열려 고구려와 발해사 학자들을 대거 만나게 되었다. 작년에 작고하신 전 발해사연구실 채태형 실장도 만났는데 발해사의 중요성을 열변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북한에서마저 고구려 중심의 연구에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9> 발해의 자존과 슬픔이 있는 곳-정효공주묘


    묘비에 '자주' 새기고,벽화에 '문화' 남기다
    36세 요절 문왕의 넷째 딸 불교식 장례 고구려식 무덤
    역법·풍습 등 시대상 확인 중경 위치 서고성설 뒷받침
    '고구려 양식' '당나라 풍' 한국과 중국 유물해석 이견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경대(鏡臺)에서 한 쌍의 방울새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 딸 정효(貞孝)공주로서 이 내용은 그녀의 묘비 중의 일부이다.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 12명의 인물 벽화가 있는 정효공주묘 무덤 안칸 동벽도('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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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효는 죽은 후에 붙여지는 이름인 시호로서 그녀는 757년 즉 문왕 대흥(大興) 21년에 태어나 대흥 56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인 문왕은 발해에서 가장 장수한 '황상(皇上)'이었다.

    정효공주묘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 용두산(龍頭山)에 위치한 유적으로 1980년 10월에 발견되었다(이곳은 발해 5경 중 중경에 해당되는 곳이다). 문화혁명 때 소꼴을 먹이던 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무덤은 연변박물관에 의해 긴급 발굴되었는데,이 무덤에서 묘비가 발견되어 그 주인공이 둔화(敦化)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동생 즉 문왕의 넷째 딸임이 밝혀졌다. 높이 106㎝,너비 58㎝,두께 26㎝의 해서체로 음각된 이 비문은 18행으로 모두 728자가 선명하여,정혜공주묘비에서 판독하지 못하였던 부분을 이를 통해서 대부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덤 바로 위에는 벽돌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식 장례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하며 탑 아래 지하에는 무덤칸이 있다. 무덤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만들어진 무덤칸은 벽돌과 돌로 쌓았으며 천장은 길다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것은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고구려식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칸의 벽면에는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였다.

    무덤길과 동,서,북쪽 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은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이다. 사후(死後) 세계에서도 공주를 모신다고 상상한 이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무사들이 집을 지키며 몸종들이 시중을 들고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여 즐겁게 하며 시종들이 일산(日傘)을 받쳐 햇볕을 가려 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당시의 미녀상인 통통한 얼굴을 한 여인들이 시종을 들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무덤과 벽화를 가지고 한중 학자들 간의 주장이 갈려 있다. 중국은 벽돌을 쓰는 무덤 양식이나 통통한 얼굴의 회화양식은 모두가 전형적인 당나라풍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비해,한국 특히 북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의 고구려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 즉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것을 이어받고 있으며 회화에서 유행을 따르기도 하지만 벽화를 그리는 풍속은 역시 고구려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들은 도굴되어 거의 없어졌지만 무덤 형태는 완벽했고,벽화 역시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기에 자료로 활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도자기 인형 2점,정효공주와 그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뼈,도금한 청동장식물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정효공주묘 개념도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지병서(貞孝公主墓誌幷序)'라는 묘지석은 발해사의 실체를 좀더 선명하게 하였다. 당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가 크게 부흥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문왕의 존호(尊號)를 통해서 그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대흥과 보력은 발해에서 사용하던 고유 연호이고,효감,금륜,성법은 불교용어이다. 특히 금륜은 불교의 전륜성왕 설화에서 나온 것으로 그 스스로 무력이 아닌 불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할 이상적인 왕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발해왕은 '황상(皇上)'을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자주적이었다는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아울러 이 묘는 여러 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이로 인하여 미술사적으로나 복식사 및 문화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중국의 '국가급문물보호단위'의 반열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당서' 등이 당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다면 정효공주묘비는 전적으로 발해시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자주성과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물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즉 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문왕대의 정치상황,공주의 시호(諡號)와 생몰년대,발해 당시의 문자사용 예와 문학적 소양,서체와 장례법,당시의 역법(曆法)과 귀족들의 생활,풍습 등 다양한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 발해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0> 두 번째 수도 - 중경현덕부

    농업 생산의 기반, 비옥한 땅을 찾아서

    해란강변 위치 기후도 따뜻

    고구려 계승상징 유물 출토

    日·신라·당과 대외 교통로

    武治에서 文治로 개혁의 땅

    사진 설명:

    중국과 러시아의 발해 유적이 있는 곳의 근대적 특징은 대개가 조선족이나 고려인들이 여전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간도지방으로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으며 고구려·발해사와 함께한 유적지로서 한국의 탐방객들이 매년 수없이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

     

    연변에서 버스로 남서쪽으로 30분 정도를 달리면 해란강이 눈에 들어오고 용정시(龍井市)를 지난다. 발해 유적 답사자들은 먼저 화룡에 가서 발해 서고성(西古城)과 정효공주묘 등을 들렀다가 오후에 연길로 돌아가면서 들르곤 하는 곳이 용정이다. 이곳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로 간 많은 대한제국의 교포들이 독립운동을 하던 곳이다. 민족시인 윤동주 시비가 있는 이곳의 대성중학교(현 용정제일중학교)는 독립과 교육의 본산이었다. 문익환 목사도 이 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가곡 '선구자'의 무대였던 용정의 '일송정(一松亭)'도 빠지지 않는 코스다. 지금은 주변에 그 지역의 큰 체육경기장이 들어서 있어 현대적 분위기가 물씬 나지만 한 2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그래도 꽤 숨이 차는 곳이기도 하다.

    작년에 갔을 때는 일송정에 한국인들이 정성스레 세워두었던 기념시비가 아래로 내팽개쳐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른바 중국식 정화작업 과정에서 높은 분의 지시로 한국인들이 제작한 것이 밀려 내려왔던 것이다. 한글로 새긴 비였지만 이곳은 엄연한 중국이었다.

    발해 지방 편제는 5경(京),15부(府),62주(州)로 이루어졌다. 그 중 5경의 한 곳이 중경(中京)과 그 통치지역인 현덕부(顯德府)로 이른바 중경현덕부이다. 바로 화룡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두도평원(頭道平原) 서북고성촌(西北古城村)의 서고성이다. 이곳은 발해의 두 번째 수도로 구국(舊國) 즉 지금의 둔화 지역에서 제3대 문왕 대흥 5년(742)에 옮겨와 대흥 19년(755)에 상경(上京)으로 옮길 때까지 14년간 수도였던 곳이다.

    원래 중경이 어디인가 하는 논쟁은 이곳 서고성설과 길림성 둔화(敦化)설과 화전(樺甸)설 등이 팽팽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 10월 이곳에서 가까운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가 발견되고부터 이곳을 중경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곳 중경현덕부의 치소(治所)는 노주(盧州),현주(顯州),철주(鐵州),탕주(湯州),영주(榮州),흥주(興州) 등 6개였다.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각각 3개 주,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와 서경압록부(西京鴨府)가 각각 4개 주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에 비해 가장 많은 주를 거느렸던 도성이었다.

    서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는데 외성은 직사각형으로 동서의 길이가 630m,남북의 길이가 730m이고 둘레가 2천730m이다.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는데 다짐층의 두께는 10㎝이다. 성벽 밑면의 너비는 13~17m,윗면의 너비는 1.5~4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1.8~2.5m이다. 15m 정도의 남문과 북문이 터져있으며 성안의 동남쪽에는 1천500㎡ 되는 못자리가 있으며 성벽에는 물이 고인 해자(垓字)가 있었다.

    해자는 대부분 메워지고 오직 남쪽 성벽의 동쪽 끝과 동쪽 성벽의 남쪽 끝에만 남아 있는데 그마저 물도랑이 되었다.

    내성은 외성 중부에서 북쪽에 치우친 곳에 위치해 있는데 장방형이며 남북의 길이가 310m,동서 너비 190m이다. 내성의 동쪽 성벽은 외성의 북쪽 성벽에서 약 70m 떨어져 있다. 내성 안에는 북남향으로 자리잡은 3개의 궁전자리가 있다. 이러한 성의 평면구조는 흑룡강성 녕안시(寧安市) 발해진(渤海鎭)의 상경(上京)이나 길림성 훈춘시(琿春市) 팔련성(八連城)의 동경(東京) 구조와 거의 같다.

    ▲ 발해의 두 번째 수도 중경 서고성 복원도(중국 길림성 화룡현).

    ▲ 중경터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 기와무지.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전면 재발굴한 서고성터 중경 유적에서 쏟아져 나온 발해의 전형적인 손끝무늬기와 등을 수십 겹으로 쌓아 놓았다. 붉은 색의 고구려기와도 선명하다(박민성씨 제공).

    여기서 나온 유물들은 꽃무늬벽돌,유약 바른 푸른 기둥밑치레,유약 바른 푸른기와,부서진 귀면(鬼面),검은 기와,그리고 고구려 계승의 상징인 연꽃무늬 막새기와,발해의 전형적인 손끝무늬 숫키와를 비롯해 신라와의 교류를 의미하는 봉황무늬 암키와,발해문자기와 등이다.

    이 유적의 소개와 최초 발굴은 일본의 만주 침략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통감부간도임시파출소기요(統監府間島臨時派出所紀要)'(1909)와 '간도사정(間島事情)'(1918) 등에서 소개되기 시작해 1937년과 1943년 및 1945년에는 발굴이 있었다.

    중국정부에 의해서는 1982년 성급(省級)의 중점문물보호단위에서 1996년에는 국가급으로 그 격이 높아졌으며 최근에는 전면 재발굴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성이 자리하고 있는 화룡현은 발해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성터로서는 허래성(虛萊城)으로 불리는 하남툰(河南屯) 고성과 해란(海蘭)고성 등이 있고,고분군으로서는 정효공주묘가 나와 유명한 용두산(龍頭山)과 순금제 장식들이 발견된 하남툰을 비롯해 발해삼채가 나와 유명한 북대(北臺) 고분군 등이 있다.

    구국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경제적 이유가 먼저 꼽힌다. 둔화 지역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으나 지대가 높아 냉하고 기후가 차서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중경 지역은 해란강 등이 있어 토지가 비옥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농업생산에 유리한 지역이다. '신당서'에서 발해의 유명한 농산품으로 소개되는 노주(盧州)의 벼(稻)와 현주(顯州)의 포(布),그리고 위성(位城)의 철(鐵)이 모두 중경 지역에서 생산됐다는 것도 이러한 점을 반영한다.

    다음으로는 고구려유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고구려 변방의 백산부(白山部)로 백산부 부족은 고구려군대에서 '말갈군'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백산부란 오늘날의 화룡,연길,용정,왕청,도문, 훈춘을 중심으로 한 연변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문왕이 무치(武治)에서 문치(文治)로 그의 국가통치 이념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중경을 선택했고,일본,신라,당과의 교섭을 원활히 하기 위한 대외교통로의 중심지에 중경이 있었다는 것도 천도의 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참고> '말갈 추장' 걸사비우

     

             대조영 아버지 걸걸중상과 같은 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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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갈 추장' 걸사비우 대조영 아버지 걸걸중상과 같은 반열

    사극 '대조영'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걸사비우(乞四比羽)는 '말갈 추장'이었다. 기록상의 걸사비우는 사극에서와 같이 대조영의 의형제이자 부하 장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아버지 걸걸중상(대중상)과 같은 반열에 있었던 자였다.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그리고 이보다 먼저 걸사비우(乞四比羽)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책봉하여 회유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이를 거절했고 무후의 명령을 받은 이해고에게 죽음을 당했다. 대조영은 아버지가 건국 길에서 죽고 난 이후 그 대를 이은 장수였다.

    어떤 네티즌은 사극 '대조영'에서 말갈 사람들은 다 어디 갔냐고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발해가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피지배층은 말갈'로 구성된 왕조로 알고 있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갈로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말갈'이라 부르지 않았다. 거란 사람들은 '스스로 거란이라 불렀다(自號契丹)'고 하지만 말갈은 그렇지 않았다. 말갈이란 자칭이 아니라 타칭의 멸시적인 비칭(卑稱)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나 고구려 지배층들이 변방사람들을 이민족처럼 깔보아 낮추어 부르던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걸사비우는 어디 출신이었는가. 아마 중경지역의 백산부 출신(일명 백산말갈)이 아니었는가 한다. 발해 건국의 주된 세력으로 '속말부' 출신의 대조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산부를 지목하는 견해가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백산부 지역이 중경이 된 것은 단순히 산업이 풍부한 곳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정효공주묘의 발견은 발해의 중경이 이곳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입증케 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묘가 발견되기 이전에 발해 5경 중의 두 번째 수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었다. 소밀성(蘇密城)이 있는 길림성 화전(樺甸)설과 육정산이 있는 둔화(敦化)설,그리고 화룡현의 서고성(西古城)설이 있었는데,결국 이 비문의 발견으로 서고성이 중경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정혜와 정효공주의 묘비는 이들이 모두 출가하여 정혜공주는 아들 하나를,정효공주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남편마저도 먼저 사망하는 비운을 맞고 있던 문왕의 심정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공주 모두 절개를 지키다 수절하다가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하였으니 부왕의 슬픈 마음이 곧 화려한 공주들의 무덤이 있게 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토록 하였다. 상여꾼의 목메어 우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의 슬피우는 소리 들판 따라 오르내리는 구나. 한나라 악읍(鄂邑) 공주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 넘고 당나라 평양(平陽) 공주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11> 역사와 발해드라마 '대조영'


    극적 재미 위해 역사적 진실 왜곡 안돼
    한국사적 정통성 확보 문화적 토대 마련은 성과
    등장인물 등 사실과 많이 달라 잘못된 인식 우려 

     

    드라마 '대조영'은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 사이를 오가면서 때로는 지나친 허구로 오해를 불러오기도 한다. 사진은 '대조영'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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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는 전쟁 사극이 갖는 촬영장의 한계로 인해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지방자치단체에서 70억 원이든 100억 원이든 세트장 건설을 도맡아 해주고 있기에 이러한 점 역시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각 사찰마다 관우를 비롯한 '삼국지'의 인물들은 숭배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관광상품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시청자들과 작가·연출·기획진이 생각하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의미는 상당한 편차를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통해서 역사를 배운다고 할 정도로 사극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 그럼에도 드라마의 실상은 2%의 뼈대에 98%의 허구적 사실로 꾸며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소설 같은 드라마일 뿐이다.

    인물의 시대적 배경이나 성격,그리고 역사적 사실의 선후관계를 제멋대로 하는 작품을 '퓨전드라마'라 하고 90% 이상 작가의 상상을 허락한다 할지라도 단 1%의 뼈대가 바르다면 이것을 '정통사극'이라고 한다. 지난 19일 고구려연구회는 '역사와 고구려·발해 드라마'란 주제로 최근 드라마들을 역사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는 자리를 가졌다. TV 사극이 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평가를 받아 본 셈이다.

    발해사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발해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체적 모습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해사는 이와 함께 더 큰 문제를 안고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다. 발해국이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였는가,아니면 고구려와 다른 말갈의 왕조였느냐 하는 문제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 후손을 자처하는 한국인들이야 말로 이 문제에 대해서 민감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조영'은 한국고대사에서 잊혀져 온 발해사를 최대 지상파 방송에서 처음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것으로 인해 발해사의 한국사적 의미를 재확인하고 한국인들에게 고구려,발해 후손을 자처할 수 있는 역사·문화적 토대를 튼실히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발해사의 구체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발해의 건국이 단지 영주(營州)에서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구려 유민들의 복국(復國) 운동의 결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역설적으로 고구려사에 비해 기록이 없어 작가가 가장 자유롭다고도 할 수 있는 '대조영'의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한번 생각하는 기회가 필요하다. 허구의 역사를 본래의 모습으로 잘못 머리에 각인하게 하는 역기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조영'이 긍정적인 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사극'으로서의 문제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대조영'에 등장하여 극의 흐름에 영향을 주는 주된 인물은 50명 정도였다. 대조영 등 고구려인이 27명,당나라 사람이 11명,거란 7명,백제 2명,신라 1명이다. 그 중에서 고구려의 가공인물은 숙영공주,부기원,흑수돌,계진,신홍,달기,부지광,장산해,고사웅,이기우,선겸,지명천 등이고,당나라 사람으로는 이문 장수와 홍패,거란인으로서는 초린,설계두,모개이고 신라는 김찬 장수,백제의 미모사,금란 등이다.

    작가는 가급적 가공인물보다도 역사상의 인물을 등장시키려 한다. 이것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정통사극으로서의 신뢰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인물이 기록과 달리 나타날 경우에는 그 폐해 또한 적지 않다.

    간신(奸臣) 부기원과 같은 가공인물을 활용한다든지 667년 당나라가 신성을 공격할 때,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주어 항복한 사부구와 같이 고구려를 배신한 장수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은 작가에게 허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걸사비우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하다. 기록을 통해 볼 때 걸사비우는 대조영의 의형제이자 부하장수가 아닌 오히려 그 아버지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같은 반열의 장수였다. 그와 같은 실제적 인물의 활약은 드라마 자체를 곧 역사로 알게하는 문제를 안게 한다. 발해건국까지의 주인공은 대조영이 아닌 그 아버지 걸걸중상이었다는 것도 기록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출연자와 촬영 장소 등이 갖는 물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야기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 멸망의 원인에 대하여 드라마는 지나치게 내부적 원인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고구려가 엄연한 침략자인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던 점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삼국에서의 신라의 위치 역할 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되었어야 했다고 본다. 신라의 대당외교와 삼국통일 의지 등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게 한 점이라든지 신라의 역할에 대한 부분이 미흡했지 않나 싶다. 물론 고구려 멸망과정에서 주화파와 주전파의 갈등과 논쟁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시대와 국가의 운명 앞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지나치게 많은 분량으로 방영되는 것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국사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고 대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부추기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같은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사사실이 누락 내지 은폐되는 경우도 있었다. 672년 백빙산전투 등에서 기록에도 엄연한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은 등장치 않고 오히려 지어낸 이적의 동생이자 당나라 장군으로 등장한 이문의 활약이 크다. 당나라 장군의 이름이 고간이라면,시청자들로 하여금 고구려 장수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을 염려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발해사의 성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부분이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발해를 고구려유민 국가로 인식하고 말갈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인터뷰에서도 확인했지만 고구려 변방인들을 이민족시하여 부른 '말갈(靺鞨)'인들을 따로 구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앞으로 '대조영'은 당을 축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세력과 백제,고구려인들이 포함된 통일신라군이 힘을 합쳐 활동하는 모습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묘사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항쟁 및 복국운동 세력과 신라가 연합해 당군을 물리치는 기록은 많이 있기 때문에 이를 잘 반영했으면 한다.


     

     

    <12> 발해사의 자주성과 고구려 계승 문제


    한국사 맥 잇는 명실상부한 해동성국
    당나라 지방정권 아닌 독립국
    중국 정치야욕 역사 진실 왜곡
    잊혀진 우리 고대사 되찾아야 


     

    드라마 '대조영'을 통해 잘 알려지게 된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잊혀져 왔던 역사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잘 알아도 발해사를 아는 이는 적었다. 발해가 고구려 앞인지 뒤인지 묻는 이도 적지 않다. 발해국은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만에 고구려인들이 살던 곳에 세워진 왕조였다.

    불교문화가 꽃을 피웠음을 보여주는 6m 높이의 발해 대형 석등(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발해진 소재).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28년간 유지되었던 왕조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한국사에서 신라가 992년(B.C.57~935)이나 왕조를 지켰고,고구려도 705년(B.C.37~668),백제가 681년(B.C.18~663),가야는 490년(42~532),고려가 474년(918~1392),조선이 518년(1392~1910) 동안 국가로서 존재했다. 그에 비하면 발해는 단명한 왕조였다.

    하지만 중국과 만주지역 왕조에 비해서는 결코 단명한 왕조가 아니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秦)은 겨우 14년(B.C.221∼B.C.207)동안 존재했을 뿐이다. 수(隋)나라도 37년(581∼618)만에 망했고,유럽인들에게 '황화(黃禍)' 즉 '황인종의 공포(Yellow Terror)'로 천하를 떨게 한 원(元)나라도 고작 97년(1271∼1368)을 버티지 못했다. 발해보다 장수했던 왕조로는 한,당,명,청 뿐이었다. 그마저 한(漢)이 230년(B.C.206~24),당(唐)이 289년(618~907),명(明)과 청(淸)이 각각 294년(1368~1662)과 295년(1616~1911)을 지속했을 뿐이다. 발해는 결코 단명했다고 할 수 없다. 많은 역사와 문화를 남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이었다.

    영토에 있어서도 발해는 고구려에 비해 1.5배 그리고 (통일)신라에 비해서는 4배 정도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역을 갖고 있었다. 영역을 고구려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행정제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해사를 보는 시각은 남북한과 중국,러시아가 각각 상당한 차이를 갖고 있다. 쟁점은 발해가 과연 자주적인 왕조였는가 그렇지 않고 중국의 주장처럼 '당나라 지방정권'이었는가 하는 점이 첫째이고,다음으로는 발해의 역사적 계승관계와 종족의 뿌리에 관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모두 발해국의 자주성을 인정한다. '당나라 지방정권'설의 핵심은 '책봉'을 당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고구려와 발해를 비롯하여 신라와 백제,왜 등이 모두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책봉'이란 외교적 승인행위 이외의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당나라 지방정권'이라는 말은 '중국사'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땅에서 현대사가 이어오는 남북한과 왜의 일본까지도 중국사의 범주가 된다.

    '신당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발해는 '사사로이'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는가 하면,그들의 왕이 황제를 자칭했고 당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정도로 자주적이었다. 고구려도 천손의식을 갖고 있던 왕조였으며 수나라를 멸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도대체 705년 동안 '지방정권'이 변함이 없음에도 '중앙 왕조'가 35회나 바뀌었겠는가 하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발해국의 역사적 주민구성과 역사적 계승관계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남북한학자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로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시각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가 아닌 '말갈(靺鞨)'인들로 구성된 발해이자 말갈인들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 보고 있다. 대조영도 '신당서'에 의거해서 고구려 장수가 아닌 '속말말갈(粟末靺鞨)'장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중국학자들 일부는 발해 건국 직후의 국호를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거나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 불렀다'는 '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을 무시하고 발해는 처음부터 국호를 '말갈(靺鞨)'이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말갈이란 고구려 변두리 사람들을 깔보아 부르던 비칭(卑稱)이자 당나라 동북방 주민들을 통털어 부르던 종족명이었다.

    일본에서는 발해를 '말갈국'으로 보기도 하고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그들과 다른 말갈'이라는 두 견해가 있지만 후자가 우세하며,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교과서에까지 채용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조선사개설' 등에서 발해를 '통일신라와 발해' 편목에 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다르며 한국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도 발해국의 자주성은 인정한다. 다만 발해국이 말갈인들이 세운 중세국가였다는 점이 중국과 통한다. 발해는 중국사도 한국사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한·러 간에 공동으로 발해유적이 발굴되면서 고구려적 요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 어떻든 발해사의 진실파악이 학문외적 문제에 얽혀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을 실시한 것은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에 자극받아 급작스럽게 수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지역에 대한 '역사침탈' 작전은 이미 1980년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것이었다. 이보다 우선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과 신장지역에 대한 '서북공정' 등이 진행되었지만 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와 변강사지연구중심 등에서 소수민족 조선족의 고대사도 중국사화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첫 대상은 기록이 엉성한 발해였다.

    80년대부터 소수민족사의 중국사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발해사는 그들의 교과서에 이미 '당나라 지방정권' 즉 중국사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고구려본기를 갖고 있는 고구려사 만큼은 보류되어 오다가 '동북공정'에 이르러 이것이 공식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가 빠지게 되었고 중국 내 주요 고구려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 중국사의 일부로 선전하게 됐다.

    고구려나 발해사의 자주성을 근거로 생각할 때 중국의 터무니없는 '당나라 지방정권'설은 '역사왜곡'이 아닌 '역사침탈'로 규정할 수 있다. 동북공정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연구 주제들은 인접국과의 국경문제와 인접국의 정세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우려하는 것 중의 하나는 북한정권의 변화에 따라 북한점령의 역사적 명분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이다. 평양수도의 고구려사도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과 동아시아인들의 상식을 무너뜨리는 논리이다.

    2007년 1월을 기해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끝이 났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주장과 정책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더욱 자신감을 갖고 지린성과 헤이룽장성,랴오닝성 정부는 고구려와 발해사의 중국사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사가들은 학자가 아닌 역사전략가가 되어가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이 '국사' 책을 버리고 '동아시아사' 교과서에 고구려,백제,신라,발해 나아가 수·당과 요·금사를 비롯해서 왜와 일본사를 언급하는 것이 더 학문적이라는 국사해체론은 그런 의미에서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중국사나 일본사가 전보다 패권적이고 우경화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주장은 너무 낭만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평화나 미래학의 입장에 있는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에 바탕하고 있다기보다 정치적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비록 현대 국가사에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의 평화는 역사를 조작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면서 지혜와 화합을 모아갈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끝-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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