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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의 실체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정신이 국민들 의식 속에 살아있길…”

작성자태을천77|작성시간08.05.07|조회수75 목록 댓글 0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정신이 국민들 의식 속에 살아있길…”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이덕남 여사 인터뷰
 
 올해 2월 21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72주기를 맞는 날이다.
 천재적 사학자이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여순 감옥에 수감된 후, 1936년 57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진정으로 뜨겁게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우리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단재 선생. 하지만 그는 아직도 대한민국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 당시,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신고를 거부했던 단재선생은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0여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무국적 상태로 떠돌고 있다. 선생 뿐 아니라 당시 호적등록을 거부했던 이상룡, 홍범도, 김규식 등 300여 명이나 되는 독립 운동가
 들도 무국적 무호적 상태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로서 평생을 시아버지 국적회복과 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이덕남(65세) 여사는 환갑이 훌쩍 넘은 지금도 단재 선생에 관한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꾸준히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딸, 손자와 셋이서 살고 있는데, 작년 말 한국을 방문한 이 여사를 만나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녀의 삶과 단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재 선생님 국적회복 추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선생님의 국적회복을 부르짖고 다닌 지 15년이 지났어요. 우리 남편도 평생 부르짖고 다녔죠. 서명운동도 했고 의원입법을 요청한 지도 벌써 3~4년 되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에 있어요. ‘독립의 사표’라고 말로만 떠들지, 도장만 찍으면 될 것을 아직도 처리를 안 하고 있어요. 아마도 국회에 친일후손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도 보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은 국가에서 녹봉을 주면서 몇 대를 보호해주잖아요. 히딩크만 해도 월드컵 4강 진출 공로로 시민권을 주었잖아요. 하물며 자기 나라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에게 호적도 안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우리나라는 역사를 교단에서 밀어내버린 나라 아닙니까. 세계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어떤 때는 내가 왜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 단재 선생의 며느리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지금 어떻게 모셔지고 있나요?
 당시 우리나라 인구 2000만 명 중에 독립 운동가가 남북한 합쳐서 60만 명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죠. 그중 순국선열이 30만입니다. 매년 11월 17일‘무후선열의 날’에 현충원에서 그 분들의 공동제사를 모셔 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또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호적이 없어서 후손들이 못 찾는 경우도 있고 나라에서 박대하니까 등록하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찾을 필요도 없어요. 이미 고고선대가 되어서 정부로부터 거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김원웅 의원(독립운동가 김근수 선생과 전월선 여사의 장남)의 자료에 의하면 무국적인 분들 중에 공식적으로 드러난 사람이 300여 명이고, 누군지 몰라서 혹은 후손들이 관심이 없어서 등록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대략 15만~20만 정도가 호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어요.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자유당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이 단재 선생님을 무척 싫어했어요. 1919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신탁통치 청원서를 냈어요. 그러니까 단재 선생님이 당신이 창간한 <신대한신문>에서‘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비판하며 이승만 하야를 성토했어요. 그러니 이승만이 단재 선생님을 원수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제 남편(신수범, 단재 선생의 장남)은 한국정부에서는 취직도 못했어요. 빨갱이라고 직장만 안 준게 아니라, 암살까지 하려 했어요. 그래서 김구 선생님이 하도 안 되게 생겨서 80원을 주며 도망가게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혼자 벌어먹어야 했죠. 그래서 제 직업이 서른 가지가 넘어요. 그렇게 우리 남편과 아들, 저는 평생 설움만 받고 살았어요. 말년(1991년 5월 10일 작고)에 겨우 구명이 되긴 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고생만 했어요.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죠. 평생을 재판과 재판을 거듭하면서 법정에서 나의 정체를 확인받기 위해 살아왔어요.
 
 
 단재 선생님의 아들인 남편은 어떤 분이셨나요?
 
 제가 23살 때 결혼했는데, 그때 남편은 46살이었어요. 나이가 2배나 차이가 났어요. 친구 오빠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제가 결혼할 때는 시어머님(박자혜, 1943년 작고)도 안 계셨어요. 남편은 홀홀단신이라고 했어요. 단재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제 남편은 주변에 누가 손가락만 아파도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담석증이 있어 우석병원에서 수술하려고 제일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쓰러졌어요.
 
 그때 남편이 제일은행 신탁부에 근무했었는데 저를 삼각동 제창국 한의원에 데려다 주었어요. 그 뒤 퇴원하려고 보니 치료비가 다 지불되어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남편이 지불한 것이었죠.
 
 우리 남편 멋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없어요. 당신은 자신이 단재 신채호의 아들이라는 것에 큰자부심을 가졌어요. 동생도, 어머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늘 혼자였어요. 그래도 당신은 단재 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단재 선생의 아들로 살다가 죽었어요. 눈을 뜨나 감으나 언제나 아버지 생각만 하고 사신 분이었죠. 단재 선생님 조명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다 돌아가셨어요.
 
 
 시아버님에 대해서 특별히 기억되는 것이 있으신지요?
 저는 시아버님을 직접 뵌 적은 없어요. 제가 들은 얘기로는 시아버님은 돈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누가 돈을 주면 두루마기에 넣어 두고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셨다고 해요. 그러다가 누가 어렵다는 얘기를 하면 그때 돈 받은 것이 생각나서 꺼내주셨다고 합니다. 남 애처로운 것을 못 보셨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단돈 10원도 남겨준 것이 없어요. 아버님의 글에 대한 지적소유권도 우리에게 없어요. 아쉽기도 하죠. 어쨌든 글을 남겨서 선생님을 알게 하는 게 후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꿈에서라도 시아버님을 뵌 적이 있는지요?
 제가 결혼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애가 없었어요. 그러자 남편이 앞으로 1년 내에 애가 없으면 이혼이라고까지 말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낮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아버님께서 하얀 옷을 입고 오셔서는 쪽마루에 앉으시며‘배가 고프니 물 한 그릇 떠 오너라’하시는 것이었어요. 물을 드신 후 이제 갈증이 가신다 하며 가시려 하기에‘진지 잡수셔야지요’했는데 그냥 가셨어요. 그러다 잠이 깼어요.
 
 그날 저녁 때 남편이 <동아일보>에서 받았다며 아버님 영정을 가지고 오셨어요. 보니까 꿈에서 뵌 그 분이셨어요. 그래서 남편께 낮에 꿈에서 아버님께 물을 떠다 드렸다고 했더니‘잘 했다’며 오늘이 기일이라는 것이예요. 낮에 추모제를 지내고 영정을 가지고 온 것이었던 거죠. 그 이후로 저를 그 집안 며느리로 인정해 주었어요. 지금 쓰고 있는 영정사진이 바로 그때 사진이예요. 그리고 이듬해 애를 낳았어요. 그 후로는 한번도 뵌 적이 없어요.
 
 
 단재 선생의 묘소 이장문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단재 선생은 1936년 2월 21일 여순 감옥에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동지들에게 자신이 죽거든 일본놈 발길에 채이지 않게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하셨다고 해요. 그러나 동지들이 후손을 위해서 묘를 써야 한다고 했고 그때 신백우, 서세충, 신석구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1936년 2월 23일 청원군에 암장을 했어요. 그때 일제의 감시가 심해서 전날 땅을 파놓고 다음날 흙을 덮었다고 해요. 그리고 1960년대 들어와서 겨우 봉분을 해드렸어요.
 
 그런데 묘소가 98년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98년에 경내가 협소해서 변종석 청원군수가 묘소이전을 추진했는데, 그 후로 이상하게도 비가 오면 봉분의 떼가 무너지며 없어지는 사태가 이어졌어요. 2004년까지 묘소사태(沙汰)가 14번이나 발생했어요. 그래서 2001년 다시 오효진 청원군수의 협조를 받아 묘소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어요. 아직 묘소이전이 완료가 되지 못하고 지금도 가묘상태인데, 청원군에서 묘소 보수 문제로 애를 많이 써주고 있어요. 현재 가묘가 있는 곳은 단재 선생님이 7세 때 서울에 오시기 전까지 계셨던 집터예요. 조만간 이장문제는 잘 마무리 될 것같아요.
 
 
 역사문제에 대해 남다르신 시각이 있으실 텐데요?
 역사는 과거지만 동시에 오늘과 내일의 답입니다.
 옳은 역사건 그른 역사건 좌우간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역사교육이 안 되고 있어요.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가 이처럼 혼란스럽고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생활수단으로 북경에 유학 온 학생들을 홈스테이 한 적이 있어요. 그 애들이 단재 선생님 영정을 보고 누구예요 물어요. 그리고 책꽂이에 꽂힌 책을 보고 한자를 못 읽어 무슨 책이냐고 하길래‘신채호 선생 전집’이라고 얘기해 줬더니 뭐하는 사람이냐고 되묻는 거예요. 그렇게 몰라요. 그런데 더 기막힌 건 그부모들이‘역사는 역사일 뿐이지 우리와 무슨 관계냐’는 식이예요. 역사를 가르쳐야 해요. 역사는 희망이자 미래의 길을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저는 신채호 선생 며느리로 40년 넘게 살았어요. 단재 선생님의 역사와 민족에 대한 정신이 국민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가게 하는 것이 제 필생의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곧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하루빨리 특별법이 통과되어 국적없이 떠도는 조국 선열들이 이제라도 마음 편히 잠들 수 있게 되는 것, 그것밖에 없어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세간의 말이 있다. 진정 이 나라 이 땅을 지켜온 민족의 혼,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있는, 역사 정신이 성성히 살아있는 무자(戊子)년 대한민국을 기대해본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8.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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