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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도침탈ㆍ

Ⅲ. 존황사상에 불타는 李仁石 上等兵 (上兵)

작성자장선영|작성시간12.10.04|조회수19 목록 댓글 0

 

‘특별지원제도’를 발표하면서 허벌나게 생색내는

귀여운 일본 군국주의자들

                                 

                                                                    장 선 영 (전 외대 교수)

 

  지난 회에서 나는 어느 대만소년의 존황사상을 감동적인 필치(?)로 서술했다. 그런데 당시 같은 처지에 있던 우리 한반도에서 그 ‘가미가제’ 소년과 맞먹는 존황 중증환자가 또 있었다. 민족혼을 상실한 이 한심한 자가 도대체 누구냐! 당시 경성(京城 : 일본인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에 거주하고 있던 이인석(李仁石)이라고 하는 젊은이였다. 일본인들은를 자기들의 발음식대로 ‘이인세끼(발음이 어째 욕처럼 들리네.)’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존황사상이 투철했다. 장차 성인이 되면 황군(皇軍)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딱한 것은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에게는 병역의 혜택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무장한 조선사람들의 있을 수 있는 반란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 넓은 대륙을 침략하자니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할 수 없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사람들에게도 병역의 혜택을 부여한다는, 이른바 ‘육군특별지원제도’를 발표했다. 1938년이었다. 물론 녀석들은 이 제도를 발표하면서 ‘천황폐하’의 우악하신 성은이라고, 갖은 수식어를 죄다 동원했다.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1944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기 시작한 해였다.)

  그건 어쨌든 간에 우리의 주인공 이인석은 ‘육군특별지원제도’가 발표되자 이게 웬 떡이냐 싶게 그야말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원입대 했다. 그리고 곧바로 중국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전선에서 그는 용감무쌍한 황군(皇軍)의 용사였다. 중국병사들을 총검으로 수없이 살해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좀 살살 하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저의 소원은 ‘천황폐하’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는 것 뿐입니다.”

이게 그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하늘은 그의 그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었다. 어느 날 그는 전투 중 적병을 무찌르다가 아뿔싸, 가슴에 총탄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쓰러지지 않았다. 침착하게 눈앞에 있는 두서너 명의 적병들을 최다 총검으로 찔러죽이고는 총검을 높이 들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흡사 그 목소리는 삼국지의 장비가 장판교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향해 질렀던 그 쇠그릇 깨지는 듯한 고성과 흡사했다. 믿거나 말거나…….

  이 ‘장렬’한 전사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또 놓칠 리 만무했다. ‘기미가요’ 소년 때처럼 신문이니 라디오니 영화니 TV니, 모든 선전매체를 이용해서 왕짜증이 날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다. (아, 참, 그때는 조선이나 일본이나 TV는 없었다. 단지 그림책에서 미국사람들이 TV를 보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그때 나는 환한 불빛 아래서 어떻게 화면이 나타나는지 매우 신기해 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인석의  ‘영웅적’인 전사 후, 그의 집에 쏟아지는 세인의 관심이었다. 연일 그의 집 앞에는 문자 그대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조문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고급관리들도 조문했다. 물론 이 자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배가 불룩한 흰 봉투를 꼭 지참했다.(어차피 그 안에 든 지폐들은 공금인데 뭐.) 생필품들도 무지무지하게 들어왔다. 물품보관용 창고를 새로 크게 지어야 할 정도로…….

  당시 생필품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군들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우선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특히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먹지를 못해 누렇게 뜬 얼굴로 힘들게 힘들게 논에 모를 심었다. 그러면 무엇하나? 추수 때 주재소 순사(※순경의 옛 이름)들이 면서기(※면사무소 직원)들을 대동하고 와서는 죄다 공출(供出) 명목으로 빼앗아갈텐데……. 물론 의복과 신발도 부족했다. 특히 신발문제가 더 심각했다. 추운 겨울에도 맨발로 통학하는 농촌어린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집에 도둑이 들면 의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주로 신발만 훔쳐가는 사례가 많았다.

  일정시대 발표한 작품들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장면을 읽은 기억이 난다. 청춘남녀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영자씨, 이 신발을 어렵게 어렵게 구했으니 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영자씨의 예쁜 발에 예쁘게 신기세요.”

“그럼요, 순돌씨. 아끼고 아끼면서 신을 거예요. 그리고 거리에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면 신발을 벗어서 제 가슴에 꼬옥 품고 다닐 거예요.”

“아암, 그러셔야죠. 요새는 옷보다 신발이 더 귀한 세상이 아닙니까? 도둑님들도 주로 신발만 훔쳐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전쟁이 언제 끝이 날른지…….” 그런데 말이다. 해방이 되고 나니까 그 없다던 신발들이 시장에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것을 조선상인들에게 인계했던 것이다. 그냥? 아니 돈을 받고……. 군국주의자들도 나라가 망하니까 돈 앞에서는 별 수 없군 그래. 해방이 되고 나니까 여기에 크게 피해를 본 집이 있었다. 그건 이인석의 집이었다. 성난 시민들이 몰려가서 친일군인의 집이라고 때려부수고 어쩌고 해서 말 그대로 ‘깽판’을 쳤다. 그러면 이인석의 식구들은? 성난 군중이 몰려온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재빨리 몸을 피함은 물론 제일 좋은 신발들을 골라 신고서……. 또한 신발들이 잔뜩 들어있는 배낭도 하나씩 둘러메고서…….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노고는 애석하게도 말짱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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