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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연수원 강의 교재중) '나(我)'란 무엇인가?

작성자우리|작성시간12.02.10|조회수5 목록 댓글 0

 (공무원 연수원 강의 교재중) '나(我)'란 무엇인가?

 

 

 

 네팔, 인도에서는 부처님이 태어나시어 아시아 인류를 가르치셨고 이스라엘 에서는 예수님이 서양과 서양에 영향을 받는 나라들을 가르치셨으며 중동에서는 마호멧이 태어나 아랍권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5 천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우리 한민족은 누가 태어나 우리 민족을 가르치셨나?

우리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노래가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신 어떤 신인가? 우리 민족의 역사성 정체를 과학적으로 밝혀본 바로는 우리는 북방계 몽골리안 이었으며 그들은 환한 빛을 좋아하였고 그들의 지도자가 환한님 > 하나님 > 하느님 > 환님 이며 한자로는 桓因이었다는 것이고 이는  우리 어원에도  나타난다.

 

 이 무리들은 차츰 인구가 늘자 하느님의 무리아들 환숫(桓雄)이 새 나라를 세우려 하였고 하느님은 새 무리의 교훈과 그들이 써야할 말과 글자를 내려 주시는데 이것이 천부경과 천부인 이라는 말이 우리 역사서 여러 군데 나온다. 다음 글은 하나 둘 셋...열의 뜻을 밝히는 책 [진본 천부부경]에서 요점만 뽑아 쓴 것이다.

 

 요즘 TV 광고에서 '나만의 개성!, 나만의 공간!, 나만의 패션!'을 선전하고 있고, 또 연속극에서는 '나만의 사랑, 나만을 위하여!' 등의 주제로 철없는 극작가 들이 시청자를 이끌다 보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특히 청소년들이 저만을 알고 저만을 위해 주기를 바라게 되었으며 생명마저도 제 것 인줄 아니 제 맘대로 자살을 한다.

 

 그러나 생명이란 자연섭리인 신이 준 것이고 따라서 걷을 때도 신만이 걷어야 한다는 고차원적 말을 쓰지 않더라고 생명이 제 것 인줄알고 제 맘대로 끊으면 우선 저를 낳아 길러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이다.

 생명이란 제 것이 아니라 가족의 것이며 사회, 국가의 것인 우리의 것이니 제 맘대로 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 몸속의 세포 하나가 나는 나라고 마음대로 분열하는 암 세포와 같은 것으로 전체인 몸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나쁜’ 이라는 생각은 서양의 개인주의적, 개인 우월 주의적 사상의 독소로써, 그러다 보니 요즘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서로 자신은 상대를 필요에 의해 결혼한 채 상대가 저만을 사랑해주고 저만의 개성을 맞춰주기를 바라니, 그러고도 이혼이 안 되면 오히려 이상한 것!

현재 우리의 이혼율은 결혼 대비 48%로, OECD 국가중 최1위, 완전 선진국이 되었다.

 

2. 나, 나, 나 하는 '나의 정체'에 대하여 알아본다.

나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 이름이 나인가? 아니다. 내 이름을 홍길동에서 제임스본드로 바꾸었다 해도 나는 나이다.

그럼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나인가? 이도 물론 아니다. 옷을 날마다 갈아입어도 나는 나니까 ...

그럼 내 직위와 내 명예가 나인가? 이도 물론 아니다. 내 직위는 요즘 정치인들처럼 하늘의 나는 새까지도 떨어뜨리다가도 하루아침에 쇠고랑을 차고 따라서 하늘같던 명예도 개떡이 되니까....

그럼 내 몸뚱이가 나구나...

 그러나 내 몸뚱이의 세포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즉, 피부의 세포는 대략 3개월쯤밖에 못 가고, 가장 오래 간다는 뼈의 세포도 길어야 5 년...  그러니까 5 년 전의 나는 이미 죽고 다시 태어났단 말인가? 또 몸이 있다 해도 그 몸은 일단 물질인데, 이것을 분해하고 또 분해하면 결국 원자가 되고, 이것을 또 분해하면 쿼크가 되어 진공속의 에너지에 불과해지는데....

 그럼 나의 마음이구나... 그러나 살인강도 짓 하고 감옥살이 하던 놈이 어떤 종교에 귀의하여 아주 착한 사람으로 마음이 180도 바뀌었다. 그러니까 마음은 딴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나인가? 물론 아니다. 아닌 것은 수백만 개 합쳐봐야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3. 우주속의 생명체란?

생명의 탄생은, 원시 불덩이 같던 지구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식기 시작하자 하늘에 올라갔던 수증기가 식고 떨어져 원시 바다를 만들었고, 이 바닷물에 끝임 없는 원시 태양의 강렬한 빛과 천둥번개 또는 방사선에 의해 최초의 생명체가 태어나고 이 생명체가 진화하여 현재의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진화론이다. 그러나 현재 끓인 물을 시험관 속에 넣고 태양의 자외선 등 빛 은 물론 전기를 방전시키어 번갯불을 만들어 비추고 방사선까지 쪼이길 수십 년을 해봐야 원시 생명이 만들어질 흔적조차 보이질 않는다.

 또 애초 원시 세포가 무수한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고등동물로 진화했다고 하는데, 지금 트랜지스터 부속 등을 아무리 많이 혼합해놓고 흔들고 돌리길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자승, 수만 년을 해봐도 라디오가 조립될 확률은 완전 제로이다. 트랜지스터라디오는 그만두고 사발시계 하나가 우연히 조립될 확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복잡한 인간의 두뇌세포는 그만두고, 단세포 생물인 대장균 세포 하나가 필요한 영양소만을 흡수하여 자기 증식을 하는 신비한 작용은 현재 슈퍼컴퓨터를 남산만큼 크게 해 놔 봐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볼 때, 어쩌다가 우연으로 생명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즉, 요즘 컴퓨터는 그만두고 사발시계나 라디오 하나만 하더라도 이것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엄청난 지성들이 연구와 연구를 거듭한 결과라는 것으로 볼 때, 생명이라는 신비한 현상도 절대로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어떤 지성이 설계하고 그 설계대로 제작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4. 참 나란 개체인 내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하는 ‘우리’ 이다.

지금 생물학자들이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가 있다. 어느 해안가에 고래들이 떼로 몰려와 자살을 하는 거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루 끌어다가 바다에 넣어주어도 다시 나와 집단자살 한다. 왜일까? 바다는 넓은 것 같지만 물고기나 고래 등 동물은 자기네 길과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 과도한 증식이 되면 먹을거리가 고갈되고, 전 종족이 멸종되니 그 일부가 자살하는 것이다.

 어느 섬에 나그네쥐, 즉 레밍(lemming)이라는 쥐의 일종이 살고 있다.

이 쥐들은 너무 번식사여 먹이들이 고갈되면 그 쥐들의 반수 이상은 바다로 뛰어들어 집단자살을 한다. 이 역시 왜일까?

자기네 종족이 영위하던 범위 안에 먹거리가 떨어지면 결국 그 집단은 전멸하고 만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숫자가 없어지면 그들은 다시 살아간다.

또 몇 백만 마리인지, 몇 천만마리인지 저녁 하늘을 새까맣게 수를 놓는 까마귀떼나 철새 떼들, 또 바닷속 멸치, 꽁치, 고등어 떼 등이 떼를 지어 군무(群舞)를 하는데 그들은 누가 명령하는 것도,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서로 충돌 하는 일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춘다.

그 이유를 생물학자들은 외적에게 잡혀먹지 않으려고 단결을 한다는 것인데 새 떼들은 주로 적이 활동하지도 않는 저녁에 군무를 하며 또 군무를 한다고 외적이 잡아먹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물고기도 같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개체로는 수백만 마리 같지만 실은 우리 몸속의 세포와 같은 전체속의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의 생명체가 곧 전체의 생명체라 그들은 무전기가 없어도 일사불란 한 것이며 그렇데 군무를 하는 것은 자신들의 본성은 하나로 돌아가는 동시 그 생명체가 하루 종일 싸였던 스트레스를 풀려고 춤을 추는 것 이다.

 또 지금 이라크 등지에서는 자살특공대가 미군을 괴롭혔다. 참으로 천인 공로할 만행 같지만 우리의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도의 의거도 이와 같았다. 즉, 개인이 죽더라도 그 종족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義이고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자살은 개인이 개인을 위해 하면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죄가 되지만, 그 종족을 위한 것이라면 이는 義가 된다. 즉, 참나(眞我)란 내 개체가 아닌 ‘우리’ 속의 ‘나’ 란 말이다.

 

5.나와 우리에 대하여 우리와 서양의 차이

원시조상이나 선악과 따먹기 전 인간한테는 '나'가 없었다.

'나'가 생긴 것은 그놈의 창조적 지성을 착각한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인간은 창조 지성의 자기 표현체’ 이기 때문이다. 이 '창조지성의 자기 표현체'란 절대로 피조물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만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창조적 인간한테만 창조적 지성이 있다 했다. 그런데 이 창조적 지성을 가지고 인간이 제일 먼저 착각한 것이 부처나 예수가 그렇게 경게한 무엇을 먹으면 더 오래살고 무엇을 입으면 더 아름다워 질까 하는 '나(我)라는 개체였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한테만 생로병사(生老病死), 즉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원시 조상은 물론 지금도 문명이 전연 들어가지 않은 오지의 원시족이나 동물한테는 '나'라는 개체가 없고 '우리'뿐이니 따라서 고민도 죽음도 없다고 했다.

 이 우리의 본체는 불가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하고는 다르다. 무아는 전연 허깨비이지만 '참나'는 '나'만이 내가 아니라 '저 사람도 나'인 것이다. 즉, 더불어 사는 '우리'인 것이다. 이 우리 사상은 지금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먼저도 한 말이지만 지금 어떤 지게꾼이 하나 있다 하자. 그는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판잣집에 들어갈 때는 그래도 꽁치라도 한두 마리 사서 지개에 매달고 들어간다. 이것은 자기만이 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못 생기고 미련하지만 그래도 마누라와, 비록 말썽꾸러기 코흘리개이지만 그래도 자식들이 맛있게 먹을 것을 상상하며 자신이 힘들었던 일을 잊고 싱긋이 웃는다.

즉, 나 자신과 가족은 엄연히 다른데 개인적 나에서 우리로 승화시키니 그 힘들었던 고역이 환희로 전환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말하는 인간에게는 고뇌만 윤회하니 태어나는 원인인 무명(無明)을 제거하여 아예 태어나지도 말자던 그 고통을 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하나 둘 셋 ...열의 뜻을 밝히는 책 [진본 천부경]의 이론으로는 오히려 환희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참된 이론인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이론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 나이깨나 드신 분들의 생각은 다 그렇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은 거의 이것을 모른다. 오직 '나'만 알다보니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짝사랑 할 수 밖에 없다.

 

6. 서양인들은 대부분 내가 주체이다.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살고 나한테 이롭지 않으면 애들이 울건 말건 이혼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말이 당연하니 즐겨 쓴다.

That's your business. (그것은 너의 일이다.)

 That's your problem. (그것은 너의 문제다)

 I don't care.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우리도 돈이 많고 오직 서양만 종주국으로 아는 소위 문화인들은 이 풍속을 닮아간다. 그러니까 6.25때까지만 해도 우리한테는 내 가족이 '나'라는 생각이 있었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씨조선 때, 그리고 고려 '무신 정권'에서 해주 가문, 청주 가문 따지듯 씨족이 곧 바로 '나'였으며, 더 올라가면 밝달임금(檀君), 환숫(桓雄) 때는 그 씨족의 울타리(국가)가 모두 '나'였다는 것은 우리 뿌리 말을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이 '나'와 '우리'라는 말은 우리말과 서양말을 비교해보면 안다.

 서양인들은 나의 선생님(my teacher), 나의 학교(my school), 나의 나라(my country), 그리고 형제들이 있어도 나의 부모(my parents)이고, 식구들이 같이 살아도 나의 집(my home) 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서생님, 우리학교, 우리나라, 우리 부모님. 우리 집'이며 심지어 마누라까지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이다.ㅎㅎ.

 이것은 비단 말 뿐만이 아니다. 먼저 말이 시작될 때 그 사상적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말까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맥도 모르고 서양 문물에 미쳐서 우리 말 속에 들어있는 그 뜻을 모르며 말을 한다. 이것도 하나 둘 셋...열의 뜻을 밝히는 [진본 천부경]과 ㄱ ㄴ ㄷ ...ㅎ의 뜻을 밝히는 [천부인 ㅇ ㅁ ㅿ]을 알아야 할 이유이다. 즉, 쥐뿔(제뿌리)부터 알아야 한다.

 이 하느님 교훈 [진본 천부경]에서는 '나'가 우리로 승화된다. 불경에서는 '나'가 무아로 대치되어 허깨비가 되지만 진본 천부경에서는 '나'가 '우리'로 승화되어 결국은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일곱'으로 돈을 벌다 보면 절대 은팔지 신세를 질 일도 없고 그 돈은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간단한 천부경 말 속에 그런 엄청난 진리의 말씀이 있는가? 말이라곤 불과 20 여 단어 밖에 없던 말이 시작될 때에 지금과 같이 20 만 어휘를 쓰는 인간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결론은 이 [진본 천부경] 이론은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이론'이고 그 수행방법도 부자가 되는 길인데, 이 돈 버는 방법도 [진본 천부경] 이론으로 하면 더 쉽게, 더 많이, 더 안전하고 아름답게 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본 천부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와 한 쌍이 되는 먼저 반듯이 ㄱ ㄴ ㄷ...ㅎ의 뜻을 알 수 있는 책[천부인 ㅇ ㅁ ㅿ]을 읽어 우리 뿌리 말을 알아야 한다.

 

 이 참 나(我)란 '나'를 두르고 있는 ‘우리’ 라는 실증이 5 천년전 우리 조상들이 쓰던 그림글자 금문에도 나타난다.

 

먼저 제시했던 我의 금문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인용, 이하 같음

 

 

위 그림 글자에서 좌로부터 3개는 우리 그림글자 금문을 중국인들이 한자를 만드느라고 때를 묻힌 갑골문1.2.3이고 4번째로부터 6 번째 까지가 바로 우리 조상이 쓰던 그림글씨 금문 그대로이다.

우선 我의 좌측 변  人의 금문이다.

 

 

 

여기서는 좌측으로부터 4 번째 까지가 갑골문이고 5 번째부터 9 번째 까지가 금문.

따라서 위 我자의 좌측 변은 모두 人자 금문 .

 

그렇다면 我자의 금문은 결국 人(사내)의 창은 전쟁 무기가 아니라 여음을 찌르는 창이고 여음은 사내 창을 둘렀다는 말이다.

 

이 말의 확증은 다음 二, 貳 금문에 나타난다.

 

二, 貳 자의 금문

 

여기서 1, 2, 3, 4 를 보시라. 여기에는 노골적으로  여음인 조개 아래 다리 두 개(貝)'까지 달려있고, 그 위에 '창(戈)'이 있다.

이상 그림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내의 창은 조개인 여음을 찌르고, 그 조개는 창을 두른다'는 위 말과 같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숫자로 쓰는 二, 貳자는 5 천년 당시는 어떻게 썼을까?

二 자와 같은 上 자.  

 


 
여기서 金文 1을 보시라. 이는 막대 두 개로 지금의 二 자와 같다. 즉, ㅡ 위에 좀 짧은 막대가 있으면 그것이 '위'라는 표시였고, 이것이 나중 지나인들에 의해 위上 자가 되었으며 아래 下 자도 마찬가지로 아래에 좀 짧은 막대가 있으면 이것이 '아래'라는 표시이고, 나중에 지나인들은 이것으로 下 자를 만들었다.

 

 
  
                                                                                                    

이들 二 글자가 숫자가 된것은 위에서 보듯 갑골문 이후 진시황때 소전, 대전 때부터이니 환숫, 밝달임금 이후로 거의 천년이 지나서야 숫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一 二 三...十의 글자가 다 그렇다. 즉 하나, 둘, 셋...열의 모든 숫자는 당시는 숫자가 아니었고 하느님 교훈 천부경 이라는 금문상 근거가 있지만 설명은 하나 둘 셋...열의 뜻을 밝히는 책 [진본 천부경] 해독에 있으므로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하고 당시는 숫자가 없었다'는 말을 증명한다,    

 

따라서 원시 조상이 쓰시던 그림글자 금문만 보더라도 나(我)란 지금처럼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짝인 너와 내가 함께 하는 ‘우리’를 말 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 우주와 함께하는 우리이므로 먼저말한 부처나 예수의 말 과 같이 우주의 의식인 神 까지 우리에 포함 하는 것이다.

 

7. 자아를 열고 ‘우리’가 되어 무아(無我)가 됐을 때의 공덕.

 

1) 엄마가 귀여운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아기는 엄마 품에서 안기어 젖을 먹으며 무한히 행복해 한다.

이때 엄마는 자기가 엄마인지 아기인지를 잊는다. 즉, 아기와 엄마가 자타일체가 되어 엄마 자신은 사라지고 동시 엄청난 희열과 행복의 파도가 밀려든다.

 

2) 남녀가 진정한 사랑을 나눌 때.

이때 두 남녀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면 이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자타일체가 되어 자신은 사라지고 엄청난 행복과 희열이 몰려온다.

 

3) 일을 할 때.

열심히 일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그 일과 책에 몰두하여 책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 엄청난 희열이 몰려온다.

 

4) 산에 오를 때.

정상에 올랐다. 구슬땀을 흘리며 고생스럽게 올랐다. 그러나 일단 정상에 올라 발아래 구름에 휩싸인 산봉우리들을 보는 순간 자신과 자연이 일체가 되어 자신을 잊고 엄청난 희열에 빠진다.

 

5) 신아일체(神我一切)가 될 때.

물론 자신은 없다. 신은 물론 대 생명(大生命)이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아니 모든 개체 생명들은 그 대 생명의 바다에 거품처럼 떠다니고 있지 않는가? 마치 태평양에 떠있던 거품처럼...

그러나 그 거품이 자신이 아니고 태평양의 바닷물이 자신인 것을 알게 되어 바닷물과 일체가 된다면 위와 같이 엄청난 희열, 즉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을 하면 영원한 희열과 생명이 신과 같이 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8. 참 나는 바로 하느님이다!!!

부처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으니 이 우주에는 나 홀로 존재 한다는 말이고 모든 존재는 마음으로 만든다는 말이며 예수는 바로 자신이 진리이며 빛인 성부(聖父)이고 성자(聖子)이며 성령(聖靈)이라는 삼위일체를 말 했지만 막상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오니 “그들만 내 형제가 아니라 너희들도 다 내 형제” 라 말 했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성부고 성자고 성령이란 말이니 인간은 바로 대 생명이고 神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먼저 질문한 나(我)의 진정한 실체이고, 성자들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현재 혹자는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런 말을 한 성자가 미친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유하건대, 태평양 바닷물을 대 생명 神으로 본다면, 그 바닷물 위에 만들어지는 거품 자신이 '나는 바닷물과는 상관이 없는 “내 거품 형태만이 나이고 내 거품이 꺼지는 날 나는 죽는다” 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람은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내 몸이 내가 아니고, 특정한 모양을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이 내가 아니다. 이 특정한 몸과 마음을 벗어버리고 '나의 본질이 바닷물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이것이 바로 '해탈'이고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지 않는 한 나도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여러 독자님들도 실은 모두 하느님이다.

우리 하느님들 만세!

 

천부경.net

 

 

또는 http://cafe.daum.net/chunbuinnet  -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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