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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래한류 작성시간23.06.13 2) 반란을 일으킨 내신좌평 우복(優福)은 비류백제 의라왕
삼국사기에 백제 11대 왕 비류왕 24년(327)에 내신좌평 우복(優福)이 북한성에서 반란했지만 비류왕이 토벌했다고 했는데 한산 북쪽이 백제북쪽이고 우복(優福)이 우씨이니 비류백제 왕인 의라왕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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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그 앞에 나옵니다. 비류왕이 사냥을 갔다 왔기 때문입니다. 역사학도라면 327년에 우복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맞는지부터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증명은 문헌 사료와 고고학 사료의 양쪽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못하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우면 됩니다.
나머지도 다 비슷한데 중국사료에 어떤 기록이 나오면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맞으면 왜 맞고, 틀리면 왜 틀리는지부터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역사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증명을 못하면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비류왕이 325년에 사냥을 갔다 왔는 내용이, 2년 후인 327년에 우복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였다고요
주장하시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이고요
비유왕이 사냥을 했는데 2년후에 우복이 사냥을 이유로 반란 했다는 내용은 문헌에 근거하지 않은 그냥 주장(망상)일 뿐입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내용과 주장으로 대학 역사 교수가 논문을 써서 통과되었다면 대학 역사 교수가 아니라 역사소설가로 봐야할 것 같은데요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논문을 통과 시켜준 지도교수가 있다면 해당 지도교수도 참 한심한 사람이 될 것 같고요-
만약에 혹시라도 저런 논문이 학술지에 실렸다면, 학술지가 아니라 네이버 소설 잡지가 될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그리고 기존역사 학자들 대학역사 교수들의 논문은 참조해서는 않되고요 배울 것도 없다고 봅니다
1) 전라도 천년사 내용을 보면 대학역사 교수들 논문(내용)은 거의 소설에 가깝고요
국민들 속이고 기망하고 거의 막장입니다
2) 전라도 천년사에서 고고학박사들의 논문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연구성과는 존중하지만
문헌학자들의 내용이 고고학 자료에 포함되면서 아쉽게도 같이 막장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문헌학자들의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고고학적인 내용 만을 기술했다면 좋은 출판물이 되었을 것인데
문헌학자들 내용이 고고학 내용에 포함되면서 도매급으로 같이 폐기되어야 마땅한 자료가 되어서 안탑깝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
■ 진서 동이열전 기록을 마지막으로 비류백제인 부여의 내용이 중국 정사에서 사라집니다
1) 비류백제인 부여가 멸망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나 중국 정사에 나오지 않고요
2) 의라왕이 죽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의라왕을 기리는 의라신사가 있습니다
■ 4세기 중반부터 영산강 유역에 분구묘의 대형화, 대형 옹관 등장, 백제와 다른 금동관과 금동신발 출토등
비류백제 이동과 정착을 추론할 수 있는 고고학적 물질문화 변화가 영산강 지역에 나타납니다
■ 무령왕 시대인 AD 501년에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인 달솔 우영(優永)이 뜬금없이 삼국사기에 등장합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고 삼국사기와 중국 정사 내용을 연결해서 정리하면
1) 개로왕은 부여의 여씨
2) 문주왕과 동성왕은 모용의 모씨(삼근왕도 모씨로 추정)
3) 무령왕 이후부터는 부여인 비류백제 우태의 우씨로 추정
그래서 부여인 비류백제의 후손인 성왕이 백제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주서부터는 백제 시조가 우태로 등장합니다:무령왕 부터 북주시대에도 비류백제의 우씨가 백제왕이 된 것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3 최종 정리해 보겠습니다
비류왕의 공격으로 하북성 창주시에 있던 의라왕(우복)이
신천지인 영산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하고 일본열도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부여씨인 개로왕이 사망하자
2) 개로왕을 보좌하던 모용씨의 문주가 백제왕이 되었는데..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씨의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비류백제의 후손인 우태씨의 우씨가 백제를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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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미래한류 작성시간23.06.16 수구리 3) 모용씨의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본열도를 다스리던 우태씨의 무령왕이 백제왕으로 등극하여 ...
->일본서기 웅략 5년조를 보면 곤지가 개로왕의 임신한 왕비를 데리고 왜국으로 가던 중 왕비가 각라도에서 아들(무령왕)을 낳자 아들은 백제로 돌려보내고 왕비만 왜국으로 데려갑니다.(전용신 포함 일부 일본서기 번역본이 오역을 하였음. 원문을 확인할 것) 그런데 이후 아들(무령왕)이 언제 왜국으로 갔습니까? 이후 무령왕이 왜국으로 갔다는 단 하나의 증거라도 있습니까? 만일 무령왕이 왜국으로 깄다면 그의 무덤은 전축분이 아닐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미래한류 작성시간23.06.16 수구리 비유왕이 사냥을 했는데 2년후에 우복이 사냥을 이유로 반란 했다는 내용은 문헌에 근거하지 않은 그냥 주장(망상)일 ...
-> 정성스럽게 적어주신 답글에 감사드립니다. 비류왕의 사냥이 내신좌평 우복의 반란 원인이 아니면 우복의 반란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백제본기의 최초 반란이 내신좌평 우복의 반란이라면 신라본기의 최초 반란은 아달라이사금 때 있었던 아찬 길선의 반란입니다. 길선의 반란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보는 길선의 반란 원인은 우복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같은 원인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한서와 동이전 한조에도 두 각료의 반란 원인이 나옵니다.
백제본기는 사냥기록이 삼국 중 가장 많은데 백제본기 사냥기록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우복의 반란 원인은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백제본기 초고-구수왕조는는 70년 동안 사냥이 없는 매우 특이한 시대인데 이때는 반란도 당연히 없습니다. 누가 만일 초고-구수왕조에 왕이 사냥 갔다고 슬쩍 적어 넣으면 이것이 거짓말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7 미래한류 .
질문 1의 답변) 일본서기 내용은 글자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개념. 즉 흐름만 믿습니다
무령왕이 일본열도에서 일본을 다스리던 왕인 곤지왕 세력의 지원을 받던 비류백제의 후손으로 백제왕이 되었다 정도
질문 2의 답변) 목지국.정확히 말하면 정사 삼국지에 월지국이니 후한서의 목지국은 월지국의 오기
정사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마한이라는 나라는 BC 1~2세기 내용이니 후한서와 정사삼국지 마한 기사는 마한이 아니라 백제 기사입니다
(정사 삼국지의 금조선今朝鮮에서 금今은 BC 1~2세기, 조선朝鮮은 위만조선이니 마한은 위만조선 시대에 있었던 마한이니 후한이나 삼국시대의 백제입니다)
월지국이 BC 1~2세기 나라이고, 서기 9년에 온조왕에게 멸망했는데 비류백제가 목지국 진왕이리는 믿음 재고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고요
백제 辰朝人에서 辰은 천자 진자로 봐야 하고요 그래서 백제는 천자국이니 백제 辰朝人(천자 고조선 사람)은 백제왕의 후손이라는 의미.
질문 3) 반란의 원인이 삼국사기에 없으니. 추론하고 주장하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추론이고 주장일뿐
반란의 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소설 쓸 생각 없음) -
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7 미래한류 마지막으로
후한서와 동이전 한조에 두 각료(우복과 길선)의 반란 원인이 나옵니다.고 했는데 확인할 수 없습니다
후한서에 나오는 반란원인은 어디에 어떤 내용인가요?(정확한 출처와 내용 제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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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역사 교수들이
잘모르는 국민들을 속이고 기망하는 수법이 사료 내용제시 없이 말로 하는 것입니다
(문헌 왜곡과 변조는기본이고요.
설을 풀면서, 그럴듯하게 꾸미는 수법을 자랑으로 생각하지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맞는 것으로 보이게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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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길선이 AD 165년 반란을 일으키고 백제로 도망갔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후한서를 포함한 중국 사서에는 길선이나 우복은 나오지 않습니다
1) 후한서 한조에는 AD 44년 염사치 기사기 전부이고요(AD 165년 기사는 없습니다)
2) 우복의 반란은 AD 327년이니 서진시대(265∼316)도 아니고 동진시대 기사이니 후한서에 기록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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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만약 문헌 근거없는 주장을 하셨으면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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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수구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6.17 미래한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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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역사교수들의 문헌왜곡/ 변조의 대표적인 사례(전라도천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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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직공도에 기문이 나오지 않는데 『남원지역은 양직공도에서 백제 주변의 소국인 기문국으로 알려져 있다』(전라도 천년사 총설 77페이지) 고
♥ 양직공도를 국민들이 잘 모른다고 거짓말 하는 대학역사 교수들이 사이비 역사학자들 입니다♥
2) 약직공도 그림에 ■상사문(上巳文)을 상기문(上己文)으로 주장하고 상(上)자를 없애고(지웠고)
상기문(上己文)이 문文의 한자를 문汶으로 치환하여 상기문(上己文)이 기문(己汶)으로 둔갑술을 발휘 할 수 있으니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서 대학역사교수들이 사巳자를 무조건 기己로 우길수 밖에 없었겠지요
이렇게 문헌을 왜곡하고 설을 풀어서 약직공도 상사문(上巳文)을 일본서기 기문(己汶)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대학역사 교수들이니
대학 역사 교수들을 사이비 역사학자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미래한류 작성시간23.06.26 수구리 1) 월지국은 목지국(삼국지 빼고 모든 한중 사서가 목지국임)의 오기인데 그 이유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목지국의 건국과정이 상세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삼국지 동이전에 관해서 뭐라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록 한 줄 한 줄에 대하여 맞으면 왜 맞고, 틀리면 왜 틀리고, 그러면 맞는 것은 무엇인 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후한서와 삼국지 한조에는 길선과 우복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이 나옵니다. 님이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이들의 반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삼국사기에서 비류백제가 보이게 됩니다. 우리 고대사에 관해서 무슨 이야기라도 할 정도가 되리면 우리 기본 사서인 심국사기 초기기록을 놓고 기록 하나하나에 대해서 사건 연도가 맞으면 왜 맞는지, 틀리면 왜 틀리지를 설명하여 구분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