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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규식 파리로 보낸 신한청년당, 3·1운동 불 지른 기폭제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2.31|조회수82 목록 댓글 0

 

    

김규식 파리로 보낸 신한청년당,

 3·1운동 불 지른 기폭제

  •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 입력 : 2019.02.15 03:37 | 수정 2019.02.15 05:07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막전막후]
    선우혁을 국내로, 장덕수를 日로, 여운형을 만주·연해주로 파견해 김규식 지원해줄 독립운동 독려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박종연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총무이사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처럼 대량 살상과 파괴를 일삼는 현대 문명을 대신해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려는 개조사상의 유행과 영국·프랑스·미국 같은 승전국에 의해 패전국들의 식민지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배경이 되어 발생했다.

    1919년 1월 개막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은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다. 승전국은 패전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빼앗은 주권과 영토를 되돌릴 것을 결정했으며 전쟁을 일으킨 국가는 식민지를 포기하게 됐다. '각 민족의 운명은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 영향이었다.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접한 여운형을 중심으로 장덕수, 김철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당시 톈진에 머무르고 있던 김규식을 특사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조선 독립 문제를 세계 각국에 정식으로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김규식은 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독립 외교 활동에 나섰다. 회의는 주요 결정이 조약으로 이뤄진 1920년까지 이어졌지만 당시 전승국 일원이었던 일제의 방해로 뜻을 펼치기 어려웠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 독립 문제를 제기하려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반대한다는 인상적인 사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신한청년당은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한인들의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제대로 전달해야만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 등을 국내로, 장덕수·조용원 등을 일본으로, 여운형을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각각 파견했다.

    1919년 2월 국내로 파견된 선우혁 등은 3·1독립선언의 기독교 측 민족대표였던 이승훈·양전백 등과 만나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민족자결주의가 확산되는 이 시기에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도모하면 반드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며 지원을 호소했다. 일본에 파견된 장덕수 등은 재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독려, 2·8독립선언 추진에 영향을 줬다.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여준·김약연·정재면 등을 만나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고 조선 독립을 주창하는 영문(英文) 선전문을 만들어 국외 인사들에게 널리 알렸다.

    하지만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같은 지역(상하이)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2개의 기관(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이 활동함으로써 줄 수 있는 혼선을 방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1922년 자진 해산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임정과 함께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시대적 흐름이었던 민족자결주의를 적극 받아들여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국내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밑거름이 된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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