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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식민지 청년들, 침략국 수도에서 독립선언… 세계사에 전무후무"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0.12.31|조회수241 목록 댓글 1

 

 

"식민지 청년들, 침략국 수도에서 독립선언…

세계사에 전무후무"

  • 윤소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
  • 입력 : 2019.02.07 03:08 | 수정 2019.02.07 03:09


    [3·1운동 100년, 임시정부 100년]3·1운동 막전막후
    도화선 된 2·8 독립선언

    윤소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
    윤소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

    1919년 초 도쿄 유학생들은 간다(神田)구 니시오가와초(西小川町)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자주 모였다. 목조 2층 건물이었다. 재(在)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와 조선학회·학우회 등 유학생 단체들은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치제도에 대해 토론했으며, 도쿄제국대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민주주의 강의에 열광했다. 1918년 1월부터 보도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유학생들의 눈과 귀를 붙잡았다. 그해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윌슨을 의장 삼아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기대감을 안겨줬다.

    유학생들은 와세다대학 선배인 조소앙·장덕수 등이 상하이에서 김규식·여운형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미국에서도 이승만·민찬호·정한경 등이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이 파리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벌일 때 뒷받침해 줄 전(全) 조선인의 거족적인 독립의 함성이 절실했다.

    도쿄 유학생들이 앞장서기로 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을 발기하고 그 명의로 조선민족대회 소집 청원서, 선언서, 결의문을 작성해 일본 중의원·귀족원 의원, 일본 주재 외교관, 신문사와 지식인들에게 발송하고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왜 이런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근대 일본에서 처음 출현한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原敬) 정부를 상대로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질식돼 데모크라시를 '민본주의'로밖에 번역할 수 없었던 당시 일본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쟁취하고자 한 조선 청년들의 외침은 충격을 던졌다.

    2·8 독립선언 주역들이 1920년 3월 26일 도쿄형무소에서 출감한 뒤의 기념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 장영규(앞줄 맨 오른쪽), 최승만(그 왼쪽), 강종섭(뒷줄 가운데) 등 2·8 독립선언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2·8 독립선언 주역들이 1920년 3월 26일 도쿄형무소에서 출감한 뒤의 기념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선청년독립단 대표들인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 장영규(앞줄 맨 오른쪽), 최승만(그 왼쪽), 강종섭(뒷줄 가운데) 등 2·8 독립선언 참가자들이 함께했다. /독립기념관


    준비 과정엔 곡절이 많았다. 일제 감시망을 따돌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광수는 1919년 1월 중순에 요쓰야(四谷)구 가타마치(片町)에 있는 하숙집에 사흘 밤낮 틀어박혀 선언서를 작성했다. 송계백은 모자 안감에 이광수가 기초한 선언서를 숨기고 조선에 들어와 최린 등을 만나 운동 계획을 알리고 정노식으로부터 운동자금 3000원을 받아 일본으로 돌아온 뒤 운동이 본격 추진될 수 있도록 했다. 주동자 윤창석이 경찰서에 연행되는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도쿄 유학생의 거사 계획을 접한 최린과 상하이에서 도쿄로 잠입한 장덕수는 2월 8일 결행이 성급하다고 생각해 연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일본 국회가 개설되는 기간에 거사를 단행해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2·8 독립선언이 거행됐던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在)일본 조선YM CA회관의 모습.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라지기 전의 사진이다.
    2·8 독립선언이 거행됐던 일본 도쿄 지요다구 재(在)일본 조선YM CA회관의 모습.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사라지기 전의 사진이다. /재일본한국YMCA

    1919년 2월 8일 아침부터 눈발이 날렸다. 오후 들어 폭설로 바뀌었다. 36년 만의 대설(大雪)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오전에 독립선언서를 신문사와 주요 인사들에게 발송했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는 강제됐고, 그 증거로 일제 지배 10년 동안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벌여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선언서였다. 조선인은 독립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민족대회를 소집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을 향해 영원한 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오후 2시부터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200여명의 유학생이 모였다. 도쿄 경시청과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에서 정·사복 경찰이 출동했다. 학생들이 경찰과 난투극을 벌여 회관 유리문이 부서지고 주동 학생들은 부상을 입은 채 연행됐다.

    도쿄 유학생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정의를 추구하는 인류의 보편적 양심을 믿었다. 그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독립 조국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2·8 독립선언서에 참여한 많은 학생은 귀국해 3·1운동에 뛰어들었다. 일부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공동기획: 한국민족운동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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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지오름 | 작성시간 20.12.31 고맙습니다
      조상님들 기개에 제가 편하게 숨쉬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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