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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봉이씨(牛峯李氏)이완용(YeWanyong,李完用)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1.04|조회수219 목록 댓글 0


우봉이씨(牛峯李氏)이완용(YeWanyong,李完用)

부사공파 참판공파 원외랑공파 감찰공파 대사간공파 사직공파 지평공파 종성공파 의렬공파

청백리공종중(부사공파)

<묘위치 : 이완용 묘터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내산동 일대(일명내장부락)-

선인봉중턱, 지금은 가묘도 사라지고 석재 채취 현장으로 변해있다.>

⇒이완용 익산에 묻힌 사연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858년에 태어나 68세까지 살았으니 천수를 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질긴 목숨 모질도록 이어나갔다 해야 할까? 그때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시점이었으니 그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 출생인데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었습니다. 선산이 익산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용하다는 지관이 '전국 최고의 명당'이라고 지목한 곳을 자기 묘자리로 미리 잡아둔 곳이었죠.


이완용의 묘는 주산인 선인봉 중턱에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인 좌우산맥이 계곡을 이루는 중간에 자리한 이묘에서 머리를 들어 앞을 보면 靈氣(령기)어린 이 지역 최고봉인 미륵산이 朝山이 되어 이묘와 맞절을 하고 있다.


이완용의 묘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내산동에 있었다. 묘는 仙人舞手形(선인무수형)으로 시신이 평안히 잠들게 할 것 같은 명당중의 명당 이였다. 묘는 부부 합장으로 묻혀 있었다. 관은 가죽나무에 옻을 입혔고 강회(剛灰-生石灰)로 둘러쌓여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관(棺)은 가로 1.5尺 세로 6尺 뚜께 6cm 棺 뚜껑에는 빨간 글씨 朱色字(주색자)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中樞院副議長(중추원부의장) (正二位 大勳位 侯爵 牛峯 李公之柩 정이위 대훈위 후작 우봉 이공지구)란 글씨가 선명히 씌어져 있었다. 牛峯은 이완용의 본관, 棺속에는 생전에 입던 관복과 평상복 3~4벌 그의 일생동안의 행적이 기록된 誌石(지석)이 있었다.


이 무덤은 1979년 破墓될 때까지 50년 동안 철저히 보존되어 왔다. 이완용의 무덤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태조 산이 무덤 뒤에 있는 대부분의 산소와는 달리 태조 산이 동시에 조산노릇을 하면서 무덤 앞쪽에 위치하는 回龍顧祖穴이라는 文武雙全의 부귀영화를 가진 후손들이 즐비하게 나온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하지만 1979년 4월 증손자형제와 손자며느리가 참석하여 파묘를 하고, 유골은 화장하여 인근 장암천에 뿌려졌다. 파묘 이후 후손들은 모두 이민을 갔다.


이완용 묘터로 추정되는 익산 낭산면 내산동 일대, 지금은 가묘도 사라지고 석재 채취 현장으로 변해있다.


당시 '경성일보'에 의하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완용장례당시 강경에서 낭산까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장례행렬이 지나갈수 없어 일제는 강경에서 낭산까지 도로를 개설하였으며, 장례행렬이 강경에서 낭산까지 길게 늘어섰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일제치하 이완용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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