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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1.12|조회수70 목록 댓글 0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을 아시나요

  • 이선민 선임기자
  • 입력 : 2018.11.28 03:01


    1918년 11월 중국 상해서 여운형·장덕수 등이 결성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 파견하고 臨政 출범 주도… 오늘 100주년

    '우리 사업의 시초는 독립을 완성함에 있도다. 우리의 국토와 자유가 회복되는 날까지 싸우고 싸우리라. 그러나 대한의 청년아, 우리에게는 독립 이상으로 더 중요한 사업이 있도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민족을 개조하는 동시에 학술과 산업으로 우리 민족의 실력을 충실케 해야 하나니라.' ('신한청년당 취지서')

    28일은 '3·1운동의 진원(震源)'으로 꼽히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8년 11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신한청년당은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에 밀사를 보내 독립 만세 시위를 유도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신한청년당은 소수 정예주의를 채택해 '20~40세, 기성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으로 자격을 제한했다. 김규식·조소앙·이광수·김구·신석우·서병호·송병조·이유필 등 50명가량이 당원이었고, 외교·교육 활동과 기관지 '신한청년' 발간 등 활발히 움직이다 1922년 말 해산됐다.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된 신한청년당 대표단이 현지인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 왼쪽 끝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이관용, 셋째가 조소앙이다. 작은 사진은 1919년 12월 상해에서 간행된‘신한청년’창간호. 이광수가 주필을 맡았다.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28일 오후 1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컨벤션홀에서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리는 '3·1운동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 학술회의는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신한청년당의 역사적 의의와 주요 인물들의 활동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이준식 독립기념관장은 "몽골을 거쳐 1918년 무렵 천진에 있던 김규식은 신한청년당에 의해 파리 평화회의 대표로 지명되자 1919년 1월 상해로 와서 당원으로 가입하고 선편(船便)으로 파리로 향했다"며 "1919년 3월 16일 파리에 도착한 뒤 스위스 유학생 이관용과 임정이 파견한 조소앙·여운홍의 도움을 받아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광범위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고 말한다.

    변은진 고려대 연구교수는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중순부터 당원을 각지로 보내 파리 평화회의 대표 파견을 알리고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민족적 궐기를 촉구했다"며 "김철·서병호·선우혁·김순애는 국내로 들어가 천도교·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자금을 모으고 만세 운동을 촉구했으며, 장덕수·이광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의 궐기를 조직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를 돌며 현지 한인들의 만세 시위 운동을 자극했다"고 설명한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신한청년당은 3·1운동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상해로 모으고 '독립 임시 사무소'를 만드는 등 임시정부 수립의 실무를 담당했으며 초기 임정에서 핵심 간부를 맡아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했다"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란 이름에는 '구한(舊韓)'인 대한제국과 구별되는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신세대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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