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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동포 流民의 아픈 역사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1.22|조회수156 목록 댓글 1

 

 

[발굴] 사진가 류은규가 찾은

중국동포 流民의 아픈 역사

“당신은 조선족 동포를 얼마나 아십니까?”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낳은 조선족 상처… 치유되지 않아”
⊙ 김규식의 딸, 김좌진의 딸, 양세봉의 셋째 제수 등 抗日운동가 후손 촬영
⊙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 집안… 일제 패망 후도 밑바닥 인생
⊙ “30년 뒤엔 조선족 자치구가 사라지지 않을까. 한국에 60만명이 정착”


조선혁명군 장군으로 활동했던 김규식 선생의 딸인 김현태 할머니 모습이다. 김 할머니가 서 있는 곳이 아버지 김규식이 피살된 현장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 류은규(柳銀珪·56·한국방송예술진흥원 사진예술과) 교수는 2년 전 자신의 개인전 〈한인면모(韓人面貌)〉전을 잊을 수 없다. 2개월가량(2016년 8월 5일부터 10월 16일까지) 전시회가 열렸으나 여전히 진한 여운을 느낀다.
 
  사람들이 그를 ‘역사의식’이 있는 사진가라고 칭하는 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관심사는 역사가 밴 옛일(사건), 옛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 역사가 담긴 옛 사진을 수집하는 일이다. 류 교수는 한중(韓中) 수교 직후인 1993년부터 중국에 머물며 조선족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때였다.
 
  그의 관심사는 특별하다. 중국 동북(東北) 3성에 흩어진 조선족의 뿌리를 더듬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항일(抗日)운동가의 후손들을 피사체로 담았다. 예컨대 만주와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한 김규식 장군의 딸,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딸 등이다. 지금은 모두 사망했거나 세월이 흘러 자연스레 소식이 끊겼다. 그래서 류 교수의 사진이 더욱 값지다.
 
  기자는 인천 중구 신포로 31번 길에 위치한 관동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사진으로 된 역사’를 쓰기 위해 일찍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중국 하얼빈에 있는 동북농업대학에서 우선 중국어를 공부했고 옌볜(延邊)대, 하얼빈대, 중국다롄(大連)의과대학, 난징(南京)시각예술대 사진학과 교수 자격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만약 취업비자가 아닌, 관광비자로 중국에 들어갔다면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쫓겨났을 겁니다. 대학을 여기저기 옮겨 다닌 이유는 동북 3성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을 찾기 위해서였죠.”
 
  류 교수는 기자에게 “조선족 동포를 얼마나 아느냐”고 묻더니 자문자답하듯 이렇게 말했다.
 
  “조선족은 중국 56개 소수민족의 하나지만 그 근원은 복잡합니다. 청나라 때 한반도에서 올라간 사람, 그 이전인 원나라 때 간 사람, 그들 중에서도 잡혀서 혹은 자발적으로 간 사람이 있어요.
 
  그러나 제1차 이주민이라고 하면 1880~1910년대 사이에 중국에 정착한 이들입니다. 사실 청나라 때 만주는, 만주족이 신성시하는 공간으로 소수의 관리인만 살았지 공지(空地)였어요. 그때 학정(虐政)에 못 이겨 월경한 이들이 만주에 가장 먼저 정착했지요.
 
  그다음, 한일병탄 전에 일제가 꼴 보기 싫으니까 슬슬 넘어간 이들을 제2차 이주민들로 봅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의병활동을 했을 겁니다.
 
  3차 이주민들은 한일병탄 후 정말 일제가 싫어 넘어간 이들입니다.
 
  4차 때는 1930년 만주사변 이후 가게 된 이들로 일제가 만주국을 세운 뒤 통치를 위해 친일파를 그곳으로 보냈어요. 선생이나 경찰, 공무원 부류의 사람들이었죠. 또 만주 땅을 개척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일제가) 이주시켰던 역사가 있어요.
 
  그리고 해방이 되고 중국에 있던 200만명의 조선족 중 100만명은 남과 북으로 가고, 100만명은 그대로 중국에 눌러앉게 됩니다. 또 아비규환의 6·25를 겪으며 전란을 피하려 다시 중국으로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어쨌든 이런저런 사연으로 지금의 조선족 뿌리를 이뤘어요.”
 
 
  조선족 디아스포라
 

사진가 류은규씨.

  류 교수는 만주 지역 동포들의 이주사 자료를 수집하거나 그 흔적을 찍고 다녔다. 그리고 그 일부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직도 미공개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처음 중국에 들어갔을 때 하얼빈에서 한 조선족 꼬마를 만났어요. 그 아이의 말이 다 반말투였어요. 아이 부모는 돈 벌러 한국에 가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배운 게 반말밖에 없었던 거예요. 이 아이는 자신의 뿌리가 어디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흘러 흘러 중국에 정착했는지 모르는 거예요. 왜냐고요? 안 가르치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민족의 뿌리나 역사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의 역사책과 일본·중국 책, 북한 책까지 읽었다.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 역사책을 읽으니 만주의 역사, 조선족의 역사가 다시 보이더라”고 했다.
 
  “안중근만 하더라도 각 나라의 기술(記述) 태도나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한국은 영웅이지만 일본은 테러리스트죠. 중국도 영웅으로 보지만 공산당이 보는 안중근, 국민당이 보는 안중근이 다르고 북한에서 보는 안중근 역시 차이가 있어요. 예컨대 중국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보지만 천주교 신자라는 점에서 애매하게 바라봅니다.”
 
 
  “역사적 증언자를 렌즈에 담을 때 가장 아팠던 것은 분단의 비극”
 
  류 교수는 “밤마다 역사책 읽기에 몰두했다. 그때 독서량은 내 인생에서 읽었던 모든 책만큼이나 되었다. 그전에는 사진 찍기 바빠서 책 보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사진을 찍기 위해 더 열심히 읽었다”고 했다.
 
  역사책을 섭렵한 뒤 본격적인 촬영여행이 시작됐다. 항일운동가의 후손을 찍기 위해 완행기차를 타고 시골역에 내리기를 반복했다. 주소를 적은 쪽지를 쥐고서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길을 물었다. 버스를 타고, 삼륜차 택시를 타고, 때로는 당나귀가 끄는 리어카를 탔다. “어렵게 찾아간 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사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트럭에 올랐지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며칠이 걸리기도 했고 겨우 찾은 이가 몸이 아프거나 예전 기억이 확실치 않다고 느꼈을 때도 많았어요.”
 
  류 교수는 낙담하지 않았다.
 
  “만약 제가 역사학자였다면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지치고 실망했을 거예요. 구술 자료가 사료로 변신하기까지 다양한 크로스체크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나 다행히 저는 사진가예요. 역사의 증언자가 말을 못해도 그분의 살아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역사의 증언자를 렌즈에 담으며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분단의 비극이었다.
 
  ― 이념의 차이 탓에 조선족 내부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 많았지요.
 
  “많은 항일 투사가 그렇게 목숨을 잃었죠. 죽은 자도 죽인 자도 같은 우리 민족이고 조국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살았을 텐데….”
 
  ― 남과 북이 나뉜 것이 조선족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요.
 
  “김일성과 같이 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북으로 가 후대를 받았지만 민족주의 계열의 투사 유족들은 중국에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어요.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기 전까지 (한국 정부가) 민족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의 후손을 돌봐주지 못했잖아요.
 
  공산주의 계열이 아닌 투사나 유가족은 중국에서도 대우는커녕 심한 학대를 받아 아버지의 공적이 제대로 자식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 중국 문화대혁명 때도 조선족이 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게 들킬까 봐 민족주의 계열 후손들이 자료나 사진을 모두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박해를 피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고 심지어 성씨까지 바꾸었다고 해요.
 
  분명히 항일활동을 했으나 자료나 증거가 없어 대우를 못 받는 이가 많습니다.”
 
  류 교수는 “누구는 남한파, 누구는 북한파라는 말이 지금도 계속 쓰이는 만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낳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기자는 그에게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촬영할 당시의 뒷얘기를 물어보았다.
 
 
  ① 黑龍江省 尙志市에 살던 김규식의 딸
 
  김규식(金奎植·1882~1931) 선생은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가 고향이다. 대한제국 육군의 참위를 지냈으며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강원도 철원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만주로 망명해 1919년 서일,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사단장을 맡았다. 북로군정서는 이 시기 무장 항일투쟁의 핵심 중 하나였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제2연대장인 김좌진 수하의 제1대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1931년 암살됐는데 김규식을 유인해 암살한 사람은 옛 동지였다가 공산주의 계열로 전향한 이로 알려져 있다. 우리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에게 추서했다.
 
  류 교수는 “조선혁명군 장군으로 활동했던 김규식 선생의 이름이 김성주”라며 “김일성은 김성주로 개명 뒤 항일 장군으로 둔갑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돌아가신 현장(헤이룽장성 상즈시)을 선생의 딸인 김현태 할머니와 찾아갔어요. 옛날에는 그곳이 산속이었지만 지금은 농토로 변했는데, 공산당이 쏜 총알에 돌아가셨죠.
 
  김 할머니가 현장에서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내 아버지… 여기 찾아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통곡을 하셨죠.”
 
  ― 어떻게 살고 있던가요.
 
  “민족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의 집안은, 자식이 돈을 벌어 아버지에게 군자금을 댔습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회유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살았어요. 자연히 공부할 기회를 잃게 되어 일제가 패망했을 때도 밑바닥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해방이 되고 공산화가 됐으니 또 숨어 지내야 했어요. 세상이 바뀌어도 나설 수 없었던 거죠.
 
  김규식 선생 후손들은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로 살았어요. 제가 소고기를 사다 드렸더니 ‘얼마 만에 먹는 고기냐’고 하셨어요.”
 
  사진을 찍을 1994년 당시 김현태 할머니의 나이는 80세였다. 사진 속 그녀가 두 발로 섰던, 지팡이를 짚고 선 그 자리가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김규식 선생이 공산당의 손에 쓰러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류 교수는 “선생이 죽은 그 자리,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서게 해서 찍어야만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직관이 들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류 교수는 김현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 할머니는 몇 번째 딸인가요.
 
  “아마 장녀였던 것 같은데, 결혼을 하고 자식들이 있던데 이름을 묻지는 않았어요. 아들 사진도 찍었는데 무슨 사연인지 피해 다닌다고 하더군요.”
 
  ― 살던 집은 어떻든가요.
 
  “민가에서도 떨어져 있었고 살림이 형편없었죠.”
 
 
  ② 헤이룽장성 牧丹江市에 살던 김좌진의 딸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딸인 김산조 할머니(왼쪽 두 번째)와 가족들이다.

  김좌진(金佐鎭·1889~1930)은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장이다. 1930년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됐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김좌진의 부인은 모두 3명. 첫째 부인은 오숙근, 둘째 부인은 김계월(김두환의 친모이자 김을동의 조모), 셋째 부인은 나혜국이다. 다른 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류 교수는 “김좌진 선생의 친딸이 중국에 실재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족 동포들은 김산조 할머니를 김좌진의 다섯 번째 부인의 딸로 소개했다고 한다.
 
  ― 어떻게 된 겁니까.
 
  “헤이룽강 부근 산실(散失)한 지역에 김좌진 부대가 주둔을 합니다. 사람들이 몇 개월이 지나서 그 마을 처녀를 김좌진 장군의 방에 넣은 거죠. 결혼은 안 했지만 애를 낳으니까 부인이 된 겁니다. 애를 안 낳았다면 그걸로 끝이 나지만….
 
  다섯 번째 부인이라 해서 긴가민가할 수 있으나 국가보훈처와 한국에서 온 교수들이 정황을 듣고 인정을 해준 것입니다.”
 
  ― 아버지 김좌진에 대한 자부심이 있던가요.
 
  “그분은 생전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해요. 아버지 기억이 전혀 없고 말로만 들은 것이죠. 제가 ‘한국에 가면 대접받으실 텐데…’라고 하니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나라요?’ 하고 반문해요.
 
  제가 ‘대한민국’이라고 하니, ‘거기 친일파 나라 아닙니까? 내 아버지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요?’라고 말하더군요. 한마디로 대한민국은 친일청산을 안 했다는 겁니다. 조금은 이해되는 게, 당시 친일하던 조선족 동포가 원망스러웠을지 모릅니다.”
 
 
  ③ 遼寧省 淸原縣 北三家에 살던 양세봉의 셋째 제수
 

조선혁명군 사령관이었던 양세봉 선생의 셋째 제수인 김화순 할머니. 할머니 뒤 벽에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다.

  양세봉(梁世奉·1896~1934)은 조선혁명군 사령관으로 한·중 연합작전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연합군은 1932년 일본군 점령의 만주 융링제성(永陵街城)을 탈환한 뒤 상자허(上夾河)까지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혁명군은 5개로(五個路) 사령부를 거느리는 대부대로 개편하고 양세봉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직접 교장을 맡아 군대를 양성했다. 그러나 1934년 8월 12일 일본군의 밀정에게 속아 사살됐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류 교수의 말이다.
 
  “일설에는 김일성이 양세봉에게 항일운동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사령관이었어요. 당시 서른 살이었고 김일성은 고작 14세인데 그럴 리야 없겠죠. 그런데 (북한에서 나온) 책에는 그렇게 나와 있더군요.”
 
  류 교수는 “김일성이 북으로 가면서 양세봉 장군 후손들을 다 데려가 영웅대접을 했다”며 “한국 정부는 그동안 양세봉을 인정 안 하다가 문민정부 이후 평가가 달라졌다”고 했다.
 
  그러나 양세봉의 셋째 제수인 김화순 할머니 댁에는 집안 한쪽에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을 ‘조교’라고 부릅니다. ‘조선교포’라는 뜻이죠. 양세봉 후손이나 집안사람들은 옛날부터 조선교포였던 것이죠.”
 
  또한 한쪽 벽에 양세봉 장군, 할머니의 남편, 양세봉 둘째 동생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사진 속에 조선혁명군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 있었다고 류 교수는 기억했다.
 
  “할머니, 사진 좀 찍을게요.”
 
  “그냥 찍으면 안 돼…. 한복을 입어야지.”
 
  류 교수는 등을 돌려 할머니가 갈아입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카메라 앞에 선 할머니는 예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 그대로였다.
 
 
  ④ 헤이룽장성 하얼빈市에 살던 김중건의 딸
 

만주에서 무장항쟁을 벌였던 김중건 선생의 딸 김정완 할머니. 당시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촬영이 어려웠다고 한다.

  소래(笑來) 김중건(金中建·1889~ 1933) 선생은 함경도 영흥이 고향으로 1908년 고향에 연명학교(鍊明學校)를 세워 청소년에게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1925년 만주로 건너가 농대학원(農大學院)을 세웠다.
 
  소래 선생은 주로 만주 지방에서 무장항쟁을 벌였는데 1931년 항일투쟁 총지휘부인 ‘조선혁명지도처’를 설치하기도 했으나 1933년 조선공산군 부대에 붙잡혀 사살됐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88년 8월 김중건 선생 어록비가 충남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세워졌다.
 
  류 교수가 소래 선생의 딸 김정완 할머니를 찾아간 것은 1994년 무렵이다. 다른 항일운동가 후손과 달리 비교적 평안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웠다.
 
  “중풍으로 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시더군요. 할머니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아 사진 찍기가 어려웠어요. 외손녀에게 부탁해 새 옷으로 갈아입혀 의자에 앉혔는데, 오랫동안 앓은 할머니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습니다.”
 
  류 교수는 할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단순한 배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한구석에 눈을 돌렸다. 파인더의 사각형과 방문의 사각형, 그 뒤쪽에 있는 잡다한 것들을 네모난 커튼으로 가린 뒤 할머니를 앉혀 셔터를 눌렀다.
 
  ― 몸이 불편해 사진 찍기 힘들었겠어요.
 
  “그런 것보다 그분을 뵐 때 미리 공부를 하고 가야 해요. 그냥 얼굴만 찍으면 사진사에 불가합니다. 아버지(소래 선생)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을 나눠야 그때야 (경계가) 풀리게 되죠.”
 
 
  ⑤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 살던 안무의 이복동생
 

독립운동가 안무 선생의 이복동생 긍설씨 내외 모습이다.

  안무(安武·본명 安秉鎬·1883~ 1924) 장군은 독립군 국민회군(國民會軍)을 창설해 항일투쟁을 한 인물이다. 함북 종성이 고향으로 1899년에 구(舊)한국군 진위대에 들어가 교련관이 됐으나 1907년 군대 해산으로 물러났다. 학교 체조교사를 하다가 한일병탄 후 간도로 망명해 대한국민대를 조직했고 1916년 독립군 국민회군을 창설해 사령관이 됐다.
 
  1918년 무산(茂山)지구 일본 헌병 분견대 3개소를 습격했고 1920년 봉오동 부근에서 일본군 120명을 사살했다. 1923년 룽징에 본거를 두고 항일운동을 하다 관통상을 입고 체포돼 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를 거절하고 순국했다.
 
  한국에는 조카 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하얼빈에 사는 안무 장군의 이복동생 긍설씨는 류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님은 항일을 했지만 내가 뭐, 한 게 있습니까?”
 
  긍설씨는 그러나 해방 후 고생이 많았다. “해방 후 문화대혁명 때 조선민족이라고 ‘조선 특무’, 일본어를 한다고 ‘일본 특무’, 소련에 갔다 왔다고 ‘소련 특무’라는 오명을 쓰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박대를 받아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다.
 
  ― 당시 안긍설씨 촬영 포인트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날씨가 흐렸어요. 흑백사진을 찍기 가장 좋은 날씨죠. 좀 추웠지만 노부부에게 집 밖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죠. 어쩌면 고생한 남편보다 아내가 더 고생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분 아내에게 한발 앞으로 나와달라고 부탁했었죠.”
 
 
  ⑥ 룽징 시내 파괴와 혼란의 현장
 

1966~76년 중국 조선족 동포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문화대혁명 당시 룽징의 한 건물 내부 모습이다. 사진 속 마오쩌둥의 어록(그릇된 사상, 독초, 잡귀신들에 대하여서는 절대 그것들이 제 마음대로 범람하게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비판을 전개해야 한다)이 섬짓하다.

  1966년과 76년 사이 중국 조선족 동포 사회는 그야말로 파괴와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이 옌볜에 와서 ‘문화대혁명’을 통해 조작한 갈등이 발단이었다. 류 교수에 따르면 마오위안신은 우리 동포를 이렇게 추궁했다고 한다.
 
  “조국의 동북 변방에서 몸서리쳐지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너희는 중국 땅에 살면서 한복을 입고, 조선말을 쓰고, 조선글을 쓰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류 교수는 당시 문화대혁명 현장을 찍은 옌볜의 한 사진가를 만나 6000여 장의 필름을 건네받았다. 이 사진가는 류 교수에게 “내가 죽기 전까지 이 사진을 공개하지 말라”고 했고 10년간의 기다림 후 그가 사망하자 사진을 공개했다.
 

문화대혁명은 조선족 동포의 삶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19세기 후반부터 쌓아올린 민족적인 토대를, 살아남기 위해, 일순간에 무너뜨려야 했다. 폐허가 된 룽징의 시내 모습이다.

  2009년 1월 국내 사진전 〈대륙의 일상-중국문화대혁명〉을 통해 공개했다. 그리고 일부는 2010년 《연변 문화대혁명-10년의 약속》이란 책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류 교수는 “아직 미공개 사진이 많이 남아 있다”며 《월간조선》에 미공개 사진을 보내왔다. 류 교수의 말이다.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조선족 우리 동포의 고유한 전통이나 풍습을 모두 말살하려 했죠. 그러나 역사는 문자로는 장난을 칠 수 있지만 사진으로는 못 칩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나고 맙니다.
 
  당시 조선족 동포의 집안에서 한글로 된 편지라도 발각되면 홍위병에게 혼이 나야 했다고 합니다. 동포들은 살기 위해 손때 묻은 한글 책이나 사진까지 모두 불태워야 했어요. 이것이 조선족이 중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죠.”
 
  거세게 불었던 조선족 문화대혁명은 지금도 60대 이상 조선족의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고 한다.
 
 
  ⑦ 조선족 인민재판과 혁명위원회 모습
 

옌볜 조선족들이 인민재판을 하는 모습이다. 먼저 조선족 간부들이 ‘자본주의로 가는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가장 먼저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류 교수에 따르면, 조선족 간부들이 먼저 문화대혁명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로 가는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각 지방을 돌며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변절자, 반혁명분자, 나쁜 분자, 지식분자(노동자와 대립되는 교사들이 대상이었다)라는 죄목으로 투쟁적인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투옥됐고, 또 일부는 울분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남한이나 북한에 친척이 있으면 조선 특무(간첩), 공산당을 위해 소련에 갔다 왔으면 소련 특무, 강제 징용됐어도 일본공장에서 일했다면 일본 특무라는 누명을 씌우고 감금하고 폭행했다.
 
  중학생 홍위병들은 학교 교장이나 교사들을 때리기도 했고, 교문 앞에 며칠 동안 세워놓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을 하수도 구멍에다 집어넣었다. 무거운 철판을 목에 걸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홍위병들은 수많은 문화유산·사당·절·교회 같은 유서 깊은 건물과 목사·신부·스님 등을 봉건주의 미신이라며 박해, 파괴했다.
 

옌지(延吉)현 명동 혁명위원회 모습이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입지 강화를 위해 조선족의 전통과 풍습을 제거하는 방편으로 악용됐다.

  류 교수의 말이다.
 
  “한국에서 볼 때 조선족 자치구는 한국의 색깔이 없다고 하고, 중국에서 볼 때 중국 땅인데 중국 색깔이 없다고 공격받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흑과 백으로 편을 갈라놓고 공격하는 습성이 있기 마련이죠. 어쩌면 옌볜 같은 조선족 자치구는 중국문화와 한국문화가 충돌하는 지대입니다. 흑과 백의 입장에서는 자기 색이 없다고 하지만 충돌지대라는 점에서 보면 독특한 자기 색깔이 있어요.
 
  이 충돌지의 색(色)이 커지면 새로운 문명이 되지만, 색이 없어지면 소멸되겠지요. 당시 문화대혁명은 민족분규의 성격을 띠면서 이상하게 변질돼 무장투쟁까지 하게 됐어요.”
 
  ― 향후 조선족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나요.
 
  “유감스럽게도 30년 후엔 조선족 자치구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우선 인구가 없으니까요. 지금 한국에 60만명이 왔다는 말이 있어요. 주로 여자들이 한국에 왔고, 남자·노인들만 중국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조선족 남자와 한족 여자가 결혼하게 되고 이들의 자식은 조선족 정체성이 없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죠. 그래서 저는 조선족 동포들에게 ‘조국은 중국이지만 모국(母國)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월간조선  2018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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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솔뷍 | 작성시간 21.01.22 그후손은 같은민족의 얼을 잃고 중국화되어서 세뇌되어 공산당 논리에 같은 민족 나라를 팔아먹고 사기치고 다니는 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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