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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제가 가장 두려워 했던 레지스탕스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1.22|조회수261 목록 댓글 0

 

 

의열단 義烈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는 단체

 

 

의열단은

단지 남들보다 조금 더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어서

 

나라를 빼앗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레지스탕스였다.

 

 

모든 것들을 빼앗긴 시대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가장 뜨겁게 불태웠던

자신의 삶에 떳떳한 인간들이었다.

 

 

제작 : 이종 크리에이터

 

 

1919년 3월 1일

 

깨어있는 민중의 단결된 힘으로

유래가 없는 비폭력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헌병대는 성명서를 들고 있는 소녀의 손목을 칼로 잘랐다.

소녀가 나머지 손으로 성명서를 들어올리자

이번엔 그 손목마저 잘랐다."

 

 - 1919년 3월13일 AP통신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고

발로 걷어 채이며 칼로 찔리는 등 끔찍한 참상이다.

일본 군인들은 ‘한국 만세(Hurrah for Korea)’라고 외치기만 해도

총을 쏴서 죽이고 있다."

 

 -1919년 3월17일 뉴욕 타임스

 

 

 

이후 수많은 해외 외신들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게 되었다.

 

 

비폭력 운동에

절대적 폭력으로 일관하는 일제.

 

 

 

 

그들이 흩뿌린 피는 산천을 붉게 적시고

그 한과 분노로

새로운 투쟁의 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1919년 11월

김원봉을 단장으로하는 민족주의자들의

무장독립단체가 결성된다,

 

 

의열단 창단.

그의 나이 21살.

 

 

 

 

1898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 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김약산은 확실히 구별되는 두 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했다."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

 

 

그 당시 김원봉의 현상금은 무려 100만원이였다 (현재 시가로 320억)

독립운동가에게 걸린 현상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였고

그 다음은 60만원으로 김구선생이였다.

 

 

 

의열단 공약 10조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화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반드시 죽여야할 7가지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의열단은 주저하는 법 없이

바로 행동에 움직였다.

 

 

악인들은 드디어 공포에 떨게 되었다.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박재혁 폭탄 투척,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  폭사

 

"나는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이번에 우리 동지들이 구속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을 너희놈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는 현장에서 도망가는 대신

왜 자신이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외쳤다

그리고 체포당한다.

 

 

1921년 9월

의열단 김익상, 조선총독부에 폭탄 투척

 

 

 

능숙한 일어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수사망을 빠져나와

다시 상하이로 향한 그의 나이 당시 28세.

 

아내와 딸은 조국에 있었다.

 

 

1942년 규슈 구마모토 감옥을 나올 때 의열단 김익상은 이미 50대였다.

그는 해방 직전의 서울에서, 일본인 형사에 끌려가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1922년 3월 김익상, 오성륜의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총살

 

오성륜은 국경을 아우르는 탈출과 사격의 귀재.

끝없는 탈출속에서도 독일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혁명에 참가한다.

 

 

1923년 1월 서울 출신의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투척

 

 

총독 사이토를 죽이려다 실패,

경찰의 추격을 받다 교전중 사망한다.

 

 

 

1924년 김지섭의 도쿄 황궁 폭탄투척

 

의열단은 늘 자금이 부족했다.

폭탄을 제외하고 팔 수 있는 건 다팔고,

여비가 떨어지기전에 황궁에 폭탄을 투척하려하지만

경비병의 저지로 다리 위에서 폭발, 

체포되어 44세에 옥중 사망한다. 

 

 

1926년 12월 황해도 출신의 의열단 나석주,

식산은행에 폭탄투척, 불발.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철도회사를 찾아가 권총 난사

일본인들을 사살 후 추격하는 일경에 맞서다 자결.

 

 

짧았지만 뜨겁고 밝게 타올랐던

의열단은 1926년에 해체 된다.

 

 

그건 끝이 아니라

더 조직적인 결사조직을 만들기 위함이였다.

 

 

 

 

이후 중국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했는데,

이 출신들은 장개석이 국민당을 장악하면서 장개석 정권의 받침대가 되었고,

약산 김원봉은 이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장개석(장제스)

 

"조선이 독립하지 못하면 중국의 독립도 완성하지 못하게 되고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도 확보하지 못할 것이므로

국민당은 조선독립에 전력을 다해 원조하겠다"

-1945년 11월 4일

김구 등 임시정부요인과 독립운동가들에게 

 

 

김원봉은 이후 중국군 장교에 배치된다.

제 1차 국공합작 참여.

장개석은 공산당을 축출하고 군벌들을 흡수한다.

 

 

1932년 장개석의 도움으로 군관학교-조선의용대를 설치한다.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다.

 

 

 

 

1941년 항일에 소극적이던 국민당 지역을 떠나, 팔로군 주둔지로 간다.

정말 싸우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었다.

 

 

 

1942년 10월 기념촬영

가운데가 김구, 오른쪽 끝이 김원봉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지만

조선민족혁명당의 야당 입지로 세력이 약해진다.

 

 

1945년 광복, 그는 김일성의 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조선의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한

5년간의 신탁통치에 관한 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린다.

김구와 이승만은 이에 반대했다.

동아일보는 이와중에 거짓기사를 보도하고,

조선일보는 죽음으로 신탁을 막으라며 보도한다.

 

 

1946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소련이 협력한다.

 

 

1946년 5월 20일 이승만

"공산주의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그들은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우겠다.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된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된다. 김원봉은 장례식을 치르며 복수를 다짐한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해체된다.

 

 

1947년 김원봉, 노덕술, 장택상에게 체포당해 고문당한다.

 

 

 

"김원봉 이 빨갱이 새끼"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개처럼 싸웠던 이 독립운동가는

독립이 되자마자 개처럼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사흘동안 울었다.

 

 

 

 

1948년 더이상 남한에서 안전할 수 없는 그는 월북한다.

월북후에도 늘 ‘하나된 자주독립국’을 주장한다. 

 

 

1958년 독재자의 눈에 가시였던 그는 숙청당한다.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던 그는

사회주의 국가로부터 무장독립운동을 하는데 필요한

도움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가장 최전선에서 민족을 위해 싸우면서도

빨간색으로 칠해져

양지만을 향해 배신하는 기회주의자들의

돌팔매질에 몸과 마음이 찢겨져나갔다.

 

 

그는 사회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댜

 

 

국경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했던 그는

결국 조국을 지켜냈지만,

조국에서 쫓겨났다.

 

 

 

보너스+

BGM 가사

 

 

MUSE- Knight of cydonia

 

 

Come ride with me

이리와, 나와 함께 말을 타고 가자
Through the veins of history

역사의 맥들을 지나서
I´ll show you how god

네게 보여줄게 어떻게 신이
Falls asleep on the job

일을 하는 도중에 잠에 곯아 떨어졌는지

 

And how can we win

어떻게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When fools can be kings

바보들이 왕이 될 수 있을때 말이야
Don´t waste your time

시간을 낭비하지마
Or time will waste you

아니면 시간이 너를 써버릴테니

 

 

No one´s gonna take me alive

아무도 날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

The time has come to make things right

사태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때가 왔어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너와 난 우리의 권리들을 위해 싸워야만 해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너와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해

 

No one´s gonna take me alive

아무도 날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
The time has come to make things right

사태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때가 왔어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너와 난 우리의 권리들을 위해 싸워야만 해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너와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No one´s gonna take me alive

아무도 날 살아있게 놔두지 않아
The time has come to make things right

사태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시간이 왔어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너와 난 우리의 권리들을 위해 싸워야만 해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
너와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MUSE- Knight of cydo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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