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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1운동 직후 臨政과 연계해 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20대들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1.28|조회수85 목록 댓글 0

 

 

3·1운동 직후 臨政과 연계해

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한 20대들

  • 이선민 선임기자
  • 입력 2018.08.22 03:01


    제12회 민세학술대회… 청년외교단·애국부인회 재조명

    3·1운동의 열기가 계속되던 1919년 중후반 20대 청년 남녀들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의 실체가 밝혀졌다.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회장 강지원) 주관으로 지난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12회 민세학술대회는 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안재홍·연병호·김마리아·황애덕의 재조명을 통해 두 단체의 활동을 짚어봤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1919년 4월경 상해에 있던 조용주(조소앙의 동생)와 연병호(제헌·2대 국회의원)가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청년 단체를 국내에 만들기로 하면서 출발했다. 6월 초순 국내에 들어온 두 사람은 재력가 이병철과 명망가 안재홍을 총무로 영입했다. 연병호는 조직 정비와 확대 실무를 맡았고, 안재홍은 단체의 목적과 방향을 담은 강령 등을 작성했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의 검거 사실을 보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자.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애국부인회의 검거 사실을 보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자. 인물 사진은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재홍·김마리아·이병철·황애덕. 왼쪽 아래의 도장들은 두 단체가 사용하던 것이다.

    청년외교단은 임정이 역점을 두었던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회의에 대한 외교 활동 지원을 주목적으로 했다. 이와 관련, 김인식 중앙대 교수는 "청년외교단은 임정이 파견한 조소앙·김규식의 외교 활동을 후원할 뿐 아니라 국내 여론을 형성하여 독자 외교 활동도 전개하는 '국민 외교'를 지향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자금과 임정 활동에 관한 '건의서'를 임정에 전달했다. '각파(各派)의 대찬협동(大贊協同)을 표방할 것, 일본 정부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국가 독립을 정면 요구할 것' 등을 담은 건의서의 작성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김인식 교수는 "일제 심문 자료에 안재홍이 '주필(主筆)'한 것으로 돼 있고, 안창호가 보내온 답신도 수신자가 안재홍"이라며 '안재홍설(說)'을 주장했다. 반면 조은경 독립기념관 학예연구관은 "안재홍의 진술에 따르면 연병호가 초안을 작성하여 안재홍의 교정을 받았다"며 '연병호설'을 주장했다.

    청년외교단은 '외교시보'를 발행해 임정의 활동상을 알리는 한편 애국부인회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이들은 '배달청년단'으로 조직 확대를 추진하던 중 11월 말 일제 경찰에 발각돼 간부들이 체포됐다. 안재홍은 이 사건으로 30개월의 첫 옥고를 치렀다.

    애국부인회는 동경 유학생으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귀국한 김마리아와 황애덕이 중심이 돼 1919년 10월 재결성됐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활동을 전개하던 중 동지의 배신으로 일제에 발각됐다. 회장 김마리아는 혹독한 조사 중 병보석으로 나온 틈을 타 상해로 탈출했다. 황민호 숭실대 교수는 "김마리아가 이끌면서 애국부인회는 임정과 연결을 더 분명히 했고, 탈출도 임정 국내 조직의 도움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총무 황애덕은 3년 형을 선고받고 2년을 복역했다. 윤정란 서강대 종교연구소 연구원은 "황애덕은 형무소에서 일반 여성 재소자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실정을 알게 됐고 이후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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