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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북이 통일되면 제일 먼저 영화화 될 이야기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2.07|조회수232 목록 댓글 0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한 중국인 집 안에는 상기된 얼굴의 조선인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13명. 윤세주, 이성우 등이 좌정한 가운데 날카로운 눈매에 잘생긴 얼굴의 한 청년이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경상도 사투리 짙게 배어나오는 그의 언어는 정연하면서 매서웠다.

23세의 청년. 그러나 어느 범보다도 무섭고 어떤 용보다도 날래게 ·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뒤흔들 사람이었다.

그 이름은 김원봉. 그의 주도 하에 ‘의열단’이 결성된다.



의열단은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채택했다 


 5개의 파괴대상으로는 우선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등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원한이 하늘을 갈랐던 동양척식회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그리고 식민통치의 촉수인 각 경찰서와 주요 기관을 들었다.


그리고 죽여야 하고, 또 죽여도 되는 ‘7가살’의 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일본 고관 ,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 등을 명시했다.



이 의열단의 정신을 신채호가 그 사나운 명문으로 표현한 것이 유명한 “조선 혁명 선언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후 1920년대 초반 의열단의 이름은 조선을 뒤흔들었다.



↑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


1920년 박재혁이 부산경찰서를 공격하여 서장을 폭사시킨 것을 필두로

의열단원들은 일본 경찰의 공포의 대상이자 최고의 목표물이 됐다.




↑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터뜨린 나석주,




↑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를 들부수고 1대 20의 총싸움에서 그 대부분을 쏘아 넘어뜨린 명사수로서,

이후 주택가 지붕 위를 오르내리면서 무려 1000명의 경찰들과 맞서 싸우다가 

마지막 한 발로 자살한 영화 주인공같은 의거의 주인공 김상옥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의열단원이었고,

심지어 황옥 경부같은 조선인 경찰 고위 간부까지도 의열단에 포섭되어 폭탄을 반입하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가히 의열단의 이름은 신화적 존재였다.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사건 기사. 사진은 21세 때의 김원봉.



의열단에 소속된 젊은이들, 일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며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보내던 젊은이들은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들은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고 최고의 멋을 내면서 수영과 테니스를 즐기며 여생(?)을 만끽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젊은 청년들은 당시 조선 여성들의 모성 본능과 동시에 동경을 자극했다.

그들의 정의로운 면모는 비탄에 빠진 조선 쳥년들에게 희망이 되어줬으며

한마디로 '백마탄 기사님'과도 같은 존재였다.

 


실제로 비장하기까지한 로맨스가 존재하였으며 청년들의 짧은 젊음을 빛냈다고 한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역시 의열단의 ‘수괴’ 김원봉이었다.

<아리랑>에서 김산은 김원봉을 이렇게 소개한다.



↑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원봉 장군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관한 자료를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기미년 이후 친일파와 일본 관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최대의 공겁의 대상이었고,

 나와 같은 20대 전후의 젊은이들에게는 조국 해방의 상징적 존재였다.”

 

 

  김원봉은 뛰어난 리더쉽과 용맹함.그리고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해 

실제로도 여성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고

청년들에겐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일제는 김원봉을 잡기위해 야단법석을 부렸지만 김원봉은 여유로웠다.

그 당시 김원봉의 현상금은 무려 100만원이였다 (현재 시가로 320억)

독립운동가에게 걸린 현상금으로는 역대 최고액이였고 그 다음은 김구선생이였다.(60만원)

 

 

김원봉에 대한 일제 정보기관의 기록
"보기에는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아리랑 김산의 기억
"김약산은 확실히 구별되는 두 개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했다."

 

 

 

 

그러던 김원봉에게 반려자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박차정 선생이다.(1910.5.8~1944.5.27)

 

 

 

박차정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한 아버지와 신간회,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 등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 맨앞줄 중앙이 박차정 선생

 

그녀는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여러차례 체포,구금당했다.

이곳에서 남녀평등사상과 독립의지를 키워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살의 어린나이에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 노덕술 (ㅆㅂㄻ)

 

그러다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무거운돌로 머리를 짓이기고

손톱을 뽑히는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문휴유증으로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게되어

1930년 봄에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고있던 둘째오빠 박문호로부터

중국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중국으로 망명을 갔다.


↑ 의열단원 박문호 (박차정의 둘째오빠)


 

박차정 선생의 국내에서의 활약은 그녀의 오빠와 지인들을 통해 전해져 

이미 중국내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화제였었다.

그때 의열단장이였던 김원봉은 그녀의 공적을 인정하여 의열단 간부에 선임하였다.

그후 박차정은 국내에서 못다 이룬 독립 투쟁을 오빠와 동지들과 중국에서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20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믿기힘든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그녀를 마음에 둔 김원봉은

 1년뒤인 1931년,그녀와 결혼하였고 박차정 선생은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이후 난징으로 거주지를 옮겨 남편인 김원봉이 난징에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당시 그녀는 ‘임철애,임철신’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과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하기도 하였고 ‘조선민족 전선연맹’과

이것의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 의용대’에서 부녀복무 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중 1939년 2월 

장시 성 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총을 맞아 그 휴유증으로 

1944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충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1945년 12월 환국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임시정부 요인들.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김원봉이다.

 

 

 

 광복이 되자 김원봉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 밀월에 돌아왔을 때는 그 앞에 레드 카펫이 깔릴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의 환영인사를 받은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귀국할때 가져온

박차정의 유골과 서거할 때 피뭍은 적삼을 직접 묻고 장례식을 치뤘다.



↑박차정 여사 장례식 中 가운데가 김원봉 장군

 

 

그리고 그는 좌익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이 아닌 한국 경찰에 체포된다.

이때 그를 체포한 이가 그 이름도 유명한 친일 경찰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은 옷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김원봉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개 끌 듯 끌고 갔다.

1919년에 의열단을 결성한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일제 경찰에 잡히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노덕술에게 조사과정에서 뺨을 맞고 빨갱이새끼라는 모욕을 당했다.

수십 년 동안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 투쟁을 했던 

중년의 전사(戰士)의 속내가 어떠했을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면 북반부로?"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대륙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적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그것도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의열단 동지 유석헌에 따르면 김원봉은 이후 사흘 동안을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승만(李承晩)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한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넘어간것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해방전보다 더 설치며 활동하는것에 남쪽에 대한 희망을 저버렸다고 한다.

 

유석현의 회고에서 김원봉은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로 술만 마시며
"여기서 있다간 왜놈들 등살에 언제죽을지 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른쪽에서 3번째가 김원봉

 


그는 북한에 남아 북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해 초대 국가검열상에 오르고,

북한 정부의 구성자체가 항일을 주장하였기에 김원봉은 친일파 제거에 업적을 세운다.

김원봉은 월북 후 북한에서 고위직을 가졌지만, 언제나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주장했다.

그때문에 김원봉은 김일성 눈밖에 나게되어버린다.




안그래도 김원봉이 거물급으로 커버리는것에 위기감을 느낀 김일성은 

독재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김원봉을 숙청하기로 결정,

 

 그 죄명도 어처구니없게도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사주를 받은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게된다.

 

 

 

결국 김원봉은 분을 못이겨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자살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역사속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 모략 속에서

그를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되어있기 때문이다.

 

무장 독립운동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활동을 남긴 그였지만,

 이념 하나 때문에 그는 60년 넘게 차가운 역사속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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