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 군부, 1907년부터 '헌병경찰제' 공작했다
입력 : 2016.08.12 03:00
"헌병이 경찰 전권 장악" 주장, 헌병대장 아카시 서한 발견
일제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실시한 헌병경찰제가 1907년 시작된 군부의 집요한 공작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견됐다. 헌병경찰제는 군인인 헌병이 일반 국민에 대한 경찰 행정을 담당하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11일 광복 71주년을 앞두고 일제의 한국주차헌병대장을 지낸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1919·작은 사진)가 1909년 8월 후임자로 임명된 사가키하라 쇼조(榊原昇造)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을 입수해 공개했다. 일본 고어(古語)로 쓰인 초서체 친필 서한에서 아카시는 '헌병이 일반 경찰을 통제해 경찰의 전권을 장악하고 한국주차헌병대를 헌병사령부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카시는 당시 헌병대가 2400명의 일본인 헌병과 4400명의 헌병보조원을 가진 큰 부대로 520곳에 배치돼 있어 5000명인 대한제국 경찰에 비해 우세하지만 헌병과 경찰이 양립해 있고, 합동 일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비용과 노력의 허비가 막대하다고 불평했다. 그는 헌병이 경찰의 전권을 장악할 수 없다면 통감에 부속될 이유가 없다며 통감 휘하에서 벗어나 식민지병(兵)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카시는 또 부임 당시 헌병대장이라는 명칭이 너무 작아서 헌병사령관 명칭을 요구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이 서한을 통해 헌병경찰제를 둘러싼 당시 일본 군부와 민간 관료의 입장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아카시가 1907년 10월 헌병대장으로 임명될 때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헌병이 조선 치안의 전권을 행사하도록 주문했다. 하지만 조선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는 데라우치와 아카시의 거듭되는 건의에도 헌병경찰제 시행에 소극적이었다. 아카시는 서한에서 '이 새로운 보호국에서 군도(軍刀)의 광채와 (군복의) 다갈색을 싫어하여 보통 경찰에 의지하려는 문관 기질은 배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헌병경찰제는 데라우치가 1910년 6월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