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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종착역 을사늑약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3.25|조회수27 목록 댓글 0


조선의 종착역 - 을사늑약

일본은 조선을 원활히 지배하기 위하여 통역관 출신인 송병준을 조종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도록 하고, 손병희와 이용구가 조직한 진보회를 통합해 일진회를 결성했다.
일진회(一進會)는 친일단체로 전국에 조직망을 만들어 100만 명 정도의 회원을 모았으며, 일제의 조선 병탄(竝呑)에 적극 협조했다.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가 천황의 특사로 서울에 왔다.이토는 고종을 만나 대한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박탈하는 협정문에 서명하도록협박했으나, 고종은 서명을 하지 않고 버티었다.

그러자 이토는 방법을 바꾸었다.
내각을 소집하도록 하고 일본 군대를 풀어 회의장을 완전 포위한 다음, 참석한 대신 8명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부를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했으며, 법부대신 이하영은 입을 닫았고, 나머지 5명 즉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 군부대신이근택(李根澤)은 찬성했다.

이렇게 해서 을사오적(乙巳五賊)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110여 년이 흘렀는데도 이들은 이미 죽었지만 영원히 살고 있다.
욕을 실컷 먹으면서 말이다.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찬성하에 박제순과 일본 특명전권 공사 하야시 사이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며, 우리나라의 외교권(外交權)을 빼앗긴 조약이다.
'늑약(勒約)'은 강제로 맺은 조약을 뜻하며, 제2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外交權)을 넘겨주었다는 소문이 나자 더 있어봐야 생활비 축나는 것이 아까워진 조선 주재 외국 공사(公使)들은 모조리 공사관 문을 닫고 보따리를 싸서 일본으로 이사를 갔다. 이제부터 조선에 대한 외교업무는 일본에서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1906년 2월 1일부터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통감정치를 시작했으며초대 통감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인 이토 히로부미였다.

고종은 경운궁에 유폐되었고, 사람을 만나려면 통감의 허가가 있어야 했으니,니1910년의 한일병합은 서류상이었을뿐 실제적인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부터였다.

한심한 조선, 아니 도대체 이 꼴이 될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이렇게 된 판에한 번 붙어보고 죽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기개도 베짱도 없는 무기력한 등신, 이것이 조선의 실상이었다.
하기야 일본 애들이 삼키지 않았어도 조선은 어차피 다른 나라의 밥이 될 것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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