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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지도첨부)

작성자기라선|작성시간21.04.02|조회수230 목록 댓글 0

 

 

항일 독립전쟁사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중심으로

 

1. 만주에 감도는 독립전쟁의 기운

 

1919

 

3 - 왕청현 합막당에서 국민회군(안무) 조직, 왕청현 봉오동에 군무도독부 결성(최진동)

4 1 - 일본군 20사단 창설(사령부 용산)
4
7 - 일본군 6개 대대 조선파견

4
15 -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대한독립단 조직(박장호, 40)
4
- 연길현 명월구에서 의군부 조직(이범윤), 왕청현에서 의민단 조직(방우룡
)
9
- 안동현 대한독립청년단, 관전현 홍통구로 이동해 대한청년단연합회로 개편(안병찬), 봉오동에서 대한독립군(홍범도) 결성
.
10
- 장백현에서 독립군비단 조직(이회삼,이동백 등
)
11
- 한족회의 군정부, 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로 변경(이상룡), 정의부를 임시정부 산하 북로군정서로 개편(서일
)
12
- 일본, 38여단 조선파견후 조선주둔 37여단과 통합해 19사단으로 확편(조선 동북부). 39,40여단을 20사단으로 확편(조선 서북부). 관동도독부에 관동군 1개 사단과 철도수비대 6개 대대 상주배치.

 

1920

 

1 24 - 상해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 서간도 군구, 북간도 군구, 강동 군구 군제 제정.
1~3
- 간도 주둔 독립군, 일본 군경과 17회 전투 개시
.
2
- 관전현 향로구에서 광한단 조직(이시열,현익철
)
3
-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설치(김좌진, 서대파 십리평
)
4
-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한족회 결성. 한족회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임시정부와 협상으로 임시정부 군사부분 담당, 서로군정서 발족
.
4
4 - 일본군, 블라디보스톡 한인촌 점령
.
4
- 시베리아 주둔 미군, 체코군 철수
.
4
25 - 간도 거주 일본인들, 일본 영사관 소재 용정촌 상부지에서 거류민 대회 개최해 일본정부 육군대신과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에게 보호 요청 주장
.
5
28 - 군무도독부군(최진동), 대한독립군(홍범도)을 통합하여 국민회 산하의 북로독군부(최진동)와 북로제1군사령부(홍범도))로 개편.

 

 

 

 

 

 

북로군정서는 러시아 체류 체코군에게서 무기를 획득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배하에 놓여 있던 상태에서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6만명의 체코 병사들이 러시아로 넘어가 1916년 창설한 부대로 러시아군 소속이었다. 1917 10월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전투를 하고 있던 이들은 무소속 부대가 되었다가 미국소재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아 프랑스군 예하에 소속됐다. 볼셰비키 공산혁명군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한 체코군은 체코가 해방되고 소련과 휴전협정이 성립되면서 1920 4월 귀국길에 북로군정서에 무기를 판매한다.

 

"블라디보스톡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이범석, 우등불

 

(우등불은 당시 전투 상황을 잘 기록해 놓았으나 다른 독립군 부대와의 연합에 대한 내용을 일체 적지 않고 오직 북로군정서에 대한 기술만 해놓은 단점이 있다.)


2. 
만주 독립군의 대이동

 

1920

 

6 4 - 화룡현 삼둔자 주둔 신민단(박승길) 30여명이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 주둔 일본 순찰 헌병소대 습격.
6
5 - 독립군 연합, 삼둔자에 진입한 일본군 남양수비대와 일광산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
.
6
7 - 군무도독부군, 대한독립군, 신민단 연합봉오동에서 월강추격대와 전투해서 승리
.
7
1 - 유하현에서 오동진 등이 광복군 총영 조직
.
7
11 - 대한독립군(홍범도), 노두구에서 간도 일본 영사관 경찰대와 교전
.
8
- 서로군정서, 일본으로부터 청부를 받은 마적단(장강호
張江好)의 습격으로 삼원보 본부 완파. 서로군정서 본부 액목현으로 이동(신흥무관학교생은 안도현으로 이동
).
8
28~9 8 - 길림성 혼성2여단 예하 1, 간도 독립군에 대한 1차 초토작전 전개
.
9
1 -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노령 방면에서 무기구입 후 복귀
.
9
9 - 북로 군정서, 사관연성소 생도 졸업식
.
9
12 - 마적단(장강호, 300여명), 혼춘현성 1차 약탈
.
9
16~30 - 길림성 중국군(맹부덕), 간도 독립군에 대한 2차 초토작전 전개. 17일 북로군정서, 왕청현 서대파를 떠나 서성진(이도구) 방면으로 이동개시.

 

 

 

<중국군 혼성2여단 1단의 토벌작전과 독립군의 1,2차 대이동>

 

1차 이동

 

1920 5월 초 일본은 중국 길림성에 "중일 합동수사대를 편성하여 간도의 불령선인을 토벌하자"고 제의 했다. 이에 대해 길림성장 서정림은 "불령선인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은 정치범에 속하므로, 이를 중국측에서 초토할 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불령선인: 불순한 조선인)

 

삼둔자 전투

 

6

 

4

 

삼둔자(간평) 주둔 신민단(박승길) 30여명, 일본군이 두만강변 대안 강양동에 집결했다는 정보 입수.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 주둔 일본 순찰 헌병소대(헌병군조 복강태삼랑福江太三郞)  습격하고 삼둔자로 철수.

 

5

 

22: 남양수비대(중위 신미이랑新美二郞), 만주 삼둔자(간평)까지 침입했다가 일광산 계곡 전투에서 패배.

 

 

 

<봉오동 전투 전체도>

 

 

<봉오동 전투 상세 지도>


 

(하촌은 현재 저수지에 잠겨 버렸으며, 중촌과 저수지 상류에 있는 상촌은 폐허가 되어 겨우 흔적만 찾을 수 있다.)


봉오동 전투

 

6

 

삼둔자에서 일본군 남양수비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 19사단사령부는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서 월강추격대 편성.

 

(월강추격대: 소좌 안천安川, 37연대 10중대-대위 신곡新谷, 70여명. 75연대 2중대-대위 삼. 기관총 소대-준위 자산紫山, 27. 헌병대-대위 소원小原, 11. 경찰대-경시 갈성葛城, 11. 남양수비대 생존병력. 보병 200여명, 헌병 11, 경찰 11명 합계 220여명 )

 

21시경: 월강추격대, 함경북도 온성군 하난동에서 두만강 도하. 후안산촌으로 진출개시.

 

야간: 삼둔자(간평) 일광산 계곡 주둔 남양수비대 생존병력, 골방령 넘어 안산촌 지나 후안산에 진입. 월강추격대와 합류.

 

24시경: 월강추격대, 길안내원 확보 위해 후안산 마을에 병사 3명 파견하였다가 최명국(독립자금 모금담당 독립운동가집에서 교전. (일본군1,조선인남녀2 사망. 한인 1명 부상)

 

대한독립군(홍범도)- 지휘부(최진동,안무)는 동북부 산에 엄폐, 1중대(이천오)는 봉오동 상촌 서북단 엄폐, 2중대(강성모)는 동산에 엄폐, 3중대(강시범)은 북산에 엄폐, 4중대(조권식)는 서산 남단에 엄폐, 2개 중대(홍범도)는 서산 중북단에 엄폐. 신민단은 상촌 남단에 엄폐. 군무국(이원)은 본부병력과 잔여병력으로 서산 최서북부에 엄폐하여 탄약 공급과 퇴로확보 하기로 작전계획 수립.

 

2중대 3소대 1분대(이화일)는 고려령 북쪽 고지에서 대기하다 일본군과 교전하면서 유인하기로 계획.

 

7

 

새벽~0445: 대한독립군 2중대 3소대 1분대, 고려령 줄기를 타고 흥진촌(고려촌)과 수남촌(고려둔)에서 월강추격대 선발 중대를 기습하여 유인 전술 개시.

 

830: 월강추격대 주력, 상봉오동 하촌 진입.

 

11시경: 월강추격대, 중촌에서 아침 식사 후 상촌으로 진출개시.

 

12시경: 월강추격대 선발대, 상촌 진입.

 

13: 대한독립군, 상촌 작전지역 내로 진입한 월강추격대 본대에 기습공격 개시.

 

오후: 월강추격대, 포위된 것을 알고 탈출하기 위해 서산 4중대 1개 소대를 향해 돌격하였으나 협공에 당하고 다른 길로 후퇴하기 위해 비어 있는 남쪽으로 전진하다가 매복해 있던 신민단에게 협공 당함.

 

1640: 갑작스러운 우박과 폭풍으로 인해 전투 불가능하여 철수

 

야간: 조선주재 일본군 19사단 사령부비파골로 이동한 월강추격대에 본대로 철수명령.

 

(독립군월강추격대 46명 사살. 월강추격대 150여명이 사살됐다고 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기에 사기를 위해 부풀린 측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악천후가 아니었다면 월강추격대는 전멸을 면하지 못했을 정도로 기본 전술배치에서 조차 이미 승기를 놓쳤다.)


 

 

 


<홍범도 장군이 의함 유신석에게 보내는 초서로 흘려 쓴 편지군자금과 영수증에 대한 내용과 안부. 친필이라면 대단한 명필가이며, 동시에 학문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양감영 나발수 선발 문장 시험에 합격했으며 산사에서 2년간 한문을 배웠다. (지금도 포탈 사이트인 네이버의 책 소개란에 나오는 어떤 책에는 홍범도가 일자무식이라고 버젓히 적어 놓고 있다.)>

 


 

<대한독립군(홍범도) 예하 어느 중대의 소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들. 일본군 입수품.>


일본군 19사단이 봉오동까지 침입한 사태는 중국측의 반발을 불러왔고, 진상조사에 나서 독립군의 군세가 강함을 알게 된다. 일본은 독립군의 강한 군세를 이유로 더욱 더 중국을 압박했으나 중국의 거부로 목적을 관철하지 못했다. 7 16일 일본은 "일본군 1개 연대 규모로 2개월간 간도 지역의 불령선인을 토벌하겠다"라고 길림성장이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길림성은 중국군이 독자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겠다고 나섰다.

 

길림성은 혼성2여단 예하 1(맹부덕, 120여명)을 동원해서 7월에 준비를 마친후 8월에 작전을 개시하기 직전에 국민회 등에 중국군 계획을 미리 알리고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협조하기 바란다. 토벌 기간중 도시나 대로변에서의 행동을 자제하고, 산 속으로 숨거나 기지를 연길로 변두리의 돈화현 또는 안도현 접경 지역으로 옮기도록 하라"며 제안했다.

 

대한독립군(홍범도)은 각각 명월구와 이청배 주둔지를 떠나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하여 남완특구와 북완특구로 산개 주둔했다. 직후에 대한국민회군,대한의군부군,대한신민단,대한광복단 등이 집결하여 연합군 형식이 됐다.

 

북로군정서는 같은 시기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으로 이동주둔해서 군사무기체계 확충에 나섰다.

 

(77일 의란구에서 열린 간도지역 독립군 연합회의에서 즉각전투 보다는 실력배양으로 결론을 내리자 행동적 독립전쟁론자였던 홍범도는 실망하여 북로독군부를 탈퇴하고 과거의 대한독립군으로 돌아가자 북로독군부는 자동으로 해산되어 군무도독부만 남게 되었다.

 

홍범도는 당시 여러 전투에서 감당한 역할과 올린 성과를 보면 김좌진보다 더 높게 평가돼야 한다.

 

하지만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홍범도는 북한지역 출신에다가, 말년에는 홍범도의 군세를 서로 자기 예하로 끌어 들이려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농간에 의해 조선인 공산당 무장병력을 앞세운 소련에게 무차별하게 공격당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강제 해산당한 후에는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소련에서 연금을 받으며 노후를 보냈다는 측면에서 비중이 낮게 다뤄지고 있다고 본다.

 

김좌진도 끝내는 조선인 사회주의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홍범도가 독립군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준 최진동 마저 당시 상봉오동과 하봉오동의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대지주였기에 끝내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2차 이동

 

828일부터 98일까지 의란구, 명월구, 동불사 지역에서 벌인 형식적인 토벌에 대해 일본측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중국은 916일부터 9 30일까지 대감자, 봉오동, 서대파에서 2차 토벌작전을 진행했다.

 

이에 따라 북로군정서(700여명) 9 17~18일에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 10일경 안도현 경계 화룡현 청산리 3도구 근처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완료했다.

 

 

 


<일본군 조선주둔 19사단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는 모습>


3.
일본군의 만주 침입과 독립군의 일본군 섬멸작전

 

10 2 - 마적단(장강호, 400여명), 훈춘현성 2차 약탈.
10
6 - 일본군 19사단, 간도 침입.
10
7 - 일본, 일본군의 간도 출병 결정.
10
12 - 북로군정서, 청산리 부근 도착. 삼도구 묘령에서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합동작전회의(이 번 전투는 회피하고 군사력 증강하기로 결정).
10
13 - 일본, 19사단에 간도출병 작전명령 정식 하달. 북로정서군, 청산리 부근으로 이동.
10
17 - 일본군 대독립군 간도 작전 전개.
10
21 - 북로군정서, 청산리 전투.

10 22 - 북로군정서, 천수동 전투. 대한독립군, 완루구 전투.
10
22 -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홍범도), 어랑촌에서 연합작전 전투.
10
24 - 북로군정서 2제대, 일본군 1개 중대와 천보산 광산촌 전투.
10
26 - 대한독립군(300)과 북로정서군 1제대(50) 연합대, 고동하 전투 후 안도 방향으로 이동.
10
27 - 북로정서군과 대한독립군, 황구령촌으로 이동 주둔.


마적단의 훈춘현 2차 습격과 일본군의 침입

 

10 2일 새벽 5시 일본의 청부를 받은 400여명의 한족 마적단(장강호)이 야포 3문을 앞세워 훈춘현을 2차로 습격해 왔다. 훈춘현 중국군 병사들은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일본군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형식적 도움에 그쳤다. 마적단은 중국군 60명을 비롯해 조선인 7명을 살해하고, 일본영사관과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여 일본인 14명을 죽이고 30여명을 부상시켰다.

 

일본은 마적단에 조선인이 100여명이나 있었다고 주장하며, 훈춘 일본영사분관의 긴급보호요청을 내세워 2일 오후 경원수비대 80명을 훈춘에 파병했다. 3일에는 경원헌병대 6, 보병 1개 중대(소좌 안부安部, 30)을 추가 파병했다.

 

한족 마적단에 끼어 있는 불령선인(조선인), 중국군, 과격파 적군(사회주의자)은 일본의 적대세력이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요했다. 4일에는 20사단 78연대 3대대를 추가하고, 사건지역과 무관한 용정촌에도 1개 중대를 파병했다.

 

12일부터 양일간 동3성 순열사 장작림과 간도의 불령선인을 토벌하도록 승인에 대한 협상에 나서 거부당하자, 14일에는 중국의 양해 없이 간도에서의 불령선인 토벌을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16일에는 간도 총영사를 통해 "작전지역으로 중지철도 남쪽 20리 이외의 동녕현,훈춘현,연길현,왕청현을 선정하고 작전기간은 2개월간이며, 작전개시일은 17 00시"라고 길림성에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28일 중국은 일본의 힘에 굴복해 "중일협동토벌협정"을 체결하고 동녕현,훈춘현,연길현,왕청현,화룡현에 대한 일본군의 활동자유를 보장하고 만다.

 

<일본군 대 한국 독립군 전투 작전 지도>

 

일본군 작전계획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중장 대정이랑(大庭二郞) 8월 초에 미리 작성해 놓았다가 중국의 거부로 인해 실시하지 못했던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다시 입안해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보고한 바 20일에 허가됐다. 8월에 작성된 작전계획서에는 9월 하순에 작전을 개시해서 1110일까지 작전을 완료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0 9일 참모총장 상원용작(上原勇作)은 참모본부 작전명령 제57호 훈령을 하달했다.

 

"19사단 일부(9,000여명)로 훈춘과 간도에서 불령선인과 동조한 마적을 초토할 것, 14사단 예하 1개 보병 여단을 추가 파견할 것, 14사단 예하 1개 보병 여단은 포?Posyet에 상륙해 불령선인에 대한 시위 행동을 할 것, 1개 부대를 삼차구 부근를 출동시켜 나자구 부근으로 진출케 할 것, 1개 부대를 토문자 부근으로 진출시켜 다른 부대와 책응하게 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3사단 항공대 공군기 4대를 차출해 지원토록 했다.

 

11일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중장 대정이랑(大庭二郞)은 작명 제3호를 19사단장에게 보냈다.
 
-
보병 3개 중대로 편성한 1개 부대를 편성해 해림에서 합막당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보병 4개 중대와 기병 3개 중대로 편성한 1개 부대를 삼차구에서 나자구로 진출시키고, 보병 4개 중대로 편성한 1개 부대를 토문자 부근으로 진출시키고, 이들 부대는 해() 지역을 토벌하면서 간도지역의 탈출로를 봉쇄하라.

-14사단 28여단은 포세트에 상륙하여 훈춘 간도 지역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시위를 목표로 훈춘-양수천자-국자가-회령으로 행동하라.

-보병 6개 대대로 편성한 토벌대는 "간도 불령선인 초토계획"에 따라 훈춘현 왕청현, 연길현, 화룡현에서 불령선인을 초토하면서 안도와 돈화 지방으로 도피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13 19사단장 중장 고도우무(高島友武)는 예하 37,38여단에 훈령을 하달했다.

 

-11사단 일부 병력(1,000여명)은 바라바쉬에서 토문자 방면으로 진출하고,

-13사단 일부 병력은 삼차구에서 노흑산과 나자구 방면으로 진출하고,
-14
사단(포조浦潮 파견군) 28여단(4,000여명) 10월 하순 포?항에 상륙하여 시위를 목적으로 훈춘,양수천자,국자기,회령으로 행동하라.

-기림(磯林) 지대는 갑 구역(훈춘현) 내의 적을 초토하라.
-
목촌(木村) 지대는 을 구역(왕청현) 내의 적을 초토하라.
-
() 지대는 병 구역(연길현,화룡현) 내의 적을 초토하고 적이 돈화와 안도 방면으로의 탈출을 저지하라.
-
상황에 따라 국경수비대를 본 토벌작전에 책응시킨다.  (국경수비대: 안서(安西)지대(1,000여명): 3개 중대, 기관총 4개 소대, 기병 1개 소대)

-사단 지휘소는 16일에 회령으로 추진한다.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를 쫓던 동(東正彦) 지대 예하 어느 보병 부대의 행군 모습>



일본 전투작전 부대 편제

 

-기림(磯林) 지대:
지대장:38여단장 소장 기림직명(磯林直明), 38여단사령부, 75연대 제1,2대대( 2개 중대씩 결원. 기관총 2개 소대, 특종 포대, 통신반, 위생반), 78연대 제3대대(기관총 1개소대, 통신반, 위생반), 기병 27연대 3중대(1/2 소대 결원), 포병 25연대 2대대 야포 1개 중대(75mm 6, 산포 1개 소대), 공병 19대대 2중대.

 

-목촌(木村) 지대:
지대장:76연대장 대좌 목촌익삼(木村益三), 76연대 1,2대대( 2개 중대씩 결원. 기관총 2개 소대, 특종포대, 통신반, 위생반), 기병 27연대 2중대 1개 소대, 산포병 1중대(1개 소대 결원), 공병 19대대 1중대 1개 소대, 헌병.

 

-() 지대:
지대장:37여단장 소장 동정언(東正彦), 37여단 사령부, 73연대 2,3대대(10중대 결원. 기관총 2개 소대, 특종 포대, 통신반, 위생반), 74연대 2대대(기관총 2개 소대, 통신반, 위생반), 기병 27연대 1중대,2중대(1개 소대 결원), 포병 25연대 1대대 야포 1개 중대(75mm 6), 공병 19대대 3중대, 헌병

 

-사단 직할대:
자작 겸 중장 고도우무高島友武, 74연대 1대대 본부중대와 3중대, 항공반, 무선전신반, 구 통신반(전서구)

 

일본군이 이러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미 북로군정서(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국민회(안무)는 왕청현과 연길현에서 화룡현 서부 산악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군무도독부(최진동)는 왕청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일본군의 선봉토벌대의 기세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10
일 경

대한독립군, 득미동으로 이동주둔. 북로군정서, 어랑촌 부근으로 이동.

 

11

일본군 19사단 73연대(대좌 산전山田), 용정현 두도구 도착

 

13

일본군 73연대, 묘령과 삼도구 정찰 후 용정현으로 복귀

 

15

()지대 본대(소장 동) 용정현 도착 집결완료. 한국 독립군 부대들이 청산리 계곡을 통해 안도현으로의 탈출을 획책할 것으로 판단하여 작전계획 수립.

 

16

국자가 지역 전투대: 74연대 2대대, 기관총 1개 소대
천보산 지역 전투대: 73연대 2대대, 기관총 1개 소대
두도구 지역 전투대: 73연대 3대대

 

용정현 임시 주둔:


()지대 사령부.
73
연대 본부와 2대대 2개중대, 3대대 1개 중대, 기관총 1개 소대, 특종 포대, 통신반.
74
연대 본부와 2대대 2개중대, 기관총 1개 소대, 특종 포대, 통신반1/2.
기병 27연대 1,2중대.
야포병 25연대 1대대 1개 중대.
공병 19대대 3중대.

 


 


<한국 독립군 독립전쟁 청산리 일대 전체 전투 지도>

 


17

 

야간: 동 지대 사령부, 예하부대에 작전명령 하달.

 

-73연대 5개 중대 중 일부는 청산리 계곡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 후방 차단, 주력 중대들은 독립군 추적 섬멸.
-
기병27연대(대좌 가노加納)는 후차창구(後車廠溝)-전차창구-승평령 가도로 우회 기동하여 노령 방면 적 퇴로 차단.
-74
연대 2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야포병 1개 소대는 예비대로 두도구에 주둔.
-
지대 사령부 두도구로 이동.

 

산전(山田) 토벌대(우종대-73연대 3대대 2개중대. 좌종대-73연대 2대대 2개 중대, 3대대 1개 중대, 기관총 1개 소대, 야포병 1개 중대) 편성.

 

우종대右從隊(소좌 중촌中村), 두도구에서 봉밀구로 우회 진출 후 독립군 후방장악과 탈출 저지.
좌종대(대좌 산전山田), 용정촌-팔가자-삼도구-청산리로 독립군과 전투.

 

18

 

기병27연대, 용정촌-두도구-승평령 거쳐 안도(송강진)를 목표로 기동.


우종대, 두도구에서 봉밀구로 진출.
좌종대, 용정촌-팔가자-삼도구-청산리로 이동개시.

 

동 지대 사령부, 득미동 남쪽 만리동에 대한독립군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 입수.

 

19

 

우종대, 봉밀구 서남쪽 3Km 지점에서 중국 마적단과 교전.

 

예비대, 이도구로 진출. (예비대: 74연대 본부와 2대대 2개중대, 기관총 1개 소대. 야포병 25연대 1대대 1개 중대. 천보산 지역 전투대 73연대 2대대 1개 중대)

 

20

 

천보산 지역 전투대 73연대 2대대 1개 중대, 이도구 예비대에 합류.

 

좌종대, 청산리 계곡 안으로 진격개시.

 


야간: 북로군정서 송하평에서 백운평으로 이동하여 야간대책회의, 1제대(김좌진, 비전투원), 2제대(이범석, 사관 연성소 졸업생 600여명)로 부대 재편성, 1제대가 진로개척, 2제대가 일본군 추격 저지하기로 계획수립.

 

청산리 백운평 전투

 


북로군정서 편제 (청산리 전투 당시)


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 한건원 백종열 김훈, 보병 대대장 김규식, 부관 김옥현, 1중대장 강화린, 특무정사 나상원, 2중대장 홍충희(대대장 서리 겸직), 3중대장 김찬수, 특무정사 권중행, 4중대장 오상세, 1중대 1소대장 강승경, 2소대장 신희경, 2중대 1소대장 채춘, 2소대장 김명하, 3중대 1소대장 이익영, 4중대 1소대장 김동섭, 2소대장 이운강, 기관총대 1소대장 김덕선, 2소대장 최인걸 - 독립신문 95

 

21

 

새벽: 좌종대, 선발추격대(소좌 안천安川, 1개 중대) 편성해 이도하 계곡 탐색개시.

 

07: 북로군정서, 봉밀구 계곡방향으로 북상 시작. 노령과 침령 사이 고개마루 남쪽에서 일본군의 급추격에 전투준비태세 돌입.

 

1제대, 고개마루 부근 사방정자의 산기슭 2제대 정면 후방에서 예비대로 은폐하며 지휘.

2제대, 1개 중대(이민화)는 우측 산허리, 1개중대(한근원)은 좌측 산허리, 1개 중대(김훈)는 정면 우측, 1개 중대(이교성)는 정면 좌측으로 분산 엄폐.

 

08: 좌종대 선발추격대 첨병소대, 백운평 공지에 진입했다 사상자를 내고 퇴각.

 

오전: 북로정서군, 계곡에 진입한 좌종대 본대와 전투에서 200~300명 사살.

 

오후:

 

2제대, 봉밀구 정찰결과 일본군(우종대) 접근을 파악하여 1제대에 1시간후 출현할 것임으로 갑산촌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

 

동 지대 예비대 어랑촌 부근 와룡촌에 진입. 기병27연대(대좌 가노加納) 안도에서 와룡촌으로 복귀.

 

(기병27연대는 안도까지 진출했으나 기마병에게 불리한 습지라서 노령까지 진출하지 못하고 와룡촌으로 이동했다.)

 

기병27연대 일부 만리동 북쪽 오도향차 방향으로 파견하여 대한독립군 퇴로차단, 1개 기병소대 천수동에 파견하여 대한독립군 감시.

 

북로군정서, 갑산촌으로 이동개시.

 

야간: 우종대, 침령에서 노령으로 길게 이어지는 고개마루 가운데 한 곳에서 좌종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전투로 상호 사상자 발생.

 


(청산리 백운평 전투는 증봉산 아래 2m 높이 폭포인 직소택에서 치뤄진게 아니라 양쪽에 절벽이 있고 공지가 있는 돌마당이라는 곳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천수동 완루구 어랑촌 전투 지도>

 


22

 

02: 북로군정서, 갑산촌 도착.

 

천수동 전투

 

04 30: 북로군정서, 천수동으로 이동개시.

 

05 30: 북로군정서, 천수동 척후 활동. 동 지대 기병27연대 1개 중대병력 확인. 1제대 2개 중대(김훈,이민화)는 천수동 외곽 포위하고 2개 중대(이범석)는 기병 27연대 1개 중대(중위 도전道田)를 정면에서 강습.

 

(기병중대에서 4명만이 탈출해 와룡촌으로 퇴각했다.)


완루구 전투

 

대한독립군, 만리동에서 취침하던 중 습격 예감이 들어 천리봉 산기슭으로 이동 매복.

 

새벽:

 

동 지대 예비대 예하 반야(飯野) 대대(2개 중대, 1개 기관총 소대), 2개 대로 분산 편성하여 1대는 남완루구를 통해 북으로 진격하고, 2대는 북완루구 통해 남으로 진격하여 남북포위 공격 시도.

 

대한독립군. 예비대 편성해서 반야 대대 2대를 측면 공격하는 척 하다가 천리봉으로 회피해서 은신.

 

07시경: 반야 대대 1대와 2, 대한독립군의 복장이 일본군 복장과 유사해 대한독립군으로 서로를 오인하여 상호교전 개시하여 400여명 사망. (대한독립군, 소총 240자루와 탄약 500여발 노획)

 

(반야 대대가 오인 상호교전으로 대부분이 사망했지만, 400여명 사망설은 편제 인원상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250여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랑촌 전투

 

07: 북로군정서, 천수동 전투 노획물에서 일본군이 어랑촌 부군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입수하고 천수동 북쪽 874고지 선점하여 전투태세 준비.

 

오전:

 

동 지대 예비대와 기병27연대, 874고지 점령 위해 총력전투 도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가 선점한 874고지 옆 고지 점령한채 일본군 배후 기습작전 전개.

 

(일본군 1,000~1,600명을 사살 (1,000(이범석 회고), 1,300(중국 관변), 1,600(북로군정서 발표), (상해임시정부는 300명으로 발표). 독립군 100명 전사.)

 

(어랑촌: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漁浪社)에서 살던 사람들이 개척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라 붙혔다.)

 

오후: 어랑촌 전투 직후, 북로군정서 2제대는 노두구 방향으로 북상하고 1제대는 대한독립군과 합류해 서쪽 방향으로 이동.

 

15: 북로군정서 2제대, 맹개골에서 일본 기병 10명 사살. (군마 5, 지도 4장 노획)

 

오후: 북로군정서 2제대, 만기구 후방 산림에서 일본 보병 30여명 사살.

 

야간: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 1제대, 서쪽 삼림 지대를 통과하여 고동하변으로 이동.

 

23

 

오전: 북로군정서 2제대 50여명, 쉬구 산림에서 일본군 보병 100여명 발견하고 기습. 직후에 접근하던 기병 1개 소대 기습.

 

오전~오후: 동 지대 예비대와 기병27연대, 만리동 정밀 수색.

 

천보산 전투

 

24

 

20,21: 북로군정서 2제대(이범석), 천보산 서남쪽 부근의 광산에서 73연대 2대대 1개 중대와 2차례 교전. 73연대 2대대, 1개 중대와 기관총 소대 증원파견.

 

25

 

새벽: 북로군정서 2제대, 천보산 서남쪽 부근에서 73연대 2대대 1개 중대와 재교전.

 

(3차례 천보산 전투에서 독립군 2명 전사, 일본군 사장자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음. 하지만 1개 중대와 기관총 소대가 추가 증원된 것으로 보아 일본군의 사상자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전: 동지대 예비대, 추격대 편성(소장 동정언東正彦, 보병 150(소좌 반야飯野, 기관총 3)), 압북동에서 주민심문을 통해 고동하변으로 대한독립군 추격개시.

 

야간: 북로군정서 2제대, 천보산 광산촌에 이르러 천보산지역 전투대 73연대 2대대 1개 중대를 기습하여 교전. 2제대, 분산되어 일부는 돈화현, 이범석 일행은 왕청현으로 이동.

 

25

 


22: 동 지대 예비대 추격대, 대한독립군 야영지 발견.

 


<고동하 전투 지도>

 

고동하 전투

 

26

 

00~: 추격대(150여명), 대한독립군 야영지 급습. 대한독립군, 신속하게 대피한 후 포위대형으로 역습하여 일본군 2개 소대 100여명 사살. 동 지대 예하 추격대, 포위망 뚫고 탈출.

 

오후: 추격대, 1743 고지로 이동하여 선점해서 차후 전투에 대비했으나, 대한독립군은 1743 고지를 무시한채 안도 방면으로 이동. 추격대, 와룡촌 사령부로 철수.

 

27

 

북로군정서 1제대, 고동하를 따라 남하하여 노령을 넘어 황구령촌(黃勾)에 집결. 대한독립군, 황구령촌 이동하여 북로군정서와 회합.

 

(김좌진은 왕청현 방면으로 북상하여 일본군과 떨어진 지역에서 군사를 조련하자는 의견을 냈으며, 홍범도는 백두산과 가까운 안도 지역에서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양의견의 차이는 사적인 부분도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가족단위 부대로 가족과 함께 이동하고 주둔하여 생활했던 반면에 대한독립군은 순수하게 장정만으로 편성된 부대였기 때문이다.)


4. 3
차 독립전쟁 준비를 위하여

 

10 - 국민회군, 삼도구 우심산 서쪽에 집결, 군무도독부 나자구로 이동. 서로군정서군, 내두산에서 광복단과 합류.

10월 말 - 마적단(장강호,중야천락中野天樂. 500), 내두산 서로군정서(이청천) 급습. 서로군정서군, 황구령촌으로 후퇴 개시.

11월 초순 - 대한독립군, 황구령촌에서 서간도지역 독립군 잔류대 통합해 병력 400명으로 확충해 안도 남쪽 내두산으로 이동 중 서로군정서군과 합류.
11
6 - 마적단, 안도현 점령.
11
7 - 북로정서군, 병력200명으로 재편성후 오도양차를 지나 왕청현 방면으로 이동.
11
6~10 - 대한독립군, 중국군 혼성부대원 1,200명과 함께 안도현 탈환. 대한독립군, 대사하자를 떠나 연길현 경유해 왕청현으로 이동. 독립군 왕청현 북부지역에서 재결집, 안도현에서 대진단 조직(김중건 등).
11
20 - 일본군, 2단계작전 청야작전 개시- 교민살해, 마을파괴, 가축소각, 귀순심리전.
12
- 독립군, 소만국경지대 밀산으로 이동.

 

 

 

<마적의 서로군정서 습격과 대한독립군 안도 탈환 전투 지도>

 

안도 탈환 전투

 

10월 하순

 

마적단(중국인 장강호, 일본인 중야천락中野天樂: 500여명), 내두산 서로군정서 기습. 서로군정서(이청천), 황구령촌 방향으로 퇴각.

 

(10 25일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이 중국 육군대신과 참모총장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독립군이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했기에 간도 출병 일본군이 토벌할 수 있게 해달라"라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마적단을 매수한 것이다.)

 

11

 

초순

대한독립군, 황구령촌에서 내두산으로 이동개시. 서로군정서 황구령촌 인근에서 내두산으로 이동중이던 대한독립군과 만남.

 

6

마적단, 안도현성 점령하여 대사하자의 대한독립군 공격 준비.

 

7

북로군정서 1제대, 오도양차를 거쳐 천부산 서쪽을 따라 왕청현으로 이동개시. (11월 중순 도착)


6~10

대한독립군, 중국 혼성부대와 연합하여 안도현성 탈환 준비 후 탈환 작전 돌입. 마적단 내두산 방향으로 퇴각.

 

20

일본군, 1단계 작전 종료.

일본군, 2단계 작전 청야작전 시작. (독립군의 존재 기반이 될 수 없도록 조선인 마을 말살 작전)

 

11월 하순

대한독립군과 서로군정서, 대사하자를 떠나서 연길현을 거쳐 왕청현으로 이동.

 

12

독립군 연합, 연해주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전쟁 준비 계획 수립.

북로군정서, 국민회, 군무도독부는 먼저 밀산으로 이동.

 

20

일본군, 2단계 작전 청야작전 종료.

 

1921

 

1 15

일본군, 간도 파견대를 제외한 작전부대 완전 철병.

 

3

북로군정서, 국민회, 군무도독부. 이만으로 이동하여 대한총군부 결성.

 

4 12

북로군정서, 국민회, 군무도독부,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이만에서 회합하여 대한총군부를 대한독립단으로 확대 개칭.

 

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 고문: 백순, 김호익, 외교부장: 최동진, 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김좌진, 참모: 이장녕, 나중소, 군사고문: 이청천, 1여단장(이만): 김규식(참모 박영희), 2여단장(영안현): 안무(참모 이단승) 영안현 사관학교: 이범석, 김홍국

 

 

* 내용은 항상 더 자세하고 올바른 내용으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블러그니까요.

 

(뱀 다리 그리기: 독립전쟁 전투, 많이들 들어 보고 읽어 봤지만 너무나 시각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항상 느꼈습니다.

 

다들 사진이라고 해봐야 기념탑 앞에서 찍어 온 사진들이고, 특집 프로그램으로 다룬 내용들도 지금의 너무나 변한 현장의 영상만 보여 줄 뿐이었습니다책을 읽어 봐도 지명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라서 그저 환상같은 상상 속에서만 막연하게 받아 들어야 했습니다.

 

검색 전문 구글에서조차도 지도로 작성된 독립군들의 전투지도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은 독립전쟁 당시에 관한 지도 자료들이 많이 작성되었지만, 한국 독립전쟁에 관한 지도들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독립전쟁이네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네 하고 있지만 개념화를 돕기 위한 지도같은 시각화 자료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독립기념관 조차도 전시관에 독립전쟁 지도는 아에 없고, 그나마 일본군이 작성한 봉오동 진입도 사진마저 못 알아 보도록 축소해서 올려 놨더군요.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은 가져다 쓰기 편한 세상이 됐지만, 다들 바빠서인지 찾으려고만 하지  함께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자료들을 직접 작성해 보려는 수고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답답해서 직접 당시 봉오동 전투며 청산리 전투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시각적인 도움을 드리고자 지도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이런 시도를 누군가가 처음으로 시작하면 십시일반 여러 사람이 나서게 되어, 지적하고 수정하면서 결국에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 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청원드립니다.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목적하에서 복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몇 몇 글들이 자신이 작성했다고 하면서 돌아 다니고 있는 실정입니다.

 

퍼가는 것은 정보공유 정신에 따라 좋지만, 글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면서도 쉽게 다른 사람들의 일기가 됐던 뭐가 됐던지 간에 자신이 작성한냥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보공유를 목적으로 자료를 무료로 작성해서 서로 공개적으로 알려 서로의 지식이 되게함으로써 지식강국 대한민국이 되도록 글을 작성하는 많은 사람들은 힘이 빠집니다.)

 

 

원문출처 : qnwkkr블로거 (http://blog.naver.com/qnwkkr/120103869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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