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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패왕별희] 관계자들이 말하는 장국영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초스압)

작성자블루노트|작성시간15.03.16|조회수59,529 목록 댓글 2

 

  


* 관계자들 (첸카이거 감독, 메이크업 아티스트, 경극 사부)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처음 데이의 역할은 마지막 황제 존론이 맡기로 되어있었는데, 스케줄 문제로 인해 무산되고, 장국영이 캐스팅되었어요. 장국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원작을 영화화하려는 제작사들에게서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받은바 있었고, 본인도 관심이 있었지만 메이드되지 않았다가 첸카이거가 감독을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전에 장국영은 첸카이거의 데뷔작인 <황토지>를 인상 깊게 봤었고,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영화로 몇 차례 <황토지>를 언급했었어요.

 



 

‣ 첸 카이거 (각본/감독)

 

홍콩에서 장국영을 처음 만난 날. 내가 <패왕별희>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장국영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그림처럼 앉아서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경청하고 있었다. 







얘기를 마친 후 나는 장국영에게 "당신이 청데이를 맡아줘서 기뻐요."라고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

 

(장국영이 대륙 출신이 아닌 광동어를 쓰는 홍콩 출신이고, 경극이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캐스팅에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처음엔 첸카이거도 처음엔 반신반의 했던 모양)

 

그러자 장국영이 그런 나의 속내를 꿰뚫어보기라도 한듯이

"저는 청데이에 적격이에요. 저는 항상 예술 속에서 살고 있고, 제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제 자신이 바로 청데이예요."

라고 말해서 그때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장국영은 인터뷰에서 "진정한 예술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었죠. 자신의 영어 이름도 중성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레슬리라고 지었다고...)

 






그랬던 내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장면이 있었는데...

 




  

 

샬로에게 보검을 찾아주기 위해 원대인의 집을 찾았던 데이가 유린당하고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다가 일본군에게 둘러싸이는 장면이었다. 장국영을 인력거에 태워놓고 우리는 촬영준비를 한 후 촬영에 들어갔는데, 장국영이 탄 인력거의 덮개를 들추는 순간 장국영의 입가에 번진 연지는 마치 피를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장국영의 눈빛에 담긴 절망과 비애가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실제로는 몇 초 되지 않는 굉장히 짧은 장면이고 영화에선 데이가 울지 않는데, 장국영은 촬영이 끝난 후에도 데이의 감정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계속 울고 있었다. 나는 그저 조명을 모두 끄라고 지시하고 장국영이 어두운 곳에서 혼자 감정을 추스르게 해줬다. 그때 나는 비로소 처음 만난 날 장국영이 말했던 "저는 청데이예요"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장국영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인물에게 투입해 새로운 경지를 창조하는 배우였다. 그의 눈빛이 바로 사랑과 시대의 반역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 그 자체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패왕별희>는 굉장히 몰입해서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촬영에 임했던 작품이어서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후유증이 엄청나게 컸다. 영화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던 중, 어느날 잠을 자는데, 예쁜 푸른색 옷을 입은 데이가 꿈에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이만 안녕” 이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는데..

꿈에 나온 사람이 장국영인지 청데이인지 알 수가 없었고, 왜 그런 꿈을 꿨는지도 몰라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 일이 있고 10년 후 장국영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때 그가 내 꿈으로 찾아와 미리 작별인사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하게 된다. 장국영을 처음 만난 날 그가 했던 말처럼 그는 정말 청데이처럼 살다가 떠났다. 사실 나는 그와 마주보고 있을 때에도 왠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국영의 눈빛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먼 과거의 어느 화려한 꿈속에서나 본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 송소천 宋小川 (경극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

 



 

장국영에게 나를 소개해준 사람은 바로 패왕별희의 원작자인 이벽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가 너무나 유명한 세계적인 스타여서, 거만하거나 까다로울까봐 걱정했다. 그러자 이벽화는 장국영처럼 상냥하고 좋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를 만나는 순간 나의 모든 염려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만난 그날 우린 바로 친해져 버렸다. 그래서 그보다 네살이 어린 나는 촬영하는 내내 장국영의 숙소인 호텔 스위트룸의 리빙룸에 묵으며 그의 어시스턴트를 자처했다. (전화 받고 팩스 받고 뭐 그런 일을 도와주는)

 

 



장국영은 촬영에 들어가기 두 달 전에 이미 북경으로 와서 경극연습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습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프로 경극배우들도 반년이나 걸려야 겨우 습득하는 동작조차 열흘 만에 모두 완벽하게 해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내가 놀라워할 때마다, 장국영은 기뻐하며 "몰랐지? 나는 전생에 경극배우였단다." 라고 농담을 했다.

 

 


 

 

데이의 가발과 머리장식은 굉장히 무거워서 매일 7-8시간 동안 그걸 쓰고 있으면 프로 경극배우들조차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첸 카이거 감독도 장국영에게 휴식시간에는 가발 좀 벗고 있으라고 권했는데, 촬영 장면의 느낌을 유지하고 싶었던 장국영은 휴식시간에도 내내 무거운 가발을 쓰고 있길 고집했다.

 

 



  

숙소를 함께 쓰는 동안 몇 번 트러블이 있었는데, 평소엔 상냥하고 친절하다가도 문득 예민해지는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 한 바탕 싸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촬영을 하다보니까 장국영이 예민하게 구는 날의 패턴을 알게 되었다. 바로 다음날 슬픈 장면을 찍어야 되는 날마다 장국영은 예민하고 우울해졌던 것이었다. 






슬픈 장면의 촬영을 앞둔 장국영은 전날부터 우울해하면서 그 감정에 빠져있었는데, 그럴 때는 그냥 아무 말도 걸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우울해하고 있게 그를 내버려두고 나서부터는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던 날 장국영이 전화를 해주었다.

" 소천아 다 네 덕분이다. 너의 메이크업이 없었다면 데이가 그토록 예쁘지 않았을 거야."

라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 그렇지 않아. 꺼거(중국어로 형, 오빠/ 장국영의 애칭)의 아름다운 얼굴이 없었다면 나도 고운 화장을 할 수 없었을 거야"

라고 그에게 말해줬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홍콩으로 돌아간 장국영은, 경극 사부님들과 나를 홍콩으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영화판 일이라는 게 보통 영화가 끝나면 모두 끝나는 관계가 대부분이라 그의 행동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장국영같은 대스타가 나를 이렇게 대접해주는 이유가 뭘까? 장국영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가 말했다.


"나는 성실한 사람이다. 네가 나에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제대로 보답하고 싶다."


이후로 장국영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경극 사부님들과 나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그의 39세 생일 파티 때도 홍콩으로 초대를 받아서 갔었고, 한번은 그가 친구들과 함께 북경의 우리 집에 놀러온 적도 있었다.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촛불을 켜놓고 CD로 그의 노래를 함께 들었다. 장국영이 나에게 자신의 노래 중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寂寞夜晚 - 우리나라 CF에서 사용된 TO YOU의 원곡>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북경어 버전을 들어봤냐고 묻기에 내가 못 들어봤다고 했더니, 우리를 위해서 즉석에서 북경어로 노래를 불러줬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저음의 허스키 보이스인 그의 목소리엔 영혼이 담겨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냐고 묻자 장국영이 말했다. “글쎄 그저 나는 한곡의 노래도 한 편의 영화처럼 어떤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해. 그래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 스토리를 상기하게 되는 것 같아.”

 





 

그가 중국 본토 투어를 했는 때, 나를 초대해줬다. 나는 그와 동행해 각지를 돌았는데 콘서트가 한 번 끝날 때마다 그는 초조해하며 나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첨하는 게 아니라 나는 꺼거가 정말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해. 모든 몸짓은 꺼거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고, 눈빛에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어.” 라고 진심으로 말했다.





언젠가 장국영이 내가 분장을 맡은 경극을 보러 북경까지 와줬었는데, 그가 객석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그 공연장 안에 있던 절반 이상의 사람이 모두 그를 향해 쇄도하는 바람에 엄청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공연이 끝나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소천아 너는 절대 이 일을 그만두지 마. 너는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장국영의 그 말은 나를 몹시 감동시켰다.

 




장국영은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자신은 늘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고 그는 종종 말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항상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소천아 잘 지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떠셔? 장선생님과 사선생님(장국영의 경극 사부들)은 어떻게 지내셔?”라고 주변 사람들의 안부까지 빼놓지 않고 물었다. 언젠가 그에게 사 선생님이 암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그는 곧장 뵈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가 선생님 댁에 병문안을 간 날, 평생 장군 역할만 해온 강인한 선생님이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장국영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무명 시절과 가난도 모두 극복했는데, 도대체 마지막에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장국영은 종종 말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정에 굶주려있고, 항상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있어주길 원했었다. 그랬던 그가 우리를 남겨놓고 홀로 떠나가 버렸다. 그가 하늘에서 혼자 쓸쓸하게 지낼까봐 걱정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계속 기억해주고 사랑해줘서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 장만령 張曼玲 (중국 경극원의 최고 실력자이자, 장국영의 경극 스승)

 

 

나의 남편 사연생과 나는 1993년 패왕별희 촬영 때 장국영을 처음 만났다. 우리는 그의 경극 지도교사였다. 첫째 날 우리가 스튜디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남편이 “당신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간 거예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괜찮아요. 운동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서야 그가 38.9도의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곧장 레슨을 시작하기를 원했다.

 




장국영은 이전에 경극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해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 유례가 드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매일 4시간씩 레슨을 받고, 그 후 호텔방에 돌아가서도 연습을 계속 했다. 모두가 함께 밥을 먹을 때조차, 그는 계속 경극 동작만 생각하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이렇게 움직이는 게 맞아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였다. 연습을 하고 있을 때 그는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고, 내가 칭찬을 해주면 뛸 듯이 기뻐했다.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는 바로 그의 동작을 지적했다. 내가 지적을 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잘 못하지만, 내일은 꼭 제대로 해보일 겁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정말 그는 완벽한 동작을 내 앞에서 선보이곤 했었다.




 

장국영은 예술에 대해 너무나 진지했다. 우희를 연기하기 위해 평소에도 무대의 스텝으로 걸어 다닐 정도로 완전히 우희의 역할에 몰두해있었다. 평생을 경극에 몸담고 살아온 나조차 지금까지 장국영처럼 예술에 대해 헌신적인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는 세계적인 스타였고, 몹시 바빴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북경을 방문할 때마다 아무리 바빠도 꼭 우리 집에 찾아와주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잠깐 짧은 인사만 하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잔뜩 싸와서 우리를 대접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매년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안부 전화를 걸어주었다.



 



남편과 내 앞에서 그는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바닥에 앉아서 무릎을 안고 허물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가 온다고 하면 나는 항상 당근 쿠키를 굽곤 했다. 그가 매우 맛있게 먹어줬기 때문이다.

 




97년에 그가 홍콩에서 콘서트를 할 때, 우리 가족을 모두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 저녁 식사를 대접해줬다. 그리고 호텔까지 따라와선 우리가 호텔방에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업무 상 우리의 교제는 사실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 부부는 그저 경극에 종사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 불과했다. 장국영은 그런 우리에게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고 무한한 우정과 존경을 표현해주었다.





 

내가 결코 잊지 못하는 일이 있다. 98년에 남편이 암에 걸렸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곧장 북경으로 찾아왔다. 당시 남편은 집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장국영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남편을 끌어안고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솔직히 내 남편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내 앞에서조차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장국영이 자신을 끌어안자마자 남편이 울기 시작했다. 장국영의 눈도 붉게 충혈이 되어있었는데, 남편을 위해 억지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는 남편을 자상하게 설득했다.

“더 드셔야 돼요. 많이 드셔야 좋아져요.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가서 사올게요.”

그리고 작은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남편의 손을 잡고 남편의 곁을 지켜주었다.

 




지금은 그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에 없다.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종종 생각한다. “여보, 국영이 외롭지 않게 당신이 잘 지켜주세요.”

 

장국영의 마음에는 항상 애정이 넘쳤다. 그는 연장자, 친구, 어린아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살갑게 대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갈 때도 식당에서 누군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종업원이 와서 요구할 때에도, 주방장까지 뛰어나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도 항상 웃으며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1997년 장국영의 콘서트 땐 중국 중앙 희극 학원의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경극 공연을 펼쳤다. 그 퍼포먼스는 대 성공적이었다. 콘서트가 끝난 후에도 그는 잊지 않고 자신의 무대에 서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북경의 학교를 찾아갔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놀라워했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장국영은 사람과의 교제에서 그 사람의 지위나 신분을 보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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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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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웬즈데이 작성시간 15.03.16 정말 그가 그립습니다.
  • 작성자니나 작성시간 15.03.17 눈물이 나네요.. 유일하게 좋아한 중국계 배우였는데...
    이전에도 이후에도 제겐 장국영을 대신할 배우가 없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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