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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에세이

우주와 생명 그 깨달음의 보고 7. 열린 우주-96%의 나를 찾아서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04.22|조회수160 목록 댓글 0

우주와 생명 그 깨달음의 보고


7. 열린 우주-96%의 나를 찾아서   

 

(이 글은 전체 열여덟 편 중 7번째 글입니다.  이 글은 앞글의 결론의 연장이기 때문에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첫 번 글부터 차례로 읽으시는 것이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칠정(四端七情)은 인성(人性)을 설명하는 성리학(性理學)의 주요 개념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의 근거가 되는 사단(四端)을 살펴보면,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을 가엾이 보고 헤아려 주는 마음으로 인지단(仁之端),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악(惡)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의지단(義之端),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예지단(禮之端),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음과 그름을 가려 행할 줄 아는 마음으로 지지단(智之端)이라고 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을 모아서 사단(四端)이라고 하였다.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사람이 갖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희(喜, 기쁨) · 노(怒, 노여움) · 애(哀, 슬픔) · 구(懼, 두려움) · 애(愛, 사랑함) · 오(惡, 악함) · 욕(欲, 욕심) 등을 말한다. 요즘은 줄여서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표현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유학을 떠받쳐주는 네 기둥과 같다. 서울의 4대문의 이름에도 이 의미가 들어간다. 동대문은 인(仁)을 일으키라 하여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한다하여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한다 하여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북대문만은 지형이 험하고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인지 숙지문(肅知門)이라 하지 않고 숙청문(肅淸門)으로 하였다가 후에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흥인문과 돈의문. 흥인문은 흥인지문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돈의문은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기 전이 모습)

 

 


(숭례문과 숙정문. 숭례문은 2008년 방화로 소실되어 최근 새로 복원되었고, 숙정문은 원래 망루가 소실으나 1976년 복원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은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發)하므로 순선(純善)이요, 칠정(七情)은 기(氣)를 겸(兼)하였으므로 선악(善惡)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양심이라는 거울과 저울이 있다. 하여 우리는 굳이 고등 교육을 받지 않아도 참됨과 그릇됨을, 선과 악을, 아름다움과 추함을 거의 정확하게 구분 할 수 있다. 맹자의 말씀처럼 사람은 본시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고, 사단은 양심과 같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본마음의 표현이고, 퇴계 선생의 말씀처럼 사단은 우주의 본질인 이 즉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사람의 본마음은 하늘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1.26)'는 성경의 경구는 사람의 육체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모습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하느님을 절대선이라 한다면 성선설은 동양과 서양에서 기막힌 어울림을 이룬다.


   그러나 가난한 철학자의 눈에 비춰지는 세상의 모습은 참으로 불의하고 사악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단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칠정의 모습은 점점 커져 세상과 사람은 선과 악으로 갈라지고 그 싸움에서 마침내는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퇴계 선생은 사단의 발로는 순수한 선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사단의 파멸은 교오한 악의 모습이다.


   측은지심의 파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은 점점 사라진다.

   수오지심의 파멸. 악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생산하는 사악한 세력들의 득세하고 있다.

   사양지심의 파멸. 동방예의지국은 이젠 옛 말.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만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시비지심의 파멸. 입시 전문 교육. 지혜를 배우는 교육이 아니라 문제를 풀기 위한 교육 시스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관은 파멸되고 이익이냐 손해이냐 하는 경영논리만이 남아 있다.


   선은 배척당하고, 악은 환영 받는 이 시대에 던지는 또 하나의 물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까지의 과학은 성리학적인 입장에선 기(氣)의 학문이다.

   과학은 음양오행으로 움직이는 기의 세계 즉 물질의 우주만을 우주의 전부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주는 시뮬레이션이며 관념 우주라는 것이 앞의 글들의 결론이다. 이기이원론이든, 이기일원론이든 성리학에서는 기(氣)를 우주의 본질로 보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깨달은 바로는 적어도 기(氣)는 우주의 본질이 아니다.

   정확한 분리는 아니지만 개념적인 관점으로 보면 광학물질의 4%의 우주를 기(氣)의 우주라 한다면, 96%의 미지 물질과 미지에너지의 우주는 이(理)의 우주이다.


   이 글의 수정 작업을 하는 2014년 4월 국가적 재난이 터졌다.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수학여행단 학생들을 실은 커다란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이다. 현재까지 300여명이 사망 실종된 이 사건은 오래도록 슬픔과 아쉬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사건이 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에 제대로 대처했다면 많은 수, 어쩌면 전원 다 구조할 수 있었던 사건인데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이 있었더라면 승객을 남겨두고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정부도 느려도 너무 느린 구조작업으로 이미 빠져나와 처음에 구조되었던 구조자 말고는 단 한명도 구조하지 못하는 치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오지심이 있었더라면 지속된 거짓보고와 거짓보도로 유가족들을 속이지도 온 국민을 우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겸양지심이 있었더라면 정치인들이나 고위관료들이 사진이나 찍으려고 현장과 유가족들에게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선거에 나온 정치인들이 술판을 벌이지도 야구장에서 뱃노래를 부르며 응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비지심이 있었더라면 어찌 구조해야 가장 합리적인 구조방법인지 초기에 판단했을 것이고, 군과 해경이 자기들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않고, 민간의 도움이든 외국의 지원이든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을 것이다.

   온 국민을 자괴감과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몰고 간 이 사건이 어찌 결론 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우주는 구형인가? 푸앵카레 추측]


   1904년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Jules-Henri Poincaré 1854~1912)는 자신의 논문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앙리 푸앵카레와 그이 명언)


 

   기본군[fundamental group]이 영인 3차원 다양체[3 dimentional simply connected manifold]가 3차원 구와 위상동형이 될 가능성이 있을까?


   이후 100여 년 동안 이 문제는 '푸앵카레 추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수많은 수학자들을 사로잡아 왔다. 과연 이 푸앵카레 추측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의 형상에 관한 질문이다.


   쉽게 말해 우리 우주가 공과 같은 구형체인가, 가운데 구멍이 있는 도넛 모양인가를 생각해보는 문제이다.


   '누군가 긴 밧줄을 잡고 우주여행을 떠났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이 우주를 한 바퀴 돌고 지구로 돌아왔을 때, 우주에 빙 두른 밧줄을 회수할 수 있다면 우주는 공처럼 둥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밧줄을 당겨서 회수할 수 없다면 우주공간을 관통하는 거대한 구멍이 있다고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이럴 때는 우주는 도넛 모양이지 동그랗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오로지 밧줄 하나로 우주의 모양이 둥근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푸앵카레는 생각했고,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푸앵카레 추측이다.


   푸앵카레 추측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수학자들이 있다.    1950년대에는 '파파'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리스 출신의 수학자 크리스토스 파파키리아코풀로스, 그의 경쟁자였던 독일 출신 볼프강 하켄 박사, '어떻게 하면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하지 못할까?'라는 제목의 논문을 쓴 존 스털링스 박사가 있었다.

   푸앵카레의 추측은 1960년대 스티븐 스메일 박사와 1980년대 윌리엄 서스턴 박사에 의해 4차원 이상에서의 증명이 완성되었지만 마지막 관문인 3차원에서의 증명은 하지 못한 채 인류는 21세기에 접어든다.

   2000년 미국 클레이 수학연구소는 푸앵카레 추측을 비롯한 수학의 7대 미해결 문제 해결에 각 100만 달러씩 총 7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건다.

 

 

(페렐만과 푸앵카레. 푸앵카레의 추즉을 도식화한 그림)

 

(페렐만의 증명. 증명은 물리적 방법을 이용하였다. 온도, 에너지, 엔트로피 등 물리학의 용어가보인다.)

 

   드디어 2002년 인터넷에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한 페렐만의 논문이 게시된다. 2003년 MIT와 프린스턴 대학, 뉴욕 대학에서 페렐만의 푸앵카레 추측 증명에 대한 특별 강연이 열린다. 2005년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이 페렐만에의해 풀렸음이 6명의 수학자들에 의해 선언된다.

   그리고 2006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수학연합 주최의 국제수학자대회에서 페렐만 박사가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로 발표되지만 페렐만은 수상을 거부하고 잠적한다. 현재까지 페렐만은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접촉을 일체 피하고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은둔하며 살고 있다.


   그레고리 페렐만(러시아, Григо́рий Я́ковлевич Перельма́н, 1966년 ~  ) 나보다 세살 어린 이 천재 친구가 혹시 푸앵카레의 추측을 풀면서 우리 우주의 모형뿐만 아니라 우리 우주가 시뮬레이션 관념우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과학자가 아니라 수학자였으며 푸앵카레의 추측의 풀이는 물리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수학자들이 수학적으로 그 문제를 풀려할 때 그는 물리적으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는 다른 쪽으로도 생각할 줄 아는 천재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관점에서만 사물을 바라본다. 그것은 학식이 높다거나 전문가일 경우 더 더욱 그렇다. 그가 수학 문제를 물리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은 혹시 철학적으로도 그 우주에 접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추측을 해 본다.

   그는 구형인 4% 우주의 실체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4%를 100%로 착각하였을 것이다. 4%만의 우주는 꽉 찬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텅 비어있는 그것은 허무이다.



   동굴.

   광장 출구를 나서자 긴 통로가 나타난다. 통로 위에는 [우리가 보는 4%의 우주는 속임수이다. 신 플라톤] 이라는 전광판이 걸려있다. 통로 벽에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사람들의 모형과 영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오는 컴퓨터 조작 영상과 비슷하다. 입체 시뮬레이션 영상에 한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게임을 하듯 정신없이 두 팔을 들고 손놀림을 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이 사람의 오른 손을 움직일 때 마다 하얀 연기가 쉴 세 없이 나온다. 흰 연기가 영상 안으로 흘러들어가더니 무수한 연기 한 알 한 알이 크고 작은 생명체로 변해 시뮬레이션 안에서 뛰어놀고 있다. 시뮬레이션에서는 죽은 생명체가 옅거나 진한 회색 연기가 되어 이 사람의 왼손으로 다시 돌아온다. 연기는 사람의 몸에서 정화되어 다시 흰 연기가 되어 오른 손으로 나오기를 반복한다. 검게 변한 짙은 연기를 하얗게 정화하기 위해서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인다. 반면에 나갈 때와 같이 거의 흰 연기 그대로 되돌아오거나 아예 투명한 연기가 되어 돌아오는 연기들도 있는데 이 희고 투명한 연기는 이 사람의 에너지원이 되는 것 같다.  대부분의 회색 연기들이 이 연기들과 만나면 금방 희게 변한다.


   또 다른 박스의 영상은 어떤 별 하나가 무지막지하게 빨갛게 부풀어 오르더니 갑자기 하얀색으로 확 줄어들어 폭발하는 영상이다. 폭발의 힘은 엄청나서 원래 별이 가지고 있던 수소와 헬륨이 분해와 융합의 과정을 거쳐 수많은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 낸다.


   어떤 소년은 아주 오랫동안 우주에 대한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우주를 지배하는 두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하나는 보존(保存)이고 하나는 순환(循環)이다.]


   이 말은 우리 우주를 <역동하는 닫힌 우주>로 생각하였다는 뜻이다. 우주가 곧 전체이므로 모든 것은 우주 안에 들어 있어야하고 최초의 역동성에 의하여 우주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순환한다.

   그것은 소년의 오랜 확신이었고, 그리고 물질에 관한한 아직도 이 논리는 유효하다. 그러나 이젠 이런 소년의 신념이 허물어졌다. 우리 우주는 단지 4%에 대해서만 닫혀있다.


   공을 평지에서 굴리면 공은 공기나 땅과의 마찰에 의해 점점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서게 된다.

   공기나 땅이 없는 우주공간이라면 공은 처음 속도를 계속 유지하고 끝없이 앞으로 갈 것이다.

   작년에 지구를 떠난 지 36년 만에 160억Km를 날아 태양계를 벗어난 보이저1호도 이런 관성의 힘으로 멀고 먼 여행을 하고 있고, 다른 천체와 부딪치지 않는 한 이 여행은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진공도 아닌데 심지어 공기와 땅의 마찰이 있는데도 공이 점점 빨라진다면 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마찰력보다 더 많은 어떤 힘이 공에 가해진 것이다.

(보이저 1호와 2호의 경로)


 

   우리 우주가 우주 자체의 중력을 무시하고 점점 더 빠르게 가속 팽창을 하고 있는 것은 외부 또는 내부에서 어떤 힘이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질량보존,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의하여 내부가 닫혀있다면, 이는 당연히 외부에서 제공되는 에너지이고 지난 글에서 나는 이 힘의 원천을 암흑에너지라고 이야기하였다.


   암흑에너지는 컴퓨터의 전원과 같다.

   이는 우리 우주의 시뮬레이션 가상공간을 유지시켜주는 기본 값이다.


   우리 우주는 4%의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서는 닫혀 있지만, 96%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해서는 열려있다.

   물론 96% 중 아마 몇% 정도는 과학의 진보에 따라 새롭게 밝혀지고 그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우주가 외부의 힘에 그 전체의 운명이 달려있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상의 시뮬레이션이든 3차원 가상공간의 입체 시뮬레이션이든 이 시뮬레이션을 유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은 <전원>이다. 그 전원의 바탕 위에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우주는 4%의 내부 프로그램과 96%의 외부 동력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가상공간이다.


   4%에 대해서는 닫혀있고 96%에 대해서는 열려있다면 우리 우주는 닫힌 우주인가? 열린 우주인가?


   우리 우주는 닫혀있다.

   무엇에 대하여?

   프로그램에 대하여.


   우리 우주는 열려있다.

   누구에 대하여?

   프로그래머에 대하여.

   무엇에 대하여?

   근본에 대하여.



   힉스에 의하여 질량이 주어졌음을 상기하라? 질량은 우주 내부에서 적용되는 가상의 힘이다. 우주를 벗어난다면 질량은 그냥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우주가 닫혀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량의 지배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우주가 열려있다면 우리는 질량과 더불어 다른 힘의 영향은 받게 되지 않겠는가?


   우주의 비율을 그대로 나에게 적용하면 나는 4%의 육체와 96%의 영적인 존재이다. 질량 즉 나의 육체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수치적으로 단지4%이다. 그럼 나머지 96%는?


   공교롭게도 인간의 뇌는 5~10% 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현재까지 한계점으로 보는 것은 10%이다.


   천재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뇌의 13%를 썼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1955년 4월 18일 뉴저지 프린스턴병원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한지 7시간 후에 그 병원의 병리학자 하비(Thomas Harvey)가 아인슈타인의 뇌를 끄집어내어 240 조각으로 잘라 보존 처리하여 병에 담아 두었다. 하비는 그 표본을 갖고 있다가 1996년에 프린스턴 병원의 수석 병리학자 크라우스(Elliot Krauss)에게 넘겼다.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뇌는 보통 사람보다 작지만 더 왕성하게 사용하였다고 한다.


   뇌에 대한 가설이긴 하지만 만약 인간이 20%를 넘겨 뇌를 사용한다면 슈퍼컴퓨터 두뇌를 지닐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40%를 넘기면 맨손으로도 바위를 부술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사람은 원래 바위를 맨손으로 부술 수 있지만 통증과 암시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즉 40%를 넘기면 감각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70%부터가 미지의 영역, 말 그대로 초능력의 영역이라고 한다. 물론 초감각이라는 식스센스는 이미 40%대부터 나온다고 한다.


   뇌의 사용률을 우주의 비율로 맞추면 어쩌면 4%까지는 물리적인 기(氣)와 물질의 삶을 지배하고, 그 이상부터는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理)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를 열어나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며칠 전부터 통풍이라는 몹쓸 병이 나를 찾아왔다. 약을 먹어도 아픔이 장난이 아니다. 술과 고기도 먹지 말라는 의사의 강력한 권고도 있고 하니 산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절밥이나 얻어먹으면서 그동안 절제하지 않고 살았던 삶을 반성하며 도를 닦아 뇌의 효율이나 높여야겠다. 혹시 아는가? 나의 뇌가 활성화되어 효율이 높아지면 중력을 이기고 신선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게 될지.


   나는 누구인가?

   내 육체가 나인가?

   아니면 육체이외에 나를 나라고 특정할 수 있는 무엇이 내게 있는가?


원문 : 2014년 2월 26일

수정 : 2014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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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2일 하늘바다 여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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