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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에세이

우주와 생명 그 깨달음의 보고 8. 세 번째 프로그램, 세 번째 프로그래머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04.25|조회수121 목록 댓글 0

우주와 생명 그 깨달음의 보고


8. 세 번째 프로그램, 세 번째 프로그래머


(이 글은 전체 열여덟 편 중 8번째 글입니다.  이 글은 앞글의 결론의 연장이기 때문에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첫 번 글부터 차례로 읽으시는 것이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데카르트; 생각은 존재이다]

 

 


 

   르네 데카르트 [프랑스, René Descartes, 1596년 ~ 1650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이 한마디로 근대철학은 시작된다.


   장자의 나비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해 본 철학자가 있었다. 심지어 내가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실은 악마가 내 두뇌에 일으킨 간교한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감각하고, 사유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확실하다고 믿을 수가 없다. 수학의 명제와 정의처럼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의심하라!'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 질문에서 시작된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가 종교의 시작이라면, '의심하라'는 철학과 과학과 같은 학문의 시작이다.


   데카르트는 위대한 철학자이기 이전에 데카르트 좌표계(직교좌표계)를 도입해 해석기하학을 창시한 위대한 수학자이기도하다. 그는 곡선에 대수 방정식을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해, 모든 원뿔곡선(직원뿔을 그 꼭짓점을 지나지 않는 평면에서 잘랐을 때 생기는 면의 곡선. 자르는 기울기에 따라 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 따위가 생긴다.)을 2차 방정식으로 표시함으로 자연에서 생기는 곡선을 수학적으로 전환하여, 과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숫자(밑) 위에 작은 숫자(지수)를 씀으로써 거듭제곱을 간단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생각해내었고, 방정식의 미지수에 최초로 x를 사용했다.

   그는 또 뉴턴의 고전역학을 발전시키고 렌즈를 이용해 광학을 발전시킨 물리학자이기도 하였다.


   데카르트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히 근거가 있는 것을 알아내어 ‘사유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우선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 의심하는 방법으로 궁극적으로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것을 철학 용어로 <방법적 회의>라 한다.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우주의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의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은 도저히 의심할 여지가 없이 분명히 존재하는 명백한 진리임을 발견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이끌어 낸 확실하게 인식된 것이 곧 진리이다."라는 철학의 제2원리를 이끌어 낸다.


   데카르트는 모든 의심 없이 완벽하게 존재하는 것, 이러한 원리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절대로 속이는 일이 없는 완전하고 성실한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여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처럼 의심할 필요가 없는 명백한 관념 5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자아·신·논리 법칙·수학 명제·물질의 공간성이 그것이다.


   데카르트는 우주는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情神)과 연장(延長,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을 본질로 하는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다. 정신과 물질은 서로 공통성이 없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물심 이원론(物心 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세상을 기(氣)와 이(理)로 나누어 생각했던 성리학과 비슷하지 않은가? 동양이나 서양이나 생각하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합일이며, 정신과 육체는 우리 뇌의 솔방울 샘(松果腺, pineal gland. 척추동물의 뇌 속에 있는 작은 내분비기관이다. 깨어나고 잠을 자게하며, 계절에 맞게 육체를 조정해주는 호르몬인 세로토닌유도 멜라토닌을 생산한다. 인간의 솔방울 샘은 대뇌 밑, 간뇌의 시상 상부에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작은 솔방울과 비슷하게 생겼다.)에서 서로 만나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는 신의 절대성은 인정하였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반드시 신의 은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덕이 쌓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그 당시 이런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했다간 갈릴레이처럼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철학적 방법을 통하여 암시 했다는 말이다.  당시는 종교 전쟁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30년 전쟁의 시기였고 데카르트는 이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얼마 전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을 믿지 않거나 믿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신이 용서할지'를 묻는 질문에, '신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으며 신앙이 없으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답한 바 있다. 일찍이 돌아가신 우리나라의 김수환 추기경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종교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봉건 시대에 21세기에나 가능한 개방적인 생각을 한 데카르트는 진정 위대한 철학자임에 틀림없다.

   사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기 위하여 1628년 로마가톨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프랑스를 떠나 비교적 학문에 있어 자유로웠던 개신교지역인 네덜란드로 이주해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의 책을 집필하며 약 20년간 철학연구에 몰두하여 이러한 구원론을 철학적인 우회 방법으로 피력하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개신교는 절대 믿음을 강조하고 가톨릭은 유연하게 대응하니 시대의 변화가 참으로 산전벽해와 같다. 사실 데카르트의 종교관은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정적인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증거로 데카르트는 그의 생애 마지막 1년을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개인교사를 하다 폐렴으로 사망하였는데, 후에 여왕은 신교도만이 스웨덴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스웨덴 법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기 위하여 왕위에서 물러났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교사인 데카르트뿐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에 깃들어 있는 신의 상징이며, 완전한 신의 절대선이 내제된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여야 하고, 그러한 자유 의지의 완성이 영혼의 최고 목표이며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들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 호의를 가지고 행동할 때만 선하며 이러한 관용은 최고의 덕이다.’고 말한다.

   이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통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념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하였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동굴

   통로의 다른 전시박스의 영상엔 플라톤과 데카르트와 이황 선생이 굽이쳐 흐르는 강이 보이는 경치 좋은 정자에 앉아 포도주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무엇인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는 장면이 상영된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잔을 높이 들며 껄껄대는 모습이 호탕하며 유쾌하다.  동양화 같은 영상 속에 두 서양인이 있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재미있다.


   나는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데카르트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데카르트는 사실 굉장히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그는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고 의사마저도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도 마음씨 고운 한 간호사의 보살핌 덕분에 그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때의 일로 인해 그의 이름을 ‘중생(重生)’이란 뜻의 데카르트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절정기인 네덜란드에서의 이십년간의 생활에서도 그는 제도권에 들어와 강의하고 연구한 적이 없는 떠돌이 철학자였다. 말년에 스웨덴의 크리스티나여왕의 초대에 응해 그녀를 위해 새벽 강의를 하던 그는 북국의 차가운 새벽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와 같이 폐병으로 사망한다. 그의 나이 고작 54세였다.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느 누군가가 이 천재 철학자가 죽은 후 그의 머리를 분리했던 거 같다.

   1791년 그의 묘지를 이장하던 중 두개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두개골은 1878년 스웨덴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현재는 프랑스 인류학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이마에 "이 두개골은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이 맞다.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보증한다."라고 적혀있다. 한때는 전시했으나 지금은 전시하지 않고 나무 상자에 보관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명백한 관념 5가지 즉, 자아·신·논리 법칙·수학 명제·물질의 공간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가? 나는 다시 의심한다. 논리 법칙이나 수학 명제와 같은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논리이다. 이것은 이미 참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아, 신, 물질의 공간성은 다시 한 번 의심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는 물질이 가상 관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질이 차지하는 공간 또한 가상이다. 우주는 텅 비어있고 공간은 시뮬레이션이다.

   신은 절대적이며 완전한가?

   이 질문의 시작은 '우리 우주에서 신의 위치는 어디인가?'로 부터 시작하여야한다. 우리 우주의 내부에 있는가? 외부에 있는가? 내부일 수는 없다. 내부는 이미 과학이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하여 무신론자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주가 곧 전체인데 신은 우주의 어느 곳에도 그가 숨어 있는 곳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우주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4%라는 것을 알고 있다.  96%는 외부에서 왔거나 적어도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 혹시 신도 외부에 있거나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옆 전시 박스에서 또 하나의 별이 폭발한다. 폭발이 얼마나 큰지 동굴 통로가 다 보일 정도로 섬광이 번쩍인다. 그 전시박스 위에는 <우주탄생 65억년-제3자 개입>이라는 제목이 걸려있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잡은 초신성 폭발)


   우리 우주는 거시 우주의 결정성, 즉, 인과율(因果律)에 따라 정해진 길을 걸어  가는 첫 번째 규칙이 있다. 이 규칙에는 시작과 끝이 이미 정해져있다. 미래는 예정되어 있고 그것이 변화할 가능성은 없다. 이것을 신이 미리 정해놓았다고 믿는 것이 예정론(豫定論)이며 유신론(有神論)이다. 같은 논리로 이미 다 정해져 있으므로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그러므로 신은 없고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유물론(唯物論)이다. 그러므로 유신론과 유물론은 뉴턴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으로 마무리되는 고전역학의 결정성에 기초한 뿌리가 같은 사상이다.  그것은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의 차이이지 결코 근본이 다른 사상은 아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독일 1818년 ~ 1883년)시대에는 아직 과학이 양자역학에 미치지 못하였고 거시우주의 우주의 움직임을 규정한 고전역학에 머물러 있었다. 과학은 당시의 사실성을 대변한다. 마르크스는 철학에 과학을 접목시킨 위대한 철학사상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애석하게도 마르크스 시대의 과학은 고전역학이었다. 지금은 중학생이면 배우는 고전역학은 당시엔 최첨단 과학이론이었고 우주의 움직임 즉, 신의 규칙을 인간이 규명한 인류 최초의 사건이었다. 고전역학의 규칙에 따라 우주의 미래는 정해져 있고 당연히 인류의 역사도 정해져있다. 그것을 반영한 것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이다.

   만약에 마르크스가 양자역학을 알았더라면 그의 역사발전론과 계급투쟁론은 당연히 바뀌었을 것이고 공산주의 이론도 바뀌었을 것이고, 그러면 현대의 역사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독일 1818년 ~ 1883년)


   미시우주는 양자역학의 세계이다.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년~1976년)가 제안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역학을 규정하는 대표적인 규칙이다. 그는 이 원리를 발표하여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그의 나이 고작 31살(한국식이면 32살) 때의 일이다.

   이 젊은 청년과학자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년~1976년)


   불확정성의 원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곱하면 일정한 숫자보다 항상 크다>이다.

   그래서 이게 어떻다는 뜻일까?


   이를 방정식으로 표현한 것이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오스트리아 1887년-1961년)의 방정식인데,

그는 이 공로로 193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은 일종의 미분방정식인데 이것이 고전역학의 방정식들과 다른 것은, 고전역학의 뉴턴의 운동방정식에 조건을 대입하면 하나의 해가 얻어지지만 즉, 초기조건만 알면 그 운동이 어찌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지만, 양자역학의 운동을 설명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조건을 넣으면 하나의 해가 아니라 여러 개의 해가 구해진다. 이 해들은 움직이는 파동으로 이해되었고 이 파동의 움직임을 확률함수로 나타낸 사람은 막스 보른(Max Born, 독일 1882-1970) 이었다. 이 분 또한 양자역학과 결정학, 광학 등의 공로로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슈뢰딩거와 보른


   확률.


   입자의 미래가 확률로 정해진다. 당시의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고전역학자들은 이를 도저히 납득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심지어 양자역학의 방정식을 만들어 낸 슈뢰딩거조차도 이를 용납 못하고 고양이가 사니 죽니를 운운하며(슈뢰딩거 고양이 패러독스) 아인슈타인 편에 선다. 이들의 논리는 양자역학은 완벽한 이론이 아니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물리량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내면 고전역학과 같이 입자의 움직임과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패러독스]

   이 이야기는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요즘은 양자역학을 이해시키는데 활용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방사능을 가진 원자핵과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고양이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상자 안에 들어있고, 이 상자는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과 연결되어 있다. 독가스는 밸브에 가로막혀 상자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독가스가 들어있는 통 역시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되어 밸브가 열리는지 볼 수 없다. 이 밸브는 원자핵이 든 기계 장치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 기계 장치는 원자핵이 붕괴하여 방사능을 방출하면 그것을 검출하여 밸브를 연다. 밸브가 열린다면 고양이는 독가스를 마시므로 곧 죽게 된다. 덧붙여 원자핵은 단위시간당 50%의 확률로 붕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이제 단위시간이 지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양이는 50%의 확률로 살아 있거나 죽어 있을 것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자를 열어보기 전과 후의 상태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은 두 가지인데 <코펜하겐 해석>과 <에버렛 해석>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중심으로 한 해석이다. 참고로 보어의 연구소가 코펜하겐에 있었다. 이 해석은 실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여러 상태(고양이가 죽거나 산 상태)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다가, 측정이 시행되는 순간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상자가 닫혀 있을 때, 고양이의 상태는 죽은 고양이의 상태와 살아 있는 고양이 상태의 중첩으로 나타나지만,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두 가지 상태 중의 하나로 확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양이의 상태가 객관적인 결론으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관측자와의 상호작용 결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견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내가 보던 안 보던 고양이가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둘 중에 하나일 텐데 보기 전에는 알 수 없고 보는 순간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자연 현상이 내가 본다고 달라지고 보지 않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러나 실제로 미시세계의 현상은 이리 나타난다고 생각해야 해석이 가능하다.

   주사위를 예로 들면 이해가 조금은 쉬울 듯하다.

   주사위를 던져 1이 나올 확률은 1/6이다. 이는 주사위를 던지기 전부터 던져서 공중에 떠 있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순간까지도 확률은 1/6이다. 그리고 주사위가 멈춰 섰지만 내가 보지 않았다면 아직까지 확률은 1/6이다.  이 순간까지 1부터 6까지의 모든 숫자가 중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과를 관측하는 순간 1인지 다른 수인지가 결정된다.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우주의 세계는 거시우주의 세계와는 서로 다른 프로그램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코펜하겐 해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태양과 달이 관측할 때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시세계의 일일뿐 거시세계와는 관련이 없다.



   에버렛 해석은 1972년에 휴 에버렛 3세(Hugh Everett III)가 제안한 해석으로 상자 속의 고양이는 죽어 있는 고양이와 살아있는 고양이가 섞여 있는 중첩 상태가 아니라,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어 있는 고양이가 모두 존재한다. 관측자가 상자를 열어 고양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우주는 살아있는 고양이를 포함한 우주와 죽어 있는 고양이를 포함한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영화와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로 벌써 몇몇 영화의 소재로 쓰였다. 이렇게 되면 확률이 나타날 때마다 우주가 나눠지게 되는데 우주가 너무 많아져서 나는 이 해석은 채택하지 않기로 하겠다.


   아무튼 이런 논란이 있고 벌써 7-80년이 흘렀는데도 양자역학이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더 확고하게 현대물리학에 자리 잡은 것을 보면 양자역학의 확률성은 이제 현대물리학에서 사실로 인식된 것 같다.


   이 사건은 철학적으로는 우주를 지배하는 두 번째 규칙을 발견한 대사건이다. 인류는 우주 프로그래머의 두 번째 규칙을 발견하였다.


   [결정과 확률]


   도저히 한 공간에 양립할 수 없는 두개의 규칙이 한 입자와 공간에 공존한다. 거시 우주를 지배하는 결정성과 미시우주를 지배하는 확률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이것은 모순이고 또한 신비이다.


   하여 나는 두개의 프로그램이 한 시뮬레이션 아래에서 함께 공존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우리 우주가 가상공간의 시뮬레이션이라는 나의 전제를 이해한다면 이 모순과 신비는 그리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제 1우주의 프로그램은 결정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거시우주에 적용되며 우주의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주어진 규칙을 따른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이를 나는 제1프로그래머로 정의한다.


   제2우주의 프로그램은 확률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시우주에 적용되며 입자의 미래는 확률로 결정된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이를 나는 제2프로그래머로 정의한다.


   나의 딸아이가 예전에 즐겨했던 놀이공원 게임 중에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란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는데, 놀이공원이라는 공간 안에 여러가지 놀이기구를 배치하고 길도 닦고 휴게소도 만들고 요금을 정해 시작을 하면, 시간에 따라 그 놀이공원이 망할지 흥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 게이머는 중간 중간 계속 조건을 바꾼다. 요금도 조정해 보고, 출입하는 길도 더 넓히고 휴게소에 새로운 상품도 갖다놓고, 부서진 놀이기구는 수리하고, 낡은 놀이기구는 최신형 새 것으로 바꾼다. 그러면 이에 따라 게임속의 손님들이 이리저리 이동을 하고 새로운 수익구조가 생겨난다.

   이 게임은 어찌 진행되는 걸까?

   프로그래머는 놀이 공원에 필요한 기본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여기서 공간이란 컴퓨터 내부의 가상의 땅을 말하며 재료란 놀이 공원에 필요한 건축재료, 놀이기구 등 을 말한다. 물론 가상의 재료이다. 게이머는 이 재료들을 이용해 원하는 장소에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그곳으로 연결되는 길도 만들고, 중간 중간 휴게소와 편의시설도 만들고, 수리공과 청소부와 안내자들을 고용하고 손님을 맞는다. 손님들은 프로그램에 내재된 규칙에 따라 게이머가 만들어 놓은 게임시설이나 휴게소를 이용하며 돈을 쓴다. 처음 손님들의 만족도가 높으면 손님들이 더 많이 오고 이때 재투자를 하여 놀이공원도 넓히고 시설도 개선하고 인부도 더 고용하고 하는 등의 일은 게이머가 하여야 한다.


   이 놀이공원 게임이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는 결정성, 확률성, 의지성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공간과 재료, 이것들의 역할과 구조는 결정성과 같다. 여기에 주어진 공간과 재료는 사실 다 프로그램의 종속변수들이다. 컴퓨터에 전원이 켜지고 게임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공간과 재료는 이미 구성되어 있다.

   우리 우주가 그랬던 것처럼.


   손님들의 움직임은 주어진 프로그램의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 미세한 차이에 따라 손님A가 1번 놀이기구를 탈수도 2번 놀이기구를 먼저 탈 수도 있다. 또 그에 따라 손님 B, C, D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만족도도 달라지고 수천 명의 손님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결국 이 게임에서 조건에 따른 결과는 확률로 나타날 것이다.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게이머이다. 게이머는 자기결정 즉 의지에 따라 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임의 기본 규칙을 창조할 수는 없다. 프로그래머가 준 주어진 조건 내에서만 진행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우리 우주에 주어진 중력을 벗어날 수 없듯이.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결정성과 확률성은 이 게임의 프로그램에 내재되어 있지만, 의지성은 게임의 외부에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의지는 내재될 수 없다.


   다시 우주 이야기.

   거시우주의 고전역학과 미시우주의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 우주의 내부에 내재된 규칙, 결정성과 확률성은 이해가 되었지만, 우주에는 이 두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규칙이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은 생명의 의지성이다.


   생명체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듯 보이고, 때론 확률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의지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이를 우리 우주를 지배하는 세 번째 규칙, 의지성으로 표현한다.

   의지력은 다른 두 가지 규칙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이 힘의 근원이 우리 우주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지는 규정된 프로그램을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인데, 내부의 인자가 내제된 규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또한 고전역학이나 양자역학은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힘이지만 의지력은 생명체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별하면서도 독특한 힘이다.

   또한 우주내의 모든 물질은 보존과 순환의 틀에서 움직이지만 생명은 이 조건을 벗어나 움직인다. 즉, 조건에 따라 생명은 얼마든지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한다.


   이것으로 생명의 의지는 우주의 외부에서 들어온다는 철학적 추론이 가능하다. 의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이다.


   생명의 의지력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과는 다른 세 번째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세 번째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세 번째 프로그래머와 우리 생명체는 연결되어 있다.  생명은 물질인 육체와 의지인 영혼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여 우주의 제1,2규칙과 제3규칙을 모두 적용받는다.


   제3우주의 프로그램은 의지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생명우주에 적용되며 생명의 미래는 운명(결정)과 확률과 의지의 합으로 결정된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이를 나는 제3프로그래머로 정의한다.


   원본; 2014년 2월 27일

   수정; 2014년 4월 25일

1.   이글의 목적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깨달아 우리 사회가 진일보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글입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이용하시지만 않는다면 저작권 주장을 하지 않겠습니다. 

 

2.  외국어 번역이 가능하신 분은 번역을 하셔서 원문에 답 글로 달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외국 친구들에게도 알려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2014년 4월 25일 하늘바다 여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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