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모악산 산행기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1.04.11|조회수268 목록 댓글 0

아내와 함께 하는 산행이야기

머니의 마음을 닮은 모악산 산행기


산행지 : 완주, 김제 모악산 도립공원

산행코스 : 구이입구 주차장 -  선녀폭포 - 대원사 - 수왕사 - 정상 - 헬기장 - 심원암3층석탑 - 심원암 - 금산사 - 주차장 

일시 : 2011년 4월 10일 오전 10시 30분 ~ 오후 4시 10분

날씨 : 맑음

산동무 :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26명  


   항상 술이 문제였다.  산행 전날 토요일 저녁 7시 특전미사들 드리고 나오는데 견진 대부를 만났다.   만난 것은 좋은데 술에 당구에 또 술.  두 번째 술자리에서 문제가 생겼다.  청년시절 대부와 성당 활동을 하였는데 그 때 마시던 대로 마시잔다.  냉면그릇에 막걸리 한 병 씩 넣고 원 샷.  소주로 안하기를 정말 다행이다.  그러기를 몇 순배.  취해도 너무 취했다.  대충 술자리를 끝내고 간신히 집에 오기는 왔는데 새벽 3시가 훨씬 넘은 것 같았다.  아내의 칼날 섞인 잔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잠으로 빨려 들어갔다. ~~~ 아내가 흔들어 깨운다.  6시 20분이란다.  헉 7시에 집결인데.... 마음은 급한데 머리와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술이 깨지를 않았다.  일어나 앉아서 꾸벅 졸고 있는데 30분이란다.  엉기정기 일어나 이불 간신히 개고, 배낭 꺼내고 양치만 대충하고 세수는 고양이 세수.  배낭에다 아내가 챙겨주는 것 주섬주섬 주워넣고 시계를 보니 7시 3분.  총무님 전화가 온다. “죄송해요.  기다려주세요.  좀 늦어요.”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니 다행히 버스가 바로 온다.  집결지인 2001아울렛에 내리니 7시 10분. 

   잠과 술은 안 깨었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눈을 감았다.  잠도 안 오고 술은 덜 깨고  금정에서 회장님을 비롯해 몇 사람이 더 탄다.  역시 대충 인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속이 너무 쓰려 우동 한 그릇 먹다보니 다시 또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다시 가는데 이번에 속이 부글부글.  간신히 참고 모악산 주차장에 도착해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겨우 겨우 볼일을 보고 나오니 다들 또 기다린다.  아내가 나 보고 폭탄이란다.  핵폭탄.


  모악산 입구에는 큰 돌로 모악산 표지석이 있고, 고은 시인의 시비도 있었다.

<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로 시작되는 이 시를 읽어보니 모악산에 대한 경외심과 궁금증이 더한다.  나에게나 또 많은 산악인에게 우리나라의 어머니의 산은 단연 <지리산>인데 모악산은 그 산 이름을 어머니산이라 했으니 나는 오늘 모악산을 산행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모악산 표지석에서 단체사진 한 컷)

(고은님의 시비 앞에서 해해님과 함께)

  조금 더 오르니 김양순 할머니 24주년 추모 행사를 한다는 안내가 보인다.  할머니는 젊어서 이 곳 모악산에 자리를 잡고 동곡사를 지어 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고 사람들이 동곡사에 시주한 쌀로 밥을 지어서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돈도 주었으며 근처 마을 사람들은 춘궁기에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고, 6․25 전쟁 중에는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 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모악산에서 3성 7현이 나온다. 마지막 성인이 출현하면 새로운 법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고, 전 세계에서 오색(五色) 인종이 모악산에 몰려들게 될 것이다. 그러면 민족통일이 이루어지고 인류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앞으로 때가 되면 하늘에서 돌들이 날아와 성을 쌓고, 황금빛 기와가 덮인 궁궐이 지어질 것이다. 라는 예언을 자주하였다고 한다.  할머니의 예언대로 성인이 나와 우리나라를 통일하고 인류평화도 이루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모악산 출신은 아니니 마지막 성인은 아닐 것이고 그래도 나는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법>을 세상에 알리려 하니 극락에 계실 할머니가 나를 좀 도와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며 산행을 시작한다.

(김양순 할머니 선덕비)

(매년 이렇게 김양순 할머니 추모행사를 하는 것 같다)

   입구에는  매화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봄의 향기를 더 없이 느끼게 하여 주고 길옆으로 흐르는 맑은 물은 가슴까지 시원하게 적셔준다.  봄철인데도 물이 제법 많아 작은 산은 아니구나하고 걷고 있는데 조그만 폭포 하나가 보인다.  안내를 보니 <선녀폭포>란다.  안내문에는 나무꾼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던 선녀와 눈이 맞아 대원사 백자골 숲에서 사랑을 나누다 벼락을 맞고 돌로 굳어버려 <사랑바위>가 되었다고 하는데 선녀가 문제인지 나무꾼이 문제인지 우리나라 전설에는 선녀와 나무꾼에 얽힌 전설이 유독 많은 것 같다.  우리 수사사 부회장님 부부의 닉네임도 <나무꾼과 선녀>인데 누군가 선녀님 선녀폭포에서 나무꾼님과 사진 찍고 가시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쉽게도 산행지도를 보니 우리는 <사랑바위>쪽으로는 진행하지 않아 사랑바위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매화꽃이 활짝피어 모악을 처음 찾은 나를 반긴다)

(선녀폭포)

   조금 더 오르니 왼쪽길로 가면 전주김씨 시조묘가 있는 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북한의 고김일성주석의 할아버지묘도 있단다.  그래서 전쟁나면 북한군들이 절대로 여기에는 포탄을 쏘지 못하니까 이리로 피난오라고 서비스맨 등반고문님이 강조한다.   남의 조상 공동묘지를 보러 일부러 올라가기도 그렇고 우리는 그냥 오른쪽 대원사로 향하는 등반로로 오른다.

(길게 늘어서 모악산을 오르는 수사사 - 저 뒤에 나의 모습도 보인다)

  10분정도 완만한 산을 오르니 <대원사>가 앞을 가로 막는다.  대원사는 신라시대의 열반종 고승들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지금 건물은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이란다.  절에 올라가니 기와에 불교 그림을 그려 전시하고 있는데, 세속에 물든 나는 다른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예쁜 보살이 유방 한쪽을 내놓고 있는 그림만 확 눈에 들어온다.  젖이 하도 탐스럽고 풍성해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과 욕구가 마구 생겨나는데  이런걸 보고 스님들은 어떻게 육정을 잠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대원사는 제법 큰 크기의 절로  옆에 대나무 숲과 넓은 마당, 마당 한가운데 큰 5층(6층?)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절 한 켠에 있는 약수가 참 달고 맛있다.  술 속이 덜 풀린 나는 이 약수를 몇 잔이나 거푸 마셨다. 

(대원사 기와에 새겨져 전시된 그림 - 보살님같은데 나는 육정이 먼저 솟아나니 이 악귀덩어리를 어쩌랴)

(그래서 요런 그림을 곁들여 육정을 다스리고)

(대원사 앞 마당에서)

  대원사를 통과하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이 길에서는 보라색 제비꽃과 흰색 남산제비꽃들이 산행에 지친 나에게 작은 기쁨을 준다.   등산로가 옆의 땅 높이에 비해 유난히 많이 들어가 있는데 흙을 만져보니 너무너무 부드럽고 연하다.  이 연한길을 사람들이 계속 밟으니 등산로가 낮아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들어온다.  오르막이 계속되면서 조금 힘이 들긴 하지만  왠지 발걸음은 가볍다.  모악산이 계룡산 다음으로 기가 센 산이라고 서비스맨이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내가 그 기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리산도 그렇고, 계룡산도 그렇고, 기가 센 산에 오르면 왠지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또 힘이 들어 땀을 흘릴만하면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준다.  <어머니의 바람>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가파른 길을 올라가도 힘도 별로 들지 않고,  바람마저 적당히 불어와 땀을 식혀주니 이 산이 정말 <어머니 산>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에 막걸리 타임을 한 번 가지고 천천히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수왕사> 갈림길에 닿았다. 

(수왕사로 가는 가파른 오름길에서)

(흙이 워낙 부드럽고  물러 등산로가 움푹 패여있다.  그래서 소나무들이 뿌리를 다 드러내고 있다)

(길 옆에 소담하게 피어 있는 흰색 남산 제비꽃)

   <수왕사>는 아주 조그만 암자와 같은 절인데 마당의 나무 한그루가 온갖 번뇌를 다 짊어지듯 꼬여 있는 모습과 보라색 잔디꽃이 앙증맞게 뭉쳐서 피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소담하고 예쁘다.  마루에 거북 형상의 나무 조각과 처마에 걸린 용무늬이 풍경도 퍽 인상적이다.  무엇보다도 마당 앞 잘려진 고목 나무위로 파란 풀들이 자라고 있어 생명의 신비를 더해 준다.  삶은 저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리다.  수왕사에서는 송화주를 판다고 했는데 맛이나 보려고 물어보니 지금은 여기 절에서는 팔지 않고 대원사 아래 상점에서 팔고 있다고 한다. 송화주 담는 모습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아마도 이 절에서 만드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송화주를 걸러내는 스님의 모습이 현수막으로 걸려있는데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화주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수왕사를 떠났다.

(수왕사 거북모양의 나무 조각)

(수왕사 앞마당 - 저 배배꼬인 나무와 보라색 잔디꽃이 참 정겹다)

(수왕사 마당 앞에는  허리가 짤린 아름드리 고목위에 잡초가 자란다)

 

   수왕사를 지나 오르막을 조금 더 진행하니 드디어 능선과 만난다.  능선은 오히려 길이 완만하고 넓다.  보통산은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더 급해지는데 모악산은 그 반대이다.  ‘모악산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자신의 정상을 그렇게 쉽게 내어주시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정상 바로 아래 전망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서 바라보니 넓은 들판에 제법 큰 저수지와 마을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한동안 그 바위에 우뚝 서 사진도 찍고 불어오는 바람을 마음껏 만끽하였다.  바위에서 조금 더 오르니 전망대.  이곳이 정상이다.  실제로는 조금 더 위에 통신탑이 있는 곳이겠지만 거기에는 관계자외 출입금지 지역일 테니 이 곳 전망대가 실제로 모악산의 정상이 되어버렸다.

(전망바위에서 폼을 잡아보았다)

   전망대 의자에 앉아 조금 쉬고 함께 산행에 오신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보니 배가 고프다.   밥은 어디서 먹냐고 대장에게 물어보니 헬기장 지나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아킬레스가 부지런히 앞서나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통신탑을 지나 완만한 능선으로 진행하니 헬기장이 보인다.  점심시간이 되어 공터마다 등산객들이 점심을 먹느라 북새통이다.  진행하는 길에 다른 팀들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더 배가 고프다.  그런데 버너로 찌개를 끓이는 팀을 두 팀이나 보인다.  봄에는 산불 때문에 모두 긴장을 하고 있고  뉴스를 들어보면 산불이 정말 많은 시기인데 아무리 마음이 포근한 어머니의 산이라도 버너를 켜고 음식을 조리하는 것은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있는 겨울산이라면 얼마든지 유통성을 발휘하겠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지나면서 한마디 하였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풍경)

(정상은 군부대 통신탑이 자리잡고 있어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정상 전망대에서 아내와 백두산님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사는 산에서 먹는 식사라고 했던가?  헬기장을 지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꺼내 놓았다.  제갈영고문님은 각종  쌈 채소에 제육볶음도 싸오셨다.  상추, 쑥갓, 곰취나물에 이름 모를 쓴 나물 쌈에 고기를 얹고 된장을 찍어 크게 한 잎 먹으니 정말 맛있다.   아내도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소시지 볶음, 무채나물들을 내어 놓았다.  나무꾼과 선녀님의 육개장과 순무김치도 일품이었고 보디가드의 명태전과 녹두전도 아주 그만이다.   아직도 속이 좋지 않아 반주는 하지 않았지만 정말 맛있는 음식과 포도, 귤의 후식과 마르첼리나 자매님의 아메리칸 커피로 입가심을 하니 드러눕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다.    산적 대장이 30분만 오침을 하고 가자고 하고 나도 그러고 싶지만 전체를 위해서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정상 근처의 노란 제비꽃- 흔하지 않은 꽃이란다)

(맛있게 식사를 하는 사진이 없다. 그냥 이것이라도  - 아내에게 밥먹는거 하나 찍자고 하니 '밥좀 먹자'해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길을 나서니 이제는 계속 하산길이다.  길옆에는 조릿대가 끊임없이 펼쳐져 있다.  조릿대의 길이는 보통은 허리 이하인데 모악산 조릿대는 거의 내 키만 하고 어떤 것은 키보다 더 큰 것도 있다.  올라오는 길은 힘이 덜 들었는데 내려가는 길은 체중이 발에 다 실려서인지 더 힘들다.   중간에 한 번 쉬고 또 계속 내려가니 <금산사 심원암 북강 삼층석탑>과 만난다.  보물 29호이고 고려시대 때의 탑이라 하는데 내 눈으로 보기엔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이 보물이 오늘 금산사에서 수없이 볼 보물의 시작이 되었다.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내려오면서 ‘아니! 탑이 왜 절도 아니고 절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 깊은 산 중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고 ‘혹시 예전에는 자식을 못 낳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을 테니 저기서 탑돌이를 하면서 애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음흉한 생각을 해본다.   아이를 못 가지는 원인은 흔히 남자 쪽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누구 문제인지 알 수 있지만, 옛날에는 그저 약한 쪽이 여자라고 아이를 못가지면 여자 탓을 했을 경우가 많았으리라.  그래서 이런 금산사 같은 큰 절의 효험(?)이 있는 탑에서 100일 밤낮으로 탑돌이를 하면서 치성을 드리면, 그것이 돌중이 되었든 산적이 되었든 혹은 나무꾼이 되었든 누군가는 임신을 시켜주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보며 혼자 웃는다.   뭐 그냥 나만의 생각이니까 이 생각을 확대 해석해서 불교와 스님에 대한 불경이니 그런 시비는 걸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아까 대원사와 수왕사에서도 부처님에게 진심으로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던 사람이니까.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예수님의 뜻과 부처님의 뜻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스스로 고행의 길을 걸어 큰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부처가 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참 좋다.  또한 브라만교의 신분질서에 반하여 평민과 천민들에게 희망과 삶의 원리를 깨우쳐 주신 그 분의 가르침도 참으로 좋다.   나의 <어울누리>철학의 목표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질서>

(심원암 삼층석탑 앞에서)

(삼층석탑에서 단체 사진도 한 컷)

   석탑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니 심원암이 눈에 들어온다.  심원암 마당에는 예쁜 보살 조각이 부처를 머리에 이고 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폼을 잡고 있었는데 아내는 본체만체 지나간다.  입을 삐죽이 내밀고 암자를 내려가니 측백(편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아내가 편백나무라 했는데 강대빵님이 편백은 아니고 측백이라한다.  나는 그 구별을 모르니 아무려면 어떠하랴?   아내가 나보고 길 옆 숲에 들어가 삼림욕을 하자고 한다.  이 나무에서는 몸에 좋은 물질이 정말 많이 나온단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 들어가 바위를 베개 삼아 누웠더니 산적님을 비롯한  몇 분이 더 숲으로 들어온다.  최대한 오래 버티기.   이런 숲에서는 되도록 오랫동안 있어야 한단다.  그렇게 한 20분을 버텼다.  이제는 내려가자 해서 시골길을 걷는다.  제법 넓은 초원도 있고, 옆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봄꽃이 활짝 피어 있으니 천국의 풍경을 그리라면 이런 모습으로 그려야하리라.  아쉬운 것은 자생 녹차밭에 녹차나무들이 대부분 지난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누렇게 죽어있다.  지난겨울이 정말 춥기는 추웠었나보다.   목련은 이제 간신히 피었고 벚꽃은 아직 꽃망울도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길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참으로 한가롭고 즐겁다. 

(심원암의 예쁜 보살상 - 머리에 부처님을 이고 있다)

(측백(편백?) 나무 아래서서  산림욕하는 아내와 나)

(자생 녹차밭 - 지난 추위에 거의 다 얼어 죽어서 누렇다)

(금산사로 내려 가는 길 - 멋진 산수유 아래에선 아내와 수사사의 여인들)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며 유유자적 한동안 걷다보디 드디어 금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금산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 신검이 견훤을 가두어두었던 절이라는 것 정도이다.  패륜과 반역의 역사를 지닌 절.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 지나고 보제루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니 큰 마당이 나온다.  사람도 많지만 관광버스와 군인들이 잔뜩 와 있다.  ‘아니 무슨 군인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절에 오냐?’며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오늘은 일요일 군대의 종교 활동이란다.  마당 앞에는 조금만 탑들이 놓여 있고 하얀목련과 보라색 목련이 나란히 활짝 피어있다.   거기서 푸른초원님 부부와 사진을 한 장 찍고 있자니, 이곳이 고향인 서비스맨대장이 마당에서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해서 모두 모였다.  딱 봐도 국보인 미륵전(국보 62호)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자 서비스맨이 회원들에게 대략 설명을 해 주신다.  마당에 보이는 조그만 탑들은 다 보물이고, 미륵전은 국보이고 뒤에 가면 또 보물이 있고 앞에 가도 보물이 있으니 잘 보고 가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까만색의 육각다층석탑(보물 27호)이다.  검은색이 탑이 참 인상적인데 흑요암으로 만든 것인가 생각했는데 점판암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탑 앞에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어있다.  마치 꽃잎과 같이 생긴 노란 꽃받침을 바탕으로 귀한 보석을 감싸듯 피어난 노란 수선화의 모양이  얼마나 예쁘던지 와락 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미륵전 앞에서 단체 사진 한 컷 - 하트를 만든 분들이 수사사 회장 내외인 백두산 한라산님이다)

(6각 다층 석탑과 석탑 앞 수선화)

(수선화의 아름다운 모습)

  육각다층석탑 뒤에 연꽃 모양의 석련대(보물 23호)를 보고 미륵전에 들여다보니 어머어마하게 큰 금도금 부처님 두 분이 모셔져 있다.  한분은 석가모니부처이고 한분은 미륵부처님인가 보다.  저 큰 부처를 모시느라고 미륵전을 3층으로 올렸던 것이리라.  내 생각에 부처는 아마 저렇게 크고 멋지게 숭앙을 받는 것을 좋아하시지는 않을 터인데 사람들은 그를 감히 우러러 보지도 못하는 높이로 올려버렸다.  높이뿐만 아니라 크기도 크게.  그게 부처님이 넓은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좋겠지만 인간의 욕심 때문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 또한 그렇게 올려졌으니까.   인간(평민)을 구원하고자 말구유로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나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오르신 부처님이 평민과 같이 낮게 있다는 것을 고관대작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깨달음에 도달한 분이나 모두가 진심으로 우러러 보는 성인을 생각해 보건데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높은 인품을 낮추고 낮추어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못난 사람 그 아래에 자신의 위치를 두었다는 것이다.   간디, 데레사 수녀님, 김수환추기경, 법정 스님 등등 그런 분들이 그 높은 인품에도 권력을 바랐는가?  누구로부터의 존경을 바랐는가?  그저 <빈 손> 그것 아니었는가?   그러나 못난 수행자들과 권력자들은 그들이 모시는 예수와 부처를 평민의 위치로 낮게 만들면 자기들은 그보다 더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들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부처를 하늘 높은 곳으로 올려 숭앙과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자신들도 그 높이로 올라간 것이다.  종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지배의 도구로 이용된 것은 그 때문이다.

(미륵전 안에 어마어마하게 큰 부처님)

   미륵전을 둘러보고 뒤로 돌아 올라가보니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곳으로 따로 부처상이 모셔져 있지는 않고 단 만 설치되어 있다. 보궁 옆에는 보물 25호인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는데 내가 층을 세어보니 분명 6개인데 왜 5층이냐 했더니 끝이 휘어진 것만 층으로 친다고 한다.  자세히 보니 맨 위의 층은 휘어져 있지 않고 수평으로 되어 있다.  그 옆 방등계단(보물 26호)이 있는데 그 안에 부도가 보물인데 그냥 계단까지 통째로 보물이라 하는 것 같다.  이곳은 독특한 불교 의식 법회 장소라고 한다.  원래 서비스맨은 5층 석탑의 탑돌이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모두 올라갔었는데 막혀서 탑돌이는 할 수가 없다.  다시 마당으로 내려와 예쁜 수선화를 다시 한 번 보고  옆에 있는 노주(보물 22호)와 석등(보물 828호)를 구경하고 옆에 명부전과 보물 827호인 대장전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는 불교를 모르는 일반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불상과 보살상 아래 이름을 다 써 놓아서 보기에 참 좋았다.  종각을 보니 들어가지 말라고 써 있다.  푸른초원님이 들어가서 한 번 쳐보겠다고 우겨보신다.  마당을 나오니 당간지주(보물 제 28호) 두 개가 우뚝 서 있다.  당간지주에서 금산사를 다시 한 번 보고나서, 사천왕처럼 무서운 얼굴을 한 인왕상 2채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있는 금강문을 나오니 30여분 간에 걸린 금산사 관광이 끝났다. 

(5층석탑과 뒤에 방등계단의 부조 - 맨위에 평평한 것은 층으로 안 쳐서 5층이란다)

(아내와 함께 흰목련과 보라색 목련을 배경으로)

   금산사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원래 벚꽃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벚꽃은 아직 피지도 않았다. 날씨가 제법 따뜻한데도 벚꽃이 피지 않으니 아쉽기 짝이 없다.  한참을 걸어내려가니 관광단지가 나온다.  노래 소리가 들리고 시끄럽다.  우리 버스를 찾기 위해 계속 내려가다 보니 오늘이 금산사 벚꽃 축제 기간이란다.  벚꽃은 하나도 피지도 않았는데 벚꽃축제라니?   마치 아이도 낳지 않았는데 돌 잔치하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관광버스를 자리가 많이 비어있는 축제장 주차장에 세워 놓아도 될 것을 한참 아래 길 가에 세워두었다.  투덜투덜 한참을 더 내려가 버스에 가니 막걸리와 소주를 두고 간단히 뒷풀이를 하고 있다.   4시 10분에 도착해 4시 30분에 금산사를 출발하여 오는 길 경부고속도로 청원휴게소에 들러 잔디밭에서 피자 오징어 오뎅 닭꼬치등과 남은 소주와 막걸리로  뒷풀이를 하고 안양에  도착하니 밤 9시 30분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산 모악산.   고은 시인의 말대도 모악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산이다.  술로 속이 참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 되었다.  모악산의 그 맑은 정기가 나의 삶에 활력이 되고 지혜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2011년 4월 10일 모악산 산행을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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