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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10장 생명자1 (25/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0.27|조회수255 목록 댓글 0

유레카 3 - 스물다섯번째 이야기

 (인간이 자본의 수단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칸트가 만약 지금 살아있다면 칸트는 자본의 노예가 된 인류에게 어떤 정언 명령을 내릴까 궁금하다)

 

1부. 우주

 

10장.  생명자 1 

 

 

* 이 글은 <유레카3>의 25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69. 이마누얼 칸트 [Immanuel Kant, 독일 1724년-1804년]

 

 

(칸트의 초상화)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모든 것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지만, 경험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법칙)이다.』

 

    데카르트가 근대 철학의 시작이라면 칸트는 근대 철학의 정점에 서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은 근대 유럽에서는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발전하였다. 영국의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무언가 경험을 쌓기 전까지는 인식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고 주장하였고, 유럽 대륙의 데카르트에서 비롯된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본유관념(本有觀念)은 신에게 선물 받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므로, 경험 없이도 인간은 사색을 통해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나의 생각에 칸트는 기본적으로 후자의 합리주의자이며 관념론자였을 것이다. 그러다 그는 경험론자인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년~ 1776년, 영국)의 '인간 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접하고 이 둘의 합일점을 찾은 것 같다.

 

    많은 영웅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뒤집어 생각해본다. 우리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한다.

 

    『그대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라. 그것은 창의와 창조, 혁명과 진화의 시작이다.』 이 말은 내가 학생들에게 항상 하던 말이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 과학자, 발명가,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의심을 통하여 인류의 지성을 진보시킨다.

 

    우리의 하늘도 겉보기와는 달리 대상인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지구가 도는 것을 발견한 코페르니쿠스처럼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대상에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인간은 대상이 있는 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그 대상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신이나 내세, 미래 등과 같이 초감각적이며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사실 지극히 주관적인 관념이라 내가 믿는 데로 그것이 나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과 경험 또한 시간적, 공간적, 방법적으로 지극히 제한적이며, 사람마다 경험의 과정과 결과와 느낌이 다르기에 오류의 근원이 된다. 칸트는 이성과 경험의 불완전을 그의 비판 철학을 통하여 극복하려 하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1781년]은 '나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는 인식론의 연구와 고민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는 이성 비판을 통한 고민은 있지만 결과는 없다. 당시의 인류의 지성(知性)으로는 인식(認識)에는 한계(限界)가 있고 경험(經驗)은 턱없이 부족(不足)하였다. 과학이 사실을 뒷받침해주지 못한 까닭이다. 그의 시대는 고전역학이 겨우 태동하여 걸음마를 하던 시기였다. 칸트는 뉴턴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다.

 

    '태양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추론한 칸트의 '성운론(星雲論)'은 무려 150년이나 지난 1940년대에 들어서 과학자들에 의해 인정받았고 그의 주장의 정확도에 세상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처럼 과학은 인류의 지성에 절대적 밑받침이다. 과학 또한 수없는 오류의 극복을 통해 발전하는 불완전한 학문이지만 과학의 뒷받침 없이는 인류의 지성은 참으로 한발 짝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도 벅차고 힘들다.

 

    과학은 철학의 동료이기도 하지만 때때론 철학의 도구의 역할을 한다. 과학적 지식은 철학적 사유를 풍성하게 한다. 과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철학을 보는 것을 땅을 파는 것에 비유하자면 땅을 숟가락으로 파는 것과 삽으로 파는 것과 포클레인으로 파는 것과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흔히 과학을 모르고, 과학을 한다는 사람 또한 철학을 잘 알지 못한다. 이러니 이 둘은 서로의 필요를 절감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헛돌기만 한다.

    학생시절 양자역학 시간에 철학과 학생 3명이 수강 신청을 하였다. 너무 신기했다. 물리학과인 나도 너무 어렵고 교수의 강의가 국어로 강의하는건지 영어로 하는 강의인지도 헷갈리는 양자역학 수업을 철학과 학생들이 어찌 감당하려나 살짝 걱정도 되었다. 결국 한 달도 못 버티고 그만두긴 했지만 그 철학과 학생들의 용기는 오래도록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를 깨닫고 싶어 했겠지만 학생들에게 양자역학은 물리의 수학풀이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칸트시대의 과학 수준으로는 칸트의 성운론이 마치 소설과 같았을 것이다. 칸트 자신도 그 사실을 인지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실천이성비판, 1788년]을 통하여 진실의 본질을 찾기보다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하는 윤리학적인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인류가 모든 진실을 다 알고 진리를 찾을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까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알아야하고 그 아는 것을 실천하여야 한다. 하여 칸트는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든 따라야만 하는 정언 명령으로 다음의 유명한 두 가지 명령을 보편 인류에게 내린다. 정언 명령이란 조건이 붙는 명령이나 권유가 아니고 인간이라면 무조건 따라야하는 명령이다.

 

 

 

 

    첫째 명령은,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 하라" 이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내가 하려는 행동을 누가 보거나 다른 사람이 똑 같이 하더라도 당당한 행동만 하라는 의미이다.

 

    둘째 명령은,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 하라" 이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로 축약되는 칸트의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칸트 시대의 사람들은 신분의 지배를 받았다. 왕권신수설과 같이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하늘이 결정하였다고 믿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연론적인 인간관을 그는 반대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칸트가 처음부터 이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칸트는 루소의 저서를 접하기 이전까진 철저한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다고 한다. 칸트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프랑스 1712년~1778년)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 sur l'origi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s hommes)』을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나는 천성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지식만이 인류의 영광을 이룬다고 믿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대중을 경멸했다. 루소를 읽고는 이런 맹목적 편견이 사라졌다. 나는 인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도덕적 평등주의자가 됐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다.'라는 명언은 칸트가 인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칸트 시대에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한 것이 「신분(身分)」이라면 21세기 현대에 있어서는 「자본(資本)」이다. 인간이 자본의 수단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칸트가 만약 지금 살아있다면 칸트는 자본의 노예가 된 인류에게 어떤 정언 명령을 내릴까 궁금하다.

 

원문 ; 2014년 3월 5일

1차 수정 ; 2014년 5월 8일

2차 수정 ; 2014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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