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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9장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의지1 (23/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0.26|조회수206 목록 댓글 0

유레카 3 - 스물세번째 이야기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와 유물사관을 이끈 마르크스가 겸애교리라는 묵자의 한 사상에서 만난다)

 

1부. 우주

 

9장.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의지 1

 

 

* 이 글은 <유레카3>의 23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64. [쉬어가기] - 오서산 가는 길

       2007년 10월 28일,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던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산악동호회를 따라 오서산 억새 산행을 하였다. 그 때 산행을 하며 느낀 감정을 시(詩)도 아니고 산문(散文)도 아닌 운문 형식의 글로 써 보았다. 

 

    산(山)을 오르는 일은 명상(冥想)을 하는 일과 같다. 도인이나 스님이 아닌 이상 산에 큰 깨달음을 얻고자 오르는 이는 없다. 그냥 즐거움을 얻고자 혹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혹은 건강을 위해서 또는 단풍놀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오른다. 그리고 그 오르는 과정은 힘들다. 그리고 그 힘듬을 통하여 즐거움을 얻는다. 만약 노동을 등산처럼 하라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이라는 대자연의 일부를 통하여 내가 그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자연이 우리에게 내어주는 무한대의 베품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욕심꾸러기인지도 알게 된다. 우리는 산에서 그 욕심을 내려놓고 산이 내어 놓는 순수(純粹)를 가지고 돌아온다. 명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세파에 찌든 일그러짐이 아니라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유리창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다. 이 순수를 통하여 우리는 진실(眞實)과 진리(眞理)에 접근한다.

 

 

 

오서산(烏棲山) 가는 길

 

 

*** 산행 개요 ***

일시 : 2007년 10월 28일

산행지 : 광천 보령 오서산

동무 : 수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37명

날씨 : 맑음. 

 

 

 

 

 

추억 하나 담으려 길을 나선다

충청도 홍성 보령 땅

까마귀 까치가 많이 살았다는

오-서-산(烏棲山)

이제 검은 날짐승 대신해

흰 억새가 장관이라는 산

 

 

오서산 입구 상담 주차장

발을 딛어 땅에 접하니

충청도 그 푸근함이

발바닥 아래로 스며올라온다

 

 

광천막걸리 눈에 걸리고

길쭉한 잎에 매달린 상큼한 생강 한쪽

날 사 달라 유혹하는데

주차장 한 가운데 커다란 비석하나

초아의 봉사(超我의 奉仕)

 

 

 

 

몸을 풀고 산에 오르는 길

생강밭 추수가 한참이다

오솔길 따라 오른지 이십분

앞을 막는 정겨운 사찰 하나

정 - 암 - 사

 

 

 

시주는 못해도 부처님 말씀 모신

절 약수(藥水) 한 그릇 공양(供養) 받고

향토 시인 정성 스민 시화전에

눈을 빼 앗긴다

어쩜 그리 예쁜 그림에 예쁜 글을 담았을꼬

 

돌아서 나오는 길

불자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다는 현수막

저 신문은 부처님과 무슨 원수 지었길래

대자대비 부처님의 눈 밖에 낫을꼬

 

 

 

 

부처님 그늘 돌아

정상으로 가는 길

길은 젖어 미끄럽고

가파름에 숨은 턱에 걸리고

다리는 자꾸 쉬어가라 성화인데

마음은 억새에 끌려 오르고 싶고

쉬었다 가자 뒤돌아보니

정겨운 마을 한폭 가을 화폭에 펼쳤어라 

 

 

 

 

어느 산인들 깔딱 고개 없냐마는

오서산 능선고개 만만치 않구나

한발 한발 겨우 겨우 올라 선 뒤

한숨을 돌려보니 이제는 능선이다

이쪽도 보이고 저쪽도 보이는데

어이쿠! 산구름 안개 되어

이쪽 저쪽 다 뿌옇다

서해바다 기대했던 바람은 건너가고

산바람만 매섭구나 나무들이 키가 작다  

 

 

 

 

 

힘들어서 안되겠다 

몇몇동행 자리잡아 막걸리 내놓는데

탁주 한사발 한 숨에 들이키니

이 맛이 꿀맛일세 이 맛이 산맛일세

깍두기 안주삼고 서로에게 술권하니

산친구 정겹구나 이래서 산에 오네

 

 

이제는 정상가자 자리 털고 일어나

바위 넘고 길을 열어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어 보이누나 펼쳐지는

억 - 새 - 밭

아차! 너무 늦었구나

하얀 장관 한 풀 꺽여 누렇게 지고 있네

 

 

 

산구름 희뿌염에 아쉬움을 묻어두고

길 옆 억새 쓸며 가니 나타나는

그림 같은 정자 하나 오-서-정

남는 것은 사진일세 산 동무 모두 모여

안고 서고 자리 잡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오서산 정상비

칠백구십일미터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네

드디어 다 올랐네 오른 힘듬 사라지네

여기서도 한 방 찍자

이번엔 여자 따로 남자 따로

 

 

 

점심 먹자 길옆 공터 자리 잡고

싸 온 음식 펼쳐 보니

진수성찬 따로 없네

이집 음식 저집 반찬 별미구나 진미구나

소주 맥주 막걸리 양주 매실주 복분자 더덕주

온갖 술을 열어 놓고 한잔 두잔 받다보니

하늘이 가까워 기쁨이요 정상주(頂上酒)의 기쁨이라

모두 한껏 배를 불려도 남은 음식 아직 많네

그 옛날 예수님 오병이어(五甁二魚) 이것일세

나누며는 남는 것을 혼자 가지려니 모자라네

 

 

 

 

 

 

점심 먹고 일어서서 늦은 억새 구경일세

비록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장관이네

 

 

 

 

 

부족해도 만족하면 행복이고

남아도 욕심내면 불행인 것을

능선 따라 계속 가니 정상 표시 또 나오네

아까 것은 광천 정상 여기는 보령 정상

안내 사진 자세히 보니

이쪽은 대천바다 저쪽은 해수욕장

그러나 어이하리

안개가려 구름 가려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늘 산행 아쉬움이 많이 남네

 

 

 

 

이제는 내리막길 오른만큼 가파르네

한참을 내려오니 아내 무릎 아프다네

내 못난 탓 고생시킨 결과 같아 부끄럽네

한발 한발 조심 조심 살금 살금 아슬 아슬

 

 

밤밭지나 내린 마을 그 풍경이 예술일세

감나무에 주황감이 주렁주렁

너른 마당엔 벼말리고 고추 말리고

대문 앞에 가지각색 꽃단장이

산행 지친 걸음을 쉬게하네

 

 

 

 

굴 구이 먹자하고 찾아간 천북항

들물 들어 꽉찬 바다 넘치는 파도

산도 보고 바다 보니 행운중에 행복일세

사십명 모여 앉아 갓 잡아낸 굴을 굽네

통통하고 싱싱한 굴 도시에선 볼 수 없네

이렇게 맛있는 굴 생전 처음 맛을 보내

굴칼국수 입가심하고 아내와 바다에 섰네

  

 

 

바다 - 생명의 고향

언젠가는 바다도 품에 안고 하늘도 품에 안으리

오서산 - 천북 바다 - 그리고 정겨운 사람들

오늘 내가 행복한 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 했다는 기쁨인 것을.....

 

 

                                                                                    2007년 10월 28일 오서산에서

 

 

    65. 묵자(墨子)

    중국의 예수라 불렸던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적(翟)이고 성은 묵(墨)씨라 하나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그가 묵형이라는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묵씨(墨氏)’라 불렸다고 한다. 묵형이란 죄인의 얼굴에 죄명을 먹으로 떠 넣는 형벌이다. 우리나라 조선 시대에도 도둑질을 하면 얼굴에 '도(盜)'자를 문신처럼 새겨 넣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주나라에서는 지배층인 귀족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피지배층인 평민과 천민에게만 형벌을 가했다. 그렇다면 묵자는 형벌로 다스려지는 하층민이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는 묵자의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묵씨’라 불렸다고 한다. 태어난 나라도 불분명하고, 태어나고 죽은 해도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공자보다 조금 뒤, 맹자보다 조금 앞인 춘추전국시대 초기에 사셨던 분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은 수많은 나라들이 얽히고설켜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던 약육강식의 시기이다. 그런 시절에 묵자는 전쟁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뛰어난 과학자였고 기술자였으며, 많은 도구들을 개발하였다. 묵자가 만든 도구 가운데는 전쟁 무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격 무기가 아닌 방어용 무기였다. 묵자가 만든 방어용 무기들은 약소국 제후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송나라의 대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묵자는 송나라, 공자는 노나라, 맹자는 추나라 출신이고 후에 진(秦)나라의 진시황에 의하여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가 형성된다.)

 

    묵자(墨子 B.C 470년?~391년?)는 예수와 같이 만민의 사랑을 주창한 겸애주의자였다. 묵자가 예수보다 500살 정도 더 많기 때문에 '예수도 묵자와 같이'라고 말해야 하지만 예수는 워낙 초특급 슈퍼스타다 보니 편의상 이리 말하겠다.  겸애(兼愛)란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묵자의 여러 책과 사상 중에 비공론(非攻論)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儒家)의 인(仁)도 똑같이 사랑을 주장하지만 유가(儒家)는 사람을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으로 나누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즉 신분을 구분하고 인정하며,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尊卑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22,39)'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루카6,27.32)'

 

    '우리가 마땅히 복종해야 하는 하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은 정의를 원하고 불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상이나 벌을 준다.(묵자)'

 

    예수의 말을 묵자가 한말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예수와 묵자의 사랑 정신은 닮았다.

    묵자의 또 다른 칭호가 있으니 그것은 고대의 칼 마르크스라는 별칭이다. 묵자의 가르침을 네 자로 줄여 말하면 겸애교리(兼愛交利)이다. 겸애 사상은 예수와 닮았고 교리 사상은 마르크스와 닮았다.   겸애(兼愛)는 서로 사랑하자는 뜻으로 정치적인 평등을 지향하고, 교리(交利)는 서로 이익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로 경제적인 평등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었다. 겸애가 이루어지면 교리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자식에게 혹은 부모 형제에게 내 것을 나누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이 조금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겸애의 마음만 있다면 한 공동체의 사람에게 이익을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는 예수와 유물사관을 이끈 마르크스가 겸애교리라는 묵자의 한 사상에서 만난다. '사랑' 이라는 순수한 눈으로 유신론(有神論)과 유물론(唯物論)을 보면 고전역학 기반의 결정론적 사랑이 '겸애교리(兼愛交利)'라는 서로 다른 듯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70-80년대 유행하였던 해방신학의 모습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세상에는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뜻(天ㅡ意)이 있으며, 인간은 이 하늘의 뜻에 복종해야 하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평가하는 통일된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묵자는 생각하였다.

 

    예수 또한 그리 생각하였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요한6.38)'

 

    묵자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하층민들이 많았는데 특히 하급무사나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살며 집단의 우두머리인 거자를 중심으로 금욕적인 생활과 엄격한 규율을 철저히 지켜야 했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을 삶의 의무요 행복으로 여겼다. 묵가의 군인들에게 전쟁은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를 지키는 방어 전쟁만이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그것은 묵가(墨家)의 신앙이고 철학이었다.

 

   사람들은 공자 맹자의 유가(儒家)와 노자 장자의 도가(道家)가 춘추전국시대의 양대 사상으로 생각하지만, 순자, 장자, 한비자의 책을 보면 '유묵(儒墨)'이라 하여 유가와 묵가를 대등하게 놓아 당시 묵가의 세력이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묵자는 춘추 전국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사상을 펼쳐 보려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힘 있는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반기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비천한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사상이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부국강병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중을 옹호한 묵자의 사상은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약해지기 시작했고, 통일 이후 중앙 집권적 전제주의가 강화되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묵자 사상의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서이며, 오늘날 중국에서는 사회주의와의 유사성을 초점을 맞추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처럼 묵자와 그를 따르던 묵가의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들의 공동체생활의 모습도 닮아있고, 미국을 개척했던 청교도들의 검약사상도 들어있고, 그리스의 스파르타도 생각나게 하며, 어떤 부분은 종교적 비밀결사 조직과도 같았다.

 

    이런 묵자와 묵가가 왜 실패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를 분석하고 미래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원문 ; 2014년 3월 3일

1차 수정 ; 2014년 4월 30일

2차 수정 ; 2014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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