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3 - 세번째 이야기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뜨거워지는 것이라면, 철학은 자아(自我)에 대하여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에 단 한번이라도 좋다)
1부. 우주
1장. 프롤로그 - 과학과 종교 그리고 철학 3
* 이 글은 <유레카3>의 3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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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전 예비지식
이제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원자와 태양계의 신체검사를 해보자. 나의 생각으로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래의 원자와 태양계에 대한 글을 읽고 이해가 된다면 본문을 읽을 자격을 갖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최소한의 예비지식의 수준은 넘어 선 까닭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본문을 읽지 않기를 권한다. 어린 학생이라면 조금 더 지식이 생긴 후에 읽으면 될 것이고, 모르시는 분이라면 이 글을 읽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것이고 본문을 끝까지 읽는다 해도 목적하는 깨달음에 도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악착같이 읽었다면 그것은 나를 믿거나 혹은 배척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함일 것이다. 나는 이 둘을 모두 정중히 거절한다.
8. 원자
우주 물질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수소를 살펴보면, 수소는 원자핵으로 양성자 하나와 전자 하나가 있는 가장 기본적이며 간단한 원자이다. 원자핵으로부터 전자가 있는 외각까지의 반경은 약 0.53x m 정도의 크기이다. 너무 작아서 일견 감이 잘 안 오지만, 원자의 반경을 올림픽 스타디움처럼 늘리면 원자핵의 크기는 축구공만해진다. 전자의 질량은 양성자의 질량의 정도이므로 탁구공보다 훨씬 작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전자의 속도는 양자 역학적으로 계산하느냐, 고전 역학적으로 계산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대략 초속 2000Km가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인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기에 밖에서 보기엔 마치 구름처럼 핵을 감싸고 있는 형태라 전자구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원만한 힘이 아니고서는 전자를 통과해 원자핵에 접근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한동안 절대로 깨지지 않는 입자는 원자였다.
모든 전자는 아무렇게나 막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지구를 비롯한 행성처럼 일정한 괘도를 따라 돈다. 태양계와 다른 것은 이 괘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 존재한다. 원자에게 어떤 힘을 주면 전자의 괘도가 옮겨지는데 괘도와 괘도 사이를 연결하는 길은 없다. 순식간에 괘도에서 괘도로 순간이동을 한다. 순간이동!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 작은 우주의 세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또한 전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나타낼 수 있다. 왜냐고 묻지는 마시라. 과학자들도 아직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렇게 측정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를 양자역학의 세계라 한다. 반면에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움직임을 규정한 것을 만유인력의 법칙, 고전역학 또는 뉴턴이 발견했다 해서 뉴턴역학이라고도 한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양자역학이 발표되었을 때에 고전역학을 하는 과학자와 양자역학을 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이 있었다. 고전역학의 입장에서는 양자역학 이론의 터무니없음이 너무 작은 세계의 움직임이라 아직 규명을 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반면에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새로운 규칙을 발견한 대사건이었다. 고전역학이 지배하는 거시 우주는 '1+1=2'와 같이 정형화된 세계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서는 1+1=2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을 뿐 확정할 수는 없는 세계이다. 심지어 1+1이 2가 되고 3이 되는 것이 동시에 중첩되어 존재하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비정형화된 세계이다.
아무튼 올림픽 종합운동장만한 넓이에 딸랑 축구공 하나, 탁구공 하나 있는 것이 원자의 실제 모습이다. 우리가 만약 잠실 종합운동장에 갔는데 가운데 축구공 하나 놓여있고, 관중석 뒷편으로 탁구공 하나가 돌고 있다면 운동장이 텅 비어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전자의 부지런함이 원자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지, 원자는 실제로는 텅 비어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꽉 차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마술처럼 비어있다. 만약 원자와 전자가 붙어 있는 중성자별처럼 원자핵과 전자가 붙어있다고 생각한다면 태양의 직경은 대략 6~7Km, 지구는 60m 그리고 우리 몸은 좁쌀보다도 더 작아진다. 우리의 육체는 심하게 뻥튀기 되어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개미보다도 훨씬 작다.
8. 태양계와 이웃 별
지구를 직경 1cm의 땅콩에 비유하면 태양은 직경 109cm의 커다란 애드벌룬이다. 이 두 천체가 약 100m 떨어져서 지구는 초속 30Km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목성은 야구공만한 크기로 500m 떨어져서, 토성은 정구공만한 크기로 1Km 떨어져서 태양을 돌고 있다. 행성의 마지막인 해왕성은 탁구공 크기로 약 3Km, 얼마 전 행성의 지위를 잃은 명왕성은 4Km밖에서 태양을 돌고 있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은 센타우르스 자리의 3개의 별, 알파센타우리 A, 알파센타우리 B, 프록시마 센타우리로, 이 중 태양에서 4.2광년 떨어진 프록시마 센타우리(Proxima Centauri)라는 적색왜성이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다. 적색왜성은 수소가 다 타고 수명이 다한 별로 크기도 작고 그리 빛나지도 않는다. 반면 알파센타우리 B는 태양과 크기가 비슷한 별로 그가 거느린 행성 중에 혹시 수퍼지구가 있어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이 있지 않을까 과학자들을 설레게 하는 항성이다. 태양을 농구공의 크기에 비교하면 이 별들은 지구에서 달의 거리에 두 배 반쯤 떨어져있다. 가장 가까운 별들과도 태양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금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 여행을 하고 있는 보이저 우주선의 속도로 태양과 가장 가까운 이웃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에 도착하려면 약 7만 3775년이 걸린다.
우리가 어느 맑은 날 밤 공기 좋은 곳에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 온 하늘이 별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별이 쏟아진다'라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4~50대 이상 시골에서 사셨던 분이라면 별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느낌을 잘 알 것이다. 그 황홀감은 어떤 불꽃놀이 보다도 화려하며 충격적이다. 밤 하늘이 온통 빽빽하게 크고 작은 별들로 가득차 있고 그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에게로 마구 쏟아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된다. 실제로 우주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 우리가 맨 눈으로 보는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별들과 은하들이 밤하늘에 가득 펼쳐져 있다. 이처럼 우주도 꽉 차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자보다도 더 텅 비어있다. 마술사의 바구니처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구니에선 계속 무엇인가 나온다.
(차례대로 태양,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A, 알파 B, 프록시마의 크기와 색깔 비교 - 위키백과)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항성계에서 본 태양. 3차원 우주공간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인 셀레스티아로 재현함.- 위키백과)
현대의 과학은 불과 최근 수세기 만에 어마어마하게 발전하였음에도 우리는 우주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찾아낸 우주내의 물질은 고작 전체의 4%에 불과하다. 나머지 96%는 암흑물질, 암흑에너지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4%의 물질과 에너지도 완벽하게 이해한 것도 아니지만, 과학은 아마도 96%를 찾기 위한 노력을 거듭할 것이며 그 껍질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마치 얼마 전의 힉스입자의 발견과도 같이, 인류는 경의와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본문에서 이야기하겠지만 힉스(Higs)는 이 글의 시작이고 나에겐 충격이었다.
9. 종교
종교에서 '믿음'은 짜장 훌륭한 도구이다. 그것의 사실성을 떠나 그 종교가 선(善)을 지향하고 있고 그것으로 그 구성원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종교는 이미 우리와 인류에 공헌한 것이며 진리를 말할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분명 우주의 구성요소이지만, 우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불과 얼마 전까지는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고 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그나마 몇몇 선(善)을 지향하는 종교들이 지난 수 천 년 동안 인류의 빛이 되었음은 그 종교의 일부 악행과 폐단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역사에 매우 가치 있고 의미 있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일이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신화와 종교로 시작된다.
그러나 종교는 참으로 변화에 더디다. 자동차로 길을 가다 보면 옆으로 풍경이 지나간다. 그것이 앞에 있었을 때와 옆에 있었을 때와, 뒤에 있었을 때의 모습은 각기 다르다. 마찬가지로 원시인들이 보는 하느님과, 고대사회에서의 하느님과, 중세에서의 하느님과, 현대의 하느님의 모습은 서로 달라야하고 실제로도 다르다. 인류가 세상을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진 까닭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구약의 하느님과, 예수가 보았던 하느님과, 중세의 하느님과, 지금의 하느님은 당연히 다르고 달라야한다. 하느님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는 인간의 각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일부 개신교회처럼 구약시대의 성경문구나 상황을 현대사회에 적용하려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경구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어리석은 처사이다. 부처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지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봉건시대의 하느님이다. 아직도 성경 문구 하나에 집착을 하고 트집을 잡는다. 재림예수를 왕이 되어 오시는 절대 권력의 황제의 모습으로 생각한다. 하느님 나라는 나쁜 놈들을 다 심판하고 자기 신앙인들끼리 잘 먹고 잘 사는 미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작금 중동지방에서 일어나는 이슬람계열의 IS라는 종교집단의 광신을 보라! 거기에 무슨 하느님이며 알라가 있겠는가? 오로지 자신들의 그릇된 신앙 논리에 사로 잡혀 인간의 존엄과 그들의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우주를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그 안에 있는 이 세상은 이미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과 생명은 이미 하느님의 백성이다. 어찌하여 하느님이 그대들만 사랑하고 그대들의 의식만 인정하고 그대들의 예배만이 그분의 마음에 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유대민족과 유대 땅의 민족신이었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모든 민족과 그 영역의 땅의 하느님이 되도록 하느님의 영역을 넓혔다. 철학의 순교자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 1548년 ~ 1600년 2월 17일)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리레이, 아이작 뉴턴, 애드먼드 핼리 등과 같은 중세의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영역을 지구를 벗어나 태양계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나는 '유레카3'를 통해서 그 영역의 범위를 138억년의 우주 시간과 우주 공간, 38억년에 걸친 지구 생명의 대장정인 진화의 역사와, 인류를 넘어선 모든 생명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의 영역을 넓히려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그래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길에서 하느님을 아는 길로 가는 해법이 될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우리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고, 우리 생명은 어떻게 만들어져 어떤 과정으로 지금 여기까지 왔는지를 대략 알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과학을 100% 신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고 오직 수천 년 전에 그 시대의 지식과 깨달음으로 쓰여 진 경구에 매달려 현대 인류의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지 그지없다.
그러므로 나는 종교행위로 삶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나 그를 믿는 신앙인들에게 권고한다. 그대가 그대들의 하느님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과학의 우주 창조론인 빅뱅이론을 자세히 섭렵하고, 생명의 역사인 진화론을 읽으며, 우리 우주의 시스템인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을 비롯한 고전의 지혜와 만났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며 인류가 살아가야 하는 진리의 길과 그로 얻어지는 구원의 길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 존재하는데 자신들의 경전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무시하고 심지어 교과서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행위는 참으로 옹졸하고 무지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이유들이 과학자들이나 젊은이들에게 종교는 왠지 가짜 같은 느낌이 더 들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4년 10월 28일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빅뱅이론과 진화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찾으려하는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느님을 째째하게 만들지 마라. 그 분은 그대가 생각하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
10. 철학
철학은 참으로 멋진 학문이다. 인간은 철학에 와서야 비로소 자아(自我)를 찾는다.
<나는 누구인가?>
신의 창조물인가? 엄마 아빠의 난자와 정자의 결합의 성장물인가?
단지 그것뿐인가?
<나는 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의 가치이다.
나는 독립된 나요. 나는 비록 유한하지만 나를 위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인 것이다.
철학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철학을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가 남긴 어록들을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철학이고, 그들의 철학이다. 나는 그대에게 자기의 철학을 만들라고 이야기한다. 그대가 그대의 삶에 대하여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그대는 이미 철학을 시작한 것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한 귀절.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사랑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뜨거워지는 것이라면, 철학은 자아(自我)에 대하여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에 단 한번이라도 좋다. 그 한번으로 인해 우리의 삶은 '나'의 영역을 벗어나 수많은 또 다른 나인 '우리'를 만나고 마침내 '우주'를 만날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와 생명 그리고 나를 찾기 위해 동굴 탐험을 시작할 것이다. 동굴은 플라톤에서 따온 개념이다. 동굴의 저 편엔 진짜가 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것은 사실 가짜일지도 모른다.
원본 2014년 2월 4일
1차 수정 2014년 3월 31일
2차 수정 2014년 10월 15일
3차 수정 2015년 11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