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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25장 권력 - 권력중심사회, 역할분담사회 3 (70/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2.15|조회수253 목록 댓글 0

유레카 3 -일흔번째이야기

(창조 영역으로의 진화. 이것이 우리 인류 지성의 진화의 목적이고, 지금 이 시대 인류에게 내리는 우주와 우주의 프로그래머인 하느님의 당부이고 새로운 계명이다)

 

3부. 길

 

25장. 권력 - 권력중심사회, 역할분담사회 3

 

* 이 글은 <유레카3>의 70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205. 3D Printer의 시대

 

   3D Printer가 활성화되면 지금처럼 커다란 공장에서 제품을 집단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필요로 하고 원하는 제품을 3D Printer가 있는 작은 공간에서 개별 생산한다. 이는 제조와 유통이라는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시스템의 파기가 예측 가능한 눈앞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획일적인 브랜드의 시대에서 소비자의 개성과 취향을 강조한 특화 개별 상품이 생산되어 디자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고, 폐기되는 제품을 분해해 재활용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대량폐기를 막고 지구 자원을 보호하며 환경문제도 혁명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하다.  3D Printer는 컴퓨터가 세상을 바꾼 그것 이상으로 우리시대를 바꾸어 나갈 것이다.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이고, 디자인은 감성의 표현이다. 감성의 표현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유리하다. 이래저래 미래는 여성과 젊은이가 주축이 되는 시대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는 아직도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고, 20대 실업률은 사상 최대라 한다. 우리가 잘못 된 길을 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젊은이들이 보다 큰 포부와 야망을 가지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는 사회이다.  지금처럼 취직 자리 구하기 조차 버겁고, 취직 스펙을 쌓기 위해 꿈이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것은 인생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이 책임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노인 복지를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젊은이들에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이야 말로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  젊음에게 기회를 주어라.  그것이 우리나라와 인류의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다. 

 

(이번 글에는2011년 12월 11일 태백산 사진을 올린다.  눈의 나라라 표현하며 걸었던 아름다운 산이다)

  

   206. 권력중심사회

 

   인류의 지난 일만 년 역사와 문명은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였었고, 싸움의 문명이었으며, 계급 질서의 사회였다. 나는 이것을 권력중심사회라 명명한다.

   권력중심사회에서 사람들의 목표는 위로 오르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윗자리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이다. 모든 권력은 남성이 독점하였다. 여성의 권력은 남성의 권력 높낮이에 의해 유지되었다. 여성에 대한 글을 길게 쓴 것은 남성이 가지고 있는 편견, 혹은 여성 스스로도 남성중심문화에서의 잘못된 교육을 통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잘못 교육받고 인식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그런 편견을 깨라는 의미이다. 이 인식을 깨는 것은 다음 이야기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며 평등하다. 미래에 여성에게 더 유리한 사회구조가 형성된다 하더라도 이 전제는 유효하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의 생명나무에 걸린 나뭇가지와 나뭇잎처럼 한 프로그래머의 의지의 분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동일한 계열의 DNA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명의 진화의 과정을 표현한 한그루의 생명나무는 우리가 하나의 근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나뭇가지 하나하나는 DNA 구조가 동일한 종족을 의미하며, 나뭇잎은 그 종족의 개별 생명체를 의미한다. 모든 생명은 형제관계이며 한 프로그래머 즉, 한 하느님의 분사이며 하느님의 부분이고 하느님 그 자체이다.  남성과 여성만이 동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동등하다. 

 

 

   모든 생명은 수직 관계의 상하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이다. 이 수평 관계를 유지시키는 것은 역할의 문제이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것은 뱀이 개구리보다 높거나 악(惡)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하기 위한 뱀의 역할이고, 개구리의 역할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생명에겐 각자의 역할이 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평등하다. 미래의 사회는 이 평등성에 기초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사는 것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207. 하느님과 나는 평등하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과도 평등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분이다. “의지는 외부에서 오는 힘이다.”는 말을 기억하는가? 

 

   <하느님은 지극히 높은 분이 아니라, 지극히 넓은 분이다.>

 

   다음 문명으로 진화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는 주인과 종의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지고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 신분제도가 낳은 착각이다.  옛날의 왕이나 황제는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백성들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그 위에 두고 싶었을 뿐이다.  왕이나 황제보다 낮은 하느님.   그런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류 진화의 목적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느님은 인류를 당신의 조력자도 두고 싶어 하신다. 

 

   주인이 종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수십 억 년에 걸쳐 이룩한 이 생명의 땅 지구를 함께 가꾸어 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다. 그 분은 인류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나이 쉰에 지천명(知天命)한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얻게 된 또 하나의 깨달음.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우리는 그 분의 부분이고, 그 분은 우리의 전부이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왜 인간이 저지르는 사악한 현장을 막지 않고 벌하지 않는가? 나치가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였을 때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 되는가?

   <물고기는 바다이지만, 바다는 물고기가 아니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나온 것이다. 물고기는 바다의 구성성분이다. 하여 물고기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다가 물고기는 아니다. 물고기는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지만 바다가 물고기를 어찌 할 수 있지는 않다. 다만 물고기의 짧은 생애가 끝나면 물고기는 분해되어 다시 바다의 일부가 되고 다시 다른 생명의 부분이 된다. 이것은 불교에서의 윤회와 상통한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다.

   <나는 하느님이지만 하느님은 내가 아니다.>

 

   인간이 사악한 짓을 저지를 때 왜 하느님은 개입하지 않는가? 생명은 하느님의 부분이며 하느님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나이 40을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 나이 50을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 60에는 귀가 열리는 이순(耳順)이라 했고, 70에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며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하였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나는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곧 나이다.]

[나는 부처이고, 부처가 곧 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나이게 맞게 지천명한 것으로 만족하여야 할 것 같다.

 

 

   208. 역할 분담 사회

 

   우리가 목표하는 다음 세대의 사회구조는 수평평등관계이다. 그것은 몸과 지체와의 관계와 같다. 우리 몸은 수많은 지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 하는 역할이 다를 뿐이다. 머리가 중요하다고 해서 손가락보다 더 높다고 할 수는 없다. 손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손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손은 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겐 높낮이가 없다. 하느님마저도 나보다 높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평등 관계 아래 권력 지위가 아닌, 직책과 역할이 분배된 미래사회. 나는 이 사회를 <역할분담사회>로 명명한다.

 

   인류의 다음 세대인 역할 분담 사회의 기본정신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퍼져 수평적 평등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내가 누구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반대로 내가 누구보다 더 낮다 라고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보다 높은가?'

   대답은 당연히 No이다. 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보다 높다는 생각은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게 하고, 자식의 인생에 간섭을 한다. 관심을 갖는 것은 사랑의 행위이지만 간섭은 사랑의 행위가 아닌 부모의 집착이며 욕심의 표현이다. 부모와 자식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희생이 필요한 특수한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특수한 경우이어야만 한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청소부 아저씨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청소부 아저씨는 청소부 아저씨의 역할을 하는 사회로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차이가 아니라 차별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같은 시간의 노동을 하였을 때, 그 벌이의 차이를 모두 다 똑 같이 하는 것은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안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엄청나게 커서도 또한 안 된다. 나는 노동법에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의 비율을 정했으면 좋겠다.

   <임금 비율제>.

   <최고 임금제>와 더불어 <역할 분담 사회>에서 도입했으면 하는 제도이다. 즉, 같은 회사에서 단위 시간당 임금 비율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의 노동과 기술에 대한 횡포를 막고 기업공동체로 가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9. 교육

 

   이것은 또한 교육을 바로 서게 할 것이다. 무조건 높은 자리가 아니라 자기가 가장 잘 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고 사회는 더욱 더 발전할 수 있다. 무조건 100점을 맞게 해서 공부를 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할 수 있는 일, 즉, 적성을 찾아 주는 일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 우리나라의 큰 문제이다. 그러나 사회구조, 노동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교육의 변화는 없다.

 

   내가 사는 지역에 교육대학이 있다. 관악산 옆 삼성산에 올라 이 학교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교육대학은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들기 위한 교육 기관이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상위 5%안의 성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반에서 1~2등하는 학생들이 겨우 입학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렇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 다른 일을 해야지 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할까? 초등학교 선생님이 평생 안정된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 선택의 기준이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적어도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기 위한 조건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적성, 어린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사명감, 교육에 대한 열의 등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고등학교 성적 50%안에 드는 정도 학생의 실력이라면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50%라는 최소한의 기준을 두고, 선생님으로서의 자질과 열의가 있는지를 가지고 학생들을 선발하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너무 너무 자질이 풍부하고 하고 싶어 하는 어떤 학생이 고등학교 성적 상위 5%안에 들지 못한다다는 이유로 선생님이 되는 첫 관문부터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한다면 그것은 그 학생의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도 손해가 되는 일이다.

 

   우리나라 교육입시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가장 큰 것은 사회 노동 구조의 문제이지만, 대학 입시를 오로지 성적에만 의존하는 이유도 있다. 나는 각 대학이 학과별로 해당 학과의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을 정해 놓고, 그 수준 안에 들어온 학생들은 성적이 아닌, 그 학과에 맞는 적성, 인성, 자질 등의 다른 요소로 학생들을 선발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대학 입시의 과열도 막고, 학교 졸업 후 보다 좋은 재원을 사회에 내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10. 어울누리 세상으로

 

   현대 인류는 고도의 효율성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백을 생산하기 위해서 백 명이 필요했다면, 지금은 한명, 아니 영점오명이면 족하다. 과학 기술이 인류의 생산력을 그렇게 발전시켰다. 사람은 남고, 노동의 가치가 떨어진다. 단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최저임금제로 내몰리는 이유이다. 서민, 빈민 계층이 중산층으로 올라가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중산층이 서민 계층으로 떨어지기는 쉬워진다. 빈부의 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사회는 각박해져 간다. 종교가 인류 문명의 땅을 다지고, 과학이 다진 땅 위에 멋진 집을 지었지만 이 집은 점차 감옥이 되어간다. 이 집을 놀이공원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은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역할분담사회로 가는 길은 어느 한 단편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권력과 자본의 분배 문제, 노동의 문제, 교육의 문제, 사회 문화의 문제들이 동시에 같이 발전하고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평등과 자유의 바탕위에서 가능하다. 예전에 사회 교과서에서 나온 이론. '자유를 신장하면 평등이 제한을 받고, 평등을 중요시하면 자유가 제한을 받는다. 자유를 바탕으로 한 제도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제도이고, 평등을 바탕으로 한 제도가 공산주의, 사회주의이다.  이것은 권력 중심 사회이었기에 가능하였던 말이다. 역할 분담 사회가 되면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은 동시에 가능하고, 또 반드시 그러하여야만 한다.  역할 중심 사회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사물을 높낮이의 상하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다른 수평한 관계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싸움의 시대를 마감하고, 어울림의 시대로 도약하라!

 

   인간과 인간의 어울림.

   인간과 자연의 어울림.

   인간과 하느님의 어울림.

 

   이것이 우리 인류 지성의 진화의 목적이고, 지금 이 시대 인류에게 내리는 우주와 우주의 프로그래머인 하느님의 당부이고 새로운 계명이다.

 

 

원문 ; 2014년 3월 28일

수정 ; 2014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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