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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25장 권력 - 권력중심사회, 역할분담사회 1 (68/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2.15|조회수197 목록 댓글 0

유레카 3 -예순여덟번째이야기

(문명을 시작한지 불과 일만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대부분 이해했고,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이해하였으며, 지구를 지배한 어떤 종족도 이루지 못한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하였으며, 마침내 우리는 우주와 생명과 프로그래머의 관계를 미약하나마 깨닫기 시작하였다)

 

3부. 길

 

25장. 권력 - 권력중심사회, 역할분담사회 1

 

* 이 글은 <유레카3>의 68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192. 동굴

 

   동굴. 두 길이 넘는 수직 출구를 이제 반 정도 올라왔다. 이제 남은 높이는 일 미터 남짓. 두어 번 만 더 발길질을 하면 손이 출구 끝에 닿을 것 같다.

   땀이 온 몸에 흐르고 바위에 기댄 등이 따갑다. 손을 뒤로 뻗어 디딤돌을 집으며 발로 잔뜩 힘주어 밀며 한 뼘 한 뼘 위로 오른다.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출구에 쓰여 진 글을 읽으며 나는 잠시 쉬며 생각했다.

 

   [돌아가리라!]

 

   육체는 수소에서 시작하는 물질과 에너지에서 왔으니, 다시 물질과 에너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의지는 결국 의지가 나온 존재. 그 존재자에게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왜 ‘돌아간다’라고 표현했을까? 아주 오래전의 어떤 선지자는 우리 우주가 허상임을 알고 이런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돌아간다. 결국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그 곳이 곧 본질(本質)이라는 의미이리라.

 

귀천 (歸天)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千祥炳, 호 ; 심온(深溫), 1930년 1월 29일 ~ 1993년 4월 28일) 시인. 1967년 불행히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옥고와 고문을 겪었으며, 1993년 지병인 간경화로 인해 타계하였다.

 

   가난한 시인의 맛있는 시 한수로 목을 축인 나는 온 힘을 다해 동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동굴 밖은 산정 근처일거란 나의 예상과는 달리 끝 간 데 없이 푸른 바다가 펼쳐진 갯바위이다.

 

   193. 무극, 태극, 태허 그리고 무생

 

 

   모든 생명의 끝은 죽음이다. 생명에 있어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생명의 시간은 짧고, 생명은 떨어지는 물방울보다 가볍고 여리다. 죽음보다 낮은 곳은 없다. 삶이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모든 생명은 물이 아래로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듯이, 생명의 삶은 하루하루 태허(太虛)의 바다를 향해 흘러 들어간다. 태허의 바다. 성리학(性理學)은 우주의 본질인 이(理)를 무극(無極), 태극(太極), 태허(太虛)라 하였다. 무극은 미시우주를 태극은 거시우주를 그리고 태허는 생명우주를 말한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우주의 본질을 알고자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분자로, 원자로, 소립자로 더 나아가 초끈으로 결국은 파장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무극의 우주이다.

   또 우주의 본질을 알고자 우주를 어머니인 지구계를 넘어, 아버지인 태양계를 지나, 은하수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10만 광년 거대한 회오리 모양의 멋진 우리 은하계를 품고, 그런 은하가 끝없이 펼쳐져있는 우주를 생각하는 것이 태극의 우주이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멸하여 없어질 것이다. 생명도 죽고, 별도 죽고, 마침내는 우리 우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허는 죽음의 우주이다. 그러나 멸(滅)로부터 생(生)이 새로 시작된다. 그것을 깨닫고 겸손하고 겸허하게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생(無生) 우주이다.

   태허(太虛)가 되어야 무생(無生)이 시작된다. 생(生)은 애당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몇 십 년 전에 삶을 시작했던 바로 그 시간이 태허의 우주에서 무생의 우주로 건너온 것이다.

 

   삶 이전엔 아무것도 없다. 우리 우주가 무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의 삶도 무에서 시작하였다. 하여 나는 삶을 무생(無生)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우리의 삶이 무생이고, 우리 지구와 태양도 무생이고 마침내는 우리 우주도 무생이다. 우리 우주조차도 한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우주는 공간적으로는 무극에서 태극으로 움직이고, 시간적으로는 무생에서 태허로 움직인다. 그리고 무생에서 태어나고 생겨난 나는 이 지구에서 잠시 놀다가 다시 몇 십 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빨리 태허의 죽음으로 내려가리라.

 

   나는 절벽을 오르듯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 좀 더 높이 오르려 애썼지만 실상은 매번 내려만 가고 있었다.

 

(이번글에는 2010년 10월 10일 산행하였던 지리산 반야봉, 뱀사골의 사진을 눈요기 사진으로 올린다)

 

 

   194. 싸움의 문명

 

   지난 일만 년의 인류 문명의 역사. 인류문명은 전쟁의 문명이다. 역사책을 들여다보라. 내용의 절반은 전쟁과 그 전쟁의 영웅 이야기이다. 전쟁으로 나라와 나라가 바뀌고, 민족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결정된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이고 당연히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한다. 패자의 재산과 권리 목숨까지도 승자의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민족이나 나라도 모든 국력과 지혜를 전쟁에 집중하였다.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혹은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보다 강한 군대, 보다 좋은 무기와 장비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발달하여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다.

   철로 만든 칼과 창이 만들어지고 나중에 철제 농기구가 나온다. 원자폭탄이 만들어져 사용된 후에 원자력 발전이 생겼고, 인터넷과 GPS의 시작은 군용이었다. 인공위성 가운데 가장 성능이 좋은 위성은 군사첩보위성이다.

 

   나라와 나라는 전쟁을, 집단과 집단은 투쟁을, 개인과 개인은 경쟁의 방법으로 싸운다. 인간의 삶은 평생 그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라고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끊임없이 싸워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롭겠는가? 싸움의 결과 마침내 등급이 매겨지고 신분이 생겼다. 신분은 하늘에서 내린 축복이며 재앙이다. 왕은 하늘의 아들이 되고 귀족은 하늘이 선택한 가문이 된다. 신분 세습의 당위성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 하늘을 명분으로 갖춰진다.

 

   인류 문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앞면에는 평화와 번영이, 뒷면에는 전쟁과 파괴가 항상 함께 다닌다. 이 둘은 파괴와 건설을 반복하며 인류의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지리산에서 저 멋진 운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지리산에 오른 것이 아니다)

 

 

   195. 형이상학의 시작

 

   문명은 신화를 기축으로 하는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과학과 철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종교는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시작이었고 인류는 '지성의 진화'라는 다른 동물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지성의 진화 목적은 본질의 이해이다.

   하늘을 보기 시작한 인류는 하늘의 천체가 하루의 변화와 계절의 순환에 연관이 있음을 알았고, 이는 온갖 상상과 어우러져 예상과 예측이 가능해 지고, 관습이 되고, 문화가 되어 드디어 신화가 만들어져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더니 마침내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가 신앙으로 굳어진 후엔 문화의 주축이 되어 인류의 삶을 지배한다.

   기체와 같이 자유로웠던 상상력의 신화가, 종교적 진리라는 갑옷을 입고 고체와 같이 굳어진다. 종교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수천 년 전에 생겨난 종교적 관습과 믿음은 굳건하다.

   돌처럼 굳어진 종교와는 별도로 형이상학은 과학과 철학으로 이어진다. 문명을 시작한지 불과 일만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인류는 우주의 역사를 대부분 이해했고,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이해하였으며, 지구를 지배한 어떤 종족도 이루지 못한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하였으며, 마침내 우리는 우주와 생명과 프로그래머의 관계를 미약하나마 깨닫기 시작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산의 바다.  지리산은 참으로 영산이다)

 

   197. 신분

 

   현대에 있어 개인 간 신분 차별은 상당히 많이 개선되었다. 불과 10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왕의 나라 즉 왕국이며 왕조였다. 왕이 국가의 대표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다. 그를 위해 죽는 것이 곧 충이었다. 그 아래 양반이라 불리는 소수 지배층들이 있었고 약간의 중인과 대부분의 평민, 그리고 평민 축에도 못 끼는 천민들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세상은 신분제도가 있었던 그 때에 비하면 확실히 진보한 것은 맞지만 아직도 우리는 많은 권력의 차별 아래 놓여 있다. 그것이 우리 이름 앞뒤로 붙는 계급이나 직책일수도 있고, 재산의 양일수도 있고, 단순한 나이일 수도 있고, 질서란 이름으로 혹은 예의란 이름의 문화일 수도 있다.

 

(뱀사골 계곡의 아름다운 모습.  햇빛에 비친 저 모습을 나는 지리산에서 찾은 소중한 보석이라 하였다.

 

 

   198. 남성과 여성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부(夫婦)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지어미가 지아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질서였고, 심지어 딸과 아내가 남자의 재산의 의미였던 때도 있었다. 모세의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도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별도로 있는 것은 남의 아내에 대한 간음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는 남성이 가지는 특별한 재산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즉, 이 계명은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과 더 가깝다. 지금도 이슬람이나 일부 문화에서는 이런 관습이 남아있고, 남자들의 머릿속엔 아직까지 여자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현대에 들어 여성의 권리는 점차 높아지는 것 같다. 아무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며 평등하다.

   그러나 형식적이나마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기 위한 과정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근대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나라 영국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18년에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1928년이 되서야 남성과 같이 21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

   이때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느냐 안주느냐 의견이 분분할 때 영국을 대표하는 신문 ‘The Times’는 사설을 통해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야 한다면 개에게도 주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을 정도이다. 신사의 나라, 민주주의의 모태가 된 영국에서 조차 여성이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은 것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최근의 일이다.

 

   서양사회에서 이렇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리스도교의 영향이 크다. 오랫동안 서양 문화를 지배했던 그리스도교는 여성은 남성의 갈비뼈 중에 하나로 인식하였다. 실상은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여성의 뱃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창세기에 이런 이야기가 실리고 사람들은 종교적 가르침이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의심이나 조건 없이 받아들여 진 것도 참으로 미스터리이다. 신약에 와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남성의 머리는 그리스도, 아내의 머리는 남편, 남자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영광이라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고,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 하여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면 아예 밀어버리라고 공갈협박(?)을 하고, 여자는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1코린11장)는 지금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바오로사도는 코린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천년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이유로 전락한다. 

   그리스의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여성은 미완성 남성이라 표현하며 성적 표현에 있어 남성은 능동적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이유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기준을 둔다.

 

   동양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동양의 문화를 지배한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 중 하나인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유학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이다. 여기서 부부는 동등관계가 아니라 상하의 관계이다. 칠거지악이니 열녀문이니 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제한하는 못된 관습 중 하나이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고 마땅히 감내해야 할 숙명으로 생각하였고, 한 여성의 온 인생을 걸고 희생한 상징물인 열녀문은 가문의 영광스런 표식으로 생각되어졌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은 일견 치졸하기 그지없다.

 

(반야봉 정상에서 아내와 함께.  그녀가 나의 짝이어서 참 좋다.)

 

원문 ; 2014년 3월 28일

수정 ; 2014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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