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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22장 높음과 넓음2 (60/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1.24|조회수152 목록 댓글 0

유레카 3 -예순번째이야기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의지를 가진 작은 하느님들이다)

 

3부. 길

 

22장. 높음과 넓음

 

* 이 글은 <유레카3>의 60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171. 마르크스와 유물론

 

   우리가 우연히 그냥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다. 우리가 흔히 무신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성의 불완전한 종교에서 바라 본 종교적인 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도 19세기 당시 유럽사회에서, 신흥세력인 자본가 그룹인 부르주아들이 기존의 권력자들과 결탁해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는데 교회가 일조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상황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신 이외에 다른 신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이 곧 신 그 자체이다.

   마르크스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인민의 절대다수인 가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인 노동자 농민들을 수탈하는데 일조하는 교회의 신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슬퍼하는, 온유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자비로운, 마음이 깨끗한, 평화를 원하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마태 5장) 백성을 사랑하는 신은 교회에 없다. 그런 생각의 바탕 위에서 그는 고전역학의 결정성과 만나게 된다. 고전역학은 그 시대의 최첨단 과학이론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공산당 선언을 했지만 21세기에서 바라 본 공산당 이론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우주의 시작과 끝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니 전쟁과 투쟁과 경쟁의 역사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자이고 철학의 입장에서 이런 불의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17세기 프랑스나 영국에서의 대혁명처럼 절대 권력의 왕과 귀족들이 시민들에 의하여 쫓겨나듯이, 불의하고 사악한 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들에 의하여 제거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고 그것은 어쩌면 이미 정해진 역사의 과정이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과 역사발전론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공산당 선언(1848년)에 이은 러시아의 10월 혁명(1917년)으로 실현되며, 공산주의 이론에서 신은 그렇게 제거되었다.

 

(볼세비키 혁명이라 부르는 10월 혁명을 주도한 레닌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했지만 그것은 플롤레타리아를 이용한 또 다른 독재의 시작이었다)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만약에 당시의 유럽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노동자, 농민 등 약자의 편에 서서 노동을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권력에 맞서 그들을 대변하였다면, 마르크스는 아마도 다른 이야기를 썼을 것이다. 신은 언제나 당신을 닮은 착한 백성인 프롤레타리아들과 함께 계시고, 부르주아와 권력자들을 물리치시어 프롤레타리아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신이 예비한 역사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물론 양자역학을 접했더라면 또 다른 마르크스의 철학과 그에 따른 새로운 세상이 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172. 내면의 본성 - 프로그래머

 

   이제 그 생명의 프로그래머를 하느님이라 규정한다면, 하느님의 위치를 새롭게 규정해야 할 것 같다. 프로그래머를 과학과 철학의 융합으로 본 우주와 생명의 창조자 개념이라면, 하느님은 여기에 상상력과 신념이 더 가해진 철학과 종교의 융합적인 절대자라고 구분하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념이 상상하는 절대존재, 우리 생명체의 근원인 창조자, 우주의 바깥에서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그의 이름을 종교적 믿음이나 철학적 신념에 따라 하느님, 하나님, 부처님, 알라, 옥황상제, 천지신명이나 그냥 우주 프로그래머라고 부른들 아무 상관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그 개념보다 훨씬 더 그분의 존재의 영역을 넓힐 것을 권유한다.

 

   그분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신다.

나는 하느님으로 정의하는 프로그래머의 분사이고, 하느님의 부분이며, 나는 곧 하느님이다. 예수만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나도 하느님의 아들이고, 당신도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여 나는 그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살아야하고, 나의 거울을 잘 닦아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四端)의 마음으로 사람의 본분을 다하며 사는 것이 군자의 길이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내 영혼과 육체가 그분의 경지에 도달하면 나는 곧 부처이고 그것이 해탈이다.

   그리스도교건, 천도교건, 불교건, 유교건 올바른 종교의 바탕은 내면의 본성 즉, 프로그래머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내면의 본성을 찾고 싶어서 일까?  2014년 11월 1일 오대산을 찾아갔다. 아래의 오대산은 11월 1일, 폭포와 정선은 11월 2일의 사진이다.  철학적인 글은 자료 구하기가 쉽지 않아 글 읽는 중간 중간 눈을 쉬어가시라 올려본다.)

 

 

 

   173. 낮은 하느님

 

   하느님과 그의 형상을 모두가 높이려 할 때 하느님을 사람의 위치로 낮추려는 시도가 이천년 전 중동지방 유대인의 땅에 있었다.

   모두가 자기 지위를 높이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갈 때 왕자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이가 이천 오백년 전 인도의 북부 지금의 네팔에서 태어났었다.

   이 두 분의 새로운 시도의 성패를 이천년, 이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판단하자면 형식적으로는 성공을 하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실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표지석에서 -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 놓은 곳이라 하고, 문수 성지는 문수 보살이 이곳에서 부처님의 뜻을 설파했다는 의미이다.)

 

   형식적 성공이란 이천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분들의 유지와 뜻이 인간과 인간, 문화와 문화, 나라와 나라, 문명과 문명의 연결을 통해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용적 실패란 의미는 그분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낮추어 인류의 구원과 깨달음을 달성하려 했지만, 인류는 반대로 그분들을 높이고 높이어 신앙과 숭배라는 이름으로 하늘 높은 곳으로 내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는 스스로를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을 기어이 <신의 아들>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의 철학적 의미는 유대의 특정된 민족 신을 인류보편의 하느님으로 만든 사건인데, 이는 하느님의 위치를 낮추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감히 그분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구약시대에서 아빠, 아버지의 친근한 위치로 신약의 하느님은 내려온다.

 

   유대민족이 아닌 이방인은 배척하던 하느님에서 사마리아 여인이며, 로마의 백인대장이며, 심지어 가나안 여인의 딸에까지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손길이 미친다. 예수 사후엔 유대는 예수를 배척하지만, 바오로 등을 통한 이방인 지역의 교회는 오히려 번성해지고 로마제국에 입성한다.

 

 

(사도 바오로와 그의 전도 여행 지도. 주황색 로마의 입성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 것 처럼, 바오로는 로마에서 그의 최후를 맞는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성립한 것은 절대적으로 그의 노고이다.)

 

 

   300년 가까운 혹독한 박해는 히브리문명과 희랍문명의 충돌과 융합의 시기일 것이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기에 이른다.

   유일신 히브리 문명이 근본이었던 그리스도교가 다신교이던 희랍문명과 융합되어 유럽과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며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을 낮추는 작업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향력이 넓어졌다. 하느님이 낮아지면 하느님은 더 넓어진다.

 

   인간이 신을 높이려는 의도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그 첫째는 신을 경외하게 함으로 피지배 계층인 다수 대중을 순화시키려는 것이고, 둘째는 왕과 권력자들이 자기의 위치를 높여 신분과 권력의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이다.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이 얼마나 어이없는 궤변인가?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와 무의식중에 널리 통용된다. 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권력자들의 위치도 신 바로 아래까지, 심지어 살아있는 신의 위치로 권력의 힘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중국 황제의 별칭은 노골적으로 천자(天子)였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을 통해 당시 유대사회의 전통에 도전한다. 모세 율법에 따라 백성의 삶을 구속했던 유대의 종교적 전통과 권위를 그는 인간중심으로 바꾸려한다. 그에게는 그러한 전통보다는 마음이 가난한 백성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모세의 십계명조차도 달랑 두 가지 계명으로 함축시킨다. 이웃을 사랑하라,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렇게 하는 일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의 섶다리 - 다리는 물로 인해 갈라진 곳을 연결해 준다.  나의 이 글이 싸움에서 어울림으로 진화하는 인류의 다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저리 춤을 출것이다) 

 

 

   174. 진화 - 높음에서 넓음으로

 

   생명은 개별적인 독립체가 아니라, 생명군집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모든 생명은 한 하느님의 분사이고 모두 형제이다.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사이에 높고 낮음은 없다. 나를 대하듯 남을 대하고, 나를 대하듯 다른 생명을 대하는 것이 사랑이며, 자비이며, 인이다. 내 안의 하느님을 깨닫고 상대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도 보라. 그러면 우리는 낮아지지만 넓어질 것이다.

 

   21세기 과학문명은 인류의 힘을 극대화하였다. 우리 인류는 우리의 어머니이며 보금자리인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더 높이 오르려하고 더 많은 권력을 탐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인류는 스스로 궤멸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인류의 미래 문명은 어떻게 진화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높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넓음을 지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싸워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넓어짐을 선택하여야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의지를 가진 작은 하느님들이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하늘의 본성은 하늘에서 나온 사단, 인의예지에 있다는 유학의 가르침과, 모든 생명을 오직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하느님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다는 인류의 큰 스승들의 가르침이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높아지려 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아져 힘없는 백성들 사이에 녹아든 것이다.

   이분들이 낮아지려고 했던 목적은 넓어지기 위해서이다.

 

(정선 가는 길의 백석 폭포 - 산 위의 물길을 돌려 폭포를 만들었다 한다. 폭포는 물이 자유를 향해 낙하하는 모습이다.)

 

 

   21세기. 현대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높음이 아니라 넓음이다. 내가 곧 작은 하느님인데 나보다 높은 것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고 존귀한 존재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나아가 모든 생명에도 적용된다. 나보다 높은 사람도 없지만 나보다 낮은 사람 또한 없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그 평등으로 인해 넓어지고 그 넓어짐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이다.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짐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 소수의 자유를 떠 받쳐줄 수많은 백성들의 억압과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평등(平等)과 자유(自由)는 싸움의 세상에서는 등을 지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어울림의 세상에서는 얼싸안고 있는 개념이다. 높이 오르려 하는 것은 산에 오르는 것처럼 힘이 든다. 그러나 넓어지려는 것은 평지를 걷는 것처럼 평화로울 것이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우리는 높이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넓어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정선 동강의 아우라지 섶다리. 제법 큰 강을 저리 다리를 놓아 위태롭다.  올라보니 흔들흔들 하였다.)

 

원문 ; 2014년 3월 17일

수정 ; 201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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