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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21장 유한(有限)과 무한(無限)2 (58/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1.19|조회수191 목록 댓글 0

유레카 3 -쉰여덟번째이야기

 (21세기는 유한의 세계이고 어느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은 다른 많은 누군가는 너무 없다는 뜻과 같은 의미이다.   당신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그 이상의 부를 축척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악이다)

 

3부. 길

 

21장.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2

 

* 이 글은 <유레카3>의 58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164. 우주를 지탱하는 힘- 생명

 

   우리 우주의 벽에 빛이 부딪쳐 반사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 우주는 빛보다 더 빨리 가속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내에서는 빛 보다 빠른 것은 없다.   그러나 우주의 팽창속도는 예외라 한다.   그런 이유로 시각적 우주는 무한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는 안다. 우주가 아무리 빠르게 팽창을 하여도 우주가 유한하다는 것을.

   유한하다는 것의 철학적 의미는 닫힌 공간이라는 의미이고 최초에 주어진 재료 외에는 더 이상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우주는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서는 닫혀있고, 의지에 대해서는 열려있다.  성리학적인 개념으로는 기(氣)에 대해서는 닫혀있고, 이(理)에 대해서는 열려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유한한 우주에 사는가? 무한한 우주에 사는가?’를 규정하는 것은 ‘진리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하는 문제와 연관된다.

 

   <진실을 통해 진리를 구한다.>

 

   지금까지 우주는 영원무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주는 영원하지도 무궁하지도 않다.

   우주 내부에 속해 있는 것은 결국은 소멸한다. 그 시작과 끝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끝은 off일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우주가 대수축된다거나 팽창으로 흩어져 없어져 버리는 것 보다는 간명하다. 적어도 우리 우주에 생명이 존재하는 한 우리 시뮬레이션 우주의 전원이 off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명은 전원을 off시킬 수 있는 프로그래머의 분사이다. 분사(噴射)란 물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압력호스처럼 생명의 원천인 프로그래머의 의지가 우주 공간에 뿜어져 나왔다는 의미이다.  한나무에서 나무의 가지나 나뭇잎이 수없이 갈라져 나오듯이 그렇게 생명은 분사되었고, 나무가지와 나뭇잎은 나무 그 자체이다.  즉, 우리 생명의 의지나 생각이나 영혼은 우주 프로그래머의 의지 그 자체이다.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일 따위는 결코 없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우주는 죽은 우주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은 우주의 파괴를 막는 희망이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생명은 우주 가속 팽창의 유일한 원인이다.

   생명의 힘인 의지에너지는 외부에서 공급되는 힘이고, 이 힘은 우주를 지탱하는 두 가지 힘. 은하를 흩어지지 않게 수축시키는 힘인 암흑물질과, 우주를 팽창시켜 우주공간을 확보하는 힘인 암흑에너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시간은 무엇일까? 우주 내부에 있어 시간은 간명하다.

   <3차원 공간의 이동 속도.>  뒤에 "미래" 부분의 '상대성 이론'에서 설명하겠지만 과학적으로도 시간과 공간과 물질과 에너지는 같은 개념이다.  공간은 곧 시간이다.

   우주 외부에게 시간은

   <시뮬레이션의 진행방향.>

   그 시작은 전원 on, 그 마침은 전원 off.

  어느 경우라도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165. 부자는 죄인인가?

 

   <우주가 유한하다>

 

   이 전제가 화두의 시작이다. 우리에게 우주는 전체이다. 우주가 유한하다는 것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유한하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그런데 우리 인류는 무한의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가정과 전제가 틀린 수학 문제처럼 한참을 진행하였는데도 합당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과학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하고 물질은 풍요로워졌는데도 인류는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발전의 모순에 직면하여있다. 워킹푸어(Working Poor)란 말이 있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서민들이 느끼는 불안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시스템은 그 바탕이 무한의 생산과 소비를 전제하고 있다. 이것이 초기 자본주의시대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인류의 기술력에 비해 지구의 자원과 인류의 소비 능력은 무한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류는 지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소비해가고 있다. 석유를 비롯한 탄소연료나 철과 같은 지하자원은 지구에 무한히 묻혀있는 것이 아니다. 짧게는 몇 십 년 길게는 일이백년 후엔 지구의 자원은 고갈될 것이다. 심지어는 깨끗한 물과 공기도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오염되고, 살고 있는 땅도 오염되거나 줄어들게 될 것이다. 현재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위기는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위험한 에너지의 사용연한도 고작 100년 내외이다.

 

 

(이 자료는 헬륨-3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그림이지만, 지구에 남아 있는 자원 사용 가능기간도 같이 있어 함께 활용한다.  자원 사용기간은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라늄이나 탄소 연료들이 고갈된다는 것이다.)

 

 

 

   대량생산 - 대량 소비 - 대량 폐기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은 인류에게 가해지는 다른 어떤 종류의 위험보다도 더 위험하다. 그것은 시스템 내부의 위험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위험은 인류를 단합하게 할 것이고 인류의 지혜는 능히 그것을 극복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영화처럼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기 위하여 쳐들어온다든가, 6500만 년 전처럼 소행성이 지구를 향하고 있다면 모든 인류는 단합하여 이를 해결하고 극복할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문제는 스스로 자각(自覺)하기 전까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우리 몸에 퍼져있는 암처럼 우리가 그것을 자각했을 때에는 갈라진 둑이 졸졸 새다가 한번에 터지는 것 처럼 아마도 너무 늦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산에 도토리를 먹고 사는 다람쥐들이 있다. 여기에 굶고 있는 다람쥐들이 있다. 만약에 도토리가 무한하다고 가정하면 굶고 있는 다람쥐들이 게으른 것이다. 그들의 게으름으로 산에 널려있는 도토리를 줍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도토리가 유한하다고 가정한다면 도토리의 절대량이 부족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어느 일부의 다람쥐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사회의 부가가치를 유한하다고 보느냐? 무한하다고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의 생활양식과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무한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무능력을 탓하며 좀 더 열심히 일할 것을 강요하여야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사회의 부가가치를 유한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부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갖지 말라고 요구하여야 한다.  무한하다면 우리는 경쟁력을 키워야한다.  다른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빨리 더 많이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하다면 우리는 나누어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한의 세계에서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능력과 성공의 가치이다. 그러나 유한의 세계에서는 죄악이다.

 

   삼성의 고이병철 회장은 '부자는 죄인인가?'는 문제로 고민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살아 있었을 당시에는 고민의 대상이 될 여지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는 인류에게 무한히 넓은 땅이며, 자원은 무제한이고, 인류가 생산하는 부가가치의 한도도 정할 수 없었다.  노력을 하면 노력하는 만큼 나의 땅은 넓어지고 나의 부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즉, 무한의 세계이었다.  그 시절 대우그룹의 김우중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펴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상을 무한의 영역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인류에게 있어 이것의 해답은 명확하다.  21세기는 유한의 세계이고 어느 누군가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은 다른 많은 누군가는 너무 없다는 뜻과 같은 의미이다.   당신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그 이상의 부를 축척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악이다.  그것은 그것으로 살아가야 할 어느 누군가의 부를 빼앗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는 지구에 길게 잡아야 일백년 정도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이다. 우주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우주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소는 138억년 전  그 최초의 3분동안에 만들어진 것이고, 탄소와 산소를 비롯한 모든 원소는 50억년 전 쯤 태양이 생기기 전 어떤 초신성 폭발에 의하여 생겨나 나에게로 전달된 것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의지는 우리 우주 외부의 프로그래머에게서 온 것이다.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육체이든 영혼이든 모두 다 다른 것에서 와서 잠시 그대의 모습으로 결합되어 있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한다.

 

   "전 세계 최상위 부유층 1%가 글로벌 자산의 절반에 가까운 48%를 소유해 부의 쏠림 현상이 심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난한 하위 50% 인구가 소유한 자산총액은 세계 자산의 1%에 불과했지만, 상위 10%가 차지한 자산 비중은 87%에 달했다. (연합뉴스 2014년 10월 14일 보도)"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아니고 죄악이 아니라면 무엇이 죄악인가?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식량과 물자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우리의 기술 능력은 충분히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생존요소인 의식주와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옷, 먹을거리. 우리 사회가 이것이 모자라지 않는다.  집 - 이미 필요량의 110%를 넘었다. 학교, 병원.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이 없어서 혹은 모자라서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에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부족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무한한 자본 축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밑이 없는 독처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부족함을 느낀다. 아마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들에게 돈을 그만 벌라고 한다면 그는 화를 낼 것이다.

 

   돈과 행복의 지수를 나타낸 그래프가 있다. 이 그래프는 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행복지수도 높아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돈이 많아지면 오히려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려 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담보하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몇 년 전 동반성장위원회라는 곳에서 대기업의 초과 이윤을 협력업체와 나누자고 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은 적이 있다.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 - 실은 자기의 돈을 벌게 도와준 협력업체일지라도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무한의 세계, 즉 경쟁 시스템 속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 경쟁은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욕심으로 변하여 모두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결국은 자기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소득이 높아질 수록 행복지수도, 기부금 참여율도, 자원봉사 참여율도 점차 높아지지만, 어느 한계가 지나면 이 모든 것이 떨어진다는 통계 자료.  욕심은 인간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경쟁은 발전의 힘이다. 그러나 경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이제부터는 발전의 전리품을 모든 인류가 나누어야 하는 시기이다.

 

   경쟁과 투쟁과 전쟁이 무한우주 무한사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면, 유한우주 유한사회에서의 발전의 원동력은 어울림이다. 싸움의 시대에서 낙오는 패배자가 마땅히 감당해야할 벌칙이다. 그러나 어울림의 세상에서의 낙오는 전체의 실패이다.

 

   얼마 전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못이긴 세 모녀가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을 두고 동반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2014년 2월 26일 사건). 이 자살이 큰 이슈가 되었던 까닭은 그 가난한 사람들의 낙오가 서민계층에 나의 낙오로 연결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에 2014년 11월 18일 복지를 좀 더 확대한다는 '세모녀법'이 국회소위를 통과한 모양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을 베풀 듯, 목숨 끊지 말고 연명이라 하라는 지원책보다는, 우리 인류와 모든 생명이 한 형제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정으로 인류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이 세대에는 더 절실히 필요하다. 국가의 정책은 가난한 이들에게 몇 푼 선심을 쓰는 돈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만약에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복지'의 개념을 '지원'이라는 틀을 벗어나, '생활'이라는 개념으로 전환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복지는 함께 사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결혼을 한 부부들도 아이 낳기를 두려워한다. 이런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생명은 모든 구성원이 함께 짊어져야 할 공동 책임이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현재 인류 앞에 놓인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사항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더욱 필요한 일이다. 그대들의 성공을 알아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누군가는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원문 ; 2014년 3월 13일

수정 ; 2014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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