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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20장 진실과 진리1 (55/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1.17|조회수203 목록 댓글 0

유레카 3 -쉰다섯번째이야기

 (인류는 피조물로서 자연 생태계 으뜸임을 과신하고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래머의 협조자로서 지구와 지구 생태계를 보호하고 조율하는 일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3부. 길

 

20장. 진실과 진리1

 

* 이 글은 <유레카3>의 55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153. 진실의 동굴, 진리의 동굴

 

   나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것은 출구이자 또 다른 동굴의 입구였다. 진실의 동굴에서 진리의 동굴로 들어 온 것이다. 진실의 동굴이 용암이 지나가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넓고 반듯하게 형성된 용암 동굴이라면 진리의 동굴은 석회 동굴이다. 수만 년의 세월을 두고 한 방울 한 방울 물이 흐르고 매달리고 떨어지고 쌓여 동굴이 형성되고 바닥에선 죽순처럼 석순이 올라가고 천정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종유석이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마침내 석순과 만나 석주가 된다.

   어느 곳은 넓고. 어느 곳은 사람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좁다. 나는 지금 이 동굴에 있다. 그것은 진리(眞理)의 길과 같다. 어는 곳에서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외칠 정도로 큰 것이, 어는 곳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를 뚫는 것처럼 좁은 것이 진리의 길이다. 진리의 길은 다양하고 험하고 좁고 외롭다. 

 

 

(석회동굴의 종유석과 석순)

 

 

  나는 아직 어두워 형태를 분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단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간다.

 

  진실(眞實)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넓고 반듯한 용암동굴에 비유하였다. 다만 그 진실을 우리가 제대로 찾았느냐 잘못 찾았느냐의 문제이다. 500년 전까지 진실이었던 천동설(天動說)은 인류가 잘못 찾은 진실이었다. 창세기의 창조 설화 역시 과학의 입장으로 보면 잘못된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한다.

 

 

(용암동굴인 제주도 만장굴 2013년 10월 이곳을 방문하였다)

 

 

 

   우주 어느 곳에도 천당이나 지옥 같은 것은 없다. 이것 역시 과학의 입장에서는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진리의 가치에서 본다면 천당과 지옥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여야한다. 한 세상을 착하고 성실하게 산 사람과 온갖 나쁜 짓을 다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 죽은 놈의 결과가 죽은 후에라도 역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류가 갈망하는 최소한의 정의가 아니다.

 

   이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우주와 생명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끝나간다. 우리의 우주는 관념 우주이고, 모든 생명의 의지는 우리 우주의 외부 프로그래머와 연결되어 창조되고 진화되었으며, 우리 인류는 창조자의 협조자로 진화되도록 선택받았고, 지금 우리는 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진화 의지에 맞게 인류가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인류와 지구생명과 지구는 오래도록 번성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선택을 한다면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가 만들어놓은 [힘]을 스스로 못 이겨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나의 글은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이며 또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자로서의 나의 예언이다. 거리의 철학자들이 철학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점쟁이 노릇을 해가며 점을 봐주는 것이 철학이며 예언이 아니다. 예언은 예고가 아니라 경고이며 희망이다. (엘버트 노울런 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예수를 알고 싶으시면 꼭 이 책을 읽으시라 권한다.)

 

 

   이미 이야기했지만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진실에 관한 문제이다.

 

   우주와 프로그래머와 그 프로그래머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질문의 열쇠이다. 내가 현재까지 깨달은 것은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철학은 종교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깨달음을 공유하고 그 깨달음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부조리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다. 예수의 시대, 공자의 시대, 석가의 시대에는 인류의 무지(無知)가 그 시대의 부조리를 사람들과 함께 풀어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여 깨달은 자가 나를 따르라며 외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지금은 모든 정보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공유되는 지금은 그럴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아니 된다. 

 

 

   154. 새로운 계약

 

   나는 새로운 진실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우주와 생명이 가지는 가치와 목적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바탕으로 우주 프로그래머와의 새로운 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종교적인 계약이 아니라 철학적인 계약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새로운 진실을 바탕으로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새로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개척하고 만들어야한다. 그것은 싸움의 문명이 아니라 어울림의 문명이다. 인류는 피조물로서 자연 생태계 으뜸임을 과신하고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래머의 협조자로서 지구와 지구 생태계를 보호하고 조율하는 일이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155. 진실과 진리

 

   진실과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1년 전 쓴 글의 다른 철학이야기의 첫 시작이었다. 이 명제에 대해선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이번 글에서 재차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과 틀림>처럼 <진실과 진리> 또한 우리가 쉽게 혼동하여 각별히 주의하고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명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진실과 진리는 같은 것이며 고정불변(固定不變)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이 종교, 철학, 사상, 윤리 등 관념을 바탕으로 둔 학문이나 사유, 도덕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 칸트의 말처럼 좀처럼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을 풀어보면 진실(眞實)은 참된 사실(事實)이다.

   진리(眞理)는 참된 이치(理致)이다.

 

   어떤 사실이 진짜로 옳은 것이라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실이 변했다 하는 것은 그 앞의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뜻이다. 500년 전 쯤에 천동설이라는 사실이 지동설로 바뀌었다. 지동설이 사실로 인식되자 천동설은 거짓이 되었다.

   진실은 과학처럼 나름 객관적 증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과학도 계속 진화하고 어제의 과학이 오늘은 신화가 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늘을 윗물, 바다를 아랫물로 표현한다.

   태초의 세상은 물(창1,2)이었는데, 물을 갈라 궁창을 만들고(창1,6), 궁창을 윗물과 아랫물로 가르고(창1,7),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고(창1,8), 아랫물은 한데모아 바다와 뭍을 구분하셨다(창1,10).

 

   창세기의 이야기를 만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이 온통 물로 가득 찼을 거라 생각했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수평선에는 하늘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 물이 비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지니 하늘이 파란 것은 바다처럼 물로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여 거꾸로 거슬러 태초의 세상은 온통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그 시대의 과학이다.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를 규정한 과학용어가 허블상수이다. 허블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을 처음 알아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팽창속도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가 한 점으로 모아지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계산한 결과가 138억년이다. 그 태초의 한 점이 폭발하여 지금의 우주가 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과학이다.

   창세기시대나 지금이나 과학적인 추론 방법이 비슷하지 아니한가?

   과학은 그 시대의 사실을 대표한다.

   창세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은 가시광선과 적외선 자외선 등 여러 파장이 있으며, 빛의 산란 현상 때문에 가시광선 중 푸른빛만 반사되어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구구단도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미분, 적분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사실성을 반영하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 생각하는 많은 부분들이 미래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학생 때만 해도 절대 깨질 수 없는 기본입자는 원자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답을 썼단 틀린 답이다.

   이처럼 사실성 여부에 있어 그래도 가장 정확한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절대 진실일 수는 없다.

   종교나 철학은 과학보다는 사실성의 면에서 부족할 수 있으나 대신 훨씬 빨리 앞으로 갈 수 있다.

 

   윤회는 불교의 믿음이지만 철학적으로 생각해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고, 우주가 영원무궁한 것이라 생각했던 중세 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354년~430년) 주교는 시간에 시작이 있었음을 그의 고백록에 써놓았고, 아직 은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200년 전에 에드가 앨런 포는 그의 서사시 유레카에서 우주의 시작과 우주가 커졌다 다시 줄어들어 소멸할 것이라는 현대의 우주론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태양이 우주의 가스 구름에서 만들어진다는 칸트의 성운가설 또한 그 시대의 과학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과학적으로 증명 된 것만을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감옥에 가두고, 우물 속에 들어가 하늘을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 등 기독교의 교리를 집대성한 교부이다)

 

 

 

 

 

   156.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미국, 1809~1849)의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이 글의 제목인 [유레카3]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포의 유레카에 이은 3번째 유레카라는 의미이다.

 

  포는 미국의 천재 작가이며 문학에 과학을 접목시킨 문학 이론가이며 시인, 소설가, 비평가이자, 그의 시와 소설에 그 시대까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이론을 개척했지만 미국 문단에서 이단아로 취급받으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에드가 앨런 포는 그의 초상만큼 슬픈 생애를 살았다)

 

 

   딸랑 40년의 짧은 삶을 산 이 천재의 삶은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도망가고, 어머니는 요절하고, 양아버지와도 관계가 나빴고, 후에 아내마저 요절한다. 1부 9장에서 베텔게우스에 비유하였던 24살의 젊은 아내 버지니아가 포의 아내의 이름이다. 술, 마약, 병은 그의 삶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았고 세상은 이 가난하고 불행한 천재를 불법 선거에 동원하였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골목의 길거리에서 쓰러져 외로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천재성은 당시의 어느 과학자보다도 진보하였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이야기를 인터넷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보자.

원문 ; 2014년 3월 10일

수정 ; 2014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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