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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레카 3(원본)

유레카3. 쉬어가기 - 해미순교성지와 해미읍성 성지순례기 (54/73)

작성자하늘바다|작성시간14.11.13|조회수280 목록 댓글 0

유레카 3 - 쉰네번째 이야기

 (종교적 갈등이 우주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하찮은 일이지만 현존하는 현실이다.  이 갈등을 어찌 풀어야 할지 이 순례기를 통해 접근해보고자 한다)

 

쉬어 가기

  

* 이 글은 <유레카3>의 54번째 글입니다. 우주와 생명에 대한 철학적 진실을 탐구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부 우주, 2부 생명, 3부 길로 구성되어 있으며, 26장 73편의 이야기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글을 접하시는 모든 분들이 제가 깨달은 것을 함께 깨달아, 지성의 즐거움을 함께 만끽하며, 인류와 생명의 진보와 진화의 길을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첫 글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harmonism/JN41/146

 

 

 

 

   1부 [우주]에 이어 2부 [생명]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  2부 [생명]의 전체 주제는 '관계'이다.  힘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상호 작용'이듯이, 생명도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상호 작용'이다.  우리는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우리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진실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과학과 종교와 철학의 융합을 통한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이 어울리는 융합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3부의 주제는 [길]로 정하였다.  그것은 이치(理致)에 관한 이야기이다.  3부 본문에서도 이야기되지만 '진실'과 '진리'는 구별되어야한다.  사람마다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걸어가야 할 길이 다르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진리의 길은 당연히 다르다.  우리가 진실을 찾듯 진리 또한 과학과 종교와 철학의 융합에서 찾고자 한다.

 

   이 글은 지난 2011년 5월 천주교 성지인 해미 순교 성지와 해미 읍성을 다녀 온 후 쓴 순례기이다.  우리나라의 천주교 박해는 당시 조선의 근간이었던 유교와 천주교와의 갈등이다.  천주교나 유교나 둘 다 진리를 따르는 종교였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은 이 둘이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용납되지 않는 가치였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는 종교와 종교의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우주와 생명의 진실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 갈등이 우주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하찮은 일이지만 현존하는 현실이다.  이 갈등을 어찌 풀어야 할지 이 순례기를 통해 접근해보고자 한다.

 

 

 

무명 순교자들의 혼이 깃든 해미순교성지와 해미읍성 성지순례기

천주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 성지순례 개요 ***

일시 : 2011년 5월 21일(토) 오전 8시 ~ 오후 6시 40분

성지 : 해미순교 성지와 해미읍성

길동무 : 중앙성당 장내1지역 신자 31명

날씨 : 매우 흐림

 

(해미순교성지(여숫골) 안내도)

 

(해미읍성 안내도 - 마땅한 안내도가 없어 축제 안내도를 복사하였다.

이동경로 : 진남문 - 성곽위 - 지성루(서문) - 성 중간 소나무숲 - 청허정 - 동헌 - 옥사 - 회화나무-진남문)

 

 

 

   천주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성당에서 각 지역별로 성지 순례를 다녀오라고 한 모양이다. 버스비는 성당 지원금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달 형제반모임에서 오늘 ‘해미순교성지’로 성지순례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 장내지역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금요일 밤. 성지순례를 핑게로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일을 하였다. 새벽 4시 30분 귀가. 8시 집결이니까 6시 30분까지 2시간을 잘 수 있는데 뭘 잘못 먹었는지 온 몸이 두드러기가 나고 가렵다. 찬물로 목욕을 하고 아내가 손을 따주어도 별무 소용이다. 뒤척이다 5시 30분이 지나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내가 깨워 눈을 뜨니 6시 40분, 어제 미리 준비한 성지순례 안내도와 카메라를 챙기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성당에 도착하니 7시 50분. 성당이 우리 지역 내에 있어서인지 아직 많은 분들이 오지 않으셨다. 8시가 지나고 8시 10분이 되어서야 모두 모이셨다. 준비한 음식과 찬조도 있어 음식이 엄청 많다. ‘저걸 누가 다 먹지?’라는 생각을 하며 인원점검 후 8시 20분 성당을 출발하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지역장님이 준비하신 백설기, 방울토마토와 생수 한 병씩을 아침식사 대용으로 나누워 주신다. 식사를 하였기 때문에 아내와 하나로 둘이 나누워 먹었다. 버스가 군포 IC를 통해 서해안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일어나 간단히 나의 소개를 하고 묵주기도를 시작하였다. 지역장님이 해야 하지만 굳이 내게 미루신다. 내가 우리지역 형제반장인 까닭이다. 내가 성당에서 맡고 있는 유일한 직책이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성당에서 이 직책이외에 다른 직책을 맡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종교성이 매우 강한 집에서 태어났다. 나의 태몽이 어머니 꿈속에서 흰색과 하늘색의 천사가 방문하여 묵주기도를 어머니와 함께하고 하늘로 올라 간 꿈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8일 만에 유아영세를 받았고, 나의 세례명 <타데오>의 한자식 표현 <다두>가 나의 어릴 적 불리던 이름이었다. 부모님이 그 때 과일 장사를 하셨는데 덕분에 나의 별명은 <자두>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의 기본 바탕은 천주교이다. 우리 인류의 문화적 바탕은 <종교>이다. 이것은 예외 없이 모든 민족의 창조와 시작 설화는 <하늘(태양)과 신>과 관련이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우리 민족도 하느님이신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의 강림- <개천절>, 그리고 <단군>의 조선개국으로 이어지는 <단군신화>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모든 민족들도 이와 비슷한 설화를 모두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만 하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늘로부터 서로 다른 방법으로 선택을 받은 <선민(選民)>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구성원은 그 스스로가 아주 특별한 선민이다. 인간과 다른 생물들을 비교하였을 때, 인간의 특별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아무튼 나의 사상과 내면의 본질은 가정환경적인 요인이든, 나의 선택이었든 <가톨릭 사상>이라는 종교적 바탕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우주는 나의 꿈이었고 이상이었다. 그러나 물리학과에서는 우주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 당시 인류가 우주에 대해서 아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배울 것도 별로 없긴 했지만. 덕분에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을 구분할 줄 아는 정도의 과학적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종교적 바탕위에 과학적 지식이 추가된 것이다. 그것은 사상적으로는 하나의 충돌이었다. 한 선로위에서 마주보며 달려오는 기차와도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 3, 4학년 시절의 나의 숙제였다. 과학이 내 사상위에 확고히 자리 잡기 전까지 나는 종교에 귀의해 수사신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성바오로 수도회의 성소모임도 나갔었고, 많은 기도생활도 하였다. 그것이 부모님의 반대, 사랑하는 여인, 자유를 추구하는 성격과 과학적 사고와의 충돌의 영향으로 수사신부의 꿈을 접게 되었다. 아무튼 나에겐 탈출구가 필요하였다.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선로를 공간으로 분리시켜 놓았다. 일직선의 선로였지만 높이를 달리하게 하였다. 덕분에 과학과 종교의 이름으로 마주보고 달리던 두 기차는 맞닿았지만 부딪치지 않고 지나가게 되었다. 지금도 나의 사상 속 레일에서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기차>와 <종교라는 이름의 기차>가 서로 부딪치지 않고 잘 달리고 있다. 지금은 거기에 <철학이라는 이름의 기차>가 추가되어 서로 각자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다. 물론 이 기차들이 부딪치지 않는 이유는 달리는 공간의 높이 즉, 차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수학책에 <쌓기 나무>가 나온다. 쌓기 나무를 이용하여 여러 모양으로 쌓은 다음, 그것을 앞에서 본 모양, 옆에서 본 모양, 위에서 본 모양을 알아내는 문제이다. 물론 비스듬히 본 모양도 있다. 앞, 옆, 위에서 본 모양은 서로 전혀 다른 모양일 경우가 많다. 전혀 달라도 그것이 하나의 쌓기 나무 이듯이 우리가 어떤 현상, 사상, 사건, 사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종교를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거꾸로 과학을 종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창조론과 진화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나는 종교적 관점이며, 하나는 과학적 관점이다. 그것은 쌓기 나무처럼 서로 다른 방향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종교적 관점으로 과학은 과학적 관점으로 철학은 철학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처녀잉태가 가능하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종교적으로는 ‘Yes’이고, 과학적으로는 ‘No’ 이며, 철학적으로는 ‘Well’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가 정답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이 또한 현재 시점과 현재 장소에서 가능한 일이다. 과거 중세 유럽에서는 이 대답은 당연히 ‘Yes'이었고, 미래에서는 어떻게 바뀌게 될 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나에게 순수하게 신앙의 관점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종교 활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나에게는 너무 힘든 갈등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종교 활동은 안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내가 상처받는 것을 피하고, 같이 활동해야 할 분들에게 대한 배려 차원이기도 하다. ‘성요셉 아버지학교’의 봉사를 그만 둔 이유도 그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의 이러한 철학 사상과는 관계없이 종교는 그 자체로 위대하고 분명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당의 형제반장 모임에는 나가지 않는 조건으로 우리지역 형제반장 직을 맡게 된 것이다. 몇 해 전 할머니와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 지역 신자들이 보여주신 고마움에 대한 답례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사실 내게는 너무 부담스럽고 만약 기회가 된다면 주저 없이 넘겨드릴 예정이다.

 

    내가 성지순례기를 쓰기도 전에 나의 과거이야기부터 사상이야기까지 시시콜콜 이야기한 것은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하게 될 <종교적 순교>라는 관점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민감하고 위험한 논제가 될 수 있다. <순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죽음 이후를 확신하고 결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 천주교 신자들에게 순교 행위는 피해행위였지만, 현재 이슬람 자살폭탄 테러자들의 테러 행위는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테러이지만, 행하는 사람에게는 순교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순교 행위는 가해행위이다. 아무튼 순교는 그 자체로 아주 특별하며 극한 행동임은 틀림없다. 

 

    묵주기도가 끝나고, 해미순교성지와 해미읍성을 복사한 종이를 나누어드렸다. 지도를 보면서 성지와 당시 상황을 개략적으로 설명하여 드렸다. 설명이 끝나자 버스는 이미 서산 IC를 통과하고 있었다. 

 

    9시 40분. 버스가 해미 IC로 진출해 해미순교성지에 도착하였다. 해미성지는 두 번째 방문이다. 올 봄 3월말. 서산 황금산을 왔을 때, 황금산의 썰물 시간을 맞추기 위해 해미읍성과 성지를 들른 적이 있다. (2011년 3월 27일 서산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 황금산- 삼길포 여행기 참조) 그 때는 시간에 쫓겨 성지를 자세히 둘러 볼 수는 없었지만, 오늘은 이곳이 목적이기 때문에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11시 미사이므로 아직 시간 여유가 많다. 

 

(해미순교성지 앞에서 전면에서 본 모양)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4번이다. 그러나 이 공식적인 박해기간 뿐만 아니라 1790년대부터 1866년 병인박해 이후 1890년대까지 100여 년 동안 내포지방(지금의 충남지역과 비슷)을 관할하던 해미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하였다. 그 수가 무려 3천명이었다고 하니 해미에서 얼마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순교자들 중에 현재 천주교에서 순교자 이름이라도 파악한 수는 고작 100여명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는 체포한 신자들 가운데엔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지금의 홍성),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이 평민이하의 계층들이 심리 절차나 기록 없이 해미읍성 서문(지성루- 읍성지도 참조)밖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성당입구 - 저리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들어가는 문은 따로 있다.)

 

 

    성지 앞에 차를 대고 성당 아래로 내려갔다. 성모자상(예수와 마리아의 동상)이 우리를 맞아주고 있다. 해미순교성지를 여숫골이라 하는데, 이곳은 원래 이름은 나무가 우거졌기 때문에 <숲정이>불려 졌던 곳이다. 이곳에서 1866년 병인박해 이 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하며 죽어갔는데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 마리아>를 끊임없이 외치며 울부짖자 교리를 모르는 일반인들의 귀에는 그 울부짖는 소리가 <여수머리>라고 들렸다고 한다. 여수는 여우의 충청도 방언으로 사학죄인들이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로 부르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모진 박해와 공포를 이겨내게 하였던 마지막 희망의 이름, 예수와 마리아의 상이 오늘은 붉은 영산홍이 아름다운 성모의 정원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해미순교성지 - 성모자상)

 

 

    성모자상과 수녀원을 지나니 <자리개돌>이 오른편으로 뉘여 있다. 자리개질이란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미읍성 서문 밖 돌다리 위에서 두 서너 명이 천주교 신자의 팔다리를 잡고서 돌다리 위에 들어 메쳐 죽이는 참으로 끔찍한 사형 방법이었다. 또 이곳에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는지 지금도 이 바위에는 핏자국이 물들어 있고 비가 오면 그 자국이 더욱 선명해져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애달프게 한다고 한다. 이 바위는 원래 서문 밖에 있었는데 1956년 서산본당으로 이전되어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 원위치로 귀환, 2009년 1월 8일 이곳으로 옮겼고, 서문 밖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함께 모조품이 자리 잡고 있다. 얼룩진 핏자국을 바라보며 우리 순례자들은 그저 뭉클한 마음에 눈물만 글썽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모송(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합송하였다.

 

(자리개돌)

 

 

(자리개돌 - 우리가 찍은 사진이 자리개돌 입구만 나와 있어 자세하게 찍은 사진을 성지 홈페이지에서 구해왔다.

저 얼룩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피가 물들어 생긴 것이라 한다)

 

 

    자리개돌 옆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진둠벙>이다. ‘둠벙’은 ‘웅덩이’의 충청도 사투리이다.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사학죄인의 사형은 서문 밖 사형터에서 사형이 이루어졌지만, 1866년 병인 대박해 이후에는 너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잡혀오자 이곳이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사학죄인들의 수 많은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무려 일천여명이 병인대박해 이후 몇 년간의 짧은 시간에 처형되었는데 이때는 주로 이곳 성지 근처에 땅을 파고 생매장시키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되는데,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웅덩이)이 있었다. 포졸들이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끌려오던 천주교 신자들을 이 둠벙에서 밀어버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신자들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죄인둠벙’으로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 성지에 이 둠벙을 표현한 연못이 만들어져 있고 연못 한가운데 성모상이 죽은 이들의 마지막을 위로하려는 듯 애처롭다. 이곳에서도 주모송을 합송하고 우리는 더욱 숙연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시작하였다.

 

 

(해미 순교 성지 - 진둠벙)

 

 

    십자가의 길. 이곳 성지의 십자가의 길은 통상 가톨릭기도문의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사연으로 엮여져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자면

 

제1처 : 감옥에서 의연한 순교자.

제2처 : 사형 언도를 받는 순교자.

제3처 : 호야나무에 달린 순교자.

제4처 : 가족의 울음 듣는 순교자.

제5처 : 사형 길 함께 가는 순교자.

제6처 : 저주를 달게 받는 순교자.

제7처 : 죽음의 문턱 넘는 순교자.

제8처 : 하수구에 내쳐진 순교자.

제9처 : 자리개질 당하는 순교자.

제10처 : 생매장 길로 가는 순교자.

제11처 : 진둠벙에 내쳐진 순교자.

제12처 : 산 채로 묻히기 전 순교자.

제13처 : 구덩이에 들어간 순교자.

제14처 : 산 채로 묻혀 버린 순교자.

 

이다. 십자가의 길. 그들은 왜 이렇게 죽어가야만 했을까?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가? 나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질문이 오고간다. 우리보다 서너 칸 앞에는 하얀 수녀복이 청순해 보이는 수녀님들이 십자가의 길을 앞서 가고 있다. 

 

 

(십자가의 길을 기도하는 우리 일행)

 

 

(우리보다 조금 앞서 수녀님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 5처가 끝나는 지점 고개를 들어 올려 보면 진둠벙교가 살짝 보인다. 나의 생각으론 저 다리가 박해시대 때에는 외나무 다리였을 것이고, 그 아래 물웅덩이가 있었을 것이다. 앞에는 무명순교자의 묘가 있고 높게 순교탑이 서 있다. 순교탑이 서 있는 저 자리가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 당했던 바로 그 자리이다. 1935년 당시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 신부가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이곳을 발굴하였고, 순교자들의 유해, 묵주, 십자가등을 수습하여 서산 음앙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다가,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곳에 이장하여 묘를 만들었다. 이 때 발굴된 유해 조각 등은 이곳 순교기념관에 모셔져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한다. 발굴 당시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어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채로 생매장 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무명순교자 무덤과 순교탑 앞에서 기념사진)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엔 생매장 당할 순교자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묻기를 명할 찰나에 형장 포졸의 눈에 들어 온 규수의 아름다운 자태는 형장포졸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이에 포졸이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고,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함께 끌려 온 사람 중 한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혔다 한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에서는 천둥이 크게 치고, 사흘동안 안개가 생무덤을 덮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순교기념전시관 앞에서- 앞부분이 전시관 뒤에 크고 둥근 건물은 성당)

 

 

    십자가의 길을 끝내고 한가운데 서있는 순교현양탑도 둘러보고, 단체사진도 한 방 찍고 순교탑 옆 봉헌초대에 초도 봉헌하였다. 

 

   <천주의 성모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삶의 모든 결론은 죽음이다. 그리하여 삶은 자유를 죽음은 평등을 의미한다. 이 짧고 위험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의지할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은 나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만 꿋꿋하게 살아가기엔 우리 우주에 한 티끌인 태양의 한 조각 지구위에서 한 생을 살아가기엔 참으로 힘겹다. 성당 뒤 순교기념 전시관으로 오는 길, 노천 성당의 돌 자리 하나하나가 무명 순교자의 무덤인 양 슬퍼 보인다. 순교기념 전시관 앞, <여숫골>이라 쓰인 커다란 돌비석과 기념과 성당이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 모두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다. 순교기념 전시관에는 이곳에서 발굴한 순교자들의 유해와 박해를 형상화한 조각품들, 안내 영상물과 각종 기념물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기념 전시관을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미사들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올라갔다. 아내는 해미성당 특산품인 집주위에 심으면 화가 미치지 않는다는 무환자 나무 열매로 만든 <해미순교 보혈 묵주>를 세 개나 샀고, 나는 어머니와 장모님의 남은 생이 편안하시라고 두 분을 위해 생미사를 봉헌하였다.

 

 

 

 

 

(노천성당에서- 저 돌 하나하나가 순교자의 무덤으로 보였다)

 

 

    해미순교성당은 내부가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당이다. 오늘은 우리에 앞서 십자가의 길을 하셨던 수녀님 일행과 우리 팀을 포함한 대여섯 팀이 성지순례 길에 나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11시가 되자 해미순교성지에 대한 영상물이 20분정도 방영되었다. 성지 담당 신부님이 갑작스런 일로 자리를 비우셨다고, 옆에 해미성당 신부님이 대신 미사를 봉헌하셨다. 이 신부님은 아마도 일본 순교사를 연구하셨던 신부님이신 것 같다. 우리나라에 비해 참으로 열악한 일본천주교 순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강론시간에 많이 하셨다. 

 

    근본적으로 일본의 천주교 박해는 일본불교와 천주교의 갈등이었고, 우리나라는 유교와 천주교의 갈등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대표적인 외래종교인 불교와 유교. 불교에서는 신라의 이차돈의 순교가 역사에 전해지지만 그리 큰 문제없이 받아들여져 삼국과 고려의 국교로서 역할을 하였고, 유교 역시 오히려 기존 종교인 불교를 억압하며 조선의 국교로 자리 잡았던 것에 비하면 천주교는 기존 종교와 사회질서에 융합하지 못하고 사교로 몰려 금교령이 내려지고 대대적인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보다 앞서 1549년 8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 의해 일본에 전래되었던 일본 천주교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고 금교령을 내려지고 박해를 받았다. 일본은 특히 다른 문화를 잘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특성을 지닌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외세 문명을 잘 따라하면 따라했지 그리 배격하는 민족은 아니다. 해방 이후에 미국 등 서양문화가 얼마나 빨리 우리나라에 정착하였으며, 기독교 선교가 허용되자 얼마 안 되어 개신교신자가 불교에 육박하는 신자수를 가진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런데 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가 융화가 아닌 박해의 대상이 되었을까? 혹시 천주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당에서 성지쪽을 바라 본 사진)

 

 

 

    그것은 천주교의 배타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천주교는 2천년간 유럽세계를 지배하며 내려온 배타성과 우월성을 기반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는 인정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천주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사교였으면 우상숭배였다. 미사는 하느님의 언어인 라틴어로만 봉헌하였고, 성서도 성직자만 읽을 수 있었다. 신자들은 그저 성직자가 전해주는 성경과 성전(교회 전례와 전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믿기만 하면 되었다. 이것이 종교가 권력화 되고 배타적이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한 예이다. 사실 베드로로 비롯된 사도로부터 내려왔다는 천주교도 그리 순수한 것 만은 아니다. 교회역사의 초기에 수없이 갈라진 다른 교회들을 이단으로 몰아 배척하였으며,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구약시대에는 배격하였던 성화, 성물 등을 제작하고, 유럽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기축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신자들은 개종시켰고 결국 조로아스터교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절대 권력을 이용하여 신앙과 교리를 왕과 백성을 지배하는데 이용하였고, 신자들에게는 가혹한 교리를 강요하면서 정작 성직자들은 매관매직과 부정과 부패에 물들어 있었다. 이것은 사실 예수께서 가장 싫어하셨던 바리사이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교회의 정화운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십자군 전쟁, 남미 침략, 개신교와의 30년 전쟁 등에서 보여 준 천주교의 죄악은 참으로 용서받기 어렵다.

 

 

 

 

(순교기념전시관 안의 조형물)

 

 

 

    특히, 스페인의 남미 침략과 그 정복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168명의 기사를 이끌고 잉카의 땅으로 들어간 1532년, 예수가 누군지도 몰랐던 잉카의 황제 ‘아따왈빠’를 구세주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로로 잡은 후, 남미에서의 천주교는 일본이나 우리나라처럼 약자가 아니라 정복자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거대하고 화려하였으면 남미역사에 우뚝 솟아 있던 잉카 제국은 멸망하였고, 잉카 문명은 파괴되었으며, 잉카의 문화는 말살되었으며, 잉카의 땅은 남김없이 약탈당하였고, 잉카의 백성들은 처절하게 살육 당하였다. 1520년 잉카 제국의 인구는 약 7천5백만이었던 것이 스페인 침략 100년도 되지 않은 1620년 그곳에서 살아남았던 잉카의 후예들은 불과 500만 명이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약탈과 살육에서 천주교의 역할은 묵인이었고 이것은 절대적이었다. 그들의 살육은 최소한의 절차나 생명에 대한 티끌의 양심도 없었다. 불렀는데 늦게 왔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죽이고, 옥수수를 적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또 죽였다고 , 그나마 어느 양심이 남아 있었던 가톨릭 신부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눈에 인디오들은 구세주 예수도 모르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만약에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천주교가 피지배계층의 종교가 아니라 정복자의 종교가 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돌아가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의 <천주교가 인류에게 범한 10가지 범죄>라는 이름의 고백과 참회가 있기 전까지 아무도 종교의 묵인 하에 벌어진 이 끔찍한 범죄 행위에 대해 벌을 받은 사람도 없고, 심지어 죄책감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요한바오로 2세의 참회 행위조차도 지금은 잊혀 진 이야기이고 심지어 숨기기에 급급한 모양으로 보인다. 사람이나 종교나 자기 죄는 숨기기에 바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순교기념 전시관 내의 조형물)

 

 

    조금은 길고 지루한 강론이 이어졌다. 무려 1시간 30분에 걸친 미사가 끝난 후,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이동해서 식사를 하였다. 나는 일행들에게 가져온 음식 먹어야 하니 조금씩 먹으라고 사인을 보냈다. 그래도 많이 배가 고프셨는지 잔뜩 뜨시는 분들이 보였다. 나는 평소 내 양의 딱 절반만 담았다. 그냥 봉헌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5천원짜리 식사치고는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형편없다. 한 1~2천원 더 받고 먹음직스럽게 해 주었으면 좀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놀러온 것도 아니고 순교성지에 성지순례 와서 음식타박이나 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미사 후 성당입구에 있는 성모상앞에서)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고려 말부터 왜구가 서해 해안지방을 빈번히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이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조선 태종 때인 1417년 축성하기 시작하여 세종 때인 1421년에 축성 완료된 성으로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하는 내포지역의 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던 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지에 쌓은 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약 4.9M이고 안쪽은 흙으로 바깥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아래 부분은 큰 석재로 윗부분은 작은 석재를 올렸다. 성의 상부 폭은 약 2.1M로 두세 사람이 지나기엔 충분하다.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이곳에서 잠시 군관 임무를 맡은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의 주차장은 매우 넓고 또 무료이다. 물론 해미읍성도 입장료를 받지않는다. 버스를 구석진 곳에 주차를 하고 버스를 방패삼아 가져온 음식을 펼칠 요량이었다. 우선 해미읍성을 구경해야 하니 막걸리 5명, 소주 2명과 머리고기 안주를 챙겨 박스에 닮고 핸드카에 실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 봐둔 소나무 숲에서 한잔 할 생각이었다. 진남문을 통해 들어가자 보초를 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포졸복장이라 다 남자인줄 알았는데 한분은 여성이었다)가 술 가지고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제재하신다. ‘아이 막걸리 두병만 가지고 가는 거여요. 솔숲에서 간단하게 목이나 축이려고요.’ 내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자 보이는데서 펼쳐놓고 먹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역시 충청도는 대충 안 통하는 것이 없다. 지난 3월에 왔던 코스로 진남문에서 바로 성위로 올라가 성곽을 걷기 시작하였다. 10분 정도는 따라오고 나머지 분들은 곧장 옥사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 성곽을 따라오시라 하기도 좀 그렇다. 

 

 

(해미읍성의 출입문인 진남문)

 

 

    성곽을 따라 걷는 길. 펄럭이는 깃발이 성의 위용을 뽐내고, 성 안쪽 아래로는 유채꽃 밭이 펼쳐져 있으나 이미 거의 다 져서 그리 볼 것은 없다. 다만 성곽을 따라 보지 못했던 꽃들이 군데군데 아름답게 피어있어 지루하지는 않았다. 막걸리를 실은 핸드카를 끌고, 들고 서문인 지성루에 이르러 성 밖을 보니 과연 순교자탑과 모조품으로 만든 자리개돌이 보였다. 성안 동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천주교신자들이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 이 서문이다. 또 이 서문 문턱에 십자가를 두고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밟지 않고 피해서 지나가면 사형을 집행하는 삶과 죽음의 마지막 관문이기도 하였다. 비록 자리개돌은 모조품이지만 사람을 처참하게 죽였던 자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순교비가 있는 바로 조 자리일 것이다. 아까 성지에서 피로 얼룩져 150년이 다 되도록 지워지지 않는 피 얼룩을 생각하고,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음의 문을 넘었던 신앙 선조들을 생각하니 어느덧 두 눈에 눈물이 맺혀 흐른다.

 

    <천주여! 이것이 진정 당신의 뜻은 아닐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여야 합니까?>

 

 

(해미읍성 성곽위에 펄럭이는 군영 깃발)

 

 

(서문을 지나는 우리 일행 - 저 문 바로 밖이 사형터였다)

 

 

    서문을 지나니 멋진 해미읍성의 소나무들이 반겨주고 있다. 오른쪽 소나무들을 감상하면서 읍성의 반을 돌아, 숲 안쪽으로 내려왔다. 지난번 비스듬히 길을 막아 매달려 보았던 소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청허정에서 가져 온 막걸리와 안주를 펼쳤다. 3월에는 나뭇잎이 자라지 않아 이곳에서 읍성 전체와 읍성 밖까지도 훤히 보였었는데, 오늘은 나뭇잎에 가려 앞이 보이지는 않는다. 소나무와 또 한쪽은 대나무 밭에 둘러싸인 청허정에 둘러 앉아 막걸리에 머리고기 안주를 먹으니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 역시 술 맛은 분위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아내는 막걸리 한잔 하라고 불러도 쑥 뜯느라고 정신이 없다. 같이 온 지역 식구들과 한잔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옆에 있는 지역장님에게 전화가 온다. 아까 우리를 따라오지 않으셨던 분들이 구경 다하고 주차장 버스 옆에서 가져온 음식을 펼치신 모양이다. 우리도 먹고 있으니 먼저 드리라고 해도 빨리 오라고 성화인 것 같다. 주차장에서 쪼그리고 앉아 술 마시는 것 보다야, 이곳 폼 나는 정자에 앉아 술 마시는 게 누가 보아도 더 멋있는 일이구먼 그냥 가져온 거 부담 없이 드시면 되지 함께 못 드셔서 안달이 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져 온 막걸리는 다 비우고 동헌은 지나치고 옥사에 들러 곤장 치는 연습도 하고, 호야나무에 얽인 이야기도 하였다. 이 호야나무(회화나무)에 가는 철사 줄을 달아 사람을 매달아 놓고 모진 고문을 하였다 한다. 기다리시는 분들을 생각해서 대충 구경하고 진남문 앞에 놓인 화포와 신기전도 구경하고 진남문을 나섰다.

 

 

(해미읍성 성곽을 따라 핀 야생화들)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하는데 쓰인 회화나무)

 

 

(옥사에서 곤장치는 퍼포몬스를 하는 실비아 지역장님과 스테파노 형제님.)

 

 

 

    성을 돌아 주차장으로 오니 음식들을 펼쳐 놓고 이미 한잔씩 하고 계신다. 주차장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에게도 술과 안주를 내어 주셨나보다. 우리 천주교 사람들이 그런 인심하나는 참 밝다. 하긴 음식이 너무 많아서 그리라도 하지 않으면 반 이상은 남겨 갈 판이다. 음식이 이렇게 많은 것은 중앙시장에서 순대국집 대구식당을 하는 안토니오 구역장님 어머니께서 돈은 조금 받고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준비해주신 까닭이다. 제일 좋은 머리고기에 굴과 무침거리도 엄청 가져오시고 김치도 따로 담아 오신 것 같았다. 거기에 홍어무침도 찬조가 들어왔다. 나도 한편에 자리 잡고 굴 안주로 막걸리 한잔을 더 하였다. 마침 현지 분들과 자연스럽게 합석이 되어, 여기가 고향인 스테파노 형제님과 함께 몇 순배를 거듭하여 술을 마셨다. 스테파노 형제님은 여기에서 중학교까지 다니셨다고 한다. ‘여기에 땅을 사놓을 테니 같이 살 것이냐?’고 물어 보시기에 얼른 좋다는 말을 하였다. 내가 아무래도 말년은 시골에서 살기는 살 모양이다. 구차하게 살지만 않는다면야 시골에서 유유자적 좋은 공기와 좋은 흙과 좋은 물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말년 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읍성 주차장에 음식을 폎쳐놓고 뒷풀이를 하는 우리 일행)

 

 

    대략 뒷풀이가 끝나고 일어서려는데 스테파노 형제님이 서산에 친구가 하는 국수집이 있다고 가자하신다. 다들 배부르다고 그냥 올라가자했지만 고향에 와서 국수 한 그릇 사고, 또 고향친구에게 ‘나 이만큼은 산다.’고 우리를 데리고 가 자랑하시게 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 국수 한 그릇 들어갈 배가 없냐며 서산으로 가자고 결정하였다. 서산으로 가는 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성지나 읍성에서 비가 왔으면 참 낭패였을 것인데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서산에 도착해 그 식당을 점령하고 잔치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준비해 놓은 국수가 남았다고 더 드실 분을 찾기에 나는 국물은 먹지 않고 국수만 한 그릇 더 먹었다. 그렇게 국수까지 배불리 먹고 4시 30분쯤 서산을 떠났다.

 

    올라오는 길. 버스 기사님이 조용한 음악을 틀어 주시자, 요셉 형제님이 내 앞으로 오시더니 잠자며 갈 일 있냐고 신나는 음악을 틀어 달랜다. 기사님에게 말씀드리자 단속이 심하다며 창커텐을 다 치라고 하시더니 음악을 틀어주신다. 내가 다니는 수사사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거룩한 성지순례길에 벌어진 것이다. 요셉형제님은 난리가 나고 자매님 심지어 할머니 몇 분들도 아주 신나서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나는 맨 앞에 앉아 경찰차 있나 없나 망을 보고 그렇게 한 30분 놀자 조금 지치셨는지 이번에는 노래방 틀어 달라 하신다. 버스기사님이 단속이 심해 노래방 기계는 빼버렸다고 하자, 못해 아쉬워하는 눈치들이다. 막걸리 탓에 휴게소에 들러야 한다고 하자 기사님이 고속도로 도로공사 사무소에 차를 세우셨다. 소변을 보고 돌아오니 노래방을 연결해 놓으셨다고 한다. 노래하실 분 주문하라 하니 계속 번호가 들어온다. 나도 어르신들을 위해 ‘사랑의 이름표’를 불러 100점을 맞았다. 이렇게들 좋아하시는데 우리 수사사에도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조금 막혀서 어찌어찌 돌아왔는데 의왕과천 고속도로였다. 북수원에서 내려 유턴을 하니 의왕 고천. 이때까지 노래방은 열심히 돌아갔다. 고천을 지나자 안토니오 구역장님이 그만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노래방을 끝내고 마무리 기도를 한 후 성당에 도착하니 6시 40분이 되었다. 이것저것 짐을 내리고 실비아 지역장님이 세라피나 자매님이 카메라를 버스에 두고 내려서 가져왔다고 보여주신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직접 갖다 주어야겠다.’고 하시기에 아내에게 우리 카메라 잘 있냐고 물어보니, 아내가 여기저기 뒤져보더니 없다 한다. 이런. 국수집 아니면 차에 두고 내린 것이다. 부랴부랴 버스기사님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지금 차를 멈출 수 없고 세워서 찾아본다고 하신다. 5분여를 기다리니 전화가 왔다. 버스에 있다는 것이다. 버스가 있는 석수동 도서관까지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가서 카메라를 찾아서 집에 오니, 아내가 굴무침용 야채와 양념이 남아 가져왔다며 그 양념에 골뱅이 무침을 하려고 국수를 삶고 있다. 

 

    <순교(殉敎)> -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나 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일.

 

    불과 백 수십여 년 전. 조선 충청도 땅의 순박한 농부며, 어부며, 아낙들이며, 규수며, 장사꾼이며 노비며, 심지어 몇 몇 양반들까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자리개질이나 돌기둥을 떨어트려 죽임), 백지사형(팔과 다리를 묶고 창호지에 물을 묻혀 얼굴을 덮으면 숨을 쉬지 못하게 해 죽임), 굼벙에 수장, 심지어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하는 참혹한 형벌을 받으며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야 신앙을 표현하는 최고의 믿음으로 추앙받을 행위이다. 그래서 이미 우리나라에는 103위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올랐고, 그 때 성인이 못되신 순교자들을 발굴하여 지금 성인 전 단계인 복자품에 올리기 위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부단히 노력을 하고 있다. 이곳 해미성지에서 돌아가신 분들에서도 행적과 이름이 밝혀진 해미 최초의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1800년 1월 9일 순교), 성 김대건 신부님의 증조부이신 김진후 비오(1814년 12월 1일 순교), 이보현 프란치스코(1800년 1월 9일 순교)순교자에 대한 시복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세분의 공통점은 양반이라는 것이다. 양반이기 때문에 그 행적과 기록이 그나마 상세히 남아 있는 것이다. 평민들은 그저 이름이나 남아있으면 다행이고 대부분은 행적을 남길 자료도 없이 다들 그렇게 들꽃처럼 돌아가셨다.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순교를 앞두고 하신 말씀을 새긴 비 - 순교성지)

 

    이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박해와 사형을 집행한 조선 조정에 있는 것일까? 나라에서 반대하는 사교(邪敎)를 믿은 신자들의 책임일까? 혹시 다른 민족의 문화에 들어오면서 오직 천주교 교리만이 옳다고 가르치고 당시 조선의 유교적 관습과 사회 전통을 무시한 교회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 후 천주교의 입장이 바뀌었다. 민족에 따라 그 민족의 선량하고 고유한 전통과 유산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한국 천주교회는 비록 유교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긴 해도 제사와 차례를 인정한다. 어떤 신부님은 오히려 권장하기도 한다. 연령을 위한 기도(연도)는 유교의 곡소리에 맞추어져 연령들을 위해 곡을 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유교를 국교로 하고 있던 조선 조정이 천주교 신자를 사형시킨 직접적인 이유는 ‘부모에게 제사도 지내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사학죄인’이라는 죄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아주 작은 지구에서 살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 종교와 사상이 함께 어울려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갈등이 그렇게 심했어도 지금 공산당의 수괴 국가인 러시아든 중국이든 다 여행할 수 있고, 심지어 사업도 할 수 있고 북한을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못가는 곳은 없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종교가 나름의 역할을 하며 공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는 유대교와 이슬람, 이슬람과 기독교, 같은 기독교 내의 가톨릭과 개신교, 같은 이슬람의 시아파와 수니파, 힌두교와 이슬람, 개신교와 불교와의 끊이지 않는 큰 싸움과 작은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종교와 과학의 싸움도 만만치 않다. 이 문제를 우리 인류는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그것이 <어울누리> 철학의 또 다른 숙제이다. 나의 청년 시절 종교와 과학이 부딪쳤을 때 철학이 그 문제를 해결하였듯이, 인류에게 주어진 이 갈등 역시 철학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5월 21일 해미순교성지와 해미읍성 성지순례를 하고나서

글 : 하늘바다 여운종, 사진 : 가을햇살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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