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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書藝)에 관련한 상식들...

작성자수남이|작성시간20.01.31|조회수215 목록 댓글 0

서예(書藝)


◉ 서예란
  서예는 문자를 소재로 하여 붓으로 나타내는 예술이다. 곧, 붓글씨의 선과 모양 그리고 전체적인 짜임새 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그 솜씨를 예술이란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서예는 예술성을 추구함과 함께 훌륭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서예에 필요한 용구와 재료는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문방사우로 일컫는 먹 · 벼루 · 붓 · 종이이다.
  옛날에 선비들은 사랑방에 이 네 가지를 가까이 두고 소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를 글씨 쓰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친구, 즉 문방사우 또는 문방사보라고 불렀다.

◉ 문방사우(文房四友 - 선비의 벗)
  예로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던 선비들의 방에는 문방사우가 있었어요.
문방사우란 종이, 붓, 벼루, 먹 등을 말하는데, 이것들을 친구처럼 가까이하라는 뜻이에요. 그중 붓, 벼루, 먹은 백제와 신라 때의 유물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해 왔어요.
  ☞ 붓은 붓털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써요.
처음에는 나뭇가지의 끝을 짓이겨 털처럼 부드럽게 만들어 쓰다가 나중에는 짐승의 부드러운 털을 묶어 썼어요. 붓대는 반듯하고 가벼운
대나무를 썼어요.
 ☞ 벼루와 먹은 지금의 잉크라고 할 수 있는 먹물을 만들어 내는
도구예요. 벼루에 물을 부은 다음 먹을 갈면 먹물이 돼요.
벼루는 보통 돌로 만드는데 때로는 옥, 수정 같은 보석이나 백자, 청자
같은 도자기로 만들기도 해요. 용, 대나무, 연꽃 등을 조각해서 예술적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 만든 벼루는 훌륭한 장식품이 되었지요.

  벼루에 먹을 갈 때는 사용할 물을 담아 둘 수 있는 연적이
필요해요. 연적에는 공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구멍이 두 개 있어서 원하는 만큼 물을 따를 수 있어요. 대개 청자나 백자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한 손에 잡힐 만큼 작았지요.
 
☞ 붓
  붓은 끝이 뾰족하게 모여야 하고 물이나 먹을 묻혔을 때 털의 길이가 모두 같아야 한다. 약 2,200년 전에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족제비의 꼬리털로 만든 것을 으뜸으로 쳤고, 좋은 붓을 만드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했다.
 ☞ 벼루
  벼루는 손으로 만져 부드럽고 윤이 나야 한다. 먹을 가는 벼루는 먹물이 잘 마르지 않고 오래 남아 있는 것이 좋다. 벼루에 먹을 갈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 연적이다.
 ☞ 먹
  먹은 입자가 가늘고 가벼우면서도 단단해야 한다. 두들겨서 소리가 맑고, 가벼운 것을 골라야 한다.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을 모아 오동나무 기름에 섞어서 만든다. 옛날에는 해주에서 나는 먹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다.
 ☞ 종이
  종이는 우선 먹이 고르게 퍼져야 하며 종이의 두께도 고려해야 한다. 약 2,000년 전에 중국에서 처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에 종이를 만드는 관청을 두었다. 종이가 귀하여 함부로 쓰지 않았으며, 빈 곳이 없도록 글씨를 쓰곤 했다.
그 밖의 서예 용구서예에는 문방사우 이외에 모전(담요), 종이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서진, 붓말이, 붓걸이, 붓꽂이, 글을 쓰기 전이나 쓰는 도중에 붓을 받쳐 두는 필산, 연적 따위의 용구가 필요하다.


◉ 서체의 종류
  크게 나누어 한문 서체와 한글 서체가 있다.
한문 서체에는 갑골문 · 금문 · 전서 · 예서 · 초서 · 해서 · 행서가 있다.
한글 서체는 판본체 · 혼서체 · 궁체로 나뉜다.


◉ 서예의 기본자세
  자세를 바르게 갖는 것은 서예 학습의 기본이다. 서예의 기본자세에는 붓을 잡는 법 · 몸의 자세 · 붓 놀리는 법(팔의 자세)이 있다.
  글씨를 쓰는 것은 손 · 손목 · 팔꿈치 · 어깨 또는 몸 전체의 상호 작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붓을 잡는 손가락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
  몸의 자세에는 책상이나 바닥에 정중히 앉아서 쓰는 자세와 서서 쓰는 자세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리듯 하여 쓰는 자세가 있다.


◉ 팔의자세
  1. 현완법 : 앉아서 팔뚝을 어깨높이로 들고 쓰는 방법
  2. 침완법 : 왼쪽 손등에 팔뚝 전체를 대어 쓰는 방법
  3. 제완법 : 팔 뒤꿈치만 책상에 붙이고 팔뚝을 들고 쓰는 방법


◉ 완법
  집필 방법의 일종으로, 팔의 움직임을 통해 글씨를 쓰는 집필법.
글씨를 쓸 때는 붓을 잡는 방법뿐 아니라 팔을 움직이는 방법도 중요하다. 서예에서 붓을 잡는 방법을 집필법이라고 하는데, 집필 법에는 손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인 지법과 팔을 사용하는 방법인 완법이 있다. 지법은 손가락의 위치에 따라 단구법과 쌍구법으로 나뉘고 완법은 팔과 손목의 움직임 정도에 따라 침완법, 제완법, 현완법으로 나뉜다. 완법은 팔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통해 글씨를 쓰기 때문에 움직임이 클수록 큰 글씨를, 움직임이 작을수록 작은 글씨를 쓰는데 적합하다.
완법의 종류 가운데 팔 전체의 움직임이 자유롭기 때문에 서예 글씨를 쓰는 데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고 가장 바람직한 완법으로 꼽히는 것은
현완법이다.


서서 쓰는 자세 : 몸 전체가 자유스러워 많이 응용되고 있다.


팔의 자세
◉ 현완법 : 앉아서 팔뚝을 어깨높이로 들고 쓰는 방법

◉ 침완법 : 왼쪽 손등에 팔뚝 전체를 대어 쓰는 방법

제완법 :  붓을 잡는 법
◉ 단구법

◉ 쌍구법

◉ 발등법

◉ 악필법


▶ 팔의 자세
현완법. 앉아서 팔뚝을 어깨 높이로 들고 쓰는 방법이다."
침완법. 왼쪽 손등에 팔뚝 전체를 대어 쓰는 방법이다."
제완법. 팔뒤꿈치만 책상에 붙이고 팔뚝을 들고 쓰는 방법이다."
▷ 붓을 잡는 법
단구법. 엄지와 검지로만 잡는다."
쌍구법. 엄지, 중지로 잡는다."
발등법. 다섯 손가락으로 잡는다."
악필법. 맷돌을 돌리듯이 잡는다."


◉ 붓글씨를 쓰는 바른 자세
  몸의 자세 붓 잡는 법 팔의 자세   자세를 바르게 갖는 것은 서예 학습의 기본이다.
  몸의 자세
붓글씨를 쓸 때에는 작품의 크기와 쓰는 장소에 따라 자세가 달라진다. 서서 쓰는 경우와 의자에 앉아서 쓰는 경우와 바닥에 앉아서 쓰는 경우를 알아보자.
 서서쓰기 : 다리를 약간 벌려 몸의 중심을 잡고 서서 윗몸을 조금 굽히고 왼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누르고 쓴다. 큰 글씨를 쓰기에 알맞다.
 의자에 앉아서 쓰기 : 몸이 책상에 닿지 않게 앉아서, 왼손으로 종이를 눌려, 붓을 쥔 오른손과 삼각형을 이루게 한다. 가슴을 바로 펴고 몸만 약간 앞으로
숙여 눈과 지면을 30cm이상으로 유지한다. 가장 일반적인 자세이다.
 바닥에 앉아서 쓰기 : 두 무릎을 꿇거나 한 무릎을 세우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어 윗몸을 의지하며 엉덩이를 약간 들고 쓴다. 빨리 피로해지기 쉬운 자세이다.


 ◉ 붓 잡는 법
붓글씨를 쓰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손가락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쌍구법과 단구법으로 나누어진다.

 쌍구법 : 붓글씨를 쓰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으로 손가락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쌍구법과 단구법으로 나누어진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가운데손가락의 끝을 모아 붓을 잡고 약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붓대의 안쪽을 받쳐 단단하게 고정시켜 준다. 큰 글씨와 중간 정도의 글씨를 쓰는 데 알맞다.

 단구법 : 집필방법의 하나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붓대를 맞잡고 가운데손가락으로 가볍게 받쳐서 약손가락, 새끼손가락 등은 안쪽에서 붓대를 받쳐 준다. 잔글씨를 쓰는 데 알맞다. 단포라고도 부른다. 단구법은 쌍구법보다 붓의 아래쪽으로 내려 잡는다. 또 단구법이나 쌍구법은 모두 붓대가 지면과 수직을 이루게 해야 한다.
 집게손가락은 붓대의 밖에서 갈고리 모양을 하며 안쪽을 향하고, 가운뎃손가락의 손톱 뿌리 부분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나머지 손가락은 가운뎃손가락의 아래 부분에 붙여서 주로 작고 가는 글씨를 쓸 때 사용했다.
단구법을 두고 붓에 힘이 없고 기가 부족하다며 반대한 서예가도 있었다. 글씨를 쓸 때 펜과 연필 등의 필기구를 사용할 때의 방법도 이와 같다. 다만 단구법은 세 손가락이 손바닥을 막고 있으며 붓이나 펜을 움직이기 매우 불편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현완법 : 서예 학습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팔의 자세로서 오른팔을
들고 팔꿈치는 밖으로 향하게 하여, 팔이 항상 지면과 수평이 되게 하는 방법이다. 큰 글씨와 중간 글씨를 쓰는 데 알맞다. 손과 팔이 바닥에 닿지 않게 팔꿈치를 들고
붓을 곧게 쥐고 쓰는 집필법.
붓글씨를 쓸 때, 팔목을 들어 바닥에 대지 않고 붓을 곧게 쥐고 쓰는 방법으로 현완직필이라고도 한다. 팔의 드는 정도와 손목의 사용에 따라 완법은 현완법, 제완법, 침완법으로 크게 구분한다.
이중 현완법은 손과 팔이 바닥에 닿지 않고 붓을 지면에서 직각으로 쥐어서 쓰기 때문에 큰 글씨와 중간 글씨를 쓰기에 알맞은 자세라고 볼 수 있다.
보통 팔뚝을 어깨 높이로 들고 쓰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자세이다. 작은 글씨를 쓰는데 적합한 제완법과 침완법에 비해 팔의 움직임이
자유롭고 보다 크게 움직일 수 있으므로 현완법은 서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붓의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서도 많이 사용된다.

제완법 : 팔꿈치를 책상에 가볍게 대고 쓰는 방법으로 중간 정도의 글씨를 쓰는 데 알맞다.  
팔꿈치를 책상에 붙인 상태에서 팔뚝을 들고 글을 쓰는 집필법.
서예에서 중간 글씨 이하의 작은 글씨를 쓰기에 알맞은 자세로 팔꿈치를 책상에 붙인 상태에서 팔뚝을 들고 글씨를 쓰는 방법이다. 완법 중에서 팔꿈치를 책상에 대는 방식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붓을 움직이는 운동에 제한이 있다. 어깨 전체를 쓸 수 있는 현완법에 비해 서체에서 힘 있는 글씨가 나오기 어렵다. 제완법은 오른쪽 팔이 책상 위를 가볍게 스칠 정도로 들고 써야하며 손끝만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큰 글자나 행초(行草)에는 적당한 방법이 아니므로 서예를 처음 배우거나 서툰 사람의 경우 잠시 사용할 수 있지만 꼭 팔을 높이 들고 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다. 계속해서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글씨를 쓰면 힘이
어깨를 통과하지 못하고 이것이 글씨에도 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침완법 : 왼손 위에 오른손이나 팔을 올려놓고 쓰는 방법으로 작은 글씨를 쓰는 데 적합하다.
왼손을 베개처럼 오른팔의 팔꿈치 밑에 받치고 글씨를 쓰는 집필법.
서예에서 붓을 놀리는 기법 중 하나로 완법 중에서 가장 작은 글씨를 쓸 수 있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왼쪽 손바닥을 종이 위에 놓고 그 손등에 붓을 잡은 오른쪽 손목을 얹은 자세로 글씨를 쓴다. 침완법의 경우 손가락 끝의 힘으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현완법과 제완법에 비해 팔이 많이 움직이지 못한다. 때문에 침완법은 큰 글씨를 쓰기에도 적당하지 않지만 글씨 자체도 생동감이 없고 필력도 강하지 않다. 그래서 옛날부터 침완법은 팔의 힘이 아니라 손가락의 힘으로 쓰므로 글씨 쓰기에 적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 한자서체
  ▷ 행서(해서)
 한자 서체(書體)의 하나. 금예(今隷)·정서(正書)·진서(眞書)라고도 한다. 후한(後漢) 말에 한례(韓隷)의 파책(波磔)을 고치고 꺾고 치침을 더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예서(隷書)와 해서(楷書)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내용
해서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① 법도(法度)를 갖추어서 해모(楷模:模範)가 되는 서법이라는 뜻이고, ② 정서 혹은 진서로서 자체가 단정하고 용필(用筆)이 법에 맞는다는 것으로 행서(行書)·초서(草書)와 같이 흘리지 아니한다는 뜻이 있다.
종요(鍾繇)로부터 시작되고 왕희지(王羲之) 등에 의하여 장착되었다. 해서에는 형태와 쓰임새에 따라 다음과 같은 명칭이 있다. ① 정해(正楷):한 점, 한 획에 조금도 흘리는 기운이 없는 것. ② 명석서(銘石書):비명(碑銘)을 돌에 새기는 서체로 정체(正體)를 공손하게 써서 장중(壯重)함을 나타내는 것. ③ 대해(大楷):해서의 큰 자〔大字〕, 지극히 큰 것은 방서(榜書)·벽과서(擘窠書)라 일컫는다. 대체로 3치 안팎의 크기를 말한다.
④ 중해(中楷):방촌(方寸), 즉 1치 평방의 해서로 촌해(寸楷)라고도 한다. ⑤ 소해(小楷):소자(小字)의 해서로 수푼(數分) 평방의 자양(字樣)이며 뚜렷한 예는 왕희지의 황정경(黃庭經)·악의론(樂毅論)이나 왕헌지(王獻之)의 십삼행락신부(十三行洛神賦) 등이 그것이다.
소해의 아주 작은 것은 승두서(蠅頭書)·세자(細字)라고도 일컫는다. 승두서는 크기가 파리머리만 하다는 말이고 세자는 가는 좁쌀[細黍]만하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해서는 또 북위해(北魏楷) 또는 위체(魏體)와 당해(唐楷)로 나누어진다. 위체는 북조(北朝)의 원위시대(元魏時代)의 해서체로 석각(石刻)·마애(摩崖)·조상(造像)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때에 처음 해서가 시작되어 예법(隷法)에서 벗어나려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형태가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며, 방정(方正)하고 거세며 묵직한 것을 주로 하여 북비체(北碑體) 또는 위체라고 하였다.
위체의 특징은 필기(筆氣)가 혼후(渾厚: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움.)하고, 의태(意態:마음의 상태)는 질탕(跌宕:한껏 흐트러져 방탕에 가까움.)하며, 길고 짧으며 크고 작음이 그 형태에 따라 분항포백(分行布白)에 있어 묘(妙)를 다하였으되 정제한 가운데에서 변화하고 방평(方平)한 속에 기굴(奇堀)함을 감추어 정채(精采)함을 다하였다. 위체는 해서의 발전시기로서 위로 종(鍾)·왕(王)을 잇고 아래로 수(隋)·당(唐)을 열었으니 당에 이르러 해서는 완전히 성숙되었다.
완원(阮元)의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에, “북파(北派)는 중원(中原)의 고법(古法)으로 삼가고 치졸하나 비방(碑榜)에 으뜸”이라 하여 비학(碑學), 즉 위체를 숭상하는 학풍의 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당해(唐楷)는 북위해에서 수대(隋代)를 거쳐 해서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그 규구(規矩)가 잡힌 해서의 전형(典型)을 이룬다.
수대에는 아직 필획에 있어 다소 예서의 잔영이 보이며,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서체가 성숙되고 서가(書家)를 배출하게 되며 표준서체를 이루게 된다. 그 대표적 서가로는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안진경(顔眞卿)·유공권(柳公權)을 들 수 있다.
북위해는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지는 과도기적 형태로 방필 위주의, 아직 예서에서 탈피되지 않은 원형(原形)의 해서이며, 당해는 숙달되고 규구가 짜임새 있게 틀이 잡힌 해서이다.
 당나라 때는 예서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해서라고 한다. 주로 공문서에 이용된 양식이며,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이다.당나라 때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아 가장 중요한 서체가 되었다. 해서는 현재 사용하는 표준서체와 인쇄체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현전하는 가장 초기의 예는 위나라 종요가 쓴 법첩인데 성숙된 경지를 보이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해서체가 발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왕희지에 이르러 일단의 형식이 완성되었다.대표적인 서예가로는 구양순·우세남·안진경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김정희의 〈묵소거사자찬〉,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발문, 이이의 서간문 등이 대표적 해서체로 꼽힌다.
진서(眞書)·정서(正書)·금예(今隸)라고도 한다. 후한말에 한예(漢隸)의 파책(波磔)을 변화시키고 여기에 점(點)·탁(啄)·도(桃)·적(趯)을 더하여 만들어진 방정한 서체로, 당나라 때는 예서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해서라고 한다. 주로 공문서에 이용된 양식이며,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이다.
당대(唐代 : 618~907)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아 가장 중요한 서체가 되었다. 그 당시 문관으로서의 성공 여부는 서예의 숙련도와 관련이 있었다. 해서는 현재 사용하는 표준서체와 인쇄체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현전하는 가장 초기의 예는 위(魏)나라 종요(鍾繇)가 쓴 법첩인데 성숙된 경지를 보이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해서체가 발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일단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해서는 북위해(北魏楷 : 일명 魏體)와 당해(唐楷)로 분류된다. 북위해는 북조시대의 해서체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서체이며, 아직 예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방필(方筆) 위주의 방정하고 묵직한 필법을 보여준다. 이것은 북위시대의 비(碑)·석각(石刻)·마애·조상(造像) 등에 새겨진 문자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당대는 해서의 성숙기로 글자체가 정련되어 표준의 서체가 완성되었으며 해서를 장기로 하는 전문서예가들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안진경(顔眞卿)·유공권(柳公權)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김정희의 〈묵소거사자찬〉,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 발문, 이이의 서간문 등이 대표적인 해서체로 꼽힌다.→ 서예

  ▷ 행서
 한자 서체(書體)의 하나. 당나라의 장회관(張懷瓘)은 “진(眞)도 아니고 초(草)도 아닌 것을 행서라 한다.”고 하였으며, 청나라의 송조(宋曹)는 “행(行)이라는 것은 진서(眞書)의 약간 흘리고 간략한 것으로 쉽고, 서로 이어져서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 그 사이에 진하고 가는 획이 나올 수 있으며, 진도 초도 아니면서 모난 것〔方〕을 떠나 둥글게〔圓〕 되니 곧 해·예(楷隷)를 빠르게 한 것이다.”고 하였다.

내용
동한(東漢)의 유덕승(劉德昇)이 창시하였다고 하고, 진(晉)나라의 위항(闈恒)은 위초(魏初)의 종요(鍾繇)와 호소(胡昭)가 유덕승에게 배워 행서법(行書法)을 썼다고 하였다. 종유 삼체(三體) 중의 하나가 행압서(行押書), 곧 행서이며,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에게 이르러 완성되었다.
행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져, 청나라의 유희재(劉熙載)는 “행서에 진행(眞行)과 초행(草行)이 있는데, 진행은 진에 가깝되 흘린 것이고, 초행은 초에 가까우나 덜 흘린 것”이라 하였다.
행서는 해서와 같이 섞어 쓰기도 하고, 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해·행·초 3체를 혼합해 쓰기도 하여 그 조화와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면 서법으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역대의 서가(書家)들은 행서에 치중하여 힘쓰고, 더욱 주의한다.
이 행서의 종류로는 행압서·진행·행해(行楷)·초행·행초(行草)·소행초(小行草)·반초행서(半草行書)·선서(扇書) 등으로 경우에 따라 달리 표현하고 있다.
① 행압서:행서의 초기 칭호로 ‘行狎書’라고도 표기한다. 압(押)은 서(署)로, 본래 압자(押字) 함(銜, 啣)과 같은 사인(sign)에 근거를 두고 생긴 명칭이다. ② 진행:비교적 진서(眞書)에 가까운 행서를 말하며, 진(眞)을 겸한 것으로 해행(楷行) 또는 행해라고도 부른다.
③ 행해:진행과 같은 것으로 일설에는 해행이라 하여 본래 해서이면서 행서에 가까운 것을 말하기도 하며 세분하기 어렵다. 『동기창론행해 董其昌論行楷』에 “당비(唐碑)에 행해인 것이 많으니 회인(懷仁)의 삼장성교서(三藏聖敎序)를 소왕체(小王體)라 하는 것으로 모든 비가 이것을 닮았다.”고 하였다.
④ 초행:비교적 유동(流動)하여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행초라고도 한다. 장회관은 “진을 겸한 것을 진행이라 하며 초를 띤 것을 행초라고 말한다.”고 하여 행초와 초행을 습관상 혼용하고 있있다.
⑤ 행초:두 가지 뜻으로 하나는 초행과 같고, 하나는 행서와 초서를 가리킨다. ⑥ 소행초:형체가 비교적 작은 행서.
⑦ 반초행서:장회관이 ≪서의 書議≫에 말하기를 “왕헌지법(王獻之法)은 초도 아니고 행도 아닌, 초에 흐르기 편하며, 행을 열어 초 또한 그 중간에 있게 하며, 굳세며 빼어나되 간이(簡易)하기에 힘썼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서체를 말한다. ⑧ 선서:행·초 사이의 서체이다.
근대의 심매수(沈寐叟)가 ≪잡가언 雜家言≫에서 말하기를 “선서라는 것은 행·초 사이에 있어서 빠르게 쓰는 뜻을 취하였다.”고 하여 반초행서와 같은 것이다. 서체는 항상 필획의 복잡함을 덜어 간이하고 빠르기를 구하여 변하였다.
그리하여 해서는 행서로, 다시 초서에 이르렀으나 초서는 알아보기 어려워 널리 쓰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필(帶筆)로서 단독감(單獨感)이 연속감(連續感)에 이르게 된다. 행서는 알아보기 쉽고 또 간이하여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서체로 더욱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해서와 초서의 중간적인 서체로, 이와 같이 행서는 해서·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며 나아가 해·행·초 3체를 다 섞어 쓰는 등 서체 가운데 가장 다양하게 변화를 줄 수 있는 서체다. 그 섞어쓰는 정도에 따라 행압서·진행·행해·초행·행초·소행초·반초행서·선서 등으로 나뉜다.진대의 위항은 위나라의 종요와 호소가 유덕승에게서 배워 행서를 썼다고 하는데 종요삼체 가운데 하나가 행압서, 즉 행서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행서는 후한에서 삼국시대의 위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체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동진의 왕희지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며, 이후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53년에 왕희지가 쓴 〈난정서〉인데 이것은 당대의 필사본이다.
해서와 초서의 중간적인 서체로, 행서의 종류에는 행압서(行押書)·진행(眞行)·행해(行楷)·초행(草行)·행초(行草)·소행초(小行草)·반초행서(半草行書)·선서(扇書) 등이 있다.
행압서란 행서의 초기 명칭이며, 진행은 진서에 가깝게 하되 흘린 것으로 해행(楷行) 또는 행해라고도 한다. 행해는 해서이면서 행서에 가까운 것을 말하며, 초행은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행초라고도 한다. 소행초는 글자가 작은 행초이며, 반초행서는 초도 아니고 행도 아닌 중간적 서체이며 선서 역시 반초행서식의 서체이다. 이와 같이 행서는 해서·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며 나아가 해·행·초 3체를 다 섞어 쓰는 등 서체 가운데 가장 다양하게 변화를 줄 수 있다.
당나라 때 장회관(張懷瓘)은 "진(眞)도 아니고 초(草)도 아닌 것을 행서라 한다", "정서(正書)를 조금 바꾸어 쉽게 하려고 점·획 사이를 흘러가는 필의로 썼기 때문에 행서라 하며 또는 행압서라고도 한다"라고 했다. 또한 청대의 송조(宋曹)는 "행은 진서(眞書)를 약간 흘리고 간략화한 것으로 쓰기 쉬우며 서로 이어져서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듯 그 사이에 진하고 가는 획이 나올 수 있으며, 진도 초도 아니면서 모난 것[方]을 떠나 둥글게 되니(員) 곧 해서와 예서를 빠르게 한 것이다"라고 했다.
행서는 후한초의 유덕승(劉德昇)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진대(晉代)의 위항(衛恒)은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호소(胡昭)가 유덕승에게서 배워 행서를 썼다고 하는데 종요삼체(鍾繇三體) 가운데 하나가 행압서, 즉 행서이며 이것은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즉 역사적으로 볼 때 행서는 후한에서 삼국시대의 위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체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여 동진의 왕희지 부자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며, 이후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353년에 왕희지가 쓴 〈난정서 蘭亭序〉인데 이것은 당대의 필사본이다.→ 서예

▷ 초서
 넓은 의미로는 자체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초체를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의 초서는 장초·금초·광초 등을 가리킨다. 장초는 예서 필획의 글자가 모두 독립되고 결체가 모나고 납작하며 파책이 남아 있고, 필획이 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점획을 생략했다. 후한말의 서체인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왕희지·왕헌지 부자가 완성했다. 광초는 당나라 장욱이 시작한 것으로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나 극도로 자유분방하게 쓴 것이다. 문자가 실용적 성격에서 예술영역에 도달하는 데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서예사적 의의가 크다.우리나라는 중국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자체도 대개 진대 전통적 초서 중심으로 쓰여졌다.
넓은 의미로는 자체(字體)를 간략하고 빠르게 쓴 초체(草體)를 가리킨다. 초체는 문자를 빠르게 서사(書寫)한 것으로 전서의 경우는 전초(篆草), 예서의 경우는 예초(隸草)라 하며 중국 창사[長沙]의 묘에서 출토된 죽간(竹簡)과 서북지방 출토의 목간 등에서 대전 및 한례(漢隷)의 초서가 보인다.
이러한 초체가 계속 변화·발전하여 일종의 고정된 서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초서로 장초(章草)·금초·광초 등이 있다. 아직 형식이 정비되지 않은 한대(BC 206~AD 220) 초기의 것은 고초(古草)라 하며, 전한(前漢) 후반기에는 파책(波)을 수반하며 후한대에 글자체가 완성되는데 이것을 장초라 한다. 장초는 예초·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글자가 모두 독립되고 결체가 모나고 납작하며 파책이 남아 있고, 필획이 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점획을 생략했다. 장초의 초기 형태는 한대의 목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장초의 법첩인 사유(史游)의 〈급취장 急就章〉과 〈순화각첩 淳化閣帖〉에 있는 장지(張芝)·황상(皇象)·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다. 후한말 새로 나타난 서체인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후한의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을 이어 창안했다고 하며,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가 완성했다. 금초에는 한 글자씩 쓰는 독초체(獨草體)와 붙여서 쓰는 연면체(連綿體)가 있다. 금초는 〈순화각첩〉에 실린 왕희지·왕헌지 부자와 장지의 글씨, 왕희지의 〈십칠첩 十七帖〉·〈상란첩 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 地黃湯帖〉 등에서 볼 수 있다. 광초는 당나라 장욱(張旭)이 시작한 것으로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난 것이며 술과 자연현상 등으로부터 얻은 정취나 영감에 의해 극도로 자유분방하게 쓴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 회소의 〈자서첩 自敍帖〉 등이 있다. 초서는 쓰는 사람의 개성을 발휘하기가 용이하며, 문자가 실용적 성격에서 유희적 성격을 띤 예술영역에 도달하는 데 교량역할을 한 것으로 서예사적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초서의 발달과정을 살펴볼 만한 유구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전기·중기의 것으로 최흥효·이용·김구·이황·황기로·양사언·한호 등의 초서체 서책이 남아 있고, 후기에는 윤순(尹淳)·신위(申緯) 등의 초서가 유명하다. 그러나 중국에서처럼 크게 유행하지 않았고 자체도 대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가 중심을 이루었다.→ 서예
초서의 발생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행서(行書)가 출현한 뒤 이를 쓰기에 편리하고 속사(速寫)할 수 있도록 짜임새와 필획을 간략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볼 때, 전서(篆書)를 사용하였던 중국 전국시대에 이미 초고(草藁)라 하여 속사를 위한 초체(草體)가 있어 정체(正體)와 구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넓은 뜻에서의 초서는 모종의 자체(字體)를 초략(草略)한 서체 모두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또한, 서체사(書體史)에서 말하는 고정된 의미의 초서도 예서(隷書)를 사용하였던 한초(漢初)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 변천과정에 따라 장초(章草)가 선행하며 이후 금초(今草)·광초(狂草)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장초는 예서를 간략하게 속사한 것으로 서한(전한) 원제(元帝) 때, 사유(史游)가 창안하였다고 전하며, 후세인들이 그가 쓴 ≪급취장 急就章≫으로 인하여 이를 장초라 이름 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두도(杜度)가 만든 것으로 동한(후한) 장제(章帝)가 이를 애호하여 장초라 하였다고도 전하나, 모두 신빙할 수 없다.
이 밖에 당(唐)장회관(張懷瓘)은 한 장제와 위(魏)문제(文帝)가 초서로 장주(章奏)하라 하였으므로 장초라 이름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후 송(宋) 황정견(黃庭堅)·미불(米巿) 등의 명서가와 대부분의 소학가(小學家)들이 이 설을 따르고 있어 믿을 만한 설로 본다.
장초는 예초(隷草)·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특징인 파책(波磔)이 남아 있으며 글자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근래에 출토된 한대의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은 초기의 장초로서 아직 일정한 규범은 정하여지지 않고 있으나, 동한의 장지(張芝)에 이르러 점차 정리되며 위진시대에 이르면 더욱 정비되어 장초의 규범이 이루어진다.
장초의 법첩(法帖:법서)으로는 사유의 ≪급취장≫과 ≪순화각첩 淳化閣帖≫에 실린 장지·황상(皇象)·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며, 근래 돈황(敦煌)·누란(樓蘭)·거연(居延) 등지에서 발견된 한·위진의 목간은 장초의 실물사료로 매우 귀중하다.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血脈)을 이어 창안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동진시대 왕희지(王羲之)·헌지(獻之) 부자에 의하여 금초는 극치를 이루어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금초의 법첩으로는 장지로부터 왕희지·헌지에 이르는 명서가들이 모두 초서에 뛰어나 ≪순화각첩≫ 등의 집첩(集帖)에 많이 실려 있으며, 독첩(獨帖)으로 왕희지의 ≪십칠첩 十七帖≫ 등과, 쌍구본(雙鉤本)으로 왕희지의 ≪상란첩 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 地黃湯帖≫ 등이 다수 전한다.
그 뒤 진수대(陳隋代) 지영(智永)의 ≪천자문 千字文≫, 당 손과정(孫過庭)의 ≪서보 書譜≫가 유명하다. 이 밖에 당의 장욱(張旭)·안진경(顔眞卿)과 송의 황정견·미불, 원(元)의 조맹부(趙孟頫), 명(明)의 동기창(董其昌)·미만종(米萬鍾) 등 역대의 명서가들 중에 금초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광초는 당 장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진시대 이래 왕희지의 전통적인 초서필법에서 벗어나 술이나 자연계의 현상으로부터 정서(흥취)나 영감을 불러일으켜 광사(狂肆)하게, 즉 방종(放縱)한 태도로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당 회소(懷素)가 개성적인 광초서풍을 이루었다. 광초의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과 회소의 ≪자서첩 自言帖≫이 있다.
한편, 금초에 관련된 용어로 독초(獨草)와 연면초(連綿草)가 있다. 전자는 글자마다 필획이 단독으로 떨어진 것을 말하며 후자는 여러 글자의 필획이 서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또, 반초(半草)와 전초(全草)가 있는데, 전자는 행서와 초서 사이 정도로 흘려 쓴 것으로 특히 왕헌지가 이에 뛰어났다고 하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행초(行草)와 혼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상대적으로 모두 초서로 쓴 것을 이른다.
또한, 대초(大草)와 소초(小草)가 있는데, 전자는 자형이 크고 필획이 매우 간단한 것으로 광초에 가깝다고 하겠으며, 후자는 비교적 자형이 작고 필획이 단정하여 알아보기 쉬운 것을 말한다. 이 밖에 유사초(遊絲草)라 하여 필획이 실처럼 가늘고 실테처럼 이어지는 유희적 글씨도 있는데 송 오열(吳說)이 유명하다.
참고로 초서는 필사의 속도, 먹의 활삽(滑澀), 자형의 크기, 필획의 곡직(曲直), 점획의 태세(太細), 짜임의 소밀(疎密) 등의 변화가 오체(五體) 중 가장 심하고 다양하여 작가에 따라 개성이 잘 드러난다. 더욱이, 작품용으로 의식하지 않고 쓴 편지나 문고(文稿)류 등에서 오히려 진면목을 살필 수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는 한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의 서법이 들어왔으나 초서 발달의 초기 과정을 보여 주는 유물은 없다. 이후의 초서 진적은 고려까지 수종에 불과하며, 더욱이 금석문에서는 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까닭에 전하는 예가 없어, 서예사 서술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단지, 삼국 말기부터 고려까지에 걸쳐 행서로 된 금석문 중에서 왕희지풍이 주류를 이루고 그 품격도 높았음을 볼 때 초서도 왕풍(王風)을 근간으로 유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에 유행한 조맹부체 역시 왕희지체를 전형으로 삼은 것이므로 크게는 왕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후 서적(書蹟)이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중기의 초서로 이름난 최흥효(崔興孝)·이용(李瑢)·김구(金絿)·이황(李滉)·황기로(黃耆老)·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도 대략 왕희지풍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흥효와 이용은 조맹부체의 영향이 배어 있으며, 이황은 단아하고 기품 있는 독초를, 황기로는 회소풍을, 양사언은 활달하고 연면성이 강한 초서풍을 각각 이루었다.
후기를 대표하는 윤순(尹淳)은 청아한 미불풍을, 신위(申緯)는 단정한 동기창풍을 이루는 등 다양한 초서가 나타났지만, 저변을 이루는 초서풍은 역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였다.
이후 18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비학(碑學)의 전래로 전서·예서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초서의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감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초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근래에 들어와 한글 교육과 필사도구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한자교육이 점점 퇴보되고 한문을 이해하는 계층이 엷어짐에 따라, 초서는 생활에서 멀어지고 어렵게 느껴졌으며, 단지 예술 분야에서 서예가들의 창작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아울러 상당 부분이 초서로 작성된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인력 또한 격감되어 국학(國學)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에도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

▷ 예서
내용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의 국가통일기에 걸쳐, 그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는 소전[小篆: 진(秦)의 이사(李斯)가 대전(大篆)과 주문(籒文)을 정리하여 놓은 서체]에서 2분(分)은 변하고 8분(分)을 남겨 놓았다 하여 이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하며 또 고예(古隷)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그 명칭과 자체(字體)에 많은 이설이 있는데, 각가(各家)의 저작을 통하여 명칭 및 출처와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서: 진대(晉代) 화가인 위항(衛恒)은 “예서란 전의 빠른 것(隷書 篆之捷也)”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서가 너무 번잡하여 그것을 간첩(簡捷)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또 송대(宋代) 화가인 서개(徐鍇)의 『설문해자』 서(序)에 의하면 진시황 때 사람 정막(程邈)이 대전을 성개(省改)하였다 하므로, 예서는 소전과 동시에 이루어진 가장 빠른 것임을 알 수 있다.
② 고예: 『서경잡기(西京雜記)』에는 두릉(杜陵)의 추호(秋胡)가 상서(尙書)에 능통하며 고예를 잘 썼다고 하고, 고예는 정막이 옥중에서 대전을 변화시켜 만든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고예는 진예(秦隷)와 거의 동종(同種)의 자체이나 후대에 명칭이 달라졌을 뿐이며, 이 자체의 특징은 ‘불위체세(不爲體勢)’라는 점에서 한대의 예식자체(隷識字體), 즉 파책도법(波磔挑法)이 없는 한예(漢隷)가 그것이다.
③ 진예: 오구연(吾丘衍)의 『학고편(學古編)』에 “진예는 체세(體勢)는 갖추지 않았으나 한의 관지(款識)의 전자(篆字)와 가깝다.”고 하였다. ④ 팔분: 한대 채옹(蔡邕)의 딸인 채염(蔡琰), 장회관(張懷瓘)·오구연 등의 설에 의하면, 팔분은 소전 이후이고 한예 이전의 자체라고 하므로, 진예나 고예가 곧 팔분을 말하는 것이다. ⑤ 한예: 후한(後漢) 비각(碑刻)에 파책이 있는 서체를 한예라 한다고 하였다.
⑥ 초예(草隷)·예초(隷草): 진서(晉書) 『신밀전(辛謐傳)』에 “밀(謐)은 학문이 해박하고 글을 잘 하여 초예를 잘 썼으니 당시의 해법(楷法)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또 북위(北魏)의 서예가 왕음(王愔)은 “차중(次仲)이 비로소 파세(波勢)를 띠어 건초(建初) 연간에 예초로 해법을 이루었으니 자방(字方) 팔분으로 말하기를 모범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초예·예초는 일체(一體)의 것으로 예서의 초솔(草率)한 맛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⑦ 해서(楷書): 장회관은 “팔분은 본래 해서를 이름이니, 해서란 법(法)이요, 식(式)이요, 모(模)라.”하였다. ⑧ 진정(眞正): 장회관의 『육체서론(六體書論)』에 “예서는 정막이 만들었으니 자(字)가 모두 진정하여 또한 진서(眞書)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당육전(唐六典)』에 예서는 후세의 해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당대석경(唐代石經) 및 약간의 비갈(碑碣)은 도법(挑法)의 예서로 썼으되 이것을 소위 팔분이라 하였으니 일반으로 말하는 당예(唐隷)이다. 또 당인(唐人)의 전적(典籍)이나 공문(公文)은 자연히 후세에 말하는 당해(唐楷)로 서사(書寫)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서와 팔분 및 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역대 서체의 명칭 변천과 현존하는 역대 서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서는 고예(혹 진예) 및 분예(分隷, 또는 한예)의 2종이다. 고예는 전서의 빠른 것으로 그 체는 방편(方扁)하며 파세(波勢)가 없고 진대(秦代)에 이미 있었으며 서한(西漢) 때에 통용하였다. 분예는 이를 이어서, 즉 고예가 변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결체(結體)는 거의 같으나 파세를 더하여 동한(東漢) 때에 성행하였다.
또 예서의 명칭은 당대(唐代)에 이르도록 연용(沿用)되었으며 그 체화(體畫)가 동한으로부터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점(點)과 탁(啄)과 조(挑)와 적(趯)을 더하여 분예 이후의 주요 서체를 이루었다. 이 체를 당대에는 그대로 예서라 명칭하였으나 현재에는 해서(楷書), 또는 진서(眞書)·정서(正書)라 칭한다.
전서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중국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때 옥리였던 정막이 옥에 종사하는 사무원들의 문서가 번잡한 것을 줄이기 위해 대전을 개선하여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예서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소전과 마찬가지로 진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며, 한대(漢代)에 전서를 대신해 공식문자로 통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예서와 팔분·고예·해서의 명칭이 혼용되고 있으나, 예서는 고예와 분예가 중심이다. 고예, 즉 진예는 전서를 빠르게 쓴 것으로 진대에 시작되어 전한 때 통용되었는데 파책(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며 한대의 관지자체와 유사하다. 분예, 즉 한예는 고예가 변한 것으로 고예의 글자체와 거의 같으나 파책이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후한시대에 완전한 형태가 이루어져 널리 통용되었고, 특히 비각에 많이 사용되었다. 위진시대 이후에는 차츰 파책이 약해지고, 여기에 점(點)·탁(啄)·도(挑)·적(趯)을 더하여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는데 이것을 해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완당 김정희의 독특한 예서와 이광사의 예서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서예

▷ 전서
 한위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 주문,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에 창시된 소전을 말한다. 갑골문은 전기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아주 정밀하다. 금문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방필용절이었고,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원필용전으로 바뀌었다. 춘추시대에는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으며, 전국시대의 글자체는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현존하는 석고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대전은 협의로는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소전의 글자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한위(漢魏)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이다.
협의로는 주문과 소전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갑골문, 금문(金文), 주문, 춘추전국시대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와 진대(秦代)에 창시된 소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광의의 전서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갑골문은 청대(淸代)말인 1899년부터 지금까지 10여 만 편(片), 총 4,600개 정도의 다른 글자가 출토되었고, 현재 식별된 것만도 2,000여 개쯤 된다. 이는 은대(殷代) 후기 270여 년 간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갑골문은 오늘날 볼 수 있는 한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자구조는 단순한 것에서 합성된 복잡한 것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형성자가 많이 나타나고 부호화의 정도가 높다. 이것은 장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것으로 오래 전에 이미 문자가 생겨났음을 설명해준다.
갑골문 계열은 칼을 이용하여 글자를 새겼으며, 붓으로 쓴 것도 있다.
글자의 풍격은 전후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문자는 큰 글자가 많고 글자가 웅장하고 기이하다. 후기에는 작은 글자가 많고 글자의 풍격이 아주 정밀하다. 지금도 그것을 모방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금문을 '종정문'(鐘鼎文)이라 불렀는데, 실제로 은·주(周)·춘추전국시대의 종(鐘)·정(鼎)·준(尊)·작(爵)·병기·전폐 등의 청동기 위에 새긴 모든 글자를 포함한다. 그 서법의 풍격은 은대에서 서주 초기까지는 갑골문과 비슷하여 붓을 각지게 하여 꺾어쓰는 필체인 방필용절(方筆用折)이었으며, 대우정(大盂鼎)이 대표적이다.
서주 중엽 이후 동주 초기에는 붓을 둥글게 하여 돌려쓰는 필체인 원필용전(圓筆用轉)으로 바뀌었으며, 산씨반(散氏盤)과 모공정(毛公鼎)이 대표적이다. 그 후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붓을 사용하게 되어 글자체가 점차로 가늘면서도 힘이 있었다. 제(齊)나라의 중강박(仲姜鎛)이 대표적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시대가 혼란하여 금문(金文) 자체(字體)도 혼란스럽고 기이하게 변하여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대문자는 이때에 이르러 분열현상을 보인다.
은·주 시대의 금문서법은 청대 중엽 이래로 모사하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저명한 사람으로는 장정제(張廷濟)·오대징(吳大澂)·이서청(李瑞淸) 등이 있다. 이서청은 "석고문에서 팔분체를 습득하고, 금문에서 전서를 습득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친 붓을 사용하여 힘차면서도 변화가 있어 독특한 풍격을 이루었다.
주문은 '주서' 또는 '대전'이라고도 하는데, 〈사주편 史籒篇〉에 기록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주나라 선왕(宣王) 때 태사(太史) 주(籒)가 편찬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주 왕실이 동쪽으로 천도한 후 진이 주 땅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에서 통용되었다. 현존하는 석고문이 바로 이 글자체의 대표적인 것이다. 최초의 석고는 현재 베이징 구궁 박물관[北京故宮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문자이며, 역대로 그 서법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되어왔다.
근대의 서화가 우창숴[吳昌碩]가 이 글자체에 가장 정통했는데, 웅건·소박하면서도 다채롭고 기백이 웅대한 풍격을 이루었다. 대전 역시 광의와 협의의 2가지 뜻이 있다. 협의로는 단지 주문만을 가리키고, 광의로는 앞서 말한 갑골문·금문·주문과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서 통용되던 문자를 두루 가리킨다.
소전은 대전에 대립되는 호칭으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한다. 이는 주문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승상 이사(李斯) 등이 진나라 문자를 기초로 하여 표준글자체로 전국문자를 통일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전이었다. 이사는 각 지역의 이체자를 모두 추려내어 한자의 규범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소전의 형체는 둥글고 가지런하다. 이사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낭아대각석 琅玡臺刻石〉·〈태산각석 泰山刻石〉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역대로 소전서법 예술의 최고 본보기로 여겨진다.
한·위 이후 예서·팔분체가 성행한 이래 예서와 팔분체의 서법으로 소전을 쓴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삼국시대 오(吳)의 〈천발신참비 天發神讖碑〉이다. 북조와 초당(初唐)의 비석머리에도 역시 소전을 팔분체와 같은 체제로 많이 썼다. 성당(盛唐)에 이르러 이양빙(李陽氷)이 나와 팔분체의 기세를 모두 없애고, 이사를 종(宗)으로 삼았다.
이후 1,000여 년 간 소전서법의 명가로 대개 이들 두 이가(李家:이사와 이양빙)를 꼽는다. 청대 중·말기 등석여(鄧石如)·윤병수(尹秉綬)·조지겸(趙之謙) 등이 측필로봉(側筆露鋒)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풍격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국의 전서체 예로는 단군시대의 옛 비로 전하는 구월산의 고전비(古篆碑),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비의 전액(篆額)인 당해동진감선사지비(唐海東眞鑑禪師之碑)의 9자 등이 있다. 또 조선 중기의 허목(許穆)은 초전의 특색을 살린 독특한 전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예
내용
‘篆’은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 書斷≫ 권상에 “전(篆)이라는 것은 전(傳)으로 물리(物理)를 전하는 것이니 베풀되 다함이 없다(施之無窮).”고 하였다. 곽말약(郭沫若)은 ≪고대문자의 변증적 발전 古代文字之辨證的發展≫에서 “전(篆)은 연(掾)으로 연은 아전[吏]이니 한대(漢代) 관제(官制)에 문서(文書)를 맡은 하리(下吏)를 연속(掾屬)·연사(掾史)하여 전서는 실상 연서(掾書) 곧 관서(官書)”라고 하였다.
전서는 넓은 뜻으로는 예서(隷書) 이전에 있는 서체로 갑골문(甲骨文)·금문(金文)·석고문(石鼓文)·육국고문(六國古文)·소전(小篆)·무전(繆篆)·첩전(疊篆)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좁은 뜻으로는 대전(大篆)과 소전이 주축이 된다. 전서의 변체(變體)는 지극히 많아 수서(殳書)·각복(刻符) 등 통칭하여 잡체전(雜體篆)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전서를 창힐(蒼頡)이 만들었다고 하나, 당나라 위속(韋續)은 묵수(墨藪)에 ≪오십칠종서 五十七種書≫를 들고 “황제(黃帝)의 사관(史官) 창힐이 새의 발자취[鳥跡]를 그려서 문자를 삼아 전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믿기 어렵다.
주선왕(周宣王) 태사(太史) 주(籒)가 ≪사주편 史籒篇≫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을 ‘대전’이라고 하였다. 그 뒤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문자는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고, 진(秦)나라의 정승 이사(李斯)가 하나로 통일한 것을 ‘소전’이라고 한대에 일컫게 되었다.
≪설문 說文≫에 의하면 전은 인서(引書)로, 인서란 붓을 당겨서 죽백(竹帛:책, 특히 史書)에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이사가 통일한 서체를 전서라고 칭한다는 것이다. 전서를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갑골문:은(殷)·주(周)시대에 구갑(龜甲)과 수골(獸骨)에 새겨진 문자를 일컬어 구갑수골문자라 한다. 약칭 갑골문·구갑문·복사(卜辭)·정복문자(貞卜文字)·계문(契文)·은계(殷契) 등으로도 부른다. 은·주시대에는 미신을 숭상하여 제사·정벌·질병·전렵(田獵)·기상·출입·연사(年事) 등 어느 하나 점쳐서 길흉을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점을 친 다음 갑골 위에 복사와 점복에 관한 일을 새겼다. 이들은 은·상시대를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한 문헌이며 또 한자의 가장 오래된 실증이다.
② 대전:한자 고대 서체의 하나로 그 명칭은 한대에 처음 볼 수 있으니 소전의 대칭이다. 넓게는 소전 이전의 문자와 서체로서 갑골문·종정문(鐘鼎文)·주문(籒文) 및 육국문자(六國文字) 등이 모두 이에 속한다. 좁게는 주선왕 태사 주가 정리한 문자인 주문이다.
③ 주문:주대문자(周代文字)로 일반은 대전으로 알기도 하고, 또 대전과 같지 않다 하여 ‘주전’·‘기자(奇字)’로 보기도 한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 서(敍)에서는 “선왕 태사 주가 대전 15편을 저술하니 혹 고문(古文)과 다르다. ”하고 주는 인명으로 그의 성은 모른다고 하였다. 또, 주전·주서(籒書)·사서(史書)·고주(古籒)라고도 한다.
④ 금문(金文):은·주시대의 청동기(靑銅器) 위의 명문(銘文)의 통칭으로 종정문·길금문(吉金文)·관지문(款識文)이라고도 일컫는다. 대전 계통에 속하여 소전 이전의 대부분 전서 형체를 포괄하고 있어서 고대서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실물자료이다. 청동기는 상대(商代)에 기원하여 서주시대(西周時代)에 성행하였다. 금문의 내용은 당시 사전(祀典)·석명(錫命)·전렵·정벌·계약 등의 기록과 조기원인(造器原因)을 새겼기 때문에 상고사회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⑤ 초전(草篆):초솔(草率)하고 빨리 쓰는 전서라 하여 초전이라 한다. 결구(結構)에 생략하고 간편하게 하여 필획(筆劃)이 때로는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청나라의 완원(阮元)은 <적고재종정이기관지 積古齋鐘鼎彛器款識>·<을해정명 乙亥鼎銘>에 대하여 “초평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王九月乙亥’ 및 ‘乃吉金用作寶尊鼎用孝享’ 등의 자(字)이고 그 나머지는 다 알 수 없음은 모두 멋대로 간략하고 덜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청나라의 엄가균(嚴可均)은 ≪설문익 說文翼≫ 서(序)에서 “초서는 그 근원을 고주(古籒)에 두어 전(篆) 같기도 하고 예(隷) 같아서 고기문(古器文)의 서로 이어지고 뒤엉킨[聯綿糾結]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⑥ 고전(古篆):고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고대전서로 청나라의 계복(桂馥)은 ≪속삼십오거 續三十五擧≫에서 “宋人間用古篆作印, 元人尤多變態”라 하여 변태적인 전서를 말하였고, 또 하나는 고문자(古文字)를 가리켰으니 명나라의 조환광(趙宦光)은 ≪한산추담 寒山帚談≫에서 구체서(九體書)를 논하되 “二日古篆, 三代之書, 見於金石款識”라 하였다.
⑦ 고문(古文):고문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문자학적 각도로 볼 때 갑골문·종정문·석고문·고도문(古匋文)·고천문(古泉文)과 소전이 모두 고문 계통이고, 진한(秦漢) 이후의 예(隷)·해(楷)는 금문(今文)계통으로 상대하여 일컫는다. 둘째, 은·주 혹은 그보다 이전의 문자로 송의 곽충서(郭忠恕)는 ≪한간 汗簡≫에서 “鳥跡科斗, 通謂古文”이라 하였고 원(元)의 정표(鄭杓)는 ≪서요편 書要篇≫에서 “自伏羲命子襄作六書, 而黃帝後命倉頡製文字 下及唐虞三代, 通謂之古文”이라 하였다.
셋째, 오로지 만주(晩周)·육국(六國)에서 쓰던 문자로, 곧 왕국유(王國維)가 말하는 “허신의 ≪설문해자≫에 나오는 고문은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로 그 체(體)는 주문 소전과 같지 않아 육국유기(六國遺器) 또한 그러하다. 벽중고문(壁中古文)은 주진간(周秦間) 동토(東土)의 무자라.” 하였다.
⑧ 소전:전서의 하나로 ‘대전’과 대칭하는 것으로 ‘진전(秦篆)’이라 일컬으니 진시황(秦始皇)이 천하를 통일하고서 이사에게 명하여 만든 것이다. ≪설문해자≫ 서에 “진문(秦文)과 맞지 않은 것은 모두 없애고 이사는 ≪창힐편 蒼頡篇≫, 조고(趙高)는 ≪원력편 爰歷篇≫, 호무경(胡母敬)은 ≪박학편 博學篇≫을 지어 사주(史籒)의 대전을 고쳐서 소전이라 일컬었다.”고 하였다.
소전의 필획은 둥글고 굴려서 유창하며 대전에 비하여 정제하며, 진(秦)의 각석(刻石)으로 <태산 泰山>·<역산 嶧山>·<낭야대 琅捓臺> 등은 이사가 썼다고 전하며 소전의 대표작이다. 소전으로 획이 약간 굵으면 옥저전[玉筯篆(箸)]이라 하고 가는 것을 철선전(鐵線篆)이라고 한다.
⑨ 한전(漢篆):한대(漢代)의 전서로 체격(體格)이 방형(方形)에 가깝고 필법은 예(隷)에 가깝다. 비(碑)와 같이 장중할 때와 청동기 등에 사용하고 있다. 비에는 전액(篆額)으로, 또 청동기에는 경명(鏡銘)에 주로 썼다. ⑩ 당전(唐篆):당대(唐代)의 서가(書家)들이 쓴 전서로 대전과 소전을 많이 썼으며 이양빙(李陽冰)이 그 대표적이다.
⑪ 동방전(東方篆):동방 곧 고조선으로부터 신라·고려·조선에 걸쳐 그 유적을 살펴보면,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 단군시대의 고비(古碑)로 전하는 고전비(古篆碑)가 중국에서 창힐의 필적으로 전하는 것과 같아서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필적과 동류의 것으로는 남해(南海)에 있는 각석문자(刻石文字)와도 일맥상통하고 있어 주목된다.
신라전(新羅篆)으로는 <신라태종무열왕릉비>가 있어 오(吳)나라의 <천발신참비 天發神讖碑>의 전과 비슷하게 예봉필법(銳鋒筆法)으로 정방형의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또 최치원(崔致遠)의 필적인 <진감선사비 眞鑑禪師碑>의 전액(篆額)인 <당해동진감선사지비 唐海東眞鑑禪師之碑>의 9자는 예봉필법으로 초전의 맛이 짙어 당시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통일신라기와 고려 및 조선에 걸쳐서는 모두 소전으로 썼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중엽의 허목(許穆)의 전서는 초전의 특색을 살렸으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기형의 전서를 써서 알아볼 수 없는 자가 많다. 조선 순조 때의 학자 홍길주(洪吉周)는 ≪동문십이가소제 東文十二家小題≫에서 “허목은 결정파대(缺鼎破敦)와 같아서 억지로 은주(殷周)의 고기(古器)라 하나 어리석으면서 기괴함을 좋아하였으니 광혹(誑惑)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풍은 간혹 있어 온 일이라 하겠으나 지나친 경향으로 애써 꾸미는 일은 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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