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족구소설] 아내와 족구를(연재1)

작성자저ㄴ◐ㅠ처ㄹ|작성시간07.11.07|조회수819 목록 댓글 7

[족구소설]  

아내와 족구를


전유철(소설가 ․ 평택잔다리족구회장)


“참, 경치가 좋네요.”

아내가 족구장 주변을 둘러보며 한 마디 하자, 내 마음도 흡족했다. 아내에게 즐거운 시간과 장소를 물색해 주었다는 남편으로서의 알량한 만족감이었다.

초겨울로 들어선 족구장 주변은 아파트 단지 사이로 함초롬히 들어선 햇볕으로 오히려 따듯했다. 아파트 북쪽으로 테니스장이 있고, 그 옆에 농구장과 족구장이 함께 위치해 있다. 족구장 두 개가 설치되어 있는 넉넉한 공간에 사방은 단풍나무들로 늘어서 있다. 곱게 단풍으로 변해가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아내가 경관이 좋다고, 한 마디 꺼낸 것이다.

“자, 소풍 나온 게 아니니까, 일단은 네트부터 치자고!”

한껏 달뜬 음색으로 소리치며, 나는 가지고 간 네트를 풀었다. 아내가 한쪽 네트 끝줄을 잡고 반대편 지주대로 끌고 가서 동여맨다. 묶는 솜씨가 제법이다. 네트 상단 끈을 매고 보조 끈을 맬 때 아내가 소리쳤다.

“너무 높아요! 보조 끈을 더 당겨요! 여자족구 규격으로 하자고요.”

“여자족구? 높이가 얼만데?”

어라, 제법인데. 생각하며 아내의 반응을 살핀다.

“여자는 90cm요.”

“그럼, 남자는?”

“1m에서 1m 10cm 사이요!”

“...... ”

아내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이론에는 강하다.

“조금 더 당겨 매세요.”

아내가 보조 끈을 먼저 매고 내 편으로 와서 거든다.

“이렇게? 너무 낮은 거 같은데......”

그러자, 아내는 가방을 뒤져 줄자를 꺼내더니 높이를 재며 자, 정확하잖아요, 한다.

“헉, 줄자까지 준비했어?”

“그럼요. 규정대로 하자고요. 이 족구장은 너무 넓어요. 좀 줄여야겠어요.”

아내가 줄자를 잡고 길이를 잴 태세다. 족구장을 뜯어고치겠다는 거야, 뭐야. 1대 1로 하는 건데 대충하면 안 되나? 나는 안면을 구기고 속으로 투덜투덜 궁시렁 대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족구장 규격이 얼만데?”

“몰라서 묻는 거예요, 아는가 묻는 거예요? 사이드라인 7m, 엔드라인 6m요!”

아내의 말에 뜨끔하여 아무 말 못하고 있는데, 아내가 지주대를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사이드라인에서 이 지주대까지 얼마나 떨어져야 하는지 알아요?”

“그런 규정도 있었어?”

내가 머쓱하게 묻자,

“지주대는 좌우 사이드라인에서 1m, 안테나는 21㎝ 떨어져야 해요!”

아내는 초등학생에게 설명하듯이 말한다. 나는, 그래? 하며 수긍하였지만 속으로, 이론만 강하면 뭐해, 실제 족구를 잘 해야지. 잠시 후에 두고 보자고! 생각하며 줄자 끝을 잡고 센터라인에 대었다. 엔드라인과 사이드라인을 재고, 표식대로 금을 다시 긋자 전보다 상당히 좁아보였다.

“자, 게임하자고!”

나는 구겨진 자존심을 진짜 실력으로 만회할 요량으로 아내에게 다시 채근한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기네 족구회원들은 게임할 때 스트레칭도 안 하고 해요?”

“스트레칭? 어, 하지. 그래, 하자고.......”

아내에게 또 한방 얻어맞았다. 자존심이 억수로 상하고 마침내 문드러진다.

‘족구회원까지 들먹이며 물을 먹이다니. 게임할 때 두고 보자......’

마음의 주먹을 쥐어보지만, 상대방 킬러에게 거듭 발날 페인팅을 먹은 것처럼 벌레 반 마리쯤 씹은 심정이다.

아내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단풍나무 아래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아내와 좀 떨어진 거리에서 몸을 풀며 아내의 행동을 바람만바람만 쳐다보았다.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내의 몸매가 제법 볼만 했다. 아직도 처녀 때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내가 출근한 후 아침마다 천변(川邊)를 따라 걷기와 조깅을 한다더니 효과가 있어 보였다. 아내는 정말 실전을 앞둔 선수처럼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몸을 풀고 있다.

암풀 동작부터 엘 보플, 사이드, 트라이앵글, 힐 터치 백 스트레칭 등을 차례로 하고 있지 않은가. 스트래들 스트레칭 동작에서는 육감적인 포즈로 보인다. (남편들이여, 아내도 좀 떨어진 곳에서 보면 다른 여자처럼 감흥이 돋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스트레칭에 관해선 나도 알만큼은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아내는 아주 자연스럽게 몸을 풀고 있다.

십여 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그만 하고, 이제 게임하자고.”

“자기는 스트레칭도 제대로 하지 않고 게임만 하자고 하네요. 스트레칭은 첫째, 무리를 하지 말 것. 둘째, 탄력이나 반동을 주지 말 것. 셋째 호흡을 멈추지 말고 느긋한 기분으로 할 것 등입니당~. 서둘지 말고 땀이 날 때까지 하세용!”

똥마려운 개처럼 조바심이 나던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닭 쫓던 개가 되어 지랄같이 푸른 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래, 조바심 할 필요가 없지. 침착하고, 느긋해야지.’

자신에게 마인드 컨트롤을 걸며, 띄움이 좋지 않은 공을 상대방 코트로 곱게 넘겨주며 다음 기회를 보는 킬러처럼 나는 다시 참을 수밖에 없다.

스트레칭이 끝나면 아내가 곧 게임을 하자고 할 줄 알았던 나의 기대는 금세 기우가 되어버렸다. 아내는 내 앞으로 족구공을 던져주며 랠리 연습을 하자고 한다. 내가 뜬금없는 표정을 짓자 아내는, 그럼 연습도 안 하고 게임을 해요? 한다.

‘그래. 하자는 대로 해주자. 게임에서 이기기만 하면 다 좋은 거니까.’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고 말한 세계적인 바람둥이 ‘섹스피어’까지 떠올리며 참기로 마음먹었다. 더 서둘다가는, 자기는 잠자리처럼 매사 서둘기만 하다가 제풀에 무너지는 게 탈이에요! 라는 말까지 듣지 않으려면 말이다.

내가 차주는 대로 몇 번 공을 주고받는 아내의 폼이 제법인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연습을 했지? 방문 앞에 매달아놓은 스타 연습공으로만 이런 실력을 키울 수 있나? 얼마나 연습을 했기에 이 정도야? 어떻게 된 거지?’

아내에게 공을 차주는 나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뱀들의 거시기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아내는 족(足)으로 진지하게 연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만 연습을 하고 있는 꼴이었다. 게임 약속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설핏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늘 아내와의 족구게임은 보름 전쯤부터 선약이 되어 있었던 터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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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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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_그리고_너 | 작성시간 07.11.13 울들이 매번 하는 족구가 이렇게 소설로 표현되다니 놀랍습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 작성자방글이건태 | 작성시간 08.08.09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스크랩 해갈게요^^
  • 작성자막시무스 | 작성시간 10.02.09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광진연합회에서 도움받습니다.
  • 작성자무시라 | 작성시간 11.04.19 좋은글 감사합니다~~퍼갈께용
  • 작성자낼은주전 | 작성시간 13.09.11 재미난글 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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