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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토순례]난중일기에 5번이나 등장하는 순무어사 `약봉 서성`과 고성이씨 모친의 발복, 안동 망호리 소호헌(보물 475호)현판 자료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미산고택)|작성시간16.01.19|조회수564 목록 댓글 6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중에 순무어사 '약봉 서성'이 있다.5번 이상  등장하는 것 같다.

 

이배사(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에 난중일기를 연재하는 분들이 참으로 노고가 많다.그래서 몇번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해를 돕고자감히 자료하나를 올려봅니다.

 

 '약봉 서성' 선생이 태어난 '소호헌(보물 475호)'을  필자가 전에 답사를 한번 하였기로 관련자료를 올려본다.미흡한   부분이 잇더라도 해량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씨 부인의 발복>

 

안동의 '임청각' 주인인 이명님이 5째아들 이고를 분가시키기위해 지은집의 별정이 소호헌이다.이고가 아들이 없자 눈먼 따님에게 장가온 서해선생에게 상속됐는데 아깝게 23세에 요절하였다.

 

그러자 가문에 안좋은 일이 있는 것은 조상의 묘를 잘못썼다고 이해했고...이씨부인은 가산을 정리하여 어린 서성(호가 약봉 1558~1631)을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가서 약현성당부지터에 집터를 잡고서 아들을 기호학파의 영수인 이율곡 선생께 보내어 공부시켰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떡을 만들어서 팔았는데...그것이 '약과'이며 '약식'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아마도 조선시대자식을 과외시킨 최초의 모성이 바로 이씨부인이 아닌가 합니다.

 

이씨부인이 파주로 시조부모의 묘를 천장(묘이장)을 한이후 아들인 약봉 서성이 80여세의 장수(1558~1631)를 하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후손중 문과합격자 105명에 정승9명,대제학 6명,당상관 28명,종2품이상 15명이라는 엄청난 발복을 받았다.그리하여   3대가 영의정을 하고...3대가 대제학(조선조 유일한 가문)을 지낸 명문가로 거듭낫다고 한다...세간에서는 이를 ‘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다.

약봉은 6도관찰사를 두루 지냈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직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예천출신 '약포 정탁'도 5조 판서를 하셨는데 이조판서는 3번이나 하셨죠).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직계 후손들이 이룬 ‘업적’에 있다. 한 가문에서 정승 한 명도 나기 힘든데 무려 9명이나 배출했던 것이다.

소호헌은 마을 이름에서 취한 당호로 고려말 소시랑(蘇侍郞)이 주거하였고 앞에 호수가있어 소호라 부르게되었다.약봉 선생은 율곡이이와 귀봉 송익필 선생의 문인으로 대구 귀암서원에 부친과 함께 제향되었고 묘소는 경기도 포천에있다.약봉서성 후손들은 안동김씨중의 장동김씨처럼 노론을 한 분들도 있고... 소론을 한 후손들도 있다...

 

대다수 영남의 남인선비들은 출세에 지장을 받고 과거시험도 통과 못하고....과거에 합격해도 정승이나오질 못했다...약 200년간....소설가 이문열선생의 14대조가 유명한 정부인 장씨의 남편인 석계 이시명 선생이고 아들이 영의정에 추증된 '갈암 이현일' 1627(인조 5)∼1704(숙종 30)인데....갈암의 조카항렬(족친)이 30여명 되지만 한사람도 문과급제를 못 했다.그러나 약봉서성선생이 80세생신때 족친들중 과거급제자가 13명이었고...현직에 9명이나 있엇다...200년간 산림에 은거하며 벼슬을 못한,또는 안한 선비들(영남 남인들)이 제사때 바로 조상님들을 '처사(處士)**부군신위'하며 지문을 쓰고 위패를 모시는데 바로 이런 이유다...처사란 산림(향리)에 은거한 사람을 일컫는다...퇴계이황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남명조식선생은 묘비명에 '처사라고 써달라'고 했다한다...

[

 

 

 

<안동소호헌편액(현판)은 서명유서>안동 가볼만한곳 추천

 

소호헌편액을누가 썼는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없군요...소호헌편액은 누구글씨지??

 

2일동안 여기저기 통화를 연결해서 사람을 소개받고 다시 다른분을 소개받고 해서 드디어 찾았습니다.안동일직면사무소도 모르고 있군요...그러니 안동문화원이나 안동시청에서도 모르고 있는 사항...후...답답합니다..

 

안동 소호헌편액을 쓰신 분은 입향조인 유안당 서명양공의 4촌되는 형조좌랑 서명유(徐命維)선생이시군요....조기 제일밑에 흘려쓴 한자를 보니  같군요...ㅎㅎ

 

<첨추공파와 소호헌>

서해의 아들 약봉서성선생이 유배를 다닐때 영해(현재의 경북 영덕)에 오신적이 있다..이때 셋째아들 첨추공(첨추공파조)이  수행을 했는데,중간중간  소호헌에 와서 지내셨다고 한다..병자호란 직후까지 소호헌에 계시다가 병자호란뒤에 아버지인 서성선생이 돌아가시자 한양에 가서 장례를 지냈고, 다시 소호헌으로 돌아와서 지냇지만, 서울사는 친족들이 자꾸 서울로 오라는 말을 듣고 억지로 서울을 향해가다가 물좋고 공기좋은 충주에 머물게 되엇는데 여기서 졸(拙)하셨다고 한다.

 

그뒤 5대(代)약 150년간 소호헌은 비워있었고....현재 첨추공파종회장님이신 서영석선생님의 8대조인 유안당 서명양공께서 망호리 소호헌으로 낙향을 하셨는데 이때 형조좌랑을 하시는 4촌지간인 서명유라는 분이 쓴 편액을 걸게 된것이다.

 

 

알아볼려고 한게 2일이 걸렷고...수고로움도 있엇지만....소호헌 내력을 알게되어 퍽 다행이군요...

 

안동소호헌을 가는 분들은 안동관광과로 전화해서 해설사분을 연결하시면 됩니다.아니면 경비아저씨한테 자료만 받아가도 됩니다

 

 

 

 

 

 

건물은 높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하고 있다. 주춧돌 위의 기둥은 귀틀을 짜돌리고 그 위에 세운 모습이어서, 전북 장수향교(長水鄕校) 명륜당(明倫堂)의 그것과 비슷하다.

 

 

 

 

 

 

 

약봉태실 현판이다.

자 ...들리는 말에는 저기에 신혼방을 꾸미고 해산하면  후손중에 고관대작으로 출세하는 인물이 태어날 발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찾아 가는길:남안동IC에서 내리면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집터가 있다.조탑동 5층전탑이 근처에 있고,일직면사무소를 지나서 100m 가면 망호리에 소호헌이 있고 마을 건너편에 퇴계 이황 선생의 적통을 이어 받은 대산 이상정 선생의 종택이 있다.대산종택을 보고 좀더 들어가면  귀미리가 있는데..구한말 을미의병때 2대 안동의병장을 하신 척암 김도화 선생이 사시던 곳이고,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사가 있다.

 

안동...알고 가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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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미산고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20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꾸벅
  • 작성자심이(조경아) | 작성시간 16.01.20 소호헌... 잘 메모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
    한가지 또 배우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미산고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20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이버-'개털기사'를 검색해서 제 '블로그에서 다섯번째 공지'를 한번 읽어 보세요....안동이나 경북 북부지방 여행갈 때 한번 읽어 보고 가면 참 좋습니다.
  • 작성자솔용자 | 작성시간 16.01.21 약봉 선생의 포천 유택도, 참 좋은 길지의 명당이지요. 평지맥에 그림같은 안대가 더욱 아름답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미산고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22 명당이라는데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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