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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국토순례]백범을 도운 사람들-강화도 진사 주윤호 2편(장화리 낙조를 보다)

작성자범털과개털(박갑로,미산고택)|작성시간16.02.07|조회수236 목록 댓글 0

 

 

2016.2.2 경북 예천을 출발하여 강화도를 갈려고, 지하철 2호선 신촌역 1번출구를 나와서  200m를 직진하여 강화도행 3000번 좌석버스를 탄다.

 

강화도를 가는 이유는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주윤호 진사 생가를 답사할려고 하는 목적이다.산들카페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순례자님과 사전연락을 하였고, 안내를 해주시기로 하였다.순례자님은 강화도 나들길을 처음 만든 분중의 한사람으로서 강화도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신촌역에서 200m만 오면 항미소외과가 있는데 바로 그 앞이 버스타는 곳이다.

 

고 

 

강화터미널을 도착하니 순례자(박존엽)님이 마중을 나오셨다.순례자님이 택시를 불렀고 장화리를 가는 도중에 이건창 선생 묘소를 들렀다.

 

이건창 선생은 병인양요때 순국하신 충정공 이시원 선생의 손자로서 1852년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나셨으며,호는 영재,당호는 명미당(明美堂)으로 1867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쳤으며,24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거쳐서 예문관제학등을 역임하셨다.갑오변혁이 있자 반대하여 관직을 버렸고 1898년  47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한말의 지사인 매천 황현 선생과는 지기로서 우정을 나눈 분이시다.

 

매천 황현,이건창,김택영등이 한말의 3대문장가인데,영남인사로는 곽종석과 김흥락,장복추 선생의 문인인 조긍섭선생이 교유한 흔적이 있다.

 

이건창은 5대조인 이광명이 당쟁의 피해를 피해서 스승인 하곡 정재두를 따라 강화로 입향한 이후 집안의 가학을 이어 받아서 양명학을 전수받았다고 한다.이건창이 죽을 때 황현을 보고싶어 했고 그 우정에 답한 황현 선생의 제문도 읽어 볼 만한다.

 

시간이 없어서 명미당 현판도 못보고 이건창생가도 못봣지만....다음을 기약해본다.

이건창선생 묘소 뒷편 석모도 방향

 

 

 

건평리 이건창묘에서 동쪽방향 덕정산과 진강산(아래)

 

이건창 선생 묘소

후손들은 선생 사후 만주방면으로 흩어져서 직계후손은 없다고 한다.

 

주윤호 진사댁 근처를 가니 주촌(주씨 집성촌)이란 간판이 보인다.강화나들길 7구간  길목인데 근처에서 식사를 할 곳은 갯벌식당 뿐이다.

 

갯벌식당에서 150m를 마을안으로 들어가면 주윤호 진사 생가인데,인천광역시 학생교육원이 근처에 있길레 들러서 백범 김구선생님이 주촌을 방문한 자료를 알려줄려고 했으나 담당관리자는 "그런 것은 필요없습니다.그런 것은 인천교육청 장학사에게 알려주시면 되구요...여기는 학교의 의뢰를 받아서 체험하는 곳일 뿐입니다"한다.참으로 무식하고도 멍청한 선생들도 다 있다.진취적이고 능동적인,창의성을 발휘하는 교사나 공무원이 없다.그러니 노벨상이 한국인에게 오겠는가?내가 인천교육장을 집으로 쳐들어가야할까?아니면 넥타이를 끌고서 여기를 데려와야 한단 말인가?인천시장을 관사로 쳐들어가야할까?아니면 백범기념관 관장을 넥타이를 끌고서 와야할까?보훈처장과 광복회 회장을 넥타이를 끌고서 와야한단 말인가?강화군수와 강화시민들에게는 어떻게 알려야 하는 것일까?강화군의 상급기관인 인천...인천이 문제로다..

 

대한민국은 아직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저렇게 무관심하고 무사안일한 공무원과 관련단체들이 있어서 말이다.백범을 연구하고 따르는 개인과 관련단체가 많지만, 백범을 도운 사람들을 하나도 자료추적을 안했다.기가 막힌다.

 

잉?뭐라꼬? 백범이 고스톱을 혼자쳤따꼬?

고스톱을 혼자 어떻게 치노?치아라~!!!

학생교육원 바로뒤에 경로당겸 마을회관이 있기에 들어갈려니 마침 동네분이 문을 잠그고 나오시는데 백범 김구선생님이 방문했던 주진사댁을 찾아 왔습니다고 인사를 드리니 백범선생이 '주감찰댁'에 방문했다는 예기를 들엇다며 앞장서 안내를 해주신다.바로 저집이다.행랑채가 있었는데 시멘트건물로 바꾸어 지은 모양이다.집구조가...

 

주윤호 진사 형님이신 주윤창이  감찰(監察,사헌부 종6품직)직을 지내셨다고 한다.현지에서는 동생인 진사 주윤호 보다 형님인 주윤창이란 분이 더 유명하신가 보다.(다음날 후손께서는 감찰이 종3품을 지내셨다고 하는데 자료를 더 확인해봐야할 내용이다)

 

 

 

 

 

집안에 할머니 혼자 계신다고 하여 내일 다시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집터만 확인하고 물러나왔다.

 

주동량(朱東良=주윤창,주윤호 선생의 조부)선생에 대한 효자문.

 

주동량 선생에 대해서 검색해보니 1833(순조33년)강화에 사는 주동량 선생이 기근이 들자 비변사에 재산을 헌납한 자료가 있다 비변사에서 구휼에 앞선 기부자들을 표창하자고 왕(선조)에게 아뢴 내용이다.

 

<강화에 사는 가선대부 주동량(朱東良) 본부에 돈 1천 2백 냥을 바침>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bb_221r_001_04_0140

마을은 윗마을은 옛집터등이 그냥 남아있고,아래마을은 펜션등이 많이 지어졌다.백범 선생이 방문해서 지내고 간 마을로 리모델링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안에 백범일지에 쓰여있듯이 감나무가 많다.그러나 관리를 제대로 안했다.

<주진사의 집은 바닷가에 있어서 동짓달인데도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있고...>(백범일지)

 

장화리 대한 성공회 교회인데 ,신자들에게 백범 김구 선생 예기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안내한 순례자님은 강화도를 왔으면 낙조를 봐야한다고 강조하신다.날씨가 낙조보기 좋은 날씨라며...

저 얼음은 한강과 임진강의 얼음조각들이 한강하류로 흘러와서 바다물에 휩쓸려서 해변에 올라온 것이란다.

 

 

 

 

낙조(落照)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벤취가 있다.

백범께서는 여기를 1주일을 머무르셨다고 한다(다음날 후손의 증언).백범일지에는 몇일간 머물렀다고 씌여져있다.

 

그러면 백범선생께서는 낙조를 몇번 보셨을까?참내 이왕 일지를 쓰실려면 낙조도 몇번 봤다고 쓰시지...그러면 나도 여기 1주일 머무르면서 낙조를 몇번이고 볼 텐데 말이다.저 벤취옆에 '백범선생이 바라본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란 안내판을 세우면 좋겠다.

 

 

 

 

 

 

 

 

날씨는 영하 10도정도

백범 김구 선생님이 보셨을 낙조를 보면서 장화리 그 해변에 내가 섰다.

 

 

 

 

 

장화리 해변에서 보는 철새때...헬리콥터 소리에 놀라서 날아 올랐다.

 

강화나들길 안내자인 순례자님과 함께 갯벌식당에 들러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우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강화읍으로 갔다.

 

김구선생이 김주경을 만나러 왓다가 못만나고 그 동생인 김진경의  집에서 서당훈장을 3달을 했는데 그 서당터를 찾아봤다.서당터는 나중에 허물어졌고,일제강점기때에 편직공장으로 변모했는데 현재는 카페로 운영중이다.카페 내부에 들어가보니 천장이 옛날 모양 그대로였다.

 

뜨거운 쌍화차를 주문했고,그 향기를 마시며 백범 선생이 1900년 3달을 머물며 학동들을 가르치던 장면을 상기해본다.

손에 잡힐듯한 백범의 옷깃...그리고 들릴 듯한 숨소리...아아...왜 그리 빨리 가셨을까!

 

나는 내 개인생각으로 보면 백범의 길은 항상 올곧았다.그러나 딱하나 잘못이 있는데 48년도 남북 제정당연석회의에 참석하여 결과적으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일이 그것이다.

 

 

 

 

 

 

 

필자의 강화도 진사 주윤호 생가를 답사하는데 도움을 주신 산들카페 순례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꾸벅

 

박존엽朴存燁=010-4303-4324 강화나들길 가이드및 해설

 

카페주인이 보는 책들이다.그런데...백범일지가 없다.백범일지를 한번 보시라고 권해드렸다.

독재와 싸운다는 민주당이 낸 책도 보인다.그러나 백범을 도운 사람들 한사람이라도 아는가?관심이라도 있는가?

백범 김구와 심산 김창숙의 스승과 도운 분들중에 성태영,유완무,이천경,이시발,강화의 진사 주윤호를 ...사람들이여... 아는가 모르는가?.백범의 토양과 환경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백범 김구를 찾아서... 상해임정을 찾아서 상해를 간다...

 

마카다 청년백범 공부 다시하라~!!

 

이순신 장군을 있게한 환경을 알아야 역사는 발전한다.이순신을 천거.발탁한 서애 류성룡 대감과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서 옥에 갇혓을 때 목숨걸고 '신구차'라는 상소문으로 목숨을 구했고 그결과  백의종군케한 경북 예천 출신 약포 정탁 대감을 모르고선 이순신을 아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백범을 있게한,도와준 분들이 바로 백범 김구의 환경이고 토양이다.그것을 모르고서 김구를 안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아침 다시 방문하여 찍은 서당터건물인 카페건물

 

<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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