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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인요원 선사의 게송

작성자허굴산|작성시간23.02.14|조회수22 목록 댓글 0

莫掛袈裟便要閑 (막괘가사편요한) 

가사 옷을  걸쳐 입고  한가롭게  살지 마라  

七條中有鐵圍山 (칠조중유철위산) 

칠조 가사 가운데에  철위산(지옥)이  있느니라. 

幾多放逸縱橫者 (기다방일종횡자)

그 얼마나  많은 납자  제 멋대로  방일하다  

失却人身瞬息間 (실각인신순식간) 

사람 몸을  순식간에  바로 잃어  버렸던가?  

:佛印了元 禪師 ( 불인요원 선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삼난(人生三難)

다음과 같습니다.

 

1)첫째는 인신난득(人身難得)이니 사람 몸 얻어서

태어나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냐 하면 눈먼 거북이가 삼천년 만에

한 번씩 바다위로 머리를 내밀 때 마침

바다위에 떠다니는 썩은 나무 구멍에 머리가 끼는

일만큼 어렵고,

또 저 도솔천 상에서 바늘을 던져 사바세계 지상의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에 맞추는 일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금생에 받았으니

자기의 지엽적 삶에 집착하여 시절 따라 피었다 지는

부질없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법문을 듣고

하루속히 영원히 변함없는 자기 근본을 찾아야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히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것입니다.

 

 

 2)둘째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니 부처님 법

만나기가 어렵다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자기의 분별지성(의식)을 바탕으로 유한

상대적 진리(眞理)와 선(善)을 추구하는 세간 법을

따라서 살다보면 태어나서 반드시 죽음으로 가는

생사적(生死的) 자기모순(自己矛盾)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진여자성에 입각한 위없는

불법(佛法)은 본래 생사적(生死的) 절대모순

(絶對矛盾)이 없는

진실여여한 지선(至善)의 최상승법이기 때문에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편벽된 논리가

아니고 세상의 어느 학문과 철학과 종교라 하더라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참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한조각

구름이 일어났다 사라지듯 허망한 것이며

꿈속에서 부질없이 논쟁하다 사라지는 몽중객담

(夢中客談)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평소 자신의 분별지성과 신념이란 것이 잠만

깊이 들어도 전부 없어지고 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자기 몸이 완전히 무너져 흩어져서 죽고난 뒤에

시비선악의 분별과 또 진리라 굳게 믿고 주장하던 깨어

있을 때의 자기 지성과 신념이 과연 어디에 있으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본다면  백년의 세상일이 지난 밤 꿈에 불과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 천하를 자기 눈 아래에 두었던 청나라  3세조 순치황제는 분별의식, 분별지성을 참자기로 인식하며 의지하고 살아가던 허망한 삶의 실답지 못한 도리를 깨닫고 그의 출가 시에 이르기를     

 

未生之前誰是我 (미생지전수시아) 

태어나기  전의 나는  누가 과연 나였으며,   

 

우리 중생들은 허망한 분별지성에 의지한 자기를 참자기로 인식하고 살아가지만 우주와 하나인 전체로서의 진실한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자기였는지 스스로 깜깜하다는 말입니다.

  

我生之後我爲誰 (아생지후아위수)  

내가 생을 받은 뒤엔  내가 과연 누구인가?   

長大成人纔是我 (장대성인재시아)

장대하여  성인되니  짐짓 나로 알았더니   

 

 또한 자기가 태어나서도 자기를 자기로 일관되게 인식하는 분별지성의 자기조차도 성장하여 완전히 철이 나기 전까지는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세간의 공자 같은 성인도 

"겨우 칠십이 되어서야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는 일관된 (분별지성의)자기를 얻었다."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論語>,爲政篇위정편)고 술회 하였던 것입니다. 

 

또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라고 했으니,

데카르트 역시 생각, 분별지성의 나를 진짜 나로

여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저 공자나 데카르트처럼  비로소 분별지성(의식, 망념)으로 일관된 자기를 자기라고 알았다 하더

라도 생각과 의식(분별지성)을 초월한 분별망념이 전혀 없는 진여자성의 무심(無心)한 진짜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合眼朦朧又是誰 (합안몽롱우시수) 

몽롱하게 잠이 들면 그때 다시 누구인가?    

 

 그러면 깊이 잠들어서 천지분간 못하고 분별지성이 끊어진 때는 저 공자나 데카르트처럼 평소의 분별지성으로, 즉 깨어 있을 때 자기라고 확신하던 자기는 어디로 가버리고

깊은 잠 속에서는 과연 누가 자기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송하기를

百年世事三更夢 (백년세사삼경몽)  

백년의 세상 일은  지난밤의  꿈이요  

萬里江山一局棋 (만리강산일국기)

만리의 넓은 강산  한  판의  바둑이네 

 

라고 하여 깨어서 자기라고 믿던 자기와 모든 것이

그저 꿈 속의 환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선문중에 들어가 영원불변의 참자기를 밝히고나서 또 다음과 같이 그 심회를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百年三萬六千日 (백년삼만육천일)

인간 백년 헤아리면  삼만 육천 날 수인데  

不及僧家半日閑 (불급승가반일한) 

자기 밝힌 참선문중  반나절만 못하더라.

           

이와 같은 말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간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린 중국 대국의 황제가

직접 실토한 말이니  추호의 과장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진실로 변함없는 자기를 밝힌 최상승 불법(佛法)은 나고 죽는 허망한 꿈이 본래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한결 같은 진여자성의 마음거울을 여실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기 마음거울은 자나 깨나,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겁토록 어두워짐이 없는 모습이

마치 밝고 고요한 거울이 만상을 다 비추면서도 만상을 다 초월하여 물들지 않듯이

항상 청정한 지혜 광명이 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와 같이 허망한 분별지성을 초월한 참자기

(제6의식과 제8아뢰야식(무의식)을 초월한 자기)는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저 순치황제

처럼  스스로 증득하여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분명한 진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분별지성의 허망한 꿈을 깬 진실여여한 자기를

밝히는 부처님법은 어렵게 사람 몸으로 태어난

중에서도  참으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흔한 돌이나 모래는 어디서나 만나기가 쉬워도 변치 않는 순금은 아무데서나 쉽게 만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할 것입니다.   

 

 

 3)셋째 양사난우(良師難遇)이니 훌륭한 선지식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으로 태어나 추호도 모순 없는 진리인 위대한 불법을 만나서도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어리석게도 영원토록 변함없는 거울 본체는 보지 못하고

거울에 비친 그림자만 붙잡고 집착하여 날마다 시비선악과 이해득실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허공같은 마음을 초월적, 돈수적 수행법이 아닌 점수적 방법(소승관법 등)으로

점차적으로 깨치려 함은 무한대한 허공을 단박에 비상

(飛上)하여 가지 않고 사다리 놓고 한 계단씩 올라가려

헛되이 노력하는 것과 같아서 마침내 귀중한 인생을

허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생사의 근본인 분별지성의 망념을 초월하여 얻을 것이 없이 본래 원만한 자기 마음거울을 보아서 금생에 한 번 뛰어 여래지로  들어갈 수  있는 돈오참선법(頓悟叅禪法)을 깨닫고자 한다면 오직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서, 또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나 출가를 하였으며,

다시 조사와 같은 대선지식의 돈오참선법을 만났더라도 스스로 영원히 변함없는 진여자성의 마음거울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로이 찰라찰라 변하는 그림자만을

따라서 허송세월 한다면 입고 있는 칠조가사 가운데

무간지옥 철위산이 있다는 옛조사의 가르침을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인요원  선사의 이러한 걱정이 부디 기우(杞憂)가 되기를 출가 납자들은

다시 한 번 고인(古人)의 간절한 당부를 뼛속 깊이

새겨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임제선원 조실 법현스님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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