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찬양과 영적 실제 이사야43:21

작성자정성진|작성시간10.01.03|조회수123 목록 댓글 0

찬양과 영적 실제           이사야43:21


19세기에 평범한 광부 출신으로서, 주님께로부터 복음 전도자로 놀랍게 쓰임 받았던 빌리 브래이는, 임종 직전에,

‘나는 결코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 내 주님은, 사망을 이기셨도다. 만일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예수께 영광! 영광! 이라고 외쳐, 무저갱에 울려 펴지게 하겠다. 그러면 늙은 사단은, ‘빌리,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러니 돌아가거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영광을 외치며, 하늘나라로 올라가겠다. 영광!  주님을 찬양하라!‘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배 안에는 설교가 있고, 기도가 있으며, 헌금을 드리는 등의 요소가 있지만, 예배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은, 찬양입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와 경배를 표현하는 찬양이, 바로 예배의 핵심 요소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예배에서, 가장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가 나타나는 시간이 바로, 이 찬양의 시간입니다.  예배는, 주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며, 찬양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중심을, 설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000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자”하고, 교회에 갑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하지만, 아직 설교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아,그렇게 늦지는 않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배를 드리는,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드리는 찬양과 경배의 시간에는, 주님의 임재하심이 있으며, 주님의 응답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양의 시간을 통하여, 주님의 실제와 천국의 한 부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찬양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임하셔서, 각 사람을 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드리며, 사람들은, 미움과 두려움과 근심의 영들이 떠나가며,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심령이 깨끗해지는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을 오래 괴롭히고 있는 문제거리가, 별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며, 주님으로 채워지는,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와 찬양을 통해서 베푸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의 용모, 학벌, 영리함, 재능, 가문에 대하여 자랑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으면, 자신의 친척이나 친구, 심지어 옆집에 사는 사람까지, 자신과 관련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끄집어 내어, 자랑하며 자신을 높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그들은 이러한 자랑들이, 전혀 부질없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점차, 이러한 자랑을 싫어하게 되며, 나중에는 오히려, 자신이 인정받고 높아질수록,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오직, 우리의 자랑거리는 주님뿐이며, 그분만이, 모든 영광을 취하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이 드러나며, 영광을 받을 상황이 되면, 도망가고 싶어 합니다. 사역 중에 기적적으로, 병자를 치유한 바울과 바나바가 많은 사람들의 숭배을 받게 되자, 옷을 찟으며, 두려워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인 것입니다.


찬양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성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을수록,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아름다움과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근원이심을 깨닫게 될 때, 진정으로, 오직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을 드리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우리의 본향에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한없는 찬양을 영원히 올려드리게 됩니다.  그러나 찬양에도, 역시 영적인 실제가 별로 없는, 그 영적 가치와 수준이 낮은 것이, 존재합니다.

찬양에 대해서도, 역시 많은 오류와 오해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찬양에는 주님의 실제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매우 세련되게 말씀을 전하며, 또한 기도도 매끄럽게 잘 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가정이나 사회에서, 인격적인 면이나, 성품, 대인관계 등에서 형편없는 사람으로 지탄받고 있다면, 그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과연, 실제로 주님을 만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역시, 찬양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찬양을 몹시 좋아하고, 또 잘 부르지만, 그의 삶에 그리스도의 향취와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드리고 있는 찬양이, 영적이며, 실제적인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실제가 있는 찬양은,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고, 그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의 영과 마음은, 바뀌고 새롭게 되며, 인격도 삶도, 모든 것이,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가사가 있고, 음정이 있습니다.

찬양 곡의 가사는, 주님이 하신 일을 높이거나, 주님 자신을 높이거나, 주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음정, 그 가사의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적 요소로서, 리듬 및 박자가 포함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음악적 요소입니다. 바로 이 요소 때문에, 찬양과 노래를,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찬양에 소질이 없어’하고 말한다면, 여기서 그가 말하는 찬양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찬양의 음악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나는 음악에, 또는 노래에 소질이 없어’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은, 성도의 기본적 의무이고, 권리인데, 이 부분에 소질이 없다면, 그는 정상적인 신자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적지 않은 이유는, 오늘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찬양을 드리는 것에서, 신앙 표현적인 부분, 영적인 부분보다, 음악적 부분이, 더 강조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잘 하려면, 음악에 소질이 있고, 목소리가 좋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가대가 있다고 합시다. 지휘자는 악보에 따라, 성가대원들을 연습시킵니다.

‘자 먼저 이 찬양을 한번 듣고, 그 분위기를 익혀 봅시다. 자, 이제 대충 파악이 되었나요? 이 부분에서는, 알토가 화음을 넣고, 소프라노 솔로가, 강하지 않고 부드럽게 시작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전체적으로 강하면서도 리드미컬하게 율동적으로 흐름을 타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베이스가 육중하게 바닥을 깔아 주어야 해요. 그래야, 곡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습니다.  잘 알았죠?’

‘자 여기가 혼동되기 쉬운 부분입니다. 박자 조심하구요. 절대 플랫 되면 안 됩니다. 먼저 피아노를 몇 번 들어 보지요. 참 그리고 여기, 소프라노 솔로!, 조심하세요. 박자를 잘 세어야 해요. 정확하게 다섯 박사 반을 쉬고, 들어가야 합니다. 알았죠?  다섯 박자 반, 발바닥으로 바닥을 치면서 세어야 해요. 꼭 잊지 말 것, 다섯 박자 반!’

그러나 지휘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별로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곡은, 주님께 대한 깊은 경외감과, 놀라운 감사의 영이 표현되어진 곡입니다.  이 곡을 부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심령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 열등감이나 죄책감이나, 낙심된 분이 있으면, 먼저 심령 속에, 주님의 평안과 기쁨이 임하도록 같이 기도 드립시다’

‘여러분, 이 찬양은, 성도간의 깊은 교제와 사랑을 감사하며, 드리는 곡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서로 원망하거나 상처를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이 곡을 바르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혹시 최근에, 저에 대해서 불쾌하신 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지휘자와 성가대원들이, 찬양을 준비하면서 같이 기도하고, 찬양 중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충만하도록,/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주님을 제한하고, 방해하는 요소가 제거되도록 기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실제로 성가 연습에서, 바른 영적 상태를 준비하기 위하여 애쓰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현실적으로 그럴 만한 시간도 별로 없으며, 그러한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연습의 시작과 끝에서,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신고식 비슷하게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 교회 성가대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저 ~ 기 다른 교회가 그렇다는 것)

어느 날 어떤 교회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주의 깊게, 이 광경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드디어 성가대의 찬양 순서가 되었는데, 주님은 갑자기 ‘오!’하고 비명을 지르셨습니다. 놀란 천사들이 그 이유를 묻자, 주님은 몹시 속상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저 소프라노 솔로를 하는 자매가, 그만 다섯 박자 반을 쉬어야 하는데, 여섯 박자 반으로, 한 박자 늦어져 버렸구나!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니’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유머일 뿐이지요. 주님은 그런데에 상처를 받으시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발바닥으로 박자를 세다가, 발바닥이 간지러워져서 숫자를 잊어버렸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주님을 모욕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배가 끝난 후, 지휘자에게 혼나게 됩니다.

‘자매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전체 파트가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갔겠지만, 음악적 수준이 있는 사람은, 금방 눈치 채요! 도대체 우리 수준을 얼마나 비웃겠어요?’ 이런 모습은 성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성가대의 찬양이, 주님께 드려지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람들을 위하여, 드려질 수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음악은, 일종의 청중에 접대용과 같은 이미지를, 많이 풍기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성가대원의 높은 음악성, 격조 높은 분위기, 놀랍게 어우러지는 화음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보다, 단순히 음악적 요소에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찬양은, 일반 음악회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배와 찬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아무도 그분께만 드려질 영광을, 가져갈 순 없습니다. 보통의 음악은, 사람과 관객을 위한 것이지만, 교회 음악과 찬양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하게 조직된 음악을 전공한 수준 있는 성가 대원으로 구성된 찬양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화음이나 음악성이나,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고 느끼면서도 이상하게 심령 속에서 허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아멘!’을 외치지만, 이상하게도 속 사람은, 별로 반응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깊은 내면속에서 내적 기름부음과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망이 별로 돋구어 지지가 않습니다. 성악가의 찬송을 들을 때,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소리는 멋지지만, 그 소리를 통해서, 심령에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찬양을 들으면, 별로 음악적 수준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목소리도 제대로 발성된 것이 아니고, 목에서만 악을 씁니다. 세련됨보다는, 거칠음이 많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듣는 가운데, 깊은 속에서, 감동과 기쁨이 물결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음악성으로 드리는 찬양과, 심령으로 드리는 찬양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찬양에 있어서, 음악적 요소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음악적 요소가, 또한 찬양을 가장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음악성, 음악적인 수준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막상 찬양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는, 관심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찬양의 음악적 요소로 인하여, 찬양은 가장 그 본질을, 상실할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정한 찬양은, 음악성과 영성이 균형 잡힌 조화 속에서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과 성향과 취미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낚시를, 어떤 이는 독서를, 어떤 이는 음악을, 좋아하며 즐깁니다. 음악 중에서도 어떤 이는 팝 스타일을, 어떤 이는 감미로운 발라드 풍을, 어떤 이는 트로트 계열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클래식을 선호하는 이들은 대중음악을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보는 경향이 있으며, 대중음악 선호론 자들은, 클래식이 재미가 없고, 딱딱하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음악 자체를 즐기는 성향,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음악을, 선호하는 경향이, 예배 음악과 찬양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이,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변질시키는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즐기기 위하여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부르며, 그것을 찬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음악성이 뛰어나고,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그는 찬양에 열성이게 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하여, 성가대원으로, 특송으로, 많이 봉사하던 한 형제가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께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저는 일생동안, 열심히 주를 위해, 찬양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자, 주님, 제 면류관은 어디에 있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얘, 나는 한 번도 너에게서, 찬양을 들어 본 적이 없단다. 너는, 그저 너 자신의 취미를 즐겼을 뿐이야

우리는 어쩌면, 마지막 날에, 주님께로부터 그렇게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즐겁고 기쁜 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것의 근원은 영적인가? 아니면 육신적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원기왕성한 10대 청소년들을 보면, 빠른 템포의 요란한 댄스뮤직이 곁들인 음악을 좋아합니다. 대학생, 젊은이들의 층인 20, 30대들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발라드 풍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40대 이후의 나이가 든 연령층은, 대체로, 트로트 계열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교회 안의 성가나 복음 송에도, 이러한 성향들이, 많이 적용이 됩니다. 젊은이들은 빠르고, 경쾌한 곡이나, 새로 나온 경배곡을, 중년 이상의 층들은, 주로 찬송가나, 트로트 스타일의 곡들을 즐겨 부릅니다.

이러한 성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기질적인 취향은, 주님보다는 자기 자신의 체질에 속한 것이므로, 자기의 취향이 절대적이며,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찬양의 스타일을 즐기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한 기질적인 즐거움은, 온전한 것이 아니며, 찬양의 중심은, 주님 자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취향을 즐기고, 그것으로만 만족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양을 드리고 있는 자세는, 아닙니다.


찬양은 음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찬양에도 감동이 있지만, 음악에도 감동이 있습니다. 바른 찬양이 아니더라도, 음악은, 그 자체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충격을 주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구장에서, 축구장에서 우리는, 군중들의 응원과 함성의 열기 속에서, 어떤 흥분이나 감동을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응원을 하거나, 데모를 할 때, 그들이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는 것이, 노래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 반복적일 때, 효과가 큽니다.

데모를 할 때,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은 뭔가 강한 힘이, 속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상하게 뭔가 훈훈한 듯한, 감동이 밀려오면서, 최루탄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음악이 가져다주는, 암시적인 일종의 최면 효과입니다. 이처럼 음악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묘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찬양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러한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상관없이, 도취에 빠지고, 감격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수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도취 상태에서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 들어갑니다.  주님이 아닌, 음악이 주는 힘에 도취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찬양을 하는 사람들은, 그 곡을 즐길 뿐, 가사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흥 집회에서는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열심히 부릅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성령이여 강림하사...'를 부릅니다.  뭔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면, 다시 강림하시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들이 찬송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곡조와 분위기에만 신경을 쓸 뿐, 찬양의 메시지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어떤 형제는 '내 평생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을 몹시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는 집회에 가는 것을 몹시 귀찮아하며, 육신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고, 주님을 더 가까이 하는 데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이러한 고백과 찬양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송과 찬송가의 가사,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표현이며, 자신의 신앙적 결단이, 포함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찬송을 함부로 주의 없이, 불러서는 안 됩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도입할 때, 아마 만만하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진실된 마음으로, 찬양과 메시지와 고백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 실제가 있는 찬양의 세계에 가까이 가는 하나의 요소인 것입니다.

진정한 찬양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범사에 감사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은, 심령의 중심으로부터 드려지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의 삶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찬양이 은혜스러우며, 실제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굴복되어야 하며, 살아계시고, 실제이신 주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날, 찬양에 대한 많은 경직된 인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찬양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이를테면, 찬송가는 거룩하며, 예배 음악으로 적당하지만, 복음성가는 수준이 낮으며, 예배 음악에 적당하지 않다는 인식과 같은 것입니다.

찬송가는 북미를 중심으로 하여 100~200년 전의, 그들의 정서에 맞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찬송이 만들어진 과정에는, 주님의 은혜가 있었고, 간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또한 지금 이 시대에,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는 주님의 은총과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필요하며, 맞은 찬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 오직 과거에 백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찬송만이 영적이며, 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찬송가의 내용을 보더라도, 주님께 대한 순수한 경배와 예배로서의 찬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은혜의 경험과 신앙고백, 결단 등에 대한 표현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 이제 주안에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이 찬송은, 구원받은 감동의 표현과 함께, 주님과 계속 이 길을 걷겠다는 신앙고백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주님 자신을 찬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서’

이것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겠다는 작자의 의지가 고백되어진 찬송이지만, 역시 주님 자신을 높이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불리는 복음 성가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름 높여 드립니다.’‘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영원히 다스리네’

찬양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의 은혜, 그분께 대한 찬양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 자신에 대한 경배와 사랑과 찬양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깊은 기도와 예배와 찬양을 통하여, 주님의 지성소에 이르러, 주님의 거룩하심과 주님 자신을 구하는 경배에 속한 찬양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찬송가보다도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존재라면,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분과 우리와의 날마다의 삶이, 지극히 구체적이고, 새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똑같은 찬양과 똑같은 멜리디를 반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형식이 아니라, 생명을 원한다면, 진정한 주님의 기쁨을 원하며, 주님과 새롭고 깊은 관계를 가지기 원한다면, 우리는 계속 새로운 고백과 찬양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새 노래’로 주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영감과 인도 속에서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과 새로운 곡조와 새로운 메시지로,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의 실제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 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임마누엘의 충만한 영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