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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무주 구간 탐사, 세 번째.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19.11.28|조회수152 목록 댓글 0


20191127, 수요일, 흐림, 아침에 이슬비.

 

어제와는 낯을 바꾼 듯이 달라진 날씨. 구름이 잔뜩 끼었고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덜 가신 채, 오늘은 무주팀과 탐사를 나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또 나간다.

 

 

구천동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무주 탐사팀과 만나기로 했다

장수의 장기윤선생과, 정국장-나 두 사람 팀은 거의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차를 내리는데 아직 무주팀은 보이지 않는다. 통화한 즉, 안상기선생 혼자만 나왔는데 조금 더 안쪽 버스 종점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세 사람이 한 차를 타고 버스 종점으로 움직여 안선생과 합류.

종점의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오늘의 작전을 의논.

 

오늘은 이곳 구천동에서 치마재를 넘어 안성면으로 가는 방법이 있는지를 탐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무주의 동북쪽 무풍-설천면에서 남서쪽 안성면으로 넘어가야 무진장을 주유하는 둘레길이 완성되므로 오늘의 이 루트는 꼭 확인되어야 하는 중요한 고비이기도 하다

그 루트의 일부가 지난 번 2차탐사(1120) 때 넘었던 민재고갯길(상조마을~두문동)이었던 것.

 

오늘의 이 경로는 사실 당초부터 애매모호했다. “그렇게 넘어가는 길이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행작가 최상석님이 딱 한 번, “치마재~상조~하조 그렇게 넘어가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뿐, 자신도 그 길을 알지 못하고 몸소 걸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구천동은 말이 구천동이지 골마다 마을이 있어 한 마디로 구천동이 어디다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9천 군데나 있는 골()’이라고 구천동이었던가. (물론 이 말은 고증에 근거한 말은 아니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많은 골들 중 관동마을이라는 곳에서 출발하기로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이 고생의 시작이었던 것.

 

마을 뒤 가파른 경사의 꼬불거리는 밭 사잇길을 따라 차를 몰고 올라가서, 어느 밭 옆 농기계 주차장인 듯한 공터에 차를 두고 걸어서 오르기로 했다. 편의상 이 공터를 출발점으로 보고 이야기를 풀기로 한다. 이곳만 해도 이미 해발 710미터에 달한다.

 

바로 뒷산이 연결되는데 마땅히 고갯길이라 할 만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좁은 길이 잠깐 보이지만 그것은 서너 기()의 묫자리로 인도할 뿐, 치마재 길로 보기 어렵다

시작부터 숨을 헐떡이며 잡목숲을 헤쳐 올라간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기막힌 광경을 만나게 된다.

늙은 느티나무가 어서 오너라하고 떡 버티고 있지 않은가. 느티나무 주위에는 이미 무너져 널부러진 서낭당 돌들이 잔뜩 깔려 있다.

바로 여기가 치마재의 정상이었던 것.

느티나무 주위의 공간은 유현(幽玄)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날씨가 화창했다면 좀더 다른 느낌이었을텐데.

 

싱겁고 허탈하다.

이렇게 금방 잿마루에 도달해버리다니.

출발점에서 거리는 불과 350여 미터, 잿마루의 고도는 753미터이니 경사도가 10퍼센트 정도인 짧은 경로였다.

 

묵은 고갯길은 돼지들의 천국이다. 녀석들이 서낭당 돌무지를 다 흩어놓았을 것이 분명하고, 그런 돌들은 사방에 깔려 낙엽 아래에서 여행자의 발목을 위협한다.

 

내리막길은 좀 더 옛 길의 흔적이 뚜렷했다. 폭도 넓고, 길을 닦느라고 쌓았던 돌 축대도 군데군데 많다. 전주를 세웠던 자리도 보인다

또 한 번 로또에 당첨된 셈이라며 탐사팀 모두가 환호한다.

 

오래 묵은 길답게 낙엽은 푹푹 쌓여 썩어가고 있어 좋은데, 그 아래의 크고 작은 돌들은 위험하고 발목을 접지를까 매우 조심스럽다. 돼지들이 마구 뒤집어 놓은 노면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 육중한 체구로 뛰어다녀서 길이 무너져가는 곳도 많다.

잡목의 가지가 눈을 찌르고, 잡초 줄기가 발목을 붙잡는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당연한 현상이라 하지만, 도중에 고가도로 공사를 하면서 그렇게 되었을 길이 모호해지는 구간에서는 한참씩 헤매야 했다. 두 팀으로 나뉘어 작은 개울의 양쪽을 따라 내려가 보지만 역시 길은 애매

 

상조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높았으나 도무지 찾기 어렵고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빼고는 가팔라서 또 한 번 민재(2)’ 탐사 때의 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한참동안 전진하지 못하고 설왕설래하다가 결국 하조마을 쪽으로 긴 골짜기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시간도 이미 점심을 먹어야 할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출발점에서 2.5킬로미터.

 

사실 출발할 때부터 가는 이슬비로 시작한 날씨도 약간의 장애요인이긴 했다. 이런 날 산 속에서 너무 고생하면 탈진하기 쉽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하조(아랫새재)로 가는 길은 길다. 민가는 거의 없고 그 마을 사람들이 농사짓는 경작지가 있을 뿐. 사람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이 2킬로미터 여의 거리를 시멘트 포장길로 내려간다.

 

하조마을 입구임을 알리는 세 그루 늙은 느티나무가 반기고,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서 고갯길 내려오기는 끝

도착지점 하조마을은 고도가 366미터. 출발지점 719미터보다 무려 4백미터 가까이 낮은 곳이다. , 구천동 일대는 덕유산 자락의 매우 높은 동네라는 것, 오르는 길은 짧고 내려가는 길은 길다는 것. 관동~하조 사이 거리는 총 4.5 킬로미터.

 

안상기 선생이 안성면 명천 인근에 사는 지인에게 연락하여 차로 우리를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차가 올 때까지 하조마을 안을 구경하기로 했다.


마을 안길에서 만난 80(라는, 믿어지지 않는 젊은 얼굴)의 한 할머니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얻어낸다.

구천동 가는 고갯길 이야기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였기에 화제를 그쪽으로 몰고 가면서 물은 즉

방금 걸어 내려온 시멘트 포장길 옆으로 다른 옛길이 있는데 그곳이 새치골, 우리가 걸어온 길은 서낭댕이골(정상에 서낭당이 있었으니 당연하다), 그 재는 지맷재

자신은 구천동 배뱅이(배방마을)에서 시집왔다등등.

 

마을은 컸었다.

차도에 면한 몇 집만이 스키 대여점 등으로 서비스업을 하고 있고 한 발자국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옛 농촌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 어귀에 동그마니 따로 떨어져 있는 가겟집이 있는데 이곳은 틀림없이 주막이었을 터. 농사일로 피곤한 몸을 탁배기 한 사발로 풀곤 하던.

개울가에는 방앗간도 있다. 길보다 낮은 터에 앉은 것은 웬 일일까. 도로포장을 반복해서 노면이 높아진 탓도 있겠으나, 뒤쪽으로 흐르는 개울물을 끌어들여 물방아를 돌렸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하조방앗간간판이 아직 선명하다.

괴목저수지로 수몰되지만 않았더라면 농경지도 훨씬 넓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을에 방앗간이 있지.


마을회관에 들어가니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동네 할머니들이 열댓 명이나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반갑게 맞아들이면서 밥은 이미 다 먹고 없으니 커피나 한 잔씩 드시라고 환대한다.

방은 따뜻했고, ‘환상의 배합을 영국 여왕에게서 인증 받은 커피는 맛있었다.

탐사팀 일행 다섯 명은 할머니 한 그룹씩을 맡아서 앉혀놓고 이야기 듣기 삼매경에 빠져든다. 역시 치마재 넘어 시집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서 그 속에서 길이름을 찾아내려는 목적이 크다.

이 무리가 이 말 하고, 저 무리가 저 말 하고경쟁적으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하느라 목청이 갈수록 커진다.

떡을 해서는 머리에 이고, 아이는 업고, 저 재를 넘어 외가(구천동)에 다녔어. 삼십리 길이나 되는 곳을. 고생을, 고생을, 말도 못 햐.” (삼십 리는 좀 과장이 심한 듯)

넘어가면 구천동 어디로 떨어집니까?”
거그, 배뱅이.”

 

산골살이의 힘듦을 한 평생 머리에 이고 건너온 인생, 할 말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책으로 엮어낸다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 질이 무색한 분량이 될 것이다.

이래서 동네 노인 한 분이 별세하면 박물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소리를 또 하게 된다

채록을 하느라 녹음기를 켜 두었더니 그런 걸 뭐 녹음 하느냐며 가벼운 핀잔.

 

정국장은 원래 마을조사단 단원으로 시골마을을 다니며 이야기 들어내는 재주가 있는데, 이번에도 예외 없이 일행과 차별화를 이루면서 혼자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가더니 조금 다른 이야기를 이것저것 물어 왔다.

옛적에 지맷재 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음식숙박업을 하던 집안의 후손의 이야기라든지.

말풀(말의 먹이가 되는 건초)을 일부러 심어 키우기도 했더란다.

 

김진섭 선생이 우리를 태워주러 마을 앞에 도착했다.

아쉬움 남기고 일어섰다.

 

귀로에는 치마재로(49번 지방도)를 달려 치목터널을 빠져 나가자마자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배뱅이(배방)로 들어선다. 좁고 꼬불거리는 마을 안길을 이리저리 누벼 통과하며 언뜻 본 마을은 작지만 예뻤다.

이곳 역시 리조트지역의 입구답게 레저산업으로 바뀌어 간다. 그 좁은 동네 안쪽에까지 펜션이며 식당 같은 건물이 자꾸만 새로 들어서고 있다.

무주의 관광레저 수입은 갈수록 줄고 있다는데.

 

김진섭 선생은 안성면에 최근에 조성된 귀농귀촌자 집단 주택단지에 들어와 산단다. 일부러 이곳까지 나와 차를 태워 준 것은 참으로 고맙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하려는 일이 공익적이고 훌륭하다며 칭송의 말을 보내왔다.

함께 점심 먹고 오늘의 일정을 완료.

 

 

정리.

 

이 경로는 원래 다니던 길을 복원하는 것이니 무조건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로는,

시종점을 구천동 관동마을이 아닌 배방(배뱅이)마을로 하는 것이 더 쉽겠다. “재를 넘으면 배뱅이로 떨어진다는 하조 할머니들의 일관된 증언은 들었어도 관동마을 운운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뱅이 뒤쪽으로는 지매골이라는 지명이 있고, 경사가 느슨한 골짜기가 있기도 하다. 관동에서는 고갯길의 들머리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배뱅이를 시점으로 하는 고갯길 입구를 찾는 작업은 앞으로 다시 해야 한다.

내리막길(하조마을 쪽에서는 오르막길. 즉 서낭댕이골)의 복원 작업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다.

이 경로가 원래 목적했던 설천면-안성면 사이를 잇는 길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하조~상조~안성면 두문동(또는 안터) 사이를 잇는 경로를 추가로 찾아 연결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하지도 쉽지도 않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사족 : 치마재 이름 이야기

 

치마재는 지금은 馳馬로 쓰지만 1872년 숙종 때 이전의 지도에서는 致馬峙로 표기되어 있다. 致馬는 별 뜻 없이 우리말 소리를 이두식으로 차용해 쓴 것이어서 한자의 뜻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도로(徒勞)에 불과하다. 그런 지명이 하나둘이겠는가. 따라서 현대 지도의 표기인 馳馬를 보고 말 달려 넘던 고개라고 푸는 것도 의미 없다.

 

필자는 한동안 치마(致馬)’가 여성들의 치마저고리의 치마를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한 적도 있는데 이는 다분히 무주에 적상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옛 지도에 적상산은 오래도록 상산(裳山, 치마산)’이라고만 표기되어 왔고, ‘적상산성(赤裳山城)’을 지칭할 때만 을 붙여 표기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적상산과 치마재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치마재=적상산을 넘는 재라고 보기에도 힘들어서 이 추측이 정답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던 중에 오늘 아랫새재 할머니들의 말 속에서 지매를 듣고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현대의 여러 지도에 김해산’(또는 금해산’)이라는 지명도 보이고 치마산이라는 지명까지 어지럽게 보이는데 모두 같은 산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 산은 오늘 우리가 넘었던 치마재(지맷재)가 있는 산이다. 덕유산의 이름에 가려 유명하지 않지만 높이가 860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다. 그리고 그 아래에 지맷골(배뱅이 마을 뒤편)과 지맷재가 있다. 그렇다면 김()해산·치마산 등은 모두 지매’(또는 지마’)산의 이두식 한자표기가 굳은 것일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또 하나의 큰 유사사례가 있어서인데

진안읍 반월리에 지매실이라는 마을이 있어 공식 한자 명칭으로는 금마곡(金馬谷)’이라 하기 때문이다. ‘지매실의 어원을 찾기 위해 오래도록 애써 왔으나 아직껏 풀지 못하고 있더니 오늘 지맷재에서 드디어 실마리를 찾은 셈이 되었다. ‘김해기매로 발음되기 쉽고, ‘기매는 또 소리의 구개음화(口蓋音化)의 영향으로 지매와 통한다. 마치 김제(金堤)징게처럼 말이다.

다만, ‘지마’(또는 지매’)의 뜻은 아직도 모르겠어서 좀 더 천착해 보아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가 훈민정음을 발명하고도 뿌리깊은 사대주의 때문에 수백 년이나 이를 쓰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민간에서 당당히 불리던 우리말 지명(뿐 아니라 인명까지도)을 어거지로 한자로 쓴 것이 공식문서들이다. 뜻으로 바꾸어 쓸 수 없는 것은 소리가 비슷한 한자의 음()을 빌어쓴 것이 이두식 표기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호패나 첩지에 노비의 이름은 子近奴米(작은놈이)’, ‘糞禮(똥녜)’ 등이나, ‘자고개를 尺峙로 쓰는 것 등이 이두식 표기의 예다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사람들의 창의적인 한자 구사법이라 할 수 있는데, 통일된 규칙이 없는 것이 흠이어서 쓰는 사람마다 구구각색인 것이 후대에 혼란을 야기하는 주 원인이 되었다. )

그러므로 지도 제작자에 따라 이 글자를 썼다가 저 글자를 썼다가 하는 지명 변천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문서(지도)에 나온 한자를 곧이곧대로 뜻으로만 해석해서는 엉뚱하게 지명이 왜곡되기 쉽다.


치마산·치마재도 마찬가지다. ‘말을 타고 달려 넘는 재라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한자표기이지만, 그렇다면 말을 안 탄 사람은 넘지 못하는 재라는 것일까? 세상에 그런 배타적이고 값비싼 금수저 고개가 어디 있을까?

하물며 그렇게 엉뚱하게 붙인 한자 지명을 두고 다시 풍수적 해석까지 갖다 얹는 것은 엉뚱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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