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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고원길

무주구간 탐사 - 두번째

작성자최태영|작성시간19.11.22|조회수202 목록 댓글 0


2019년 11월 20일. 수요일.


무진장고원길 무주노선 탐사 두 번 째날.


‘탐사’가 어떤 종류의 일인지 확실히 알게 된 날이다. 역시 걷는길을 ‘만들어내는 일’은 단순히 ‘걷기를 즐기는’ 소비자의 입장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한직업. 걷는길을 창조한 모든 이에게 감사와 존경을.


1. 작전회의 - 노닥노닥사랑방. 이번에도 아침 9시에 모였다. 안상기, 허동일, 나승인, 정병귀, 박희우, 최태영(이상 6명, 무순, 경칭 생략).


(1) 지도.

지도의 위력은 대단하다. 대충 손으로 그린 그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모든 참석자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2) 작전.

여러 사람이 여러 이야기와 의견을 내놓는 것은 분명히 도움 된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많은 의견을 뭉뚱그려 탐사단의 일정을 동선으로 그려내야 하고, 시간·거리는 물론이고 식사시간과 장소 등 부대적 상황까지 염두에 둔 일정을 짠 후에 나서는 것. 

단원 간 역할의 분담까지 할 수 있다면. 유능한 기획자의 자격이다.


2. 탐사


(1) 무주읍 앞섬.

작전대로, 오전 중 짤막한 시간에 다녀올 수 있는 곳으로 앞섬을 택했다.

앞섬과 뒷섬은 무주읍의 북쪽에 위치. 내도리에 속한 두 개의 섬 아닌 섬으로, 심하게 감입곡류(嵌入曲流)하는 금강 상류지역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곳이다. 

섬이 아닌데 섬으로 불리는 동네로는 부남면에 도소(島所, 섬곳)마을 등이 또 있다. 

물이 빙 둘러 흐르므로 육로로 출타할 수 있는 통로는 한 군데 뿐이고 그나마 강물이 불어 그곳이 잠기거나 하면 섬처럼 고립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리라. 물론 옛날의 이야기지만.


앞섬은 따사로운 햇살을 제대로 받는 지형을 가졌다. 마을 뒤 북쪽은 다소 느슨한 높은 언덕, 앞쪽은 낮고 넓은 평야.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남향 터다. 그래서 많은 가구가 들어와 큰 마을을 이루고 산다. 마을 입구에 시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큰 교회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역시 농촌마을은 어디나와 마찬가지로 비어간다. 빈 집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마을 가운데를 통과. 

도중에 만난 한 할머니에게 뒷섬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는지 물었으나 없단다. 하지만 탐사팀은 마을 안길을 북쪽으로 질러 뒷동산으로 향한다.

마을 입구에서 약 8백 미터 지점,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뒤돌아보면 아늑한 앞섬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평화로운 고향을 떠나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탐사팀이 선 자리 주위로는 복숭아밭이다. 마을입구에 복숭아 저장창고가 있더니 무주군의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 마을의 주력은 복숭아인 듯.

능선에서 북쪽으로 야산을 내려가는 길을 찾아냈다. 뒷섬 방향이자 강변 방향이다. 묘가 몇 기 있는, 가랑잎이 푹푹 쌓이고 잡초가 우거진 언덕을 6백여 미터 내려가니 오래된 농로길이 나타났다.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이 다니지 않았는지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많이 깨져 있고 온갖 잡초덩굴이 우거져 가로지르고 있다. 칡 줄기가 발목을 붙잡아 엎어질 번하기를 두어 차례, 농로를 벗어나 강변으로 나선다.

이렇게 넘어올 수가 있구나.




강 건너 북쪽으로 뒷섬이 보이는데, 우리는 강변을 따라 동쪽을 향해 한 바퀴 돌기로 했다. 5백 미터 남짓을 걷자 뒷섬으로 연결되는 후도교가 나타나고, 다리 끝에서 ‘금강 맘새김길’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학교가는 길’이라 이름 붙은 소구간은 앞섬다리를 건너 읍내의 무주‘국민’학교로 다니던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길안내 말뚝은 끝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가 ‘무진장고원길’로 걷는길을 만들면 이런 설치물들에 대해서도 세련되고 알기 쉽고 의미 있는 디자인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이른바 귀농인의 재능이 소중하게 쓰인다.


무주군이 정한 ‘맘새김길’은 강변의 둑길을 걷게 디자인되어 있는데 이는 물이 붇거나 했을 때를 대비한 안전대책이다. 하지만 탐사팀은 둑 아래의 둔치를 걷는다.


초겨울의 금강변을 걷는 것은 작년 이맘때 이래의 일로서 올해도 또 반복된다.

JTV 전주방송의 ‘전북천리길’ 모든 구간 답사여행을 기획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때. 그 때도 정해진 시멘트길 대신 둑길 아래의 둔치를 걷기를 고집했었다. 둑길은 사실 걷기에 쾌적한 길은 아니므로 큰 위해가 없다면 걷는 여행자들은 흙과 돌과 풀이 섞인 둔치를 걷는 편을 훨씬 선호하기는 한다. 이를 잘 아는 ‘부안마실길’은 세 가지 경로를 제시해두고 날씨와 조수(潮水)의 높이에 따라 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초겨울의 강변도 그럴 듯하다. 잎을 모두 벗어버린 나뭇가지 사이로 주위 산과 숨은 길들이 제 속살을 꾸밈없이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강 건너편은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공격을 받아 깎아지른 절벽이 이어지고 그 절벽에 아슬아슬한 벼룻길이 나 있는 것도 보인다. 이 절벽길은 향로산의 중턱에 있는 북고사 절을 경유하여 읍내로 통하는 길인데, 뒷섬 사람들이 읍내로 가려 할 때 다리가 물에 잠겼으면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아직도 잘 남아있고 난간과 로프로 안전시설까지 되어 있는 것이 잘 보인다. 

후도교를 건너 저 벼룻길을 걷는 노선을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그늘이 없는 강변은 따분하기도 하니까.

아니면…

3백 미터가량 오른쪽(동쪽)으로 걸어 강물 속에 놓인 징검다리(보?)를 건너 그 벼룻길로 올라서는 방법도 로맨틱하겠다.





향로산은 옛지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노봉(爐峰)’을 말하는 것이 분명한데 언제부터인지 香자를 붙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노봉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봉홧불을 올리는 화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읍내 시가지에서 잘 보이는 봉우리이므로 봉수대가 있었을 법도 하다.


징검다리는 비교적 온존하고 있었다! 

비록 충북 진천의 ‘농다리’만큼 확고한 믿음을 주는 튼튼함은 아니지만 건너다닐 만하다. 징검다리를 건너간 곳에서 그 벼룻길과 연결된다.


강변 둔치 폭의 절반은 ‘억새도 갈대도 아닌 무슨 풀’(이라고 안상기 선생이 알려 주었는데 그 사이 잊었다)이 뒤덮고 있는데, 가뜩이나 하얀 꽃술 위에 상고대가 내려앉아 온통 하얗다. 나름대로는 자그마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앞섬의 동쪽 둔치를 2.3킬로미터 걸어 마을 앞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다.


(2) 점심식사

앞섬을 빠져나올 무렵 허동일 대표가 누군가와 통화를 했는데 그 상대방이 앞섬교회 목사님인 줄 나중에 알았다.

앞섬다리 건너 수리재터널 못미처에 어죽 식당이 세 군데 있는데 그 중 ‘무주어죽’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목사님을 오시라고 했다는 것. 

기독교인이 아닌 나로서는 목사님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다소 거북하던 마음을 풀어주듯, 젊은(?) 정종영 목사는 밥상머리에 깎듯이 꿇어앉아 ‘모심과 섬김의 자세’를 보여 줄 뿐 아니라, 나갈 때 보니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느닷없이 불려나온 목사님이 우리가 먹은 밥값까지 대신 내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맛있는 어죽 잘 먹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요.




(3) 상조마을에서 민재 넘어 두문동까지

오후 탐사는 적상면 괴목리 상조마을에서 안성면 금평리 두문동마을까지, 북-남으로 관통하는 재를 넘는 코스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걷는길 노선 획정을 위한 탐사작업은 말 그대로 탐험이다. 이 글 첫머리에서 표현한 것이 옳다. 탐사팀에게 응원과 지지를 부탁합니다.

점심 후의 길은 늘 험했다, 정병귀 국장의 road managing에 따르면. 

오늘도 예외가 아니어서, 나승인 선생의 예언대로 “어죽 먹고 난 다음에는 배가 쉬 꺼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험애(險隘)를 넘어야 했다.


괴목리 상조(上鳥)마을은 ‘웃새재마을’을 한자화한 것이란다. 상조보다 북쪽에는 아랫새재마을(下鳥)도 있다. 그렇다면 마을 뒤에 새재(鳥嶺 또는 鳥峙)가 있어야 하는데 어디를 말함인지? 나는 새조차 힘겨워한다는 높은 고개일텐데.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나오겠다며 마을회관에 들어갔다가 꽤 한참 만에 나온 정병귀 국장, 성과가 좋은지 상기된 얼굴이다.

마침 회관 안에는 안터에서 시집왔다는 안터(安基마을)댁, 명천에서 시집온 명천댁, 봉산에서 온 봉산댁(모두 고개 넘어 안성면)…들이 앉았다가 고갯길이 있음을 앞 다투어 증언해 주더라는 것. 

“조금 올라가면 고갯길이 둘로 나뉘는데 왼쪽으로 가면 구천동이요, 두문동을 가려면 한참 더 올라가야 하며, 다시 둘로 나뉘는데 오른쪽은 안터로, 왼쪽 길은 두문동으로 통한다”더라는 것이다. 

‘조금’이 얼마만큼인지, ‘한참’은 또 얼마만큼인지… 

세 ‘댁’이 모두 가마 타고 그 고개를 넘어 시집왔다고 하더란다. 그런 수다를 떠느라고 시간이 걸렸던 게로군.

그런데 이 고개는 ‘민재’라고 부른단다. 조령(새재)은 또 다른 고개인가? 이를테면 구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주민들에게 묻는 것은 길을 찾아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순식간에 한 사람의 일생을 다 알 수 있기도 하고, 한 마을의 문화와 풍습을 대충 알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요즘 흔한 ‘스토리 텔링’의 자료가 될 수 있다. 

또 운이 좋으면 엉터리로 붙인 지명의 원래 이름이나 유래를 정확히 알게 되기도 한다.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박물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로써 고갯길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졌다. “하지만 너무 오래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찾을 수나 있을까?” 라며 걱정도 해주더란다.


마을 입구에는 돌로 뚜껑을 해덮은 커다란 우물이 보였다. 시멘트 구조물로 비가림을 하거나 철판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요즘, 흔치 않은 우물의 관리모습이다. 

옛적에는 이 물로 씻고 나병을 치료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이것은 흔한 이야기지만).


차 두 대를 몰고 마을 뒷산을 올라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지점까지 갔다. 여기에 세워두고 잿마루까지 올라갔다가 되짚어 내려오기로 작전을 짰다. 

얼마나 거리가 멀지, 얼마나 험할지, 실제로 길이 잘 남아있을지… 등이 확실하지 않고 초겨울 해는 짧기 때문이다.


마침 두 청년이 그리 크지 않은 청솔 한 그루를 밑둥부터 베어 끌고 내려오다가 우리 일행을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상조마을에 사는 친구들인데, 철 이른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손에는 스마트폰을 홀더에 끼워 들고 자신들의 행동을 찍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성탄목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릴 작정이라나. 산골 청년으로서 할 만한 일이기는 하다.

청년들과 헤어져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곳부터 벌써 '덕유산 국립공원' 구역이 시작된다는 안내판이 서있다.


길은 처음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흙길로 바뀐다. 

길의 폭은 2미터 정도로 넉넉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녔다는 뜻이고, 아직도 당시에 길을 내면서 쌓았던 돌축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적상에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경로를 고민하던 탐사팀은 일단 환호를 올린다. 

이렇게 좋은 길이 그냥 있다니. 

물론 낙엽이 쌓이고 길가의 잡초와 잡목이 우거져 머리와 얼굴을 괴롭히고는 있지만 

이 정도의 정비작업은 우리가 가볍게 담당해도 될 당연한 우리의 일이다.




길옆으로는 물이 흐르는 바위계곡. 아니, 계곡 물가를 따라 길을 냈다고 보는 편이 더 옳다. 물소리와 함께 좋은 길을 걷는데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일행 모두가 사진도 찍으며, 노래도 부르며, 연신 경치에 탄복하며, 룰루랄라 신났다. 로또에 당첨된들 이보다 더 신나겠는가. 

가끔 길은 계곡을 건너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지그재그. 그러나 이 정도의 지그재그 역시 재미있고 반갑고 좋기만 하다. 전체적으로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다만 낙엽 쌓인 아래로 돌들이 깔려 있어 무심했다가는 발목을 접지를 위험은 숨어 있었다.

군데군데 다랑논이었거나 집터였거나 해 보이는 곳도 여럿 발견했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어 길이 모호해진 곳도 몇 군데 있긴 했으나 여럿이서 경로를 나누어 걸으면서 가장 그럴듯한 노선을 찾아가며 걸었다.


그렇게 신나게 걸은 것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1.5 킬로미터를 지나는 지점에서부터는 길이 아주 모호해진다. 

‘2미터 길’은 거의 보이지 않고 울퉁불퉁한 바위 계곡을 따라 올라야 한다. 이런 길로 가마 타고 시집을 왔다니 믿을 수 없다. 물론 가마꾼들도 험한 구간에서는 새색시더러 내려서 걸으라고 하고 빈 가마를 메고 걷는다고 하긴 하지만. 우리가 도중에 능선으로 오르는 길 입구를 놓친 것은 아닐까?

6백여 미터를 다소 고생하면서 계곡을 따라 걷다가 결국 주저앉는다. 게다가 눈앞에는 가파른 막바지 경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것. 처음 작전대로 고갯마루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냐, 중단하고 되돌아 내려갈 것이냐. 이 길이 제대로 찾은 옛 고갯길이라 하더라도 너무 힘들므로, 무진장고원길이라는 트레일 구간으로 적당한 것이냐.


그런데 길게 따지지도 생각지도 않고 우리 젊은 정병귀 대장(‘국장’에서 승격시켰다), 불문곡직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한 ‘날등’씩이 감싸고 있는데 그 중 왼쪽 날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나승인 선생, 안상기 선생 두 분은 오른쪽 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허동일 대표는 조금 아까 차의 열쇠를 받아들고 되짚어 계곡을 내려갔다. 박희우 대표와 나, 그렇게 두 사람만 하회를 기다리며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


척후(斥候)로 올라간 두 팀이 큰 소리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는데, 왼쪽 경사로 오르거나 오른쪽으로 오르거나 잿마루에서는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이미 시간은 세 시가 넘었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니 땀도 식고, 가뜩이나 북쪽 계곡이어서 햇볕이 들지 않아 추워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있다가는 얼어 죽겠다. 이른바 저체온증. 

내려가자고 소리를 질렀으나 세 사람은 이미 올라간 만큼이 아까워서라도 내려올 생각이 없다. 이거 참 고민되네…


그런데 잠시 후.

고갯마루에 도착했으니 따라 올라오라고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 반대편 내리막길은 너무나 편안하고 두문동 마을이 훤히 보이는 짧은 길이라는 것이다.


박희우 대표가 나를 배신하고 먼저 가파른 왼쪽 비탈길에 올라섰다.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오르기로 했다. 

경사는 계곡 아래에서 쳐다보던 것보다 훨씬 가팔랐다. 35도 정도는 되지 않을까? 가랑잎이 깊이 쌓여 미끄럽고, 발 놓을 곳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능선의 한 가운데를 뚫고 오르기로 하였지만, 삭정이 나무등걸은 붙잡으면 부러지고, 바위는 붙잡으면 움직이고 하여 한 걸음 올라가기도 힘들다. 네 발을 다 동원했다. 허리를 세우고는 두 발로 서있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주 답사 때 잘 걷는다고 은근 자랑하던 사람 맞나? 지팡이부터 버리고 다리 힘에 의존하라고 남들에게 잘난 척하던 사람 어디 갔나?

나의 ‘잘난척’에 상처받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어쨌든 악전고투 20분 만에 고갯마루에 닿았다.


잿마루는 천국이었다!

오후의 남쪽 햇살을 가득히 받는 산기슭과 그 아래 보이는 두문마을. 좌우 능선을 따라 선 소나무들, 그리고 꼬불꼬불 내려가는 솔숲길. 

그뿐인가, 고갯마루 능선에서는 덕유산의 눈 덮인 산줄기가 쫘악, 한 눈에 들어온다! 

그저께 내린 첫눈이 1천6백 미터 고도의 덕유산에는 이미 하얗게 쌓였고 녹지 않고 있었던 것.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인들 이보다 반가울까.



고민하며 기다리던 골짜기 아래에서 이 천국까지 마지막 깔크막이, 거리는 2백여 미터에 불과했으나 고도차는 무려 70미터에 가까웠다. 직선으로 치고 올라온 탓이다. 구불구불 지그재그 길을 따로 내어 경사를 무디게 하기 전에는 심하게 무리한 구간이다.


나승인 선생은 무릎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며 앉았다 섰다 운동을 하고 있다. 나는 체중이 훨씬 덜 나가는 덕분인지 그나마 괜찮았다.


두문동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은 솔잎 가득, 푹신푹신. 도중에 개구리 연못도 만나고, 초소형 다단(多段) 폭포도 만나면서… 

이 쪽 내리막길은 올라온 길보다 짧고 느슨한데다 마을이 가까워서인지 나름대로 잡목을 치는 등 관리의 손길이 다소나마 베풀어져 있다.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간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내리막길은 끝이 나고 동네 뒷길과 만난다. 

내리막의 길이는 1킬로미터에 조금 못 미친다. ‘민재고개’길은 오르막 내리막 합하여 총 3.5킬로미터.


그런데 왜 ‘민재’라고 부르는 걸까? 우리가 지나온 골짜기를 ‘민재골’이라 한다고 네이버 지도에 실려 있으니 그렇기는 할텐데, 이름의 유래는 뭘까?

‘미는(推) 재’? 힘들므로 뒤에서 밀어주며 오른다는 뜻?


원래 작전대로 일행 모두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고 되돌아왔다면 반대쪽 내리막길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답사해야 했을 것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기민하게 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탐사팀의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이자 탐사효율을 높이는 방법이 된다. 즉 결과적으로는 더 잘 했다는 뜻. 


앞서 되짚어 내려간 허동일 대표가 차를 몰고 큰 길을 돌아 두문마을 뒷길로 마중을 왔다. 그는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덕유산 사진을 풍부하게 찍을 수 있었다며 폰으로 전송해 주었다.


두문동은 '낙화놀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차로 그 낙화놀이의 무대인 저수지 옆을 지나면서 보니 저수지를 더욱 크게 만들려는 듯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4) 마무리.


(*) 원래 무주읍에서 적상산이나 덕유산을 넘지 않고 안성면으로 넘어가는 노선을 궁리하면서, 치마재를 넘을까 어쩔까 하다가 시간관계로 오늘은 우선 적상~안성 사이 구간인 이 민재를 탐사하게 되었다. 

치마재는 오늘 이 구간의 마지막 2백 미터만큼 가파른 곳은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무주의 산들은 웬만하면 1천 미터를 훌쩍 넘고, 고개도 8백 미터를 넘는 곳이 많아 피하려도 피할 수 없는 험로가 많으니 각오는 해야 할 것 같다.


(*) ‘노닥노닥사랑방’의 존재는 참으로 고맙고 유용하다. 앞으로도 우리 무진장고원길의 모임 장소로 계속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무주인 여러분, 애써 주십시오.


(*) 탐사팀 여러분. 무리하지 마시고, 갈수록 추워지는데 건강관리도 잘 하시고요~


(최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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