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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몽골&바이칼여행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7.11.16|조회수511 목록 댓글 1

몽골 & 바이칼 여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던 때에 중국이 오랑캐라고 여기던 변방에서 태어난 나라가 중국을(남송) 점령하고 중앙아시아를 넘어 유럽을 파죽지세로 격파해 공포에 떨게 했다. 그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어떤 땅의 모습일까 늘 궁금했다. 4세기 중국 북방에 살았던 훈(흉노)이라는 민족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유럽인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이나, 시베리아에 진출한 백인들을 격파한 몽골인 들의 승리와 같은, 황인종이 백인들을 상대로 우월했던 역사적 사건들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청나라말기 아편전쟁이나 서구열강 연합군에게 북경이 함락된 치욕적인 사건들을 알게 되면서 부터였다. 특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밤새워 읽으며 유럽을 떨게 했던 칭기즈 칸의 나라 몽골의 고비사막과 대초원을 꿈꾸게 되었다.

 

1983년 겨울에 서점에 들렀다가 몽골의 초원이라는 책을 봤다. 펼쳐보니 시바 료타로라는 일본인이 쓴 책이었다. 일본인이 쓴 책은 지명이나 사람 이름 등 일본어의 고유명사를 읽는 게 익숙지 않아 잘 사지 않았었는데. 몽골에 관한 책이어서 선뜻 구입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펼쳐든 책은 흥미로워 밤을 하얗게 새고 말았다.

몽골의 초원이라는 책에는 우리 황인종이 살았던 땅을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중에 바이칼이라는 호수 주변 초원에 우리민족이나 일본사람들의 선조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브리야트 공화국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랄, 알타이산맥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이 우랄알타이어로 분류된 언어를 쓰며 우리나라와 일본어가 우랄알타이 어계로 분류된다는(지금은 많은 학자들이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함) 것도 매우 흥미로웠다.

현재 러시아에 속하지만 우리와 같은 넓은 의미의 황인종들이 지배했던 땅 바이칼호수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지리산의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활동을 하면서 동아시아의 포유동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환경부의 자연자원 전문 조사원으로 9년 동안 활동하면서 매년 포유동물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었다.

조사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포유동물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즐겨했고 사냥꾼이야기를 많이 읽어서 조사원으로 활동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섬진강에 서식하는 수달과 지리산의 반달곰 보호활동을 하면서 일본이나 중국의 포유동물 학자나 전문가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일본, 중국의 포유동물 학자들과 한국(지리산), 일본(히로시마), 중국(하르빈)에서 동아시아 반달곰 보전을 위한 심포지엄을 공동으로 개최하여 참여하면서, 우리 한반도에서 멸종되었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살아있는 땅, 러시아 연해주의 호랑이, 표범 서식지 탐사를 갔다가 몽골에 사향노루가 많이 서식하고 있고, 바이칼호수 부근에도 사향노루가 서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우, 늑대, 사향노루가 살고 있는 곳 몽골과 바이칼호수는 또 다른 설레임을 주었다.

 

나는 맑은 물을 매우 좋아한다.

어렸을 때 화엄사계곡이나 서시천, 섬진강에서 낚시를 많이 하였다. 당시에는 어찌나 물이 맑은지 깊은 물속에 있는 물고기도 잘 보였다. 붕어, 누치 ,피라미, 꺽지같은 고기들을 직접 보면서 낚시를 그 고기 앞에다 드리워 낚을 수 있었다. 서시천이나 섬진강물이 많이 탁해져서 맑은 물속에서 유영하는 어류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바이칼 호수의 물은 세계에서 가장 맑아 40m깊이 까지 바닥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꼭 더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2017819일 마침내 오래 꿈꾸었던 몽골과 바이칼 여행을 회갑을 맞은 와이프와 함께 떠났다. 몽골에 입국하여 울란바타르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24시간 타고 바이칼호수 인근도시 이르크추크까지 가는 코스를 선택하였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미지의 땅을 더 많이 보고 느껴보고 싶었다. 인천에서 1955분에 출발하여 울란바타르에 3시간 35분 만에 도착하였다. 한국시간 오후 1130분에 도착하였으니 한 시간 빠른 시차이니 몽골시간 1030분에 도착한 것이다. 여행사의 한국 가이드가 인천에서부터 동행하였는데, 몽골에 도착하니 몽골 가이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아가씨였다. 울란바타르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도가 1350m이고 가랑비까지 내리니 날씨는 제법 쌀쌀하였다. 호텔은 깨끗하고 시설도 양호하였다.

 

820일 아침에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199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니 우리나라 보다 26년이 늦은 셈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지만 자연생태계를 보전하려는 것 보다는 관광 상품으로서의 개발이 우선되는 관리를 하고 있었다.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게르에서 잠을 자며 승마체험도 하고, 양고기 요리인 허르헉을 시식해보고 전통 몽골 유목민의 삶을 직접보고 유제품인 치즈, 발효유 음료인 수테차이도 먹어보는 일정이다.



    

평균고도 1,585m인 고원의 나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는 300만 몽골 인구 중 절반인 150만 명이 사는 도시로, 출퇴근 시간이면 차가 막혀 정체현상이 심하다고 한다. 몽골에서는 차를 생산하지 못하니 어떤 나라 차가 많이 운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니 승용차는 약 80%가 일본차였고 나머지 15%정도는 유럽이나 미국 차였으며 약 5%정도가 우리 한국 차로 보였다. 버스는 우리나라 차가 많이 보였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몽골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일본은 오래전부터 공을 들여왔다고 한다. 다음날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말로만 듣던 초원의 나라 몽골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들도 산도 초원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는 양떼나 말, , 야크 등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풀은 매우 짧았다. 몽골은 가축들의 천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육되는 가축들의 비참한 삶이 떠올라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천막집인 게르가 많이 보였다. 울란바타르 주변에도 게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중국북부에서는 빠오(파오)로 불리우는 천막집은 러시아에서는 유르트라고 한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계절따라 가축의 먹이인 풀이 자라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으리라. 멀리 차창 밖으로 큰 조형물이 보였다. Tv에서 자주 보았던 칭기스칸의 기마동상이 있었다. 생각보다 큰 조형물이었다. 몽골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필수 코스이리라. 이 거대한 조형물을 보고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칭기즈칸을 표현한 조형물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더 큰 칭기즈칸은 몽골을 여행하는 분들 가슴속에 이미 깃들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조형물은 인증샷을 하는 관광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해보였다.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어서는 톨강옆 언덕에 돌탑이 있었다. 오보라고 하는 이 돌탑에는 색색의 천들을 둘러놓고 말뼈도 걸어두는 신성한 장소로 이 탑에 돌을 3개 보태놓거나 두 손을 모으고 시계방향으로 세바퀴를 돌면서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장소였다.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비슷한 장소였다.

이곳에 황금독수리(검독수리)를 가지고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돈을 받는 분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검독수리가 몽골에서는 많이 살아 있어서 독수리 사냥을 하기도 한다. 맹금류중 가장 용맹하고 멋진 검독수리가 붙잡혀서 사진 모델로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 불쌍했다. 일본의 이바라키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어류를 전시해놓았는데, 전시된 어류가 일정기간이 끝나면 다시 그 어류가 살았던 바다나 하천에 풀어주고 다른 어류를 포획하여 일정기간을 순환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이 검독수리도 일정기간 활용하고 다시 초원으로 돌려보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검독수리

톨강을 건너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어서니 양쪽으로 바위산들이 있었고,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도 많이 보였다. 톨강가에는 버드나무가 보였고 산에는 자작나무, 낙엽송,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했다. 초원에는 많은 야생화가 피어있었는데 쑥부쟁이 같은 꽃이 많이 보였다.

일행은 게르에 짐을 풀고 말 타기 체험을 했다.

일행 16명중 무서워서 말을 타지 않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마부는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리더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나담축제에서 말 타기 경주(모리니 우랄단)에 선수로 나가는 분이라고 했다. 리더가 말을 배정했는데 나에겐 가장 늦게 말을 배정해주었다. 내말은 갈기털이 길고 더 강인해 보이는 말이었다. 가이드가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갈기털이 긴 말은 경주용 말이라고 했다. 성격이 거치니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말을 타는 요령을 설명해주고 모두 함께 출발하였다. 마부들이 고삐 줄을 잡고 천천히 이동을 하였다. 나와 와이프의 말고삐는 리더가 잡고 선두에서 이끌었다. 테를지 국립공원의 중앙을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 북쪽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곧 익숙해졌다. 아침까지 이슬비가 와서 하늘은 구름이 덥혀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초원은 생동감이 있었다.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보니 실개천 주위로 많은 야생화들이 보였다. 노고단에서 낯익은 이질풀꽃과 물매화가 많이 보였고 이제는 지리산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에델바이스(솜다리)도 보였다. 조르흠(땅다람쥐)이라고 하는 설치류가 굴에서 나와 두려움 없이 쪼르르 뛰어 다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초원을 걸어가면 조르흠이 굴속에서 나오지 않는데 말을 타고 가니 말 등에 탄 사람도 말과 동체로 보고 두려움이 없고, 가장 두려운 솔개 같은 맹금류가 말을 탄 사람이 두려워 접근을 못하니 굴에서 나와서 먹이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으로 보였다.

몽골에는 이 땅 다람쥐와 함께 마못(모르모트)라는 설치류가 서식하는데, 중국의 옛 사냥꾼 이야기에 달바칸이라고 불리는 설치류이다. 고기가 맛있고 모피를 팔 수 있어서 사냥꾼들이 많이 잡는데. 페스트의 매개동물이라 흑사병(선 페스트)이 창궐했던 시기에는 마못사냥꾼들이 제일 먼저 감염되어 희생되었다고 했다. 마못을 보고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몽골엔 맹금류가 많이 보였는데 특히 솔개가 많이 보였다. 하늘 높이 떠서 원을 그리면서날다가 급강하하여 조르흠을 사냥하는 것을 보면 야생의 세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

물매화 

승마 체험이 끝나고 1시간 휴식 후에 저녁식사를 한다고 했다. 나는 카메라를 메고 말을 타면서 보았던 에델바이스를 찾아갔다. 지천으로 핀 물매화와 이질풀을 촬영하고 실개천을건너 바위산 아래를 보니 에델바이스가 보였다. 1976년 지리산 만복대 산행중 처음보고 1978년 반야봉 중봉 서사면에서 두 번째 보고는 다시 볼 수 없었던 에델바이스가 몽골에는 지천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니 너무 반가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큰 무리의 양떼가 앞을 가로질러 천천히 풀을 뜯으며 가고 있었다. 양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걸어가니 내가 걸어가는 속도만큼 양도 움직여서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몇 마리의 소와함께 야크도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보고 싶어서 시선을 다른 쪽에 두며 야크에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조심조심 접근을 하니 먹이를 먹다가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후다닥 뛰어서 도망을 갔다.

 

저녁식사는 허르헉이라는 양고기 요리였다. 큰 사라에 양고기 찜이 나왔는데 매우 부드럽고 양 특유의 냄새도 없어 몽골이 자랑할 만한 음식이었다.

이슬비가 오락가락해서 밤에 별을 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하늘이 열리고 별이 많이 보였다. 게르를 운영하는 분이 고용한 한국 사람이 북극성을 찾는 법과 별자리에 관한 설명도 해주고 큰 천체용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별도 보여주었다.

게르 중앙에는 작은 무쇠난로가 있었다. 연료는 나무를 때거나 갈탄을 때는데 그러한 연료를 구할 수 없는 초원에서는 말,,야크의 똥을 말려서 연료로 쓴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전에 갈탄을 넣어 불을 때주더니 날씨가 추우니 새벽에 다시 불을 때 주겠다고 했다. 이불이 두꺼웠지만 새벽에는 추웠다. 다시 난로에 불을 때주어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821일 울란바타르로 돌아와 자이승 승전탑을 올랐다. 자이승 승전탑은 러시아와 몽골이 협력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가 몽골에 기증한 탑이다. 이 탑에 올라서면 울란바타르 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데, 울란바타르 시 주택지역에 화력발전소가 있어서 몽골 시내로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이 화력발전소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은 몽골의 옥의티였다. 울란바타르시 주민들이 폐질환이 심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자이승 승전탑 가까이 이태준열사(1883~1921)의 기념공원이 있는데 이태준열사는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가 울란바토르에 정착했는데, 병원을 열어 몽골 국왕의 어의를 하였다. 당시 몽골인의 70~80%가 성병에 걸려있는 실정이었는데 성병을 퇴치하는데 힘써 몽골의 영웅이 되어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태준열사는 1921년 일본군과 내통한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살해 당하였다. 몽골에서 추앙받는 이태준열사를 기념하기 위해 연세대에서 노력하여 몽골정부에서 땅을 2,000평 마련하고 공원시설을 몽골한인회와 연세대학교에서 협력하여 건립하였다. 이태준열사는 한, 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이 되어 미래 한,몽 협력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오후에는 몽골 마두금 연주와 흐미라는 독특한 발성법으로 소리를 하는 몽골 전통음악공연을 관람하였다.

 


822일 칭기스칸동상과 몽골 공산혁명의 영웅인 수흐바타르 기마동상이 있는 칭기스칸광장을 구경하고 몽골의 국왕이 살았던 궁전을 구경하였다 이곳 겨울궁전이라 하는 곳에는 당시 궁전에서 쓰던 물품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실내에 국왕이 쓰던 게르를 전시해 놓았다. 이 특별한 게르는 표범 100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민비의 접견실에서 쓰던 양탄자가 표범 48마리의 가죽으로 만들었다는데, 표범100마리를 죽여 그 가죽으로 게르를 만든 것을 직접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진촬영을 하면 벌금을 맞는다고 가이드가 주의를 주었지만 난 그 게르를 핸드폰으로 촬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625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하였다. 울란바타르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중국 북경에서 출발하여 내몽고 초원을 달려 울란바토르를 지나 울란우데~이루크츠크~모스크바로 가는 열차다. 이 열차는 앉아서 가는 좌석은 없고 전부 침대칸인데 41실이 대부분이며 21실도 있었다. 41실은 이층으로 침대가 되어있어서 오르내리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러시아 정부에서 투자하여 운영권을 가지고 있어서 승무원은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열차는 만든지 오래되어 매우 낡았으나 침구는 깨끗하였다. 몽골의 초원은 넓고 넓었다. 곧 어두워져서 풍경을 볼 수 없었다. 누워서 가니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완행열차를 타고 구례를 오는데 16시간이 걸렸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힘들 엇던지 횡단열차를 24시간 타려고 할 때 걱정이 되었지만 넓은 초원을 보고 느끼고 싶어서 울란바타르에서 비행기로 이루크츠크를 가지 않고 횡단열차를 타는 일정을 선택했었다. 각오를 단단히 해서인지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잠을 자다가 열차가 뭠춰 일어나니 열차가 멈춰있었다. 국경을 통과하는데 수속을 밟아야 해서 약 3시간이 걸린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의 여권을 조사하고 소지한 짐도 조사했다.

러시아로 진입하여 브리야트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에 도착할 무렵 날이 밝아왔다. 울란우데의 역에서 한 시간 정차를 하여 열 차역 밖으로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러시아의 풍경은 몽골과 달리 숲이 많이 보이더니 오른쪽 차창으로 바이칼 호수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러시아 소나무가 끝없이 보이는 숲이었다. 호수 가에는 가끔 낚시꾼들의 배가 보였고 별장 같은 집들도 보였다. 자작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마가목 열매가 붉게 익어 매우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모두들 일어나 열차 통로로 나와 창가에 서서 바이칼호수를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나는 와이프에게 식당 칸에 가보자고 하였다. 식당 칸에 가니 드립커피도 팔고 간단한 러시아풍의 음식도 팔았다. 오랜만에 향기로운 커피를 큰 머그잔으로 마시니 정신이 맑아졌다. 식당 칸에는 차창이 넓어 밖 풍경을 잘 볼 수 있어서 이것저것 시켜먹으며 오래 앚아있었다. 열차는 바이칼 호수에서 흐르는 앙가라 강을 따라 달렸다. 열차는 823일 오후 350분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였다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린다. 1652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처음 식민지로 만들 당시에 세운 월동 야영지에서 비롯되었으며, 1661년에는 요새가 건설되었다. 이곳은 시스바이칼리아와 러시아에서 중국과 몽골로 가는 무역 로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했다. 1686년 시가 되었으며 1898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들어선 뒤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루크츠크는 유배도시라고도 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하고, 러시아의 유인작전에 휘말려 패배하게 되는데, 그때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하여 파리까지 쫓아간 젊은 러시아 장교그룹이 있었다. 그들의 유럽 여행은 계몽의 기회였다. 그들은 개혁의 꿈을 안고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리고 반역을 꿈꾼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몇몇이 처형되고, 대부분이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다. 그들과 함께 우랄산맥 동쪽의 이 도시로 유럽문화가 따라왔다. 이혼하면 귀족신분을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루크츠크로 유배된 남편들을 찾아와 운명을 같이했던 부인들의 이야기도 감동적으로 남아 있다. 스토이전쟁과 평화는 이곳의 유배자중 한사람인 발콘스키의 부인이 톨스토이의 숙모여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전투에 참가한 발콘스키의 얘기를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나는 시베리아를 떠올리면 솔제니친이 생각난다. 제니친은 스탈린을 비난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썼다가 10년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보냈다. 솔제니친이 이때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던 경험으로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국가의 폭력과 배고픔, 인권말살의 처절함 속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웅변하는 내용이어서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 마다 되 새겨보는 소설이다.

 

이루크츠크는 우리와 인연이 있는 도시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조선인들을 일본의 스파이로 의심하고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이상설등 42명을 체포하여 그중 이범윤을 비롯한 8명을 이루크츠크로 보내 감옥에 수용한 역사가 있다.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를 품은 도시다. 도시 한가운데로 바이칼호수에서 흘러나온 앙가라 강이 흐른다. 강물은 1,800km를 흘러 북극해로 빠진다.

바이칼 호수는 초승달 모양으로 생겼다. 길이는 630km, 넓이는 20km~70km에 달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전에 생겨났고, 가장 크고, 가장 깊은 호수다. 전 세계 담수의 20%를 차지한다. 바이칼 호의 동식물 생태는 풍부하고 다양하다고 한다. 수심에 따라 1,200종이 넘는 동물이 서식하고 600종에 가까운 식물이 수면 위나 수면 가까이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약 3/4은 바이칼호수의 고유종이다. 대표적인 어류는 연어과인 오물이며 철갑상어, 바이칼 물범 네르파가 산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앙가라 강을 따라 산책을 하려 했으나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각자 자유롭게 시내 구경을 하거나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824일 호텔의 아침식사는 매우 훌륭했다. 다양한 유제품과 오물요리. 양고기꼬치구이 ,소갈비찜, 신선한 과일. 볶은 잦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루크츠크는 매우 깨끗한 도시였다. 인구가 60만이라는 이 도시는 비교적 풍요로워 보였다. 2000년 연해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스크, 국경도시 핫산을 구경하고 깨드로바야 파드 자연공원, 우수리스크 자연공원을 탐사했었는데, 연해주의 모든 공장이 문을 닫고 국가에서 배급도 주지 못해 정말 어렵게 살아가는 것을 실감했었다. 2003년 지리산 반달곰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러시아 연해주에서 반달곰을 들여오기로 하고 다시 방문했을 때도 길거리에서 보드카 술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걷거나 길에 쓰러져 잠든 젊은 백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고, 호텔 앞이나 버스정류장 부근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느라 뒤적이는 여자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루크츠크는 당시 연해주와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씌꼬바 거리는 화려하고 번화했다. 서울의 명동, 상해의 신천지 같은 쇼핑의 거리였는데 품격 있는 멋진 거리였다. 우리씌꼬바 거리에서 한 젊은이는 기타를 치고 또다른 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버스킹(거리공연)을 하는 잘생긴 이들에게 아무도 관삼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람좋은 와이프가 지폐를 꺼내 주니 음악이 더 경쾌해졌다.

우리씌꼬바거리

거리악사와 

825일 우스찌 아르다에서 브리야트족이 운영하는 민속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이곳에 두 마리의 사향노루박제가 있었다. 박제는 퇴색되었지만 반점이 선명했다. 스라소니, 늑대의 박제도 전시되어있었다. 브리야트인들은 우리이웃같은 모습이었다. 함께 놀이도 하고 씨름도하며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바이칼호수의 리스트비얀카로 가는 길목에 딸찌 민속촌에 들렸다. 딸찌민속촌은 러시아의 다양한 목조건축물을 볼 수 있도록 재현해 놓았다. 시베리아에서 오래 살아온 토프족, 예벤키족등 소수민족의 전통목조주택도 볼 수 있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유배되어 왔었을 때의 감옥을 재현해 놓았다. 비참한 수감 생활이 눈에 선했다.

이곳에는 검은 여우와 검은담비를 사육하는 사람이 있었다. 입장료를 내고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검은담비를 볼 수 있어서 매우 행운이었다. 시베리아는 매우 추워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한 동기는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 고가에 거래되는 검은담비의 모피 때문이었다.

바이칼 호수 주변에는 과거에 많은 사향노루가 서식했는데 지금은 많이 잡히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사향이 은밀히 거래되고 있는데 한국 사람이 이루크츠크에서 머물면서 사향을 사서 직접 공진단을 만들어서 한국으로 가지고 간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세계에서 수렵되거나 밀렵되는 곰의 쓸개(웅담)의 약 70%가 우리나라에서 소비된다는데 바이칼 주변에 서식하는 사향노루에게 우리 한국인이 위협이 되는 현실이 씁쓸했다.

 

                                                                  사향노루(브리야트족 민속박물관에서)

바이칼 호수의 유람선을 탈 수 있는 리시트비얀카 선착장에는 노천시장이 있었는데 즉석에서 오물을 훈제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이곳에는 잦을 많이 팔고 있었는데 알맹이는 우리 것보다 작았지만 맛은 별 차이가 없었고 가격이 매우 쌌다. 유람선을 타고 바이칼 호수로 나갔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고 있었지만 물이 매우 맑아 바닥의 자갈들이 잘 보였다. 호수가 숲에는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배에서 보드카 한잔씩을 주었고 훈제된 오물을 한 마리씩 주었다 오물은 황어정도의 크기의 연어과 어류여서 맛이 훌륭했다. 한 시간을 유람하는 동안에 네르파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올 수 도 있다고 했는데, 네르파 한 마리가 배 가까이에 나타나 우리를 보고 있었다. 잠깐 얼굴을 보여준 네르파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바이칼호수는 최고 깊이가 1637m나 된다고 했다. 바이칼호수의 주변은 끝없는 숲이었다. 오염원이 적어 청정지역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환경이 훼손되고 있었다. 바이칼에서 포획되는 오물이 양이 매우 줄어서 정부에서는 포획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번 몽골&바이칼 여행은 즐겁고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몽골의 푸른 대초원은 우리와는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현대문명이 그 사람들의 행복한 생활을 파괴할 것이라는 우울함도 있었다.

바이칼호수는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아직은 청정지역이지만 관광산업의 발달로 자연훼손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몽골에서는 맛있는 양고기와 쇠고기를 많이 먹었다. 항생제가 섞인 사료를 먹지 않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살충제나 디디티를 뿌리지 않은 신선한 육류와 치즈등 유제품은 맛도 훌륭했다.

러시아에서는 양고기 샤슬릭도 맛이 있었고. 브리야트족이 만든 다양한 만두도 맛이있었다.

특히 닭뼈를 삶아 국물을 만들고 그 국물에 큰 밤크기 만한 고기만두를 넣어 만두국을 끓인 것이 일품이었다. 이러한 만두국은 블라디보스톡에서도 먹어본 만둣국이었다.

다음 몽골 여행은 나담축제를 하고 야생화가 많이 피는 7월초에 다시 하고 싶고, 바이칼은 유리처럼 투명한 어름이 얼어 호수 바닥을 잘 볼 수 있고 시베리아의 폭풍을 맞으며 바이칼 트레킹코스를 걸을 수 있는 겨울에 해보고 싶었다.

 

1155분 이루크츠크 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 여객기는 약 3시간 40분 걸려 826일 새벽 445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내가 만약 브리야트족의 후예라면 수천 년전에 바이칼호수를 떠나 고비사막을 건너 몽골의 대초원을 거쳐 연해주 산림지대를 지나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늑대, 승냥이, 호랑이의 습격을 피해서 천운으로 한반도에 정착했을 것인데, 우리가 그들의 후손이라면 다시 돌아갔다가 그 먼 길을 3시간 40분에 돌아온 것이다.


                                                          리스트비얀카 선착장

                                                                                앙가라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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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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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병숙 | 작성시간 18.01.23 이제사 읽어 봅니다.
    멋진 여행이셨군요.
    다음 여행은 둘레길 게스트 하우스 멤버로 떠나보심도 좋을듯 합니다.
    참여자 1번 최한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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