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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연하반의 지리산개척사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8.06.14|조회수114 목록 댓글 0



“지리산국립공원 창설운동사”

  

□ 차례


1. 국립공원 지정운동의 시대적 배경

2.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 추진운동의 동기

3. 국민운동본부의 지리산지역개발조사

4. 세계국립공원협의회 공원전문가 파견 내한조사

5. 구례군민의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운동 적극추진

6. 제1호 지리산국립공원의 탄생



1. 국립공원 지정운동의 시대적 배경


 1945년 8ㆍ15해방과 더불어 우리 민족에 갑자기 밀어닥친 남북분단에 이어, 1948년에 일어난 여순사변과 그리고 1950년에 터진 625동란의 3년 전쟁을 거쳐서, 1961년의 군사혁명정부의 수립 등 약20여년의 장기간에 걸쳐서 매섭게 이 땅을 휩쓸고 지나간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들은 우리나라 전체를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피폐, 그리고 사회적 빈곤과 혼란상태로까지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기강의 해이와 사회적 혼란을 틈탄 이기적 사리사욕의 탐욕자들에 의한 산림남벌과 불법적 도벌로 인하여 전국도처의 산림들은 막심한 손상과 피해를 입게 되어 산지들은 대부분 나무하나 없는 벌거숭이 민둥산으로 변모하고, 국토는 날로 더욱 황폐화되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 사회실정을 돌이켜보면, 석탄, 석유, 전기 등 에너지자원의 태부족으로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국민생활의 연료난이 극심하여 생산성 에너지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취사와 난방용 등 가정생활용 필수연료조차 오직 산림의 땔감나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더욱 전후의 각종건물의 피해복구와 건설자재의 수요도 외재의 수입조차 어려웠던 당시로서는 크게 산림남벌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리산은 원래 산이 크고 그 면적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산세가 완만하고 토질이 두텁고 비옥하여 옛부터 적송, 백송, 전나무, 가문비나무, 구상나무 등 건축용재로서 우수한 수종들이 다양하여 도처에 풍부한 원시림지대를 이루고 있어, 당시로서는 전국적으로 전체 산림 축적량의 무려 22%를 차지하는 산림의 보고로 알려져 있었다.

1945년 해방직후부터 6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에 걸쳐서, 불법적 도벌과 지나친 남벌로 인하여 전국의 야산지대의 산림이 거의 고갈상태에 이르게 되자, 마지막 남은 지리산원시림 지대로 탐욕스런 도벌꾼들이 떼지어 몰려들고 있었으며, 지리산 국유림 골짝마다 허술한 단속을 틈타 대규모적인 불법적 산림도벌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 골작저지대는 말할 것도 없고, 해발 1,500m 이상의 연하천 준평원과 칠선계곡 막바지 완사면, 그리고 해발 1,800m높이의 제석봉 정상의 준고원 등 험준한 고산지대에 이르기까지 검은 손들이 뻗어들어 갔으며, 더욱 연하천 준고원과 칠선계곡 막바지 그리고 해발 1,700m의 장터목 고산지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스리코터 군용차의 엔진을 떼어다가 원형큰톱날을 걸어 제재소를 차려놓고 대량제재로 인하여 목재톱밥이 산더미처럼 계곡을 메우도록 지리산의 태고천연원시밀림들이 사상 유래를 볼 수 없는 최대의 수난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이러한 참상의 사실을 울분 끝에 당국에 고발을 하여도 당국도 단속을 못하니 속수무책의 무법천지일 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2.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운동의 동기


 6ㆍ25전쟁 종전직후인 1955년에 당시 구례중학교 우종수 교사를 비롯하여 강기중 교수, 이규종 교수, 윤중섭, 안성문 등 교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손재훈, 양한익, 성승준, 김용선, 김태준, 안기호, 제씨 등 일반 인사들과 더불어 “구례 연하반(求禮 烟霞伴-지리산악회 전신)이란 명칭으로 자생 산악활동 그룹을 결성(회장 손재훈, 총무 우종수)한 이후로 자주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산악활동을 하던 중, 전술한 바와 같이 지리산원시림의 불법도벌 현장을 목격하게 됨으로서 그 참상에 대한 안타까운 개탄과 참을 수 없는 울분이 마침내 “연하반” 그룹으로 하여금 수려한 지리산 자연자원의 훼손방지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영구보존을 위한 방책을 몰라 고민하고 있을 무렵의 1963년 이른 봄에 국립공원 전문학자 김헌규 박사(金憲奎, 이화여대 생물학과 교수)가 지리산 탐방길에 올라 구례에 들렸을 때 우연히 “연하반” 총무를 만나게 된 인연으로 그 날에 “연하반” 여러 회원들과 합석하여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이루어졌다. 그때 김박사는 그 전해인 1962년에 미국 시애틀에서 제1차 세계국립공원 회의가 열렸을 때 초청을 받아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귀국한 후, 처음으로 지리산을 찾게 된 터였다. 그날 담론의 화제는 주로 지리산이 당면하고 있는 대규모 산림도벌에 의한 지리산 원시림의 훼손에 대한 참상과 그 방지대책에 대한 간담이 풍성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김박사의 판단은 “지리산 생태계의 자연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선진국 전례로 미루어보아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아 정부 책임하에 관리 수호하는 길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라는 결론과 아울러 외국의 공원법 등 참고자료를 주시면서 앞으로 자기도 후원해 줄테니 우선 급한 대로 열성적인 이곳 “연하반” 그룹에서 하루라도 빨리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운동을 서두르는 것이 상책이 될 것이라는 진지한 조언과 감동적인 격려사가 뒤따랐다. “연하반” 회원들은 새로운 희망을 안고 국립공원 지정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였다.


3. “재건국민운동본부”의 지리산지역개발 조사


 1963년 1월에 당시 군사혁명정부의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박정희(朴正熙) 의장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재건국민운동본부 내에 상습적인 국민의 식량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잡곡 등 보조식품 증산과 아울러 다양한 산지개발을 목적으로 한 “지리산 지역개발 조사연구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초대 위원장에 류달영 박사, 후에 이관구 박사로 교체되었으며, 부위원장은 김헌규 박사(이대 교수)와 윤상원 박사(서울대 농과 학장) 두 분이 맡게 되었다.


그 해 7-8월 사이에 실시된 지리산 지역개발 조사에는 14개 분야(토양, 축산, 작물, 원예, 식용식물, 해충, 식물병, 농업경제, 기상, 지형, 육수, 양잠, 사회, 국립공원)에 걸쳐서 각 분담조를 조직하여 각 분야의 전문학자와 교수 등 사계의 권위자 60여명을 조사전문위원으로 추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 대학의 교수, 조교, 연구학생 및 현지 구례의 산악안내인 (“연하반” 다수회원) 등 연인원 120여명이 동참 협력한 우리나라 초유의 대규모 산지종합조사로서, 약 2개월 동안 현지조사를 마친 다음, 그해 12월 28일에 4ㆍ6배판 707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지리산 지역개발에 관한 조사보고서」의 출판을 보게 되었으며, 이 보고서는 후에 지리산지역개발의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특히 국립공원 분야 분담조의 김헌규 박사(조장), 우한정 박사(공원 전문위원), 원병오 박사(공원 전문위원), 이정우 조류학자(전문위원) 등에 의하여 국립공원 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어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것은 물론 “연하반”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김헌규 박사님의 지원약속이 주효했던 것이다.

 

 

4. 세계국립공원협의회의 공원전문가 내한조사


1963년 10월 24일에는 미국소재의 세계국립공원 협의회에서 파견된 국립공원 설계전문가 (미국인) 윌리암 하트(William Hart)씨가 유럽, 아시아 순방길에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후보지를 조사차 갑자기 내한하여 약 2주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국립공원 후보지를 현지답사하며 조사할 목적으로 내한 방문한 것이다. 이때 정부의 주선으로 농림부 산림국 우한정 박사(지리산국립공원조사 전문위원) 안내로 이곳에 도착하니, 우종수(禹 秀) “연하반” 총무와 김용선(金容善) 지리산개발위원회 총무 및 서상선(구례구 행정직원) 등이 협력 안내하여 지리산의 노고단(1507m), 반야봉(1735m), 피아골계곡 등을 현지답사 하였으며, 하트씨는 시찰을 마친 후에 평가하기를 “지리산은 산세가 매우 웅장하면서도 그 경관이 수려하며, 수림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광활한 원시림의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하여 국제적 수준으로도 매우 훌륭한 국립공원의 후보지이다”라는 호평과 아울러 오히려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구례군민은 이에 고무되고 힘입어 새로운 용기와 희망에 넘쳐서 관민일체가 되어 더욱 열성적으로 지리산국립공원운동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5. 구례군민의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운동 적극 추진


본 원고 제2항 끝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돌이켜 보면 1963년 3월 초에 국립공원 전문학자 김헌규 박사(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당시 지리산원시림 도벌방지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방안으로서의 최선책은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진지하고 감명깊은 조언과 격려를 받게 된 것은 매우 뜻이 깊고 다행한 해결책으로서 “연하반”으로서는 뜻밖의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또 알고 보니 초창기의 불안정한 혁명정부를 상대하기 때문에 수속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울 것 같아서 마음에 부담스러울 것 같았으나 김헌규 박사의 진지한 조언과 격려에 힘입어 결국에 국립공원 추진운동을 결행하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연하반” 회원들은 구례군관내 관공서 주요기관장과 지방유지 여러분들을 직접 방문하여 지리산의 원시림 도벌 현장의 실태를 알림과 동시에 지리산의 자연보전은 장차 구례의 관광개발과도 직결되는 중요사항이니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음이 필수적이라는 취지를 설명 납득케 하여 군민다수의 찬동여론을 조성한 다음, 다음 달 4월 초순에 거군적인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정부요로에 제출할 건의문 작성과 전달할 군민대표선출 등 준비를 서둘렀다.


 군민대회에서 선임된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 임원명단은 아래와 같다.


  회장에 김홍일 함명회사 사장, 부회장 두분에 김무규 선생과 안보진 양조장 사장, 총무에 김용선(지리산개발위원회 총무), 조사부장에 우종수(“연하반” 총무), 홍보부장에 양한익(“연하반” 이사), 그리고 건의서 전달할 군민대표에는 김홍일, 안보진, 양한익, 우종수, 선현수 등 5명으로 선정되었다.

 1963년 4월 말경에 군민대표 5명은 예정대로 상경하여 혁명정부 박정희 최고의장은 면담없이 건의문을 의뢰전달하고, 혁명정부 요로의 내무, 건설, 문교, 농림 등 각 분과위원장은 군민대표 5명이 같이 직접 방문면담으로 건의문을 전달하며, 지리산의 자연보존을 위하여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여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였다.


한편으로 그 당시의 구례군 총 인구수는 약 8만명이었고, 가구 수는 1만 2천 가구였는데 극빈자 2천가구를 제외한 1만가구 회원이 매호당 회비 10원씩(화폐개혁 전의 1천환에 해당)을 자진거출하여 10만원의 군민성금으로 대표단의 서울왕복 경비를 보충하였다.

건의문 전달 후에는 기다려도 오랫동안 혁명정부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더니 그 동안 혁명정부 내의 진전 상황은 많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1961년 5ㆍ16 군사혁명 성공 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성으로 박정희 장군이 의장으로 취임하고, 63년 1월 1일 일반 국민의 정치 활동이 해제되고, 63년 8월 30일 민주공화당 창당대회에서 박정희 의장이 총재에 당선 취임하였다. 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공화당 총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63년 11월 26일 제 6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로 민선국회가 성립, 구성되었으며, 63년 12월 17일 박대통령 취임식 거행하고 제3공화국 성립으로 정부개편 완료되다.


이와 같이 중대 정치적 사건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어떻게 희소식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에는 국립공원 추진에 유리한 사건들도 다행히 일어나고 있었다.

63년 7-8월 동안에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으로 지리산 지역개발조사의 과정에서 국립공원 팀장의 김헌규 박사에 의하여 국립공원 문제가 긍정적으로 부각되었다. 63년 10월 24일 세계국립공원협의회의 국립공원 설계전문가(웰리암 하트씨) 파견 내한으로, 현지답사 조사에 의하여 지리산이 우수한 국립공원 후보지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65년 봄에 이르러서는 정부에서 국립공원 업무부서를 건설부 국토계획국에 공원과를 신설하여 구례출신 박창권(朴昌權), 공원과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이 63년은 제3공화국 성립으로 정부업무가 안정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립공원 문제도 여러 상황 변화로 인하여 정부의 호응과 관심도 매우 호전되어가고 있었으니,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는 이에 고무되어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서둘러 추진운동을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66년 3월 하순경, 그동안 노심초사 기다렸던 3년 만에 다시 제2차로 종전방식의 요령으로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건의진정서 5부를 작성하여 종전과 같이 군민대표 5명이 상경하여 개편된 새 정부 요로의 각 장관들을 직접 방문하고 건의진정서를 전달하며 선처를 간곡히 호소하였다.

한편 제2차의 경비조달은 군민회원 매가구당 20원씩의 1만가구 회원찬조로 모금된 20만원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당시의 농촌 경제사정이 식량부족 등 극도로 어려웠던 터에 그 금액의 다소보다도 군민 1만가구 회원 전원의  자진찬조의 물심양면의 열성어린 협조정신이야말로 구례군민의 뜨거운 애향정신과 소망과 지리산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열정어린 표출이 어찌 아니리오.


6. 우리나라 제1호 지리산국립공원의 탄생


 1966년에 이르러서는 국립공원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반응이 크게 나타나 건설부 국토계획국 내에 국립공원 업무를 관장하는 공원과 직제가 구성됨에 따라 박창권 초대공원과장의 주관으로 그 해 6월에 지리산국립공원 기본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 공원과의 요청으로 “지리산국립공원추진위원회”의 우종수 조사부장이 지리산 현지답사와 기본조사에 동참하여 협조하였으며, 동년 9월에 46배판 368쪽에 달하는 “지리산국립공원 기본조사보고서”가 발간되어 국립공원의 심사와 지정설치에 필요한 기본자료가 마련되었다.

한편으로 63년 11월, 공화당 구례광양지구의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현재(李賢宰) 의원은 국회내 건설분과위원과 정부 내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을 겸임하게 됨에 따라 국립공원위원회 부위원장 김헌규 박사와 더불어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추진에 대한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건설부 박창권(朴昌權) 공원과장 실무자와 합심하여 서로 협조가 잘 이루어짐에 따라 다행히 국립공원 지정업무는 매우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다.


 67년 3월에는 국립공원법의 제정을 보게 되었으며, 동년 11월 20일에는 16명으로 구성된 국립공원위원회 위원의 임명위촉이 있었으며, 동년 11월 24일에는 제1회 국립공원위원회 회의에서 지리산이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ㆍ결의가 된 다음, 동년 12월 27일에는 국토종합계획 심의회를 통과한 후 1967년 12월 29일 드디어  지리산국립공원의 지정이 건설부장관에 의해 공고ㆍ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8만 구례군민과 “연하반”은 63년부터 국립공원 지정운동을 시작한 지 5년만에 어렵게 성취할 수 있었던 대망의 숙원사업 성공의 기쁨을 모두 함께 큰 감동과 보람으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국립공원 지정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구례 연하반”은 지리산국립공원 창설의 역사적인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12월 29일부터 그 이름을 “지리산악회”로 개칭하여 부르게됨과 동시에, 우종수 연하반 총무가 회장으로 취임하여 지리산국립공원을 가꾸는데 더욱 전념하게 되었다.


지리산국립공원이 탄생한지 7년 후인 1974년 12월에 건설부에서 발간한 “한국의 국립공원”책자의 서두 연혁난에는 아래와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전남 구례군에서는 관민일체로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 조사에 협조하는 동시에 정부에 국립공원 지정을 건의하는 등 열렬한 활동을 벌였으나 정부에서는 국립공원 부서가 없는 형편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구례군민이 정부보다도 4년이나 앞당겨서 국립공원 추진운동을 제기하고 앞장서서 자연보호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그대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67년 12월에 우리나라 제1호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ㆍ창설된 후에 경주, 계룡산, 한려해상, 설악산 등 국립공원이 연차적으로 이어지며 지정ㆍ설치되어 1988년까지 20개소의 국립공원이 전국적으로 지정ㆍ신설됨으로서 우리의 금수강산은 영원토록 아름다운 자연으로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6ㆍ25동란의 후유증으로 인한 불법 혼란세태로 빚어진 지리산 원시림의 자연파괴 참상에 대한 8만 군민의 통탄과 분노가 표출됨으로서 애향심으로 단합된 구례군민의 드높은 자연사랑 애국정신이 마침내 국립공원 창설운동으로 이어져 크게 자연보전에 기여함으로서 우리 국토의 금수강산을 영원토록 지키게 한 큰 보람은 오래도록 구례군민의 마음속에 크나큰 자랑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 종 수 (전 지리산악회 회장)  2003년 10월 30일



 

 

                                                                   烟霞伴 趣旨文

 

 

太古적 먼 옛날에 白頭山으로부터 뻗어 내린 白頭大幹의 큰 물줄기가 쪽바다 푸른 물결이 그리워 으로 으로 해 힘차게 뻗어 내리다가 굽이쳐 흐르는 蟾津江 푸른 가람에 가로막혀, 精氣가 우뚝 솟아 멈추어 섰다는, 由緖깊고 傳設어린 智異山南麓, 三大三美天符地에 자리 잡은 風光明媚하고 山紫水明烟霞鄕 求禮! 여기 烟霞人들의 모임이 있으니 烟霞伴이라 부른다.

 

烟霞元來 山水 卽 自然을 뜻하는 말이고 보니, 自古世俗的 富貴功名浮雲처럼 여기고 俗塵을 떠나서 閑雲野鶴을 벗 삼아 樂山樂水 鴉遊養氣하는 賢人達士烟霞人이라 불렀다. 이에 옛 烟霞人들의 鴉趣를 동경하고 또한 아름다운 眞善美淸淨自然과 짝한다는 뜻으로 烟霞伴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烟霞伴情緖的 自然愛護憧憬하는 이 고장 山岳人들의 自生和同의 모임인 것이다.

 

우리 烟霞伴은 끝없는 대지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山水自然하여 젊음의 浪漫情熱을 한껏 쏟아 삶의 보람을 찾아보자는 것이며, 淸淨無垢大自然純潔廣場에서 無言感化속에 天地浩然英氣高邁人間精緖를 길러 心身修養을 닦아보자는 것이며, 또한 날로 荒廢化 되어가는 조국강토의 自然愛護하여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보자는 것이니.

 

大地를 맑게 누비며 흐르는 맑은 물줄기와, 山野를 곱게 덮은 原始林의 푸른 숲은 人類發祥源泉이요 原始文化搖籃地이며, 또한 人類唯一한 꿈이요 마음의 故鄕임을 想起할 때, 오늘날의 우리 民族祖國江山荒廢하여 마음둘 곳 없는 精神的 失鄕民이 되어가고 있음을 自覺하고 痛歎하는 바, 이에 우리 烟霞伴은 잃어가는 綠地帶 마음의 푸른 故鄕을 다시 찾으려는 自然愛護運動先驅者되어 一草一木에 대한 愛育之情一毫一鱗에 대한 惻隱之心으로 祖國江土를 사랑하는 民族的 情緖運動의 줄기찬 噴水가 되고저 自負하고 이 땅위에 自然愛護烟霞運動을 저마다 고장마다 일으켜 이름 그대로 地上樂園! 錦繡江山을 이룩하는데 寄與하고져 함이니. 江土 위에 아름다운 自然이 다시 蘇生하여 우리 겨레가 마음의 故鄕을 다시 찾게 되는 날 祖國江土의 삶 위에 보람의 瑞光은 더욱 빛나리.

 

                                                                    195555日 求禮烟霞伴會員一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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