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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8.06.14|조회수474 목록 댓글 0

지리산 


지리산은 한반도 등뼈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가장 남쪽에 있는 산으로 3개도(전라남도,전라북도,경상남도) 5개 시,군(남원시,구례군,하동군,산청군,함양군)에 걸쳐 있고, 그 둘레가 약850리, 국립공원 지정 지역만 해도  넓이가 440.485평방km(지정당시 면적)인 큰산이다.


예로부터 삼신산(금강산.지리산.한라산)의 하나로 불려지는 지리산은 조선시대 묘향선인 서산대사는 금강산은 빼어났으나 장엄하지 못하고(金剛秀而不壯), 지리산은 장엄하나 빼어나지 않았고(智異壯而不秀), 묘향산은 빼어나고 장엄하다(妙香亦秀亦壯)고 평하였다.


지리산은 6.25이후 입산 금지지역이었으나, 1955년 4월 구례중학교 교사 몇명이 구례경찰서에서 입산 허가를 받아 6.25이후 최초로 노고단을 등반하였다, 이분들은 1955년 5월5일 등반모임인 “연하반”을 결성하여 지리산 등반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지리산은 1957년 “연하반”에서, 화엄사-노고단-반야봉-세석평전-연하봉-제석봉-천왕봉-중산리 종주코스를 개척 하였다, 연하반은 종주코스를 개척한후 등반로를 정비하고, 이정표를 설치하며 종주능선상에 샘을 발굴하였고 무명봉우리의 이름을 지었으며 등반 지도제작에 착수하여 1962년 지리산 등반지도를 완성하여 무료로 탐방객들에게 배포하였다


연하반은 1950년대 후반부터 지리산의 숲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당시엔 건축재.땔감으로 많은 목재가 필요한 시기였으며 우리나라 온산이 벌거벗은 상태였다, 강원도 와 지리산등 높은 산에 남아있는 나무들도 남벌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1963년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정부 요로에 건의하였다.

1967년 마침내 지리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1호로 지정을 받게 되어 그나마 지리산의 자연이 지켜지고 있다.


                                       연하반이 1957년부터 착수하여 1962년에 완성하고 65년에 보완한 지리산 최초 등반지도

 

 

지리산은 야생의 땅


 지리산국립공원의 면적은 국제적으로 자연보전을 위한 “보호지역” 지정시 권하는 최소면적인 400평방km를 넘는 438.9평방km(1998.7 )이다, 지리산국립공원은 해발 700m를 기준으로 지정되었으므로-낮은 지역도 우수지역은 포함- 그보다  넓은 지리산권은 한반도 남단 고유의 자연생태계를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리산권도 자연생태계 먹이 사슬 최 상층부 동물인 호랑이가 살아가기에는 부족한 넓이다. 호랑이는 일 년에  대형 포유 동물인 멧돼지,노루,고라니 등을 60여 마리 이상 잡아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살아갈 수 있으려면 먹이가 되는 대형 포유 동물들의 개체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대형 포유동물의 개체수가 안정되려면 포식자, 질병 등에 희생될 개체수를 감안하여 약 300마리의 대형 포유동물이 안정적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여 학자들은 지리산에서는 호랑이가 2-3마리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한다. 호랑이가 향후 백년동안 유전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50개체 이상은 서로 접촉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지리산은 호랑이가 살아갈 수 있는 땅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지리산에 가까스로 살아있는 표범(2-3마리 추정2002년)도 인간이 간섭해 주지 않으면 호랑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리산의 자연 생태계의 먹이 사슬 최상층부 동물은 반달가슴곰이다. 지리산은 반달가슴곰이 150여 개체는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현재 지리산에는 야생 반달가슴곰이  5-8마리가 살고 있다. 이 야생곰들도 근친교배에 의한 폐해로 20년 이상 지탱하기 힘들다는 것이 통설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지리산의 곰이 안정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곰을 방사하고 있으며, 30마리의 곰을 더 방사할 예정이다.


 지리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달가슴곰(329호), 사향노루(216호), 수달(330호), 하늘다람쥐(328)등 포유류 36종(2004,무산 쇠족제비 서식확인 추가)과 조류 88종, 어류 29종, 양서류 11종, 파충류 27종이 서식하고 있다. 19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대대적인 산림의 남벌은 억제되어 숲이 비교적 잘 보전되고 있고, 1996년부터 밀렵퇴치를 위한 민간단체(지리산생태보존회)의 활동이 강화되어 야생동물의 개체수도 크게 증가하고 있다.

 생명체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 종이 사라지면 그 종과 연관된 약10여종이 멸종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물은 알칼로이드등 약 10만 가지의 화학 물질을 합성하여 번식, 다른 종과의 대화, 천적으로부터 방어 등에 활용하여 생존하고 있다.  인간은 먹이는 물론이고 자연생명체들이 합성한 화학물질을 취하여 유용하게 활용한다. 아직 인간이 발견치 못한 유용한 물질을 함유한 종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생존도 비례하여 건전치 못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웃으로 반만년동안 함께 살아온 다양한 생물 종들이 가까스로 살고 있는 지리산은 적극적으로 보전 되어야 할 야생의 땅이다.


 1972년 지리산악회 우종수 회장님은 “국립공원협회”에서 발행한 창간호 “錦繡江山”(계간지)에 지리산의 대표적 경관 열곳을 선정하여 "智異山 10景"을 발표하였다.

노고단운해, 피아골단풍, 반야봉낙조, 벽소명월, 세석철쭉, 불일폭포, 연하선경, 천왕봉일출, 칠선계곡, 섬진청류(1972년 발표된 순서에 따름) 이다.


                                     2002년 지리산에 반달곰 복원 시험용으로 방사한 막내라는 곰

 

 

노고단 이야기


1936년 8월 5일자 조선일보에 주필 서춘(徐椿)이 연재한 “남조선 편력기행”에는 “지리산통로 구례”라는 제목으로 노고단과 지리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고래로 “지리산은 전라도 지리산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명산에 소지를 올렸는데 지리산에 올린 소지는 타지 않아  불복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는 옛 이야기가  있으며, 전라북도 남원 광한루에서 전라도 선비들과 경상도 선비들이 시회를 하다 서로 지리산 주인이라 주장을 하여, 좋은시를 짓는 편이 지리산을 갖기로 하였는데 전라도 선비들이 이겨 지리산이 전라도 지리산이 되었고 이러한 내용을 현판에 새겨 광한루에 걸어놓았다는 전설같은 얘기도 있다.


아무튼 전라도 지리산중에 있는 노고단(老姑壇.1507m)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이다, 지리산 서쪽 끝에 우뚝 솟은 산을  吉祥峰이라고 하는데 그 봉우리에 단을 쌓아 노고(老姑,할미)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노고단이라 하였다,  노고(老姑,할미)라는 이름은 지리산 산신 仙桃聖母를 존칭하는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길상봉에 오르면 동쪽으로 반야봉-세석평전-천왕봉까지 주능선으로 연결된 지리산의 주봉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동남쪽으로는 남해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을 조망할 수 있으며, 남으론 광양 백운산이, 서쪽으로는 광주의 무등산이 우뚝서있고, 북으론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만복대등 서북능선이 조망된다. 길상봉은 지리산에서 지리산을 조망하는 최고의 봉우리라 할 수 있다,


 지리십경에 노고단의 운해를 제 일경으로 발표 하였는데,노고단 운해(雲海)라 함은 밤에 섬진강,엄천강 등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산 아래로 낮게 깔려 구름 바다처럼 보이고 구름 바다 위로 산봉우리들이 섬처럼 떠있는 노고단에서 조망하는 정경을 말한다. 골짜기 아래 세속의 흔적들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끝없는 운평선위로 산봉우리가 섬처럼 떠있는 정경은 태고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운해는 가을에 많이 형성된다. 운해의 모습은 계절에 따라, 조망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겠으나, 원추리가 피는 여름 달밤에 보는 운해를 제일로 꼽고 싶다. 늦은 밤 하늘엔 밝은 달과 무수히 많은 별이 빛나고 원추리 꽃밭아래 하얀 구름바다는  끝없는 운평선을 형성한다.


운해가 노고단의 1경이라면 2경은 “산상의 화원”이다.  노고단은 약 30만평의 고원이 형성되어있다. 고원엔 실개천이 흐르고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피고 진다. 봄에는 철쭉꽃, 여름에는  원추리, 가을에는 구절초가 대표적인 꽃이다. 노고단에는 1920년대에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활동하는 외국 선교사들이 풍토병을 피하고 교육, 수양을 위해 휴양관을 건립하였다. 1922년 천막을 치고 시작한 휴양지는 1928년 18채의 석조건물을 건립하였고, 이후 58동의 건축물이 들어서 유럽풍의 산상 마을이 형성 되었다. 이곳은 일본과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이용하기도 하였다. 1935년 스웨덴의 왕립 박물관에서 조선의 생물상을 조사하고 그 표본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견된 슈텐 베리만(Sten Bergman)은 노고단을 방문한 소감을 저서인“한국의 야생동물지”에서  "4,200피트 높이의 정상에 위치한 몇 채의 크고 작은 유럽풍의 오두막과 별장들은 낙엽송들이 그늘을 드리운 사이에 있었다. 노란백합(원추리), 붉은 봉선화(물봉선화) 보라색 제라늄(둥근 이질풀)을 도처에서 볼 수 있었고 다양한 수풀들과 온갖 꽃들이 만발하였다. 지리산은 여름철을 보내기에 황홀한곳이었다”고 피력 하였다,


노고단은 여순 사건과 6.25를 맞아 대부분의 건물들은 파괴 되었고, 산불이 발생하여 키 큰 나무들이 모두 불에 타서 초원이 형성 되었다. 초원엔 원추리, 둥근 이질풀, 동자꽃, 곰취, 물봉선화 등이  무리지어 피었다.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까지 노고단은 '산상의 화원'을 형성한다. 몇 년 전부터 야생화가 관상용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탐방객들이 귀한 꽃들을 캐가면서 앵초, 복주머니난, 물매화등은 쉽게 볼 수 없지만 길상봉 부근에는 숨어있는 복주머니 난의 군락지가 있으며 눈여겨  보면 숨어 있는 많은 꽃들을 볼 수 있다. 원추리는 알뿌리를 멧돼지가 파서 먹기 때문에 군락지 형성이 쉽지 않다.  6.25이후 노고단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멧돼지들의 접근이 차단되어 유래 없는 원추리 군락지가 형성되었다. 1970년대 초에 노고단의 원추리 군락지는 절정이었다. 지리산악회에서는 봄에 철쭉제(제1회,1973)와 여름에 산나리(원추리)잔치(제1회,1974)를 개최하여 지리산으로 많은 등산인 들을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이후 너무 많은 등반인들이 산을 찾아 국립공원 지역 내에서는 축제를 하지 않게되었다.


노고단의 화원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신갈나무등 키 큰 나무들이 자라나 초원이 잠식당하고 있다. 기후 온난화로 키 큰 나무들은 더 높이 서식지를 확장할 것이다. 아름다운 산상화원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탄생하고 생장하며 절정기에 이르며 소멸하는 자연의 순환이지만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길상봉 주변과 KBS방송국 중계소 가는 길에 원추리 군락지가 남아있다. 야생화는 화창한 날보다 구름이 껴있는 날에 선명한 색이 살아나며 촉촉한 질감이 느껴진다. 실비 내리는 날 낮은 바람에 무리지어 춤추는 원추리 군락지의 정경은 환상이다.



피아골이야기-1

 

                                           왼편부터 우종수님,손명수님,고재원님,이재연님, 함태주님

 

피아골 


 노고단에서 임걸령 가는 길로 20분쯤 가면 등산로 오른편으로 비목이 있다. 1982년 5월 23일 지리산악회에서 지리산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밤나무로 만들어 세웠다, 현재 나무에 가리고 등산인 들이 돌을 쌓아 비목 상부만 보이지만, 세울 때만 해도 지리산악회 회원들이 격식을 갖추어 세웠다. 이 비목을 세운 것은 1970년대 초(69년?)초겨울에 고흥(?)에서온 고등학교 3학년 학생 3명이 세석쪽에서 노고단으로 오다가 폭설을 만났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기온이 크게 떨어져 시간이 지체되어 밤이 되었다. 기진맥진하여 돼지평전에서 능선을 타고 오다 현재 비목이 서있는 곳에서 노고단 쪽으로 100m쯤 오다가 주저앉고 말았다. 노고단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이 학생들은 담요를 둘러쓰고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데 그 중 한 학생이 친구들에게 이대로 있으면 모두 죽게 생겼으니 내가 노고단에 가서 도움을 요청 할 테니 이 자리에서 떠나지 말고 있으라고 당부를 하고 혼자 노고단을 찾아 떠났다. 이 학생은 천신만고 끝에 노고단 이 영감님 초가집에 도착하여 문을 한 번 때리고는 쓰러졌다. 당시 이 영감님은 밤에 집 밖 처마 끝에 항상 석유램프를 켜놓았었다. 이 영감님은 잠결에 문을 할퀴는 듯한 소리가 나서 잠을 깨어 짐승이 문을 할퀴었는지 생각하면서 귀를 기울이니 문밖에서 사람의 신음 소리가 나는지라 나가보니 학생이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방으로 떠메어 들여놓고 보니 의식이 없어 온몸을 주무르고 이불로 덮어주니 학생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난 학생은 친구들을 찾는 것이었다  친구들을 두고 왔는데 그만 잠들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노고단에 주둔했던 군인들에게 연락하여 현지로 달려가 보니 한  학생이 담요를 둘러 쓴 채로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 학생은 구조되었으나 한 학생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가 없었다. 다음 해 봄 눈이 녹은 뒤에 이학생의 시신이 돼지평전에서 발견되었다. 방향감각을 잃어 다시 오던 길로 갔던 것이다. 다시 바람이 세찬 눈보라가 날리는 능선으로 되돌아간 학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고산에서 눈보라를 만나면 눈을 뜰 수 없고 숨쉬기도 어렵다. 1970대 초에 노고단 산장에서 함태식씨를 도와주고 있었던 김주완씨는 천왕봉에서 노고단으로 오다 눈보라를 만나 얼마나 힘들었던지 치아가 솟아버려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남아 있었던 학생에게 왜 혼자 나서는 학생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말릴 힘만 있어도 같이 나섰을 텐데 힘이 없어 남게 되었으며 나선 학생은 ‘엄마~ 엄마~’를 부르며 갔다는 것이다. 눈이 없다면 초가집을 30분 남겨놓은 곳이었다. 후일 지리산악회에서는 이 학생이 숨진 지점에  비목을 세우고 이학생의 영혼과 지리산에서 숨져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목을 세웠다. 현재 비목은 등산인들이 하나 둘 놓은 돌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비목을 지나면 남쪽으로 시야가 터지는 골짜기가 피아골이다, 위에서 보면 피아골 오른쪽 경계는 노고단에서 질매재-문바위등-왕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며, 좌측은 삼도봉(날라리봉)-불무장등- 통꼭봉-황장산으로 이어지는 불무장등 능선이다.

 

 

                          철다리 왼편 아래 바위에 지리산악회에서 쓴 삼홍쏘 표시가 있음

 

아~~~~피아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골짜기


 피아골은 단풍이 아름다운 계곡이다.  피아골의 아름다움은 봄에 수달래, 여름의 신록, 가을 단풍, 겨울 설화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 가을의 단풍은 지리산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단풍은 매년 좋은 것은 아니고 기후에 따라 특히 좋을 때가 있다, 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할 것이다. 가을에 비가 적절히 오면 지리산 남사면인 피아골 등의 단풍이 좋고 건조하면 지리산 북사면인 뱀사골 등이 좋다, 불꽃처럼 붉은 붉나무(오배자나무)와 개옻나무, 단풍나무의 선명한 색과  우윳빛 구절초, 샛노란 산국꽃, 남색 지리바꽃, 숨어있는 자주색 좀작살나무 열매라도 찾아볼 수 있으면 더 아름답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 실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소리, 숲에서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를 듣고 무슨 새인지 알 수 있다면 더 정겹다,  피아골의 단풍은 우리가 반만년 동안 익숙했던 다양한 빛깔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역어낸 교향악처럼 어울려 한번 경험한 사람들의 가슴에 언제나 큰 울림으로 기억된다.


 피아골의 단풍은 산이 붉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나뭇잎이 맑은 계류에 비치는 수홍(水紅), 사람이 들어서면 사람도 붉게 물드는 인홍(人紅) 그래서 삼홍(三紅)이라 한다. 지리산악회  우종수회장님은  표고막터에서 1km쯤 오르면 계류를 건너는 길에 있는 아름다운 담소를 남명 조식 처사의 시구에서 빌려와 삼홍소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삼홍소는 탁족을 하기에 좋은 장소로(지금은 철다리가 놓여있음) 물이 너무 차가워서 무더운 여름에도 물에 들어가 30초를 견디기가 어렵다. 연하반 원로 고 함태주씨는 삼홍소에서 30분이 넘게 목까지 잠겨서 목욕을 하신 일화로 명성을 얻을 만큼 건강한 분이셨다,


 이분은 우리나라 군악대 창설에 참여하신 분인데 색스폰 연주를 잘하신 분으로  지리산과 섬진강을 좋아하여 집을 구례읍 원방리 섬진강변에 지으시고 등산을 항상 부인과 함께 다니셨는데 자연보호에 대한 뚜렷한 의식이 있었던 분으로 산악회 젊은 회원들에게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시곤 하셨다. 1978년 노고단~만복대 등산 중 필자가 후미에서 가다 에델바이스꽃(솜다리) 다섯 송이를 발견하였다. 지리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에델바이스를 혼자 보았으니, 순간 뽑아서 앞에 가는 분들에게  보여줄 마음도 있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쉬는 시간에 일행들에게 에델바이스를 봤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함태주 원로께서는 당신도 보셨는데 귀한 꽃이라 젊은 사람들이 애인 주려고 뽑아 갈까봐 말씀 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이분은 저에게 젊었을 때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이 들면 좋은 경관과 역사현장을 봐도 감동이 적다고 하시면서……. 피아골의 깊은 숲처럼 조용한 성품과 지리산의 튼튼함을 타고나셨던 고 함태주 원로님은 진정한 연하인(烟霞人)이셨다.


피아골의 어원에 두 가지 설이 있다. 피아골에서 내려가면 첫 동네인  직전(稷田)마을이있다.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마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옛날부터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다는 의미가 바로 피아골의 어원이라고 한다. 또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을 지키던 왕득인을 비롯한 구례의 의병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고, 구한말 고광순의병장등이 연곡사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했는데, 이분들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많이 희생 되었을 때 피가 내를(血川) 이루어 피내골이라고 불렸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도올 김용옥씨는 2006년 8월 구례 실내체육관에서 “구례 문화의 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피아골의 어원은 임진란과 정유재란때 의병들이 희생되어 피가 내를 이룬 연유로 피아골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지리산 깊은 계곡에는 많은 곳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정유재란 당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의병장 왕득인 등 칠의사들이 구례군 토지면 석주관이라는 산성에 주둔하면서 전투를 치뤘는데,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는 지점에 있어 협곡이 좁아 가야 시대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는 군사  요충지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칠의사 중 한분인 왕의성의사가 패퇴한 후 불무장등 능선에서 통곡을 하였다는 유래의  통꼭봉이 있으며, 황왜(抗倭)의 역사 현장인 연곡사가 있다,   여순 사건과 5.25를 거치며 좌우의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984년 현 피아골 산장을 건립할 당시 터를 고르면서 한 트럭 분의 인골이 출토되었다고 산장지기 함태식씨는 증언하고 있다.


피아골에는 무수히 많은 지 계곡이 있다, 지 계곡에 들어가면  빨치산들이나 산에 숨어서 살았을 사람들의 근거지를 가끔 만난다, 이런 곳에서는 주인 잃은 찌그러진 양은 그릇이나 다 썩은 고무신, 깨어진 옹기 조각들이 보이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나 동물이 사는 곳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근거지에는 먹을 수 있는 물이 가까이 있으며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안온한 지역으로, 좌 우는 작은 골짜기들이 겹쳐 있어 외적이 침입했을 시 도망을 갈 때 뒷모습이 상대에게 노출되는 시간이 짧은 지역이다, 큰 골짜기에서는 추적자에게 잘 보이게 되니 공격을 더 받을 수 있다. 그러한 근거지 에서는 흔히  멧돼지의 겨울 잠자리 흔적이 보인다. 우리 인간들도 자연의 일부로 살았을 때 동물의 본능과 학습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동물적 감각으로 먹이를 취하며 생명을 유지 했으리라. 산행중 배가 고프고 지치면 걸을 수 도 없다. 필자도 1970년대 초 세석산장에 짐을 두고 천왕봉을 가볍게 다녀올 생각으로 빵 몇 개를 들고 나섰다가 천왕봉에서 시간을 지체하여 돌아오는 길에 너무 지쳐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촛대봉을 지나 내리막 길을 바지가 헤어지든 말든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온 경험이 있다.    동물들은 먹이에 생명을 걸고 집착한다. 멧돼지는 늦은 겨울에 약14시간을 노력해야 배를 불린다고 한다. 먹이가 없는 1월부터 침엽수림 아래 낙엽 속에 있는 손가락 절반 크기의 버섯을 찾아 먹거나 칡을 캐어 먹는다. 칡을 캐어 배를 채워야 하니 그 노력이 얼마나 처절한가?

동물을 생포할 때 특정한 먹이로 유인하면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포획되고 만다. 불과 60여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가? 운조루의 일기를 보면 “마을 주민들이 소나무 속껍질(송쿠.송키)을 벗겨 먹기  위해 운조루 뒷산의 소나무를 벨 것을 허락했더니 나무 찍는 도끼소리가 쩡쩡 울려 마음이 아프다”고 기록하였다. 현시대의 사람들은 배불리 먹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물들은 생존을 위하여 독성물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떫은맛, 쓴맛, 신맛, 매운맛등 자극성 맛이 나는 것은 독성물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나 나물 등을 채취하여 식재료로 쓸 때는 이제 막 피어나 부드럽고 독성물질이 덜 증가 했을 때 채취하여 활용한다.  도토리, 밤, 덜 익은  과일 등에는 떫은 맛이 나는 탄닌을 함유하고 있다. 동물이 탄닌을 많이 먹게 되면 잘 소화되지 않고 배앓이를 하게 된다, 야생동물들은 탄닌을 섭취하게 되면 그것을 중화시킬 수 있는 적정한 양의 사포닌을 함유한 식물을 먹는다고 한다. 야생동물은 산에 불이 나면 유독 물질을 흡수하는 해독제로 숯을 섭취하려고 모여들고, 독성물질을 중화 시키거나 유용한 물질을 취하려고 흙을 먹는다고 한다.

지리산 도처에는 혹독한 자연에서 살아 남으려는 빨치산들의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 남아있다. 빨치산들도 설사를 하면 이질풀을 다려먹거나 숯을 먹었다고 한다.  빨치산들은 야생동물이 먹는 도토리, 딸기, 나물, 나무 새순등 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따먹었다. 정지아씨의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에는 ‘야산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고 노곤 노곤한 봄볕에 새 생명이 움터오는 아름다운 봄이었지만 빨치산 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춘궁기의 시작이었다……. 식량이 바닥나 하루를 굶은 채 야산으로 내려오자 취와 쑥이 제법 먹을 만하게 자라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쑥과 취를 뜯어 소금만 넣고 항고에 삶아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고 쓰여 있는데,  빨치산들이 극한 상황에서 무었을 먹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빨치산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연기가 가장 적게 나는 곰삭은 청미래 덩굴(맹감나무)과 싸리나무로 불을 피우는 등 자연물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피아골은 인간이 자연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흔적이 곳곳에 있다.


피아골 이야기-2

 

피아골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직전부락이다.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직전부락 산아래첫집까지 포장도로이다.

승용차는 산아래첫집 직전의 통제선 까지 오를 수 있다.  선유교를 건너면서 계곡 길이 시작되는데 선유교 건너 표고막터를 지나 울창한 숲과 계류를 끼고 오르는 피아골 대피까지 구간이 가장 아름답다.

피아골대피소에서 왼쪽으로 질매재로 오르면 문수대를 거쳐 노고단으로 오르며(등산로폐쇄) 대피소 우측으로 5분쯤 오르면 불로교 지나 용수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계속 계곡 길을 따르면 용수암을 거쳐 삼도봉으로 올라서고, 왼쪽 지능선 길을 오르면 임걸령 서쪽 안부 삼거리로 이어진다.

삼거리에서 임걸령까지는 약 2.5km로, 매우 가파른 길이다. 폭우에 의해 많이 파여 나간 구간을 따라 나무계단으로 만들어놓았지만, 계단 턱이 너무 높아 한발 한발 오를 때 마다 힘이 많이 드는 길이다. 내려올 때도 무릎과 허리에 충격을 주게 되니 천천히 내려와야 한다, 산행을 많이 한 분들이 나이 들면 무릎과 허리가 좋지않아 고생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무거운 배낭을 지고 내려올 때 급히 내려오면서 허리와 무릎에 충격을 많이 주어 그렇다. 산행시에는 귀찮더라도 스틱을 가지고 다녀 허리와 무릎에 주는 충격을 최소화 하는 것이 좋다.

삼거리를 지나 임걸령 고갯마루까지 체력과 지구력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1시간 반은 족히 걸린다. 따라서 너무 한 번에 오르려 하지 말고 쉬엄쉬엄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하반은 1966년 피아골 상류 노고단에서 문수대를 지나 질매재-피아골 삼거리(현 대피소)-직전부락코스를 개척하여 이정표를 설치하였고, 노고단에서 대판봉을 지나 임걸령 못미처에서 피아골 삼거리코스는 1971년에 개척하였다.

 

                                      노고단에서 KBS방송국 중계소앞 으로 피아골 가는 길에 있는 문수대입니다

 

피아골 하류 연곡천은 화개천과 함께 지리산 자연생태계의 중요한 하천이다. 섬진강을 통로로 바다와 연결 되어있다. 지리산 북부 엄천강, 경호강은 진주 남강댐에 막혀 바다에서 강과 계류로 또는 역으로 이동하며 서식하는 어류들의 이동이 차단되었지만 지리산 남부의 서시천, 화엄천, 문수리 덕은천, 피아골 연곡천, 화개천은 섬진강을 통하여 바다로 열려있어, 바다와 강을 오가며 사는 은어, 황어, 참게, 뱀장어, 농어 같은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3월말경 지리산에 봄비가 와 섬진강의 수량이 늘어나면 바다에서 사는 황어들이 산란을 하기위해 섬진강을 오른다. 황어들은 섬진강에서 산란을 하는데 연곡천과 화개천 입구도 중요한 산란처이다. 산란은 밤에 이루어지지만 아침까지 계속된다. 연곡천 맑은 물에서 수많은 황어 무리들이 산란을 하는 광경은 경이롭다. 황어가 산란을 하면 계류에 사는 어류들이 황어 알을 먹기 위해 분주하다. 바다로부터 오른 황어는 겨우내 꽁꽁 얼었던 섬진강과 지리산을 깨운다. 황어들은 산란을 하면서 서로 암컷을 찾이 하려 몸싸움을 하다 물밖으로 튀어 나와 죽기도 한다. 삵,너구리,족제비는 물가를 어슬렁거리다 죽은 황어를 물고 가거나, 직접 얕은 물에 들어가 사냥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는 지리산의 반달곰들이 황어를 사냥하는 것을 볼 때가 있을 것이다. 황어는 바다의 에너지를 지리산에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계류에 살던 은어가 9-10월에 강에서 산란을 하면 부화된 새끼가 바다(기수면)로 내려가 살다가 다음해 4월경에 강을 거슬러 올라 강과 계류에서 서식한다, 피아골 깊숙이 살고 있는 생명들이 바다와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강들이 오염되었거나 강 하류에 댐이 축조되어 바다와 연결되는 하나의 자연생태계가 단절되고 있지만 피아골 연곡천은섬진강을 통하여 바다와 열려있어 자연생태계의 연결고리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지리산 계곡 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깨끗하여 상류에서 오염되어 흘러온 섬진강에 합류하면서 섬진강물이 현저히 깨끗해진다. 피아골 연곡천 수계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쉬리, 꺽지, 자가사리들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섬진강 수계중 지리산 계류는 수  생태계의 보고다.

 

1998년 큰 홍수가 났을때 피아골 계류의 입구인 외곡부터 국립공원 경계지점 하천에는 수해복구 공사를 하면서 계류의 돌을 들어내 시멘트를 발라 양안에 축대를 쌓았다, 자연하천의 아름다움과 자연 생태적 가치를 모르는 지자체들의 무지의 소산이다. 어찌 지자체들만을 탓할 수 있으랴.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이런 환경 훼손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조원의 예산을 들여 청계천을 복원하고 있는 시점에 오히려 돈을 들여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한 우리의 현실이다. 가까운 미래에 연곡천은 복원 되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자연 생태적 소양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


무더운 여름 도시에서 열대야 현상으로 잠을 설친다는 뉴스가 전해지는 날 밤에는 피아골 계류에서 오래 목욕을 해도 춥지 않고 시원하다. 연중 기온이 높은 며칠쯤은 오래 몸을 담글 수 있다, 국립공원 지역 내에는 목욕이 금지되어 할 수 없지만 국립공원지역 밖에서는 할 수 있다. 피서 철에는 연곡천에서 목욕하는 사람들이 사용한 비눗물이 쌀뜨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무심코 저지르는 일이지만 어류들에겐 치명적이다. 비누만 사용치 않는다면 어류들도 인간의 목욕을 반겨줄 것이다. 인간들의 때는 어류의 훌륭한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무더운 초저녁 산간 계류에서 세상을 훌훌 벗고 목까지 잠겨서 계곡을 가로로 흐르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면. 귀신새(호랑지빠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무서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수리부엉이의 우~억 우~우억 계곡을 울리는 울음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일상의 틀 속에 묶여 살던 조급함을 버릴 수 있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지리산을 사랑하는 자 만이 누릴 수 있는 지리산의 깊은 맛이다.

 

                                                        피아골 대피소 앞에서 함선생님과

피아골에는 함선생님이 오래 사셨다. 현재 피아골 산장지기인 함태식씨는 구례에서 천석을 하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희 전문학교를 나오신 분으로 풍모도 걸출하시고 성격이 호방하신 분이다. 1973년 지리산악회의 권유로 노고단 산장에 산장지기로 입산한 후 지금까지 지리산에서 사셨다. 연하반의 회원으로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함선생님은 연하반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등산로를 개척할 때 함께하여 천왕봉에서 천주(천왕봉 서쪽 암벽에 음각되어 있음)를 우연히 처음 발견하였고, 국립공원 지정 운동 때도 일익을 하셨다. 노고단 산장지기를 하실 때 올바른 등산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산에서는“조용히” 깨끗이“를 실천하기 위해 야영지에서 기타를 치거나 카세트 녹음기를 트는 사람들에게는 불호령을 날리는 지리산 호랑이였다. 1974년 지리산악회에 노고단 ”산나리(원추리)잔치“를 제안하여 노고단의 원추리 군락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필자가 1회 산나리 잔치에 참석했을 때는 하늘의 별자리를 설명해주고 밤에 운해를 볼 수 있도록 안내해 주시기도 하셨다. ”노고단 운해를 보시다가 “운평선“ 이라는 신조어를 만드시기도 한 함선생님은 지리산악회 부회장으로서 지리산을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셨다. 당시 노고단에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에 ”국토건설단“들이 닦아논 비포장 길이 노고단까지 나있어 군인들의 부식을 보급하는 군용 트럭이 한 달에 한 번씩 노고단을 올랐다. 군용 트럭이 내려올 때 군인들이 성삼재-노고단 구간에서 미리 베어놓은 아름들이 나무들을 싣고 내려와 재재소에 팔아 먹었다. 함태식씨는 이러한 정보를 지리산악회에 알렸다. 우종수 회장님은 군용트럭이 노고단에 올라오는 날 하산하는 등산인편에 쪽지를 보내 연락해 주도록 하였다. 몇 일후 등산인이 함태식씨의 쪽지를 가지고 왔다. 우종수회장님은 지리산악회 회원들 몇 명을 소집하여 구례 광의면 파출소로 가서 군인들이 노고단에서 도벌한 나무를 싣고 내려오고 있으니 함께 가서 적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역시 군용트럭 가득히 나무를 싣고 내려왔다. 구례 경찰서에서는 적발은 했으나 난감한 표정이 역역했다. 당시는 군인들의 위세가 막강했던 시절 탓이다. 다음날 노고단 주둔군 연대의 연대장이 지리산악회를 찾아와 다시는 나무를 베지 않겠다고 사과하면서 취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현재 성삼재-무넹기 구간의 오른쪽에는 큰 나무들이 없다. 길로 끌어 내리기가 쉬워 당시 군인들이 큰 나무를 베었기 때문이다. 함선생님은 노고단 산장지기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여 등산문화의 틀을 잡아나갔다.

 

1970년대 초부터 1988년 천은사~성삼재~노고단 도로가 포장되기 전까지 노고단산장은 지리산의 꽃이었다. 많은 유명인들이 노고단을 찾았고 함선생님은 훌륭한 지리산 안내인 역할을 하셨다. 함선생님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노고단에 대피소를 신축하고 직영하기로 결정되면서 1988년 피아골 산장으로 옮기셨다. 1996년 필자가 지리산악회 젊은 회원들을 주축으로 “지리산자연환경생태보존회”를 결성하고 반달곰등 지리산권의 자연생태계보호활동을 시작한 이후 함선생님은 격려의 전화를 주셨다. 필자는 피아골 부근에 조사를 나가면 산장에 들려 함선생님을 뵙고 와야 마음이 편했다. 2002년 늦은 가을 피아골 산장에 들렸다. 함선생님은 겨울을 나기위한 땔감을 마련하느라 바쁘셨다. 함선생님은 산장 옆 식당겸 차실인 무애막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손수 원두차를 끓여 내놓으시면서 이 커피는 “블루 마운틴”인데 두성이가 왔으니 특별히 좋은 커피를 대접한다고 덕담을 해주셨다. 옛날 함선생님이 산에 다니시던 얘기를 듣다가 출발했는데, 배웅을 해 주시면서 산장 앞 철다리 끝에까지 오시더니 내가 사람들을 배웅할 때 철다리 끝까지 배웅을 하는데 오늘은 한걸음 더해야겠다고 한걸음 더 놓으시면서 하얀 긴 수염이 흔들리도록 파안대소를 하셨다. 연하반 초창기 맴버중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마지막 분인 함선생님의 건강을 빌면서 하산을 서둘렀다.

함선생님은 지리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신 분으로 지리산에 잠들기를 원하신다. 필자에게 “나 죽으면 화장해서 이곳에 뿌려줬으면 좋겠네” 하시던 함선생님은 2009년 피아골 대피소에서 내려와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생활하셨는데 2011,12,15일 인천에 사시는 둘째아드님 집으로 이사를 가셨다.

 

피아골 입구에는 무수히 많은 계단식 논이 있다, 인간은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확보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저수시설이 없었던 시절에는 한해가 들면 초근목피를 먹으며 살아야 했다. 피아골은 계곡이 깊고 넓어 물이 풍부하다. 평야지대에 극심한 한해가 들어 농산물 수확을 못해도, 피아골 같은 골짜기에서는 종자는 수확할 수 있었다 한다. 피아골 비탈진 계곡에는 계류를 따라 무수히 많은 계단식 논을 만들었다. 땅을 한 뼘이라 도 더 넓히려고 직각으로 석축을 쌓았고, 비탈진 땅이 수평을 유지하면서 더 넓게 하려면 석축의 높이도 높아야했다. 따라서 석축의 높이가 3m를 넘는 곳도 많이 있다. 인력으로 아무리 높게 석축을 쌓아도, 논배미는 올망졸망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논들은 생긴 모양에 따라 다랭이배미(다랑이), 꼬막배미, 삿갓배미라 불렸다. 피아골에는 이러한 계단식 논들이 100층을 넘는 곳도 있다. 굶지 않으려고 대를 이어 만들었을 노고가 눈물겹다.




피아골 연곡사

 

연곡사는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서 가장먼저 들어선 절로 알려져 있다.

8세기중엽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물로 보면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 초에 번창한 절로 보인다고 한다. 연곡사에 남아있는 유물인 동승탑, 북승탑, 서승탑, 삼층석탑 등은 선종계통의 문화유산으로 특히 동부도(국보 제53호)는 “부도중의 부도”라 할 만큼 단아한 기품을 지닌 최고의 걸작품이라 한다. 유홍준의 “3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는 “연곡사의 역사를 살피면서 나는 우리나라 돌문화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새겨보게 된다. ‘연곡사 사적기’라는 것이 제대로 전하는 것이 없어도 통일신라 동부도로부터 조선말기 부도까지 시대를 점철하는 석조물이 있어서 그 면면한 역사를 읽어낼 수 있으니 그것이 돌의 위대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연곡사는 저 아름다운 동승탑이 있어 연곡사의 이름도 빛내고 피아골의 역사적 인문적, 예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아무리 문화유산이 많아도 뛰어난 작품 하나가 없으면 어딘지 허전하지만, 모든 게 사라진 폐허라 해도 그 속에 천하의 명품 하나가 있으면 축복받을 수 있는 법이다. 연곡사 부도가 있는 피아골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연곡사 부도가 없는 피아골 이라면 얼마나 쓸쓸할 것이며, 변변한 문화유산을 간직치 못한 태백산, 설악산, 소백산 어느 골짜기에 이런 명품 하나가 있을 경우 그 산과 계곡이 얻었을 명성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 돌문화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연곡사 동부도는 완벽한 형태미와 섬세한 조각 장식의 아름다움으로 부도중의 꽃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동부도는 도선 국사(827~898)의 승탑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으며 안타깝게도 주인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동부도

 

 

                                                   동승탑 하단의 조각상

 



피아골의 자연이 아름다움의 극치라면 연곡사의 동부도는 사람이 이룩한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닐까? 이 동부도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으로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식은땀이 나는 얘기다. 피아골을 오시는 분이면 연곡사의 부도들을 꼭 한번 만나시길 바란다. 연곡사는 정유 재란 때 1598년 4월 10일 일본군들이 불을 지르고 유물을 약탈해갔으며, 조선 인조 5년(1627년)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요대사 태능(1562~1649)이 다시 복구하였다 한다. 영조 21년(1745년) 무렵의 연곡사는 왕가의 신주목(神主木, 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栗木封山之所”로 지정되어 있었다. 연곡사는 구한말 의병장 고광순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1907년 음력 9월 11일 밤에 일본군이 화개에서 당재를 넘어 습격하여 고광순이 순절하고 다시 일본 놈들에 의해 불타는 통한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의병장의 후손으로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활동을 하다 연곡사에서 순절하였다.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했을 때 구례의 선비인 박태현과 매천 황현은 연곡사까지 걸어가서 고광순의 시신을 수습하고 일꾼을 사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고광순이 순절한 곳에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서 있다. (의병의 이야기는 구례역사의 석주관 칠의사 등 의병에 관한 역사의 이야기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연곡사 아래는 평도 마을이 있고 평도 마을에서 서쪽으로 계곡건너 남산마을이 있다. 남산 마을 노인 분들이 그분의 할아버지에게 들었는데, 1907년 연곡사전투 당시 총소리가 콩을 볶듯 하고 연곡사가 불타면서 엄청난 굉음이 좁은 골짜기에서 울리는데 지리산이 울부짖는 것처럼 느꼈으며 남산마을 북동쪽 산마루에 올라 엎드려서 그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다.

 

연곡사는 “율목봉산지소”로 지정이 될 만큼 옛날부터 밤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그때의 밤나무는 밤이 도토리보다 약간 큰 밤이 열리는 나무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지리산 곳곳에서 가끔 만나는 산밤나무는 밤나무의 원종인지는 잘 모르지만 손톱 크기의 밤이 열리며 당도가 뛰어나 사탕처럼 맛이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화엄사 금정암 여 스님들이 매년 밤쌀(밤을 말려서 껍질을 깐 것)을 가지고 왔었는데, 많이 열리는 해에는 한말씩 가지고 왔었다. 필자의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같은 부피의 쌀과 함께 콩, 팥, 들기름, 참기름을 챙겨 주시곤 하셨다. 밤쌀은 약밥을 지을 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밤에 화롯가에서 할아버님께 옛 얘기를 들을 때 몇 개씩 나누어 주어 사탕처럼 먹기도 하였다. 1970년대 피아골 단풍제를 치를 때만 해도 피아골 주민들이 그 토종밤으로 밤쌀을 만들어 노상에서 팔았었는데 요즘엔 볼 수가 없다. 필자는 화엄사 연기암 부근에 그 밤나무가 몇 그루 있어서 가끔 맛을 보고 있다.

 

 

 

                                                 홍류동


홍류동(紅流洞)

 

남산마을에서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200m쯤 따라가면 넓은 반석이 아름다운 지 계곡이 있다. 현재는 등산로가 폐쇄되어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아 호젓한 계곡이다. 마을주민들은 이곳을 홍골이라 불렀다. 피아골에서도 단풍이 제일 붉은 골짜기 였다는 얘기다. 피아골은 예로부터 연곡사가 있어 당시의 지식인들이 있었고 특히 구례의 역사상 가장 큰 스승인 천사 왕석보(1816~1868)선생님께서 잠깐 생활하기도 하였다. 천사 왕석보는 매천 황현의 스승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대학자셨다. 남산마을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서당이 있었고 어른들은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생활하셨다고 한다. 일제 초기 남산마을의 세분의 선비들이 평생 사이좋게 지냈는데, 홍골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이분들이 이름을 남겨두고 싶었는지 남산마을 서쪽 홍골계곡 암석에 “紅流洞”이라고 음각을 하면서 그 아래 세분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지금도 남산마을 주민들은 이 고사를 떠올리며 서로 양보하여 다툼이 없는 마을로 이름이 높다.

 

옛날 큰길(신작로)이 뚫리기 전에는 구례에서 외곡리 목아재를 넘어 평도롤 거쳐 당재(당치마을 위 고개)를 넘어 화개면 범왕리 목통마을을 거쳐 범왕으로 또는 신흥, 의신으로 쌍계사로 통행을 하였다. 연곡골과 화개골의 통로인 당재(당치)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목아재~당재~목통을 연결하는 옛길로 확정되었다 한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피아골 이 곳 저 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당치마을은 평도 마을에서 연곡사 쪽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데 불무장등으로 오르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당치마을 위 농평마을까지는 승용차가 올라갈 수 있고 농평마을에서 통꼭봉을 거쳐 불무장등으로 삼도봉으로 오를 수 있다. 농평마을은 해발 800m에 있는 “높은 곳의 평평한 곳”이 와전되어 농평이라고 하는데, 풍수 지리적으로 “노호농골(老虎弄骨)이라는 명당터로 이름이 높다. 풍수지리 연구가 들이 구례에 오면 꼭 들렸다가는 유명한 마을이다. 산이나 들 또는 마을에 들어서면 어쩐지 아늑하고 평안한 기분이 드는 곳이 있다, 농평마을은 언제 가보아도 기분이 좋은 마을이다.

 

피아골은 골짜기가 깊고 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비탈진 땅에 석축을 쌓아 많은 농토를 일구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여순 사건 때 피아골에 사는 인구가 1,200 여명이었다고 한다. 지리산의 마을들은 여순사건과 6,25를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곳 피아골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피아골의 마을들은 불태워졌고 주민들은 피아골 입구인 외곡리, 중기, 조동, 기촌 마을 등으로 피난을 하였다. 이주민들은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군,경에서는 피아골에서 농사를 지을 사람들은 매일 아침 8시까지 목장거리라는 곳으로 오면 팔뚝에다 도장을 찍어주고 군,경에서 총을메고 경계를 서주면서 농사를 짓게 했다고 한다. 소는 반란군에게 다 빼앗겨서 몇 사람이 함께 소 대신 쟁기를 끌어 농사를 지었는데 어렵게 수확한 농산물을 산사람들에게 빼앗기기도 하였다 한다.

 

피아골에는 옛날 자식을 원하는 사람에게 자식을 낳아주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종녀(種女)들이 살았다고 한다, 종녀촌에는 성신(性神)어머니가 절대자로서 많은 종녀들과 시동을 거느리고 종녀들에게 순종과 희생을 강요했단다. 성신 어머니의 지배아래 씨받이 종녀들은 팔려가서 아들을 낳아주고 다시 종녀촌으로 돌아왔는데, 딸을 낳으면 종녀촌으로 데리고 와서 그 딸을 종녀로 키워야 했단다, 어머니의 대를 이어 종녀로 살아가야 했던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성신 어머니는 자주 성신굴(性神窟)에서 성신(性神)에게 기원제를 지냈는데 시동과 종녀들을 거느리고 제단에 올라 주문을 올리고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며 성신가를 부르며 요염한 자태로 성신춤을 추었는데, 흥분이 절정에 이르면 젊은 시동과 욕정을 불태웠단다. 종녀촌은 사라졌지만 그렇게 살다 간 종녀들의 외로운 넋이 파랑새가 되어 지금도 슬픈 노래를 부른단다.(1974.4 월간 산 56호에 우종수회장님 발표문을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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