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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반의 지리산개척사-2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5.06.24|조회수108 목록 댓글 0

                연하반 초창기 회원, 당시 구례중학교  최용모 선생님, 현재 노고단 대피소 자리에 돌집의 잔해가 보임

 

반야봉 등반


1955년 노고단을 초등한 연하반은 1956년 여름 반야봉을 올랐다. 당시에는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정순덕씨 1963년에 체포됨) 구례경찰서에서는 반야봉을 오르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다.  연하반은 개개인 인적사항과 등행일정을 상세히 적은 “지리산 입산허가서”를 구례경찰서에 제출하여 허가를 받았다. 산행 인원은 8명이었다. 군용A텐트 4개, 항고, 남비, 군용 수통, M1소총 장착용 대검, 낫, 톱, 군용 야전용 삽등 야영에 필요한 등산장비를 구입하였다. 등산코스는 구례읍 출발 - 화엄사-노고단-대판이봉-임걸령-반야봉(되돌아 옴) 첫날 점심은 노고단에서 밥을 해 먹기로 했으며, 야영은 샘이 있는 임걸령에서 하기로 했다.


구례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도보로 봉북리  숯거리를 지나 서시천 징검다리를 건넌 후 마산면 장동을 거쳐 화엄사에 도착하기 까지 1시간30분이 소요되었다. 화엄사에서 악명 높은 코재(코가 땅에 닿을 만큼 경사가 심한 구간을 일컬어 코재라고 함)를 지나 무넹기까지 3시간이 걸렸다. 날씨가 좋아서 멀리까지 잘 보였다. 현재 노고단 대피소가 있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였다. 샘 주위에는 봐주는 사람도 없이 원추리, 둥근 이질풀, 동자꽃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선도샘(노고단 대피소 부근에 있었던 샘 이름)은 정비가 안되어 있었다. 야전삽으로 물이 충분히 고일만큼 파서 샘을 정비하였다. 밥을 지을 마른 나뭇가지를 줍고, 된장국에 넣어 끓이기 위해 지보(비비추)잎을 뜯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샘 주위에는 곰취가 지천이었다. 질기지 않을 속잎만 골라서 뜯었다. 항고 네 개를 튼실하고 곧은 나뭇가지에 끼우고 양쪽에 받침목을 세워 고정시켰다. 돼지고기를 삶아 쉬지 않도록 된장에 버무려 놓은 것과,  쇠고기를 삶아 칼로 잘게 두드려 고추장에 볶은 반찬이 훌륭했다. 당시에는 순수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제사 때나 명절 때 뿐으로 항고에 나무를 때어 해놓은 쌀밥은 그 맛이 기막혔다.


식사를 마치고 선도샘을 잘 정비해 놓은 후 길상봉을 향했다. 길상봉으로 오르는 길 주변에는 원추리등 야생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길상봉에 오르니 반야봉과 천왕봉이 잘 보였다. 일행은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도록 천왕봉을 향하여 큰절을 하고 길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판이봉을 향했다. 능선에는 군인들이 군데군데 땅을 파고 통나무를 잘라서 덮개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부어서 은폐한 전투용 참호가 있었다. 아직 지리산에 빨치산이 남아있다고 하던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길은 풀이나 조릿대, 키 작은 나무들로 덥혀 있었다. 앞에서 낫으로 치거나 톱으로 썰어가면서 길을 텃다. 대판이봉 부근에 도착하니 원추리 군락지가 나오고 시야가 터졌다. 오른쪽으로 피아골 계곡이 잘 보였고, 반야봉이 가깝게 잘 보였다. 오후 3시 임걸령에 도착하였다. 임걸령 샘도 물은 졸졸 나왔지만 샘은 메워져 물이 많이 고여 있지 않았다. 샘을 정비하고 텐트를 쳤다. 텐트 겉면에는 양초를 여러번 꼼꼼히 칠해   비나 안개로 인한 습기를 차단토록 했다. 일행은 밤새 모닥불을 피우기로 하였다. 등행 계획을 세울 때 이미 토론해서 결론을 얻었는데, 호랑이나, 표범, 늑대, 곰등이 무섭고, 여름이지만 고지대 이니 새벽엔 추울 것 같으니 밤새 모닥불을 피워야 한다는 사람과 빨치산이 두려우니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결론은 맹수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지만 빨치산이라고 하더라고 인간이니 무기도 없는 등산객을 설마 해치진 않을 것이니 불을 피우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밤새 모닥불을 피우려면 많은 마른 나무가 필요했다. 일행은 흩어져 많은 땔감을 구했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큰 돌을 주어 둥글게 놓고 그 안에다 모닥불을 피웠다. 밥을 지어먹고 나니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텐트 바닥에는 풀을 베어 푹신하게 깔고 그 위에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군용 판초우의를 깔았다. 판초우의 위에 군용 담요를 깔고 그 위에 누워 군용 담요를 덥고 자야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 여름이지만 쌀쌀했다.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다행이 바람이 불지 않아 산불로 번질 우려는 없었다. 다들 피곤해서 잠을 자야하는 데 땔감나무를 자주 넣지 않으면 불은 곧 꺼질 것이었다. 오래 타도록 땔감나무 중 가장 굵은 나무를 집어넣었다.  밤은 깊어가고 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미세하게 흐르는 안개였다. 10m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닥불은 여태껏 꺼지지 않고 실연기를 뿜고 있었다.

서둘러 밥을 해먹고 반야봉을 향하여 출발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고 길은 사람이 안다녀서 잘 알 수가 없었다. 낫이나 톱으로 길을 만들어 가면서 오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오르다 보니 절벽 앞에 도착하였다. 반야봉을 올랐던 사람에게 설명을 충분히 들었던 터라 위험하게 절벽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잡고 기다 싶이 올랐다. 절벽을 오르니 위에는 안개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산봉우리들이 구름위에 징검다리처럼 놓여있었다 그 끝에 천왕봉이 우뚝  떠있었다.  뒤돌아보니 노고단도 섬이 되었다. 반야봉은 세상 밖의 세상이었다. 일행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정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지리산은 참으로 장엄하였다.


반야봉에서 미숫가루를 타먹고 쉬고 있으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 구름이 남쪽 골짜기에서 산등성이를 넘어 서서히 북쪽 골짜기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능선의 낮은 골짜기를 넘는 구름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쏟아진 구름은 멀리 가지 못하고 햇볕을 받아 소멸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구름이 걷히니 천왕봉을 향하여 꿈틀거리며 뻗어간 산 등성이가 잘 보였다. 저 능선을 따라 천왕봉에 가야했다. 지리산을 많이 올랐던 사람들에게 많이 물었지만 노고단에서 능선을 타고 천왕봉에 갔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노고단에서 반야봉까지 갔다 온 사람은 많았고, 남원쪽에서 화개재를 오르거나 화개에서 토끼봉을 올라 반야봉까지 다닌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천왕봉을 꼭 오르리라 마음을 다짐하며 하산 길을 서둘렀다.


최초 천왕봉 종주등반


1957년 여름방학을 맞아 천왕봉을 오르기로 하였다. 1955년 노고단 등반을 했었던  강기중선생님 (구례산동 출신), 이규종 선생(구례읍 출신). 윤승호선생 등이 참여하기로 하였다. 몇일이 걸릴 것이니 짐이 무거울 수밖에 없어 포터를 두명 쓰기로 하였다. 포터를 해줄 사람은 빨치산에 붙들려 짐꾼으로 산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분을 찾아 허락을 받았다. 교감선생님도 합류를 하기로 했다. 최종 참가 인원은 구례중학교 교사 7명 포터 2명, 총 9명 이었다. 1956년 반야봉을 다녀온 후 천왕봉 종주등반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장비를 꼼꼼히 챙기고 운동화도 한 벌씩 더 챙겼다. 출발하기 하루 전에는 강기중 선생집 마당에 산행에 필요한 물품을 늘어놓고 점검을 하였다. 포터 두 분은 지개를 가지고 가기로 하였으며. 나머지 물품은 적정히 배분하였다.

1957년 8월 10일 오전 8시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짐이 무거우니 화엄사 계곡을 오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소 5박을 할 예정이니 6일 동안 먹을 식량과 국거리등 짐이 만만치 않아, 코재를 오를 때는 몇 걸음 걷다 쉬다를 반복하였다. 눈썹바위에 올라 한숨을 돌리고 노고단 선도샘이 있는 곳에 오르니 12시가 넘었다.


노고단에 도착하니  꽃 천지였다. 노란 원추리 군락지에서 약초를 뜯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마산면 황전리에서 왔다고 하였다. 한약방에서 이질풀을 뜯어 달라고 부탁해서 뜯으러 왔다고 하였다. 이질풀은 배가 아플 때 먹는 환약을 만드는 재료라고 하였다. 이분들은 곰취 여린 잎과 원추리 여린 순등을 뜯어서 먹어보라고 주었다. 답례로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주었더니 도시락으로 싸온 꽁보리밥을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1956년 반야봉을 오를 때는 길상봉에서 능선을 타고 대판봉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길상봉을 오르지 않고 노고단 고개에서 지름길로 대판봉으로 향해 갔다. 포터로 가신분이 길을 알려주었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노고단에서 점심을 해먹고 첫 야영지 임걸령으로 향했다. 포터로 나선 분은 피아골과 반야봉 일대는 몇 번 가 보았고, 벱실령(벽소령), 세석평전에도 한번 가본 경력이 있다고 하였다.  대판봉에서 쉬면서 피아골 동쪽 능선이 불무장등 능선인데 농평으로 황장산으로 뻗은 능선이라고 설명을 해 주었다.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곳이라고 하였다. 주민들도 그 곳에 가려면 무서워서 여러 명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간다고 하였다. 지리산에서 호랑이 목격담은 흔한 시절이었다.


                                                                          위 사진 뒤에 기록되어 있음

 

임걸령에 도착하여  저녁밥은 두 사람이 준비하고,  모두  땔감을 준비 하였다. 제법 마른  나뭇가지를 톱으로 자르고 잔나무가지를 주었다. 밤엔 호랑이등 맹수의 습격이 무서워  모닥불을 피워야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반야봉을 올랐다. 다행이 날씨는 쾌청하여 멀리 천왕봉이 잘 보였다. 다시 내려와서 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걷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부터는 한 번도 가본 사람이 없어 어디에 샘이 있어서 야영을 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임걸령에서 점심에 먹을 밥을 해서 가지고 가지만, 저녁은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해야 밥을 해 먹을 수 있는데 샘이 있다는 벱실령까지는 몇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으니 걱정이었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웠지만 여름이라 땀이 비 오듯 하였고 쉴 때마다 물을 많이 먹기 일쑤였다. 조금 가니 전망이 좋은 봉우리가 있었다. 오른쪽 계곡은 칠불사, 화개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이 계곡에서 올라오는 고개가 화개재인데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올라온 배에 싣고 온 소금을 화개 사람들이 남원사람들에게 팔기 위해 지개에 지고 오르는 길이라고 하였다. 5,25전에 연동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연동골이라고 했다고 한다. 경사가 심한 길은 내려가니 편편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화개재였다 남쪽은 연동골 북쪽은 뱀사골이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길이라고는 없었다. 나무가 우거져 길을 만들어 나가야 했다. 선두에서 이규종 선생이 길잡이를 하였다. 우거진 나뭇가지를 톱으로 베고 잔가지는 낫으로 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였다. 이규종 선생은 학생 때 축구선수를 한 분으로 신체가 건장하였다.

토끼봉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지쳐있었다. 토끼봉에서 점심을 먹고, 참외 하나와 사탕과 셈베과자를 배분하였다. 저녁을 먹을 때까지 간식거리였다.


다행이 날씨가 좋아 높은 곳에 오르면 앞이 보이니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토끼봉에서 오후 2시에 출발하였다. 해가 오후 8시 경에 지기 때문에 6시30분경에는 야영준비를 해야 했다. 준비한 플래시는 군용 ㄱ 자 플래시 3개와 양초가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는 초지여서 시야가 터지고 가기가 쉬웠으나 봉우리에서 내려서거나 봉우리로 올라갈 수 없어 돌아가야 할 경우에는 한사람이 짐을 벗어놓고 앞을 정찰한 후 다시 전진하였는데. 나뭇가지와 풀들이 얽혀 길을 트고 가기가 너무 힘들고 많은 시간이 걸렸다.

 

                          

                             뱀사골 위 화개재를 지나 길을 찾는 연하반

 

토끼봉에서 출발해서는 자주 쉬지도 못하고 구경도 못했다. 모두들 샘이 있는 벱실령까지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쉴 틈이 없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도 없어 얼마나 가야할 지 올바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일행은 더위와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와의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쳤다. 터널 같은 나무숲을 헤치고 가다가 시야가 터지는 봉우리나 바위지대가 나타나면 살 것 같았다. 해가 반야봉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뒤돌아보는 반야봉은 웅장하고 멋진 봉우리 였다. 얼마나 갔을까, 급경사로 내려가는 길이 나왔다. 내려가는 길이라 숲은 더 우거지고 길을 만들기가 더 어려웠다. 이제 숲속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야~ 물이 있다 물

선두에선 사람이 물을 발견하였다

샘이 아니라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평평한 분지 같은 지형에 한 아름 되는 구상나무, 전나무 숲이 발달하였고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일행은 분주히 나무를 하고 텐트를 치며 야영준비를 하였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된장에 버무려 가지고 온 삶은 돼지고기를 물에 씻어 마늘을  넣고 냄비에 볶았다. 소주를 한잔씩 돌린 일행들은 모두들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키큰나무 숲속을 흐르는 실개천 옆에서 멋진 야영이었다. 연하반은 이곳을 1962년에  연하천이라 명명하였다.


-지리산 종주등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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