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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반의 지리산 개척사-3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5.07.07|조회수97 목록 댓글 0

최초 천왕봉 종주등반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8시에 배낭을 꾸리고 출발하였는데 100m 도 못가서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평지에 가까워 길의 흔적도 없었고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포터로 나선 김씨도 이곳은 잘 알지 못했다. 일행은 그 자리에 머물고 포터 김씨와 이규종선생이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참 후에 돌아왔다. 100m쯤 가니 능선길이 나타났다. 키 큰 조릿대와 나뭇가지들로 얽혀있어 전진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교대로 두 명씩 선두에서 톱과 낫으로 길을 만들면서 전진하였다. 한 시간을 걸어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벱실령(벽소령)까지만 가면 잔돌평전(세석평전)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벱실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길이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먹고, 다시 한 시간을 더 전진하였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길을 만들면서 전진했기 때문에 거리로는 그렇게 많이 이동하지 못하였다. 가다보니 길이 자꾸 내려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을 잘못 든 느낌이 들었다.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전진하는 오른쪽 멀리 큰 산줄기가 희미하게 보이더니 곧 뚜렷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우리는 주능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북쪽으로 뻗은 능선으로 접어들어 길을 잃은 것이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자는 의견과 밥을 해먹어야 되니 물이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밥을 해 먹은 후 진로를 결정하자는 의견으로 갈렸다. 되돌아서면 샘을 찾는 다는 보장이 없으니 계곡으로 내려가서 밥을 해 먹기로 하였다. 30분을 내려가서야 물을 찾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오후 1시가 되었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면 저녁밥을 지을 수 있는 샘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행은 일단 계곡을 따라 하산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을로 내려간 후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서 다시 주능으로 올라서기로 했다. 길도 없는 계곡으로 물길을 따라 내려가니 내려가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고 미끌어지며 내려갔다. 한 시간쯤 내려가서야 마을에 도착하였다. 함양군 마천면 음정이라는 마을이었다. 우리가 내려왔던 능선은 영원사 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이었으며, 밥을 해 먹고 내려왔던 계곡은 광대골이었다.


                                      백무동계곡을 건너 천왕봉을 향하는 연하반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마을 옆 공터에 텐트를 쳤다. 주민에게 물으니 백무동으로 가서 세석평전으로 오르거나 장터목으로 올라 천왕봉을 갈 수 있고, 천왕봉을 곧 바로 오를 수 도 있다고 하였다. 마을에서 닭을 두 마리 구입하고, 솥을 빌려 닭백숙을 끓였다. 주민 몇 명을 초대하여 함께 닭백숙과 막걸리를 먹으며 얘기를 들으니 오늘 우리가 길을 잘못 든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약 한 시간 30분 거리에 벱실령이 나온다고 하였다. 벱실령 가까운 남사면에 샘이 있고, 세석평전으로 가다보면 얼마 안가서  선비샘이라는 샘이 있다고 하였다. 선비샘은 샘 위에 무덤이 있는데, 옛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평마을(여, 순사건 이후 마을이 없어짐)에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던 이씨 노인이 있었는데, 자신은 뼈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남에게 천대를 받는 처지가 한심하게 여겼다. 아래 의신마을에 사는 김선비는 평생 글이나 읽으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잘사는 것을 보고 이 노인은 두 아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능선에 있는 상덕평 샘 위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샘위에 무덤을 만들면 물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니 사후에라도 사람들에게 절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 노인의 무덤이 샘 위에 들어서 사람들이 물을 먹기 위해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그 사연을 들은 사람들은 그 샘을 선비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973년 “山”誌 44호에 ‘선비샘의 전설’ 발표 우종수)


                                                                        통천문에서 기념촬영

 

일행 중 몇 명은 너무 힘들어 못 가겠다면서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천왕봉을 지척에 두고 돌아올 수는 없었다. 다시 길을 잘못 들어 내려온 지점으로 올라 능선을 타고 천왕봉에 오르고 싶었으나 일행들이 너무 지쳐 다음을 기약하고 백무동에서 제석봉으로 올라 천왕봉에 오르기로 하였다. 아침 일찍 백무동으로 가서 마을주민에게 제석봉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제석봉을 오르는 길은 험난하였다. 백무동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오후 3시경에 제석봉에 도착하였다. 짐이 무겁고 길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석봉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길에 경사가 심한 바위굴을 통과하게 되었다. 바위굴에는 통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걸쳐 놓았 다. 당시에는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통천문이었다. 마침내 천왕봉에 도착해보니 천왕봉에도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천왕봉에 있었다는 작은 집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있었다. 비교적 납작한 바위에 새긴 남신상과 조각상인 선도성모상은 돌로 쌓은 담 안에 있었다. 일행은 신상에 경배하고 샘을 찾으로 갔다. 야영을 하기 위해서는 샘을 찾아야 했다 천왕봉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가까운 곳에 천왕샘(천왕봉 동사면 약 300m아래 해발 1850m 지점에 있는 경남 진주로 흐르는  남강의 발원지)이라는 샘이 있는데 가뭄이 들면 샘이 마른다고 하였다. 바위틈에서 물이 쫄쫄 나오고 있었다. 오래 받아야 항고 가득 물을 받을 수 가 있었다. 탠트는 천왕봉 서쪽 신상이 있는 옆에 치기로 하고 천왕샘 가까이에서 밥을 해서 먹기로 하였다.


날씨가 좋아 멀리 보였으며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에 오르니 제석봉~세석평전~반야봉~노고단이 한눈에 보였다. 사방에 이름 모를 산봉우리들이 천왕봉을 에워 싼 듯 하였다.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천왕봉의 첫날밤은 밤이 깊어도 잠들지 못했다.  한기를 느껴 잠을 깨니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일행은 천왕봉의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 천왕봉 정상부에 올랐다.  마침내 붉은 해가 솟았다. 일행은 환호했다. 두 팔을 벌려 해를 맞이하였다.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천왕봉에서 해돋이를 맞이하게 되니 감격했다. 금강산 유점사 주지스님에게 들은 그대로 였다. 지리산은 거대하고 웅장한 산이었다.


 

                                                                      천왕봉에서 기념촬영

일행은 중산리로 하산을 하지 않고 뒤돌아 세석평전까지 가기로 하였다. 세석평전에서 벱실령을 거쳐 길을 잘못 들어 음정마을로 내려갔던 지점까지 가서 일박한 후 다시 음정마을로 하산하여 차를 타고 구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야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진 주 능선길을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세석평전으로 가는 길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경사도 심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기에 좋았다. 이곳은 매우 아름다워 신선이 놀만한 곳으로 여겨졌다. 고개를 들면 반야봉이 우뚝하여 길을 인도하는 듯하였다. 세석까지는 멀지 않으니 천천히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면서 걸었다. 연하반은 이곳에 있는 작은 바위 봉우리를 연하봉이라고 명명하고 ‘1972년 지리 10경을 선정할 때 이곳을 지리 10경중 하나인 ‘연하선경’으로 명명하였다.


세석평전은 주능 남쪽으로 넓은 초원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리산에서 노고단과 함께 대표적인 아고산대인 이곳은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수십 명이 이곳에 움집을 지어 감자를 재배하며 살았다고 한다. 6,25때  파괴되었지만 곳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세석평전에 도착하여 점심을 해 먹고 벱실령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경사지를 올라 사방이 잘 보이는 이름 모를 봉우리에 도착하니 남쪽으로 멀리 섬진강이 보였다. 쉬고 나서 출벌하려 하니 교감선생님이 우선생 우리 저 섬진강 쪽으로 하산하는 게 어떻겠소 하였다. 일행 중 몇 사람은 다리를 절기도 하였으며 몹시 지쳐있었다. 모두 하산하고 내년 여름방학 때 다시한번 천왕봉까지 등반을 하자고 하였다. 아쉬웠지만 하산을 결정하였다. 구례에서 화엄사계곡으로 노고단을 올라 산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을 따라 천왕봉을 오르는 종주등반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내년으로 미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봉우리 가까운 곳에 아래쪽으로 희미한 길이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 조금 내려가니 병풍처럼 암벽이 있고 암봉이 나타났다 그 사이에 아늑한 공간이 있었는데 샘도 있으며 돌로 쌓은 제단 같은 것도 보였으며 움집이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지리산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처라고 하는 영신사 터였다. 영신사 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서니 길도 찾을 수 없고 암벽지대라 위험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곧 폭포를 만나 돌아서 내려가야 했다. 이름 모를 지능선길을 내려오다 선두에서 인골을 발견하였다.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의 인골일 것이었다. 일행은 야전삽으로 땅을 파고 묻어 주었다. 낫을 들고 길을 선두에서 만들면서 내려가는 이규종 선생이 아이고~ 비명을 지르더니 주저 앉아 발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일행은 당황하여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뱀에 물렸다는 것이었다. 바지를 올리고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 에 찔려 피가 나고 있었다. 뱀에 물린 자국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뱀에 물렸다는 지점을 살펴보니 나무의 뿌리가 노천으로 나와 부드러운 부분은 썩고 날카롭게 뻗어 있었는데 내려가다 그 뿌리에 찍힌 것이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미숫가루를 타 먹고 쉬었다.


 내려온 후에 알았지만 지리산 죽음의 계곡 대성계곡이었다.  1952년 1월 지리산 빨치산들을 이곳으로 몰아넣고 휘발유 수십 드럼을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후 네이팜탄을 쏘아 불바다를 만들어 빨치산을 궤멸시킨 골짜기 였다. 네이팜탄은 3,000도의 고열을 내며 주위 30m를 불바다로 만든다고 한다.


대성계곡을 타고 하산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천신만고 끝에 의신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앞 계곡의 모래가 깔린 곳을 찾아  탠트를 치고 목욕을 하고 땀에 절은 옷을 빨아 바위에 널었다. 의신마을에서 닭 두 마리와 부식을 샀다. 솥을 빌려와 계곡에 걸고 닭을 삶고 모닥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무를 모았다. 곧 어두워졌다.  다음날 화개장터까지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타고 구례에 도착하였다. 노고단에서 능선 길로 천왕봉까지 가보려 했던 시도는 중도에 안개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도전한다면 충분히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4박 5일이면 화엄사~노고단~임걸령~반야봉~벱실령~세석평전~제석봉~천왕봉~중산리까지 갈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당한 거리에 야영을 할 수 있는 샘이 있어  좋은 등산코스가 될 수 있었다. 지리산 종주등반로 개척은 아쉽지만 1958년 여름 방학 때 다시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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